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 4ㆍ3사건
요약 :
1947~1954년 제주도에서 벌어진 남로당과 토벌대의 무력 충돌 및 진압 과정에서 주민들이 학살당한 사건. 해방 이후 사회주의 세력과 우파 세력의 갈등으로 인해 야기되었다.
1947년 3월 1일 기념일 시위에서 벌어진 좌우 세력간의 우발적 충돌이 확대된 후, 1948년 4월 3일 무장 봉기한 남로당과 시위대의 진압 과정 및 한국전쟁 이후의 토벌 작전을 통해 3만 여 명의 도민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은 종결 이후 금기시 되다가, 1990년대에야 역사적으로 재조명되어 2000~2007년 진상 조사와 피해자 파악이 실시되었다.
개요 :
4ㆍ3사건은 미군정기에 발생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 여에 걸쳐 2만5000~3만 여명의 제주도 주민들의 희생당한 사건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6ㆍ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으로 꼽힌다.
2000년 제정된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은 4 ・ 3사건의 시기를 경찰의 발포 사건이 있었던 1947년 3월 1일부터 한라산 금족지역이 해제되는 1954년 9월 21일까지 7년 7개월 간으로 잡고 있다.
이 시기 동안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당시 도민 인구의 11% 가량에 해당하는 2만5000~3만 여 명의 주민이 희생당했다. 가옥 4만 여채가 소실되었고, 중산간 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
4ㆍ3사건은 군사정권 동안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 으로 규정되며 금기시되다가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특별법 제정, 진상조사위원회 활동 등을 통해 진상규명과 정부의 공식 사과, 희생자 보상 등이 이뤄졌다.
■ 4ㆍ3사건 과정
● 1947년 3ㆍ1절 발표사 3ㆍ10 총파업
태평양 전쟁 말기 일제는 제주도에 일본군 6만 명을 주둔시키고 비행장과 격납고를 만드는 등 섬 전체를 요새화하는데 진력했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20여 만명에 불과했는데, 이들은 비행장 건설, 동굴 파기 등에 동원되어 갖은 고초를 겪었다.
광복 후 일본군이 철수하고 외지에 나가 있던 제주 주민 6만 명이 귀환했다. 급격한 인구변동과 함께 제주도는 극심한 실업난과 흉년, 생필품 부족을 겪었고 콜레라가 발병하며 수백명이 사망하는 일도 벌어졌다. 이에 더해 미군정이 일제에 부역한 이들을 군정경찰로 중용해 치안을 맡기면서 갈등과 미군정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태였다.
1947년 3월 1일 3ㆍ1절 기념식에 이은 가두시위에서 기마경관의 말발굽에 어린아이가 치였는데, 해당 경관이 아이를 그대로 내버려두고 가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본 시위군중들은 기마경관에게 돌을 던지고 야유를 보내며 경찰서까지 쫓아갔다. 그런데 경찰이 이를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여 시위대에게 발포해 주민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희생자 대부분이 구경하던 일반 주민이었다.
3ㆍ1발포사건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3ㆍ1 사건 대책 투쟁위원회를 결성하고 조직적인 반경찰 활동에 나선다. 3월 10일에는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3ㆍ1사건에 항의하는 민ㆍ관 총파업이 벌어졌다.
통신기관, 운송업체, 공장노동자, 각급학교 교사 등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인 166개 기관ㆍ 단체가 동참하는 대규모 파업이었다.
미군정은 총파업에 강경대응했다.
도지사를 비롯한 군정 수뇌부들이 전원 외지 사람들로 교체됐고, 전남ㆍ북과 경기도 응원 경찰과 서청단원을 제주도에 파견해 파업 주모자에 대한 검거작전을 전개했다. 경찰은 한달만에 500여명을 체포했고, 1년 동안 2500명을 구금했다. 1948년 3월에는 검거된 청년 세 명이 일선 지서에서 고문과 구타에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져 민심이 들끓었다.
● 1948년 4ㆍ3 무장봉기
수세에 몰린 남로당 제주도당 신진 세력들은 경찰과 서청의 탄압 중지와 단선, 단정 반대, 통일 정부 수립 촉구 등을 내건 무장 투쟁을 결정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350명의 무장대가 12개의 지서와 서북청년회, 독립촉성국민회 등 우익단체를 공격하며 무장봉기가 시작됐다.
이 사건으로 4월 3일 하루 동안에
△경찰 : 사망 4명, 부상-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 : 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 : 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미군정청은 무장봉기가 발생하자 모슬포 주둔 국방경비대 9연대에 사태 진압을 명령했다. 당시 제9연대장 김익렬 중장은 무장대 측 김달삼과 협상을 통해 평화적 사태 해결과 합의했으나 우익청년 단체에 의한 '오라리 방화사건'이 발생하며 평화협상은 깨졌다. 미군정청은 제9연대장을 평화적 해결을 주장하는 김익렬에서 강경진압 방침을 내세우는 박진경으로 교체했다. 박진경은 부임 초기부터 강경한 토벌 작전을 벌이던 중 소속 대원에게 사살된다.
1948년 5월 10일 전국 200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실시됐다. 제주도당 무장대는 선거사무소를 공격하거나 선거 관계 공무원을 납치 ・ 살해하고, 선거인 명부를 탈취하는 등 5 ・ 10 단독선거에 적극적인 거부 투쟁을 벌였다. 주민들도 선거 반대에 동조해 입산, 선거를 거부했다. 결국 남한 200개 선거구 중 제주도의 2개 선거구만이 투표소 과반수 미달로 무효처리됐다. 미군정은 6월 23일 재선거를 실시하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김달삼은 1948년 8월 21일부터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해 4 ・ 3봉기의 정당성과 성과를 정리한 연설을 했다. 무장대 지도부가 북한 정권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경찰과 서청단원의 강경진압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 계엄령 선포ㆍ북촌 학살사건
이승만 정부는 1948년 10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타 지역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키며 본격적인 진압 작전에 나섰다. 이때 제주에 파견하려던 여수 주둔 국방경비대 14연대가 파견명령에 반발해 봉기했다. 이들이 정부 진압군과 맞서는 과정에서 민간인 수천명이 학살 피해를 당하는 여순사건이 벌어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해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1월 21일 국무회의에서 "제주도, 전남사건을 완전히 발근색원해야 미국의 원조가 적극화할 것"이라며 "(제주 4 ・ 3사건을) 가혹한 방법으로 탄압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9연대 송요찬 연대장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배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고 밝혔다.
일명 '초토화 작전'으로 불리는 이 작전에 따라 9연대에 의해 중간산마을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시행됐다. 토벌대는 중산간마을 주민들을 해안마을로 강제로 소개시키고 100여 곳의 중산간마을을 불태웠다. 소개령을 전달하지도 않고 방화와 학살을 저지른 곳도 많았다. 해변 마을로 소개해온 사람이라 할 지라도 가족 중 한 명만 사라지면 '도피자 가족'이라 해 총살했다.
12월말 진압부대가 9연대에서 2연대로 교체됐지만 역시 강경 진압을 계속했다. 특히 반공주의자인 서청단원이 많이 편성된 2연대 3대대는 400여 명의 주민들을 집단 총살한 '북촌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어귀에서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사망한데 대한 보복으로 북촌마을 주민들을 북촌 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 시켜 집단 총살한 것이다.
한편 무장대의 보복 습격도 끊이지 않았다.
무장대는 1948년 11월 무차별 토벌작전이 벌어진 이후 일부 마을을 지목해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군, 경 토벌대의 진압작전과 무장대의 보복 살상으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됐다.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00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 그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고 기록되어 있다.
1948년 12월 31일 계엄령이 해제된다.
1949년 3월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의 신임 유재흥 사령관은 한라산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이 귀순하면 모두 용서하겠다는 사면 정책을 발표했다. 이때 많은 주민들이 하산했다. 하산한 주민들의 상당수는 임시수용소에 갇혀있다 석방되었으나 1650여 명의 귀순자들은 형식적인 군법회의를 거쳐 육지 형무소로 보내졌다. 무장대는 사실상 궤멸됐다. 1949년 5월 10일 재선거가 치러졌고, 같은해 6월 7일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사살됐다.
● 한국전쟁 발발
1950년 6 ・ 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주에는 다시 피바람이 불었다. 당시 후퇴하던 국군과 경찰은 좌익 사상가 및 활동가와 좌익에 가담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북한군에 합류할 수 있는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여 살해했다. 이를 예비검속이라고 불렀는데, 전국 각지 형무소에 수감됐던 4 ・ 3 사건 관련자들도 즉결 처분됐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된다. 유족들도 아직 대부분 그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다. 제주 내에서도 예비 검속에 따라 1120명이 집단적으로 수장되거나 총살, 암매장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제주도에 육군 제5훈련소를 설치하고 신병 양성에 나섰다. 이때 제주도 일반인들과 중, 고등학생 등 청년들 3000명이 해병 3,4기로 지원 입대했다. 이중에는 최초의 전투여군 소녀 학도병 14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어 서울 탈환에 성공했다.
1952년 제주도 경찰국은 '100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해 한라산 기슭 곳곳에서 무장대 토벌전을 벌였다. 1954년 9월 21일 제주도 경찰국은 한라산 금족 지역을 해제, 전면 개방을 선언했다. 이로써 1947년 3 ・ 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 ・ 3 무장봉기로 촉발됐던 제주 4 ・ 3 사건은 7년7개월 만에 막을 내리게 됐다.
금족 지역 해제 이후 소개됐던 중산간 마을에 대한 복구 및 이주 ・ 정착사업이 벌어졌다. 상당수는 원래 살던 곳을 찾아 돌아갔으나, 절반에 가까운 이들은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희생된 곳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았다. 이때문에 4 ・ 3 사건 때 집중적인 피해를 입은 마을 중 일부는 이전처럼 복원하지 못한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제주 화북구의 곤을마을이 대표적이다.
■ 4ㆍ3사건 이후
● '빨갱이' 낙인과 진상규명 운명
1960년 4 ・ 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몰락하자 국회에서 4 ・ 3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가 시작됐다. 제주 출신 국회의원들의 발의로 양민학살 진상규명 조사단이 꾸려지고 학살 피해 접수가 잠시 이뤄졌다. 그러나 이듬해 5 ・ 16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진상규명은 중단됐고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이들이나 유가족이 경찰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었다.
5.16쿠데타 이후 군사정권 시절 4 ・ 3사건은 '북한의 사주에 의한 폭동'으로 규정되어 금기시됐다. 전두환 정부때 4차 교과서는 4 ・ 3사건을 '제주도 폭동사건'으로 지칭하며 "공산 무장 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 작전 중의 하나라고 서술했다.
특히 희생자의 유가족들은 가족이 군경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거나 사법처리를 받았다는 이유로 반공법ㆍ국가보안법과 연좌제에 의해 감시당하고 사회생활에 제약을 받아야 했다. 1978년 작가 현기영은 4ㆍ 3사건을 다룬 소설 '순이삼촌' 을 냈으나, 정보기관에 연행되어 고초를 겪어야 했다.
1987년 민주화운동 이후 대학가와 시민사회에서 4ㆍ3의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이어져왔다. 1989년 5월 제주 4 ・ 3연구소가 설립되어 피해자 및 유족 채록집 '이제사 말햄수다'를 출간했다. 1993년 제주도 의회에서 '4ㆍ3 특별위원회'를 구성, 피해 신고를 받았다.
● 4ㆍ3 특별법과 공식 사과
199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는 4 ・ 3사건의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국회는 1999년 12월 16일 국회 본회의에서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 ・ 3특별법)' 을 통과시켰다.
특별법 제정 이후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4ㆍ3위원회)' 가 구성되어
△진상조사보고서 작성과 확정
△희생자와 유족 신고접수 및 결정
△4ㆍ3평화공원 조성과 4ㆍ3평화기념관 건립 △희생자 유족의 의료지원금 지원과 후유장애인에 대한 생활지원금 지급 등의 사업을 추진하게 됐다.
2003년 10월 15일 4 ・ 3위원회가 발간한 '제주 4ㆍ3사건 진상조사보고서'가 정부 공식 보고서로 확정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10월 30일 제주도를 방문해 보고서를 토대로 과거 국가권력의 잘못을 공식 사과했다. 4ㆍ3 사건이 발생한 지 55년 만이었다.
2005년 1월 27일에는 제주도가 '평화의 섬'으로 공식 지정되었다. 2014년 3월에는 '4 ・ 3희생자 추념일'이 법정 기념일로 신규 지정됐다. 같은해 4월 3일 열린 추념식에는 여야 정당대표를 비롯해 희생자 유족과 시민1만 여명이 참석했다.
● 제주 4ㆍ3 사건 진상보고서
제주4ㆍ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는 사건 발생 55년 만에 정부 차원에서 조사된 종합보고서로 공공기관과 개인으로부터 자료를 수집해 보고서에 반영했다. 보고서는 총 615쪽에 이르고, 사건의 원인이나 배경ㆍ전개과정ㆍ피해 등을 종합적으로 다뤘다. 과거 사건을 두고 특별법에 의해 보고서가 작성된 것은 4ㆍ3진상보고서가 최초다.
진상보고서는 4ㆍ3사건을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집단 살상의 책임은 당시 군 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던 미군에게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출간 이후 보수단체가 소송과 헌법소원을 제기하는 등 적지 않은 논란을 겪었다. 보수단체들은 4ㆍ3진상보고서는 가짜라고 주정하고, 희생자 결정 무효 등을 주장하며 6건의 행정소송과 현법소원 등을 제기했다. 사법부는 이에 모두 각하 혹은 기각 결정을 내렸다.
● 4ㆍ3 위원회
'제주 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는 제주도에 실무위원회를 꾸리고 본격적인 진상조사와 희생자 선정 작업이 진행했다. 희생자 신고는 2000년 6월부터 2007년 11월까지 4차례에 걸쳐 실시됐다.
4ㆍ3사건의 희생자는 2만5000~3만여 명으로 추정되나 4ㆍ3위원회가 17년 동안 결정한 희생자는 1만 4233명에 그쳤다. 행방불명자가 많은데다 이명박ㆍ박근혜 정부 동안에는 희생자 결정을 위한 4ㆍ3 위원회가 단 1차례만 열렸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는 2018년 한해 동안 4ㆍ3 희생자와 유족 결정을 위한 추가 신고를 받기로 했다.
● 참고자료
ㆍ제주 4ㆍ3사건진상조사보고서, 제주 4ㆍ3사건진상규명및희생자명예회복실무위원회, 2003년
ㆍ제주 4ㆍ3사건진상조사보고서에 대한 평가, 이재승, 민주법학 25호, 민주주의법학연구회,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