토론
지복(Bliss) 너머에는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의 수준들이 있는데,
이들의 인식(Knowingness)은 참나(내재적 신 God Immanent)로서의 신성(Divinity)의 현존(Presince)의 귀결이다.
내재적 대 초월적으로 신을 구별하는 것은 신학적, 지적, 개념적 구별이다.
참나의 현존은 고전적인 페루샤, 혹은 근원으로서의 참나의 광휘(Radiance)를 구성한다.
참나는 신성 자체와의 동일성으로 말미암아 '안다'.
참나는 그로써 그 자신의 앎(Awareness)이고,
그 자체의 현존(Presence)을 통해서 스스로 '아는 자(Knower)'로서 '알려지게' 만든다.
그리하여 참나는 무엇에 '대하여' 알지 않으며 그 자체 본질(Essence)의 완성(Completion)이다.
지복의 초월은 한정된 기능의 재개를 허용하 ㄹ수 잇으며,
이를 통해 세상 속으로의 재진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어떤 결정이 아닌 비선형적 영역 내에서의 출현이다.
외곤상으로 그것은 의지에 따른 것으로 잘못 지각된다.
사실상 '결정'을 내랠 '결정자'는 없고,
선택이나 결정을 필요로 하는 '선택지들 역시 없다.
삶은 창조(Creation)인 진화의 표현이자 편재하는 의식의 장 자체의 표현으로서
현상학적으로 자율적이 되는데,
편재하는 의식의 장은 또한 그것의 본질이 갖는 성질로 말미암아 선천적으로 다재다능하다.
의식 수준 600과 그 이상이 곶ㄴ적으로 '무심'으로 불리는 것은
연쇄적 사고가 그치고 그 자리에 의식의 비선형적 앎 자체가 들어서기 때문인데,
이러한 앎은 세계의 문헌에서 종종 한마음(Mind)으로 언급된다.
신성으로 말미암아, 잠재성으로서의 나타나지 않은 것(Unmanifest)은
실현으로서의 나타난 것(Manifest)이 된다.
깨달은 신비주의자(Enlightened Mystic)는
본유(本有 Innate)를 그 표현된 묘사에 대해 설명해 주는 번역자가 되는데,
본유는 그 표현된 묘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직 된다.
주고나적으로, 현좆ㄴ은 의식 자체의 현존이며,
현존의 성질은 사랑의 표현으로서의 진실이자,
상호적으로 진실의 광채로서의 사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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