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6일
선교사들,
제암리 고주리 참살현장을 목격하다!
검거반이 수원으로 철수
2차 검거작전에서 검거된 시위 주도자는 800여명
마을을 포위하고 방화하였다.
4월 5일에 있었던
수촌리 방화사건을 확인하기 위해
버그홀즈 영사는
영사 커티스와 선교사 언더우드
AP통신의 서울 특파원 테일러와
그의 운전수 중국인임을 보내 수촌리로 향했다.
수촌리로 가는 중 제암리에 이는 연기를 보고
인근 민가를 통해 제암리 소식을 듣고
현장을 목격, 확인하게 되었다.
커티스 영사는
6쪽 분량의 보고서를 즉시 작성 제출하였고
언더우드는 7쪽 분량의 현장 답사기를
영사에게 보고되었고
이 소식은 일본에 관대하였던
버그홀즈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선교사들의 강력한 항의로
버그홀즈 영사는
커티스를 보내 선교사들과 조사하던 중
고주리 제암리 사건이 알려지게 되었다.
커티스의 보고서에도 첨부되어 있던
언더우드의 7쪽짜리 기록은
미국 북 장로교 해외 선교본부에 전달되었다.
그가 보고 들으면서 작성한 기록은
“The Korean Situation”(한국의 상황)으로
전문이 TIME지에 실렸다.
일본 측에서 처음 보고 받은 사람은
조선군 사령관 우쓰노미야 다로다
그는 저녁 전보로
일본 육군 대신에게 보고하였다.
“제암리 고주리 사건발생 당일
발안장에서 약 400명이
군집, 소동하여 해산시켰지만
예수교도들이 폭행을 일삼자
군경합동으로 진압하던 중에
폭민 32명이 사망하고
부상자 약간에
가옥 28호가 불탔다.”고 보고하였다.
4월 17일
일제의 야만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리다.
수의사이자 선교사였던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는
1916년 그의 스승이었던
에비슨(O.R.Avision)의 권유로
한국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였다.
언더우드, 커티스, 테일러 일행과 함께
우정면 장안면이 4ㆍ15시위로 인해
수촌리 감리교회와
피해를 입은 마을의 유골을 수습
향남면 도이리 공동묘지 입구에 안장,
일본 헌병들 몰래 사진을 찍어
미국에 보냈으며
언더우드는 참사현장 보고서를 작성
미국에 보내
일제의 야만 행위를 국제사회에 알려
세계에 여론화시켰다.
감리교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윌리암 아더 노블(M.W.Noble)은
미국 영사관에게 일본의 만행을
즉시 조사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며
그의 아내 마티윌콕스 노블은 제암리에서
주민들과 함께 기거하며 치료를 돕고
복구 작업에 헌신하고 있었다.
총독부 경무 총장을 겸임하고 있던
조선 헌병대사령관 고지마도
일본 육군 대신에게 전보를 통해
“제암리와 수촌리 사건은
시위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생긴
우발적인 사건으로
진압과정에서 일본과 경찰의
사상자도 발생했다.”고 보고 했고.
“15일 경기 수원군 발안 안성에서
2회에 걸쳐 30명 내지 400명이 폭행하여
보병이 발포하고
순사와 협력하여 해산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20여명이 죽고
부상자가 한둘이며
민가 소실이 18호이고
우리 측 사상자는 없다”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15일 오후2시
발안장에서 군중 약 400명이
불온한 상황이 있음으로 주재 순사가
아리타 보병 중위와 협력하여 해산시켰다.
15일 오후 3시 제암리 야소교회당에
교도 30여명이 집합하여
불온한 상황에 있음으로서
척후병사가 해산시키려고 했으나
이에 불응하고 폭거로 나옴으로서
부득이 발포했다.”는
취지의 급보에 접하고
수비병 및 주재순사 1명,
순사보 2명이 현장에 출장하여 해산 시켰다.
그때 발포 및 방화에 의해
사상자와 소실된 가옥은 다음과 같다.
1, 사망자 약 20명
2, 부상자 1~2명으로 예측됨
3, 소실가옥 18동 가운데
천도교회당 1동, 야소교회당 1동 있음.”
제50보 1919년 4월 17일
선교사 및 특파원, 외교관 교수들이
참사현장에 와서 난민구호에 참여하고
일제의 학살만행을 세계에 알리고
일본정부와 조선 총독부에 그 책임을 묻고
국제적으로 여론화시켰다.
R.Curtice(커티스 영국 부영사)
Royds(로이드 영국 대리영사)
A.W.Taylor(테일러 재팬어드버타이저 특파원)
H.D.Underwood(언더우드 선교사)
F.Schofleld(스코필드 선교사)
W.A.Noble(노블 선교사 수원지방 감리사)
E.M.Cable(케이블 감리교 선교사)
S.A.Beck(벡크 교수)
B.W.Billings(빌링스 교수)
F.Heron Smith(호런스미스 일본인 교회 담당선교사)
들이 현장을 답사했다.
4월 18일
스코필드 3.1운동 민족대표 34인이 되다!
제암리 교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경태가
서울에 올라가
스코필드(W.F.Scofield)선교사에게 증언하면서
스코필드 선교사가 혼자서 수원역에 내려
자전거로 은밀하게 제암리와 수촌리를 찾아
현장을 조사했고
이후 여러 차례 오가면서
부상자치료와 생존자 보호에 앞장섰다.
“제암리 수촌리에서의 잔학 행위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
일본의 비인도적 조치에 대하여 조사하여
영국의 성서공회 총무 리슨(Ritson)을 거쳐
토론토의 캐나다 장로교 해외 선교부
총무 암스트롱(A.E.Armstrong)목사에게 보냈으며
이것이 다시 미국 기독교 연합회
동양 관계위원에게 보내져 7월에 발행한
<한국의 상황>에 증거자료로 실리기도 하였다.
그는 여러 차례 오가면서 수습을 돕는 한편
<Unquenchable ‘끌 수 없는 불꽃’>을 써서
일제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기에
“3.1운동 민족대표 34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감리교 수원지방 감리사였던 노블(M.W.Noble)은
미국 영사관에게
“왜정의 만행을 조사하라!”고 압력을 가했으며
그의 아내는 제암리로 내려가 숙식을 함께하며
치료와 복구를 도왔다.
“사령관 자신이 모르는 사이
서울 남쪽에서 일본군 병사가
조선인 30여명을 교회 안에 가두고
학살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실을 사실대로 처분하면 가장 간단하지만
학살 방화를 인정하면
일본 제국의 입장이 엄청나게 불리해진다.” 때문에
간부들과 협의해서
“저항했기 때문에 살육했다며
학살방화를 시인하지 않기로
결론짓고 회의를 마쳤다.”
사건 관련 중위는
“진압방법이 적절치 않았다며
30일간 근신처분을 내렸다”고 적고 있다
(아사이 신문 발굴 2007. 2. 28)
4월 19일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총독의 약속!
서울 주재 영국 영사관도 제암리 소식을 듣고
로이즈(Royds) 영국 대리영사의 요청으로
노블박사 등이 동승하여 제암리에 왔다.
노블이 제암리 구제에 참여하는 한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총독을 찾아가
배상을 약속받았다.
제암리 교회에서 불에 태워 죽인 것이
일본군의 학살이 종교탄압으로 비치는 것을
노블이 적극적으로 지적하며 항의 하였다.
그는 감리교 선교사로서
수원 지방을 담당하고 있었다.
4월 20일
“학살 방화는 부인하고....”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총독이
제암리 현장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노블과의 면담에서
제암 교회를 포함 3개 교회 파괴에 대하여
각각 500엔씩 보상하겠다는 약속을 지켜
1500엔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총독은 이 사실을 비밀에 부쳐달라고 했다.
16개 마을에서 5개 교회가 전소되었고
불탄 집 한집 당 50엔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가장 싼 집이라도 250엔이 들고
쓸 만 한 집은 1000엔이 드는 것이 보통이다.
감리교 선교부에서 선교비 2000원을 긴급지원
교회와 교인 집 복구비로 사용케 하였다.
선교사들은 현장 증언을 담은 보고서를 작성하여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에 들어가는
벡크를 통해 미국 교계에 진상을 알렸다.
또한 외교 경로를 통해
총독부에 제암리 만행을 항의하며
구호대책을 촉구하였다.
이미 평남 강서, 평북 정주, 곽산에서도
유사한 탄압사건이 일어나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자
총독 자신이 현장을 방문
1500원을 내 놓았다.
일본 측 대책회의에서는
“저항하므로 죽였고
학살 방화는 인정할 수 없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으나
총독 우쓰노미야다로(宇都宮太郞)는
“이제 두루 알려 진 일을
전부 부인하는 것은
도리어 불리한 점이 없지 않은가!
어느 정도 과실을 인정하여
행정처분을 하여두는 것이
득책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학살 방화는 부인하고
진압 방법에 있어서는 적절하지 않았다.”고 수정
“30일간 근신을 명한다.”로 하였다는 일기가
발견되어 일본신문에 게재되었다.
(아사이 신문 2007. 2.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