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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심력과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
- 수필시대 7,8월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I.
산다는 것은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나가려는 원심력과 그것과 대치되는 구심력의 절묘한 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줄다리기의 위험한 연속행위와 갈등 속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구심력을 향해서 돌아오는 동작구조, 그 회귀행위의 근저에는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잡게 된다. 그 겸허한 모습은 자신의 모습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진수이며 삶의 영롱한 에센스가 될 것이다. 이번 호 수필시대에는 무한한 원심적 탄력 속에서 가까이 존재하는 일상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한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소중한 삶의 영역이며 우리의 지친 영혼이 안주할 수 있는 터전이 된다. 오랜 방황과 거친 열정의 파도를 넘어 우리의 영혼이 가장 낮은 자제로 임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이들 작가들의 수필세계라 할 수 있다.
II.
이범찬의 <보이지 않는 정원>을 주목한다. 본래 예술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것’에 주목하는 것은 진리를 찾아내어 형상화하는 수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현대인들은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에 더 집착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이 수필은 ‘수필가는 인류의 교사여야 한다’는 측면에서 교훈적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발상의 전환이다. 디지털시대에 걸맞게 온라인(on-line)에서 취향껏 설계도 하고, 명성 따라 두루두루 찾아다니면서 감상을 하고, 오프라인(off-line)에서 조용히 명상에 잠기기만 하면 되지 않겠는가. 마땅한 땅도 없고 쫓아다닐 힘도 부치니 내 가슴 속에다 차리는 수밖에 딴 도리가 없다. 마음을 비우고 그 자리에다 작은 정원이나 꾸며보자. ‘해암의 영상정원’(靈想庭園)이라 이름을 짓고. 몇 개 구역으로 나눈다. 우선 ‘만남의 정자’, ‘배려의 샘터’, ‘명상의 방’, ‘나눔의 집’, 따위 팻말이나 달아 보자. 내 마음이 비워지는 대로 그만큼의 작은 터를 넓혀 가며 큰 정원으로 가꾸면 될 테지. 폭우에 쓸려갈 걱정일랑 숫제 안 해도 된다. 문제는 노욕으로 꽉 찬 내 마음을 비운다는 사실이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다. 늦었지만 법정 스님의 무소유론이라도 서둘러 익혔으면 한다.“
위의 인용 부분은 이 수필의 결말 부분이다. 전개부에는 보이지 않는 정원을 생각하게 된 이유들을 경험과 함께 수놓아져 있다. 수필은 그 특유의 개성이 날카롭게 빛나고 독특한 수필의 인과구조로 되어 있어 어느 곳 한 군데도 어스름한 곳이 없다. 작가의 따뜻하고 온유하면서도 개성 있는 성품이 편안함을 준다. 그러한 그의 성향에서 터져나온 수필들은 신선하다 할까 칼칼하다 할까 슬프다 할까. 그 어떤 종 잡히지 않는 미묘함이 깃들어 있다. 겸손함의 미덕과 성찰을 드러내고 있는 이 부분, “그러나 이제는 시간은 낼 수 있으나 기운이 달리니 농장이 아무리 작다 한들 그림의 떡에 지나지 않는다. 그 작가가 소개한 우화 속의 목장 소녀보다도 내 처지가 더 가엾지 않은가 말이다. 마지막 남은 작은 꿈마저 산산 조각이 난 것에 생각이 미치는 순간 다리는 천근이 되어 매어 달린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 있고, 이제서야 나서는 사람조차 잘 뜨이는데, 나는 두세 시간도 못 걸어 돌아갈 걱정을 해야 하다니......”라는 자기 고백은 수필의 공감대를 드높이는 구실을 한다. 수필은 쉽게 쓰인 듯해도 실상은 엄청난 수련과 노력 끝에 이루어진다. 그의 수필은 단숨에 읽혀지는 명쾌함과, 그럼에도 삶을 조용히 생각하게 하는 사유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여러 번 곱씹어 봐야지만 그 진중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는 인생의 역경을 아주 해학적인 언어들로, 가볍게 터치하며 재치있게 넘어가게 한다. 정년 튀임 후에 찾아드는 노후의 슬픔들이 그 어둡고 진득한 태깔을 벗어던지고 웃음 속에서 빛나게 승화된다. 그러므로 결코 보이는 것만이 우리 인생의 전부는 아닌 것이다.
허석의 <칡넝쿨을 걷다>에서는 한 작가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시달려야 했던 시대의 절망을 함께 읽어나갈 수 있다. 자신만의 렌즈를 가지고 있는 작가는 이 수필을 통해 인간세계의 다양한 이해 방법론을 제시한다. 여기에는 단순히 글쓰기의 강박으로만 폄하할 수 없는, 유한한 삶 자체에 대한 고민과 그것을 넘어서려는 실존적 몸부림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이 수필이 주는 감동은 글쓰기에 대한 지루하고도 진부했던 잡담들을 단숨에 뛰어 넘는다. 예리한 인식의 보고서라 할 만한 이 수필은 작가가 편안함을 온몸으로 거부하고 당당하게 불의와 마주보기를 주장하는 것이다. 그의 수필은 결코 난해하거나 어려운 용어들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상에서 말하는 듯 쉬운 언어들로 쓰여 있지만, 그 속에서 날카로운 자기 풍자와 세속을 향한 저항이 있어 가을 계곡에서 맛보는 쏘가리탕 맛과 같은 칼칼함이 있다. “왠지 뿌듯한 것이, 속 썩이던 것을 여발통치한 기분이다. 인간사회에서 바로 이런 것을 두고 숙청이고 청산, 일망타진이라고 하는 것인가 보다. 비리, 부정부패, 뇌물, 청탁과 같은 음성적인 일들은 그렇게 서로가 밀접한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어서 어느 한 곳을 캐내면 줄줄이 그 조직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인 모양이다. 점 조직처럼 그물망을 이루고 있어서 전체를 한꺼번에 걷어내지 않으면 그 어느 한쪽 뿌리에서도 다시 기하급수적으로 자생하는 것이기에, 적어도 눈에 보이는 땅 위에 칡넝쿨만이라도 말끔히 정리가 되도록 어느 한 줄기도 놓치지 않을 생각이다.” 이렇게 그의 글 가운데에는 악성 기제에 대한 강한 거부와 배격 의지가 놓여 있다.
수필의 갈피갈피에 진하게 배어있는 부정과 부패에 물든 사회를 정조준하고자 하는 작가의 현실인식이 감동을 준다. 특히 위의 인용 부분은 작가적 자의식의 생성 과정이 사회의식과 얽혀 수준높은 상징성을 획득한 부분으로서 단연 이 수필의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허석이 던지는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실로 오랜만에 우리의 감은 눈을 부릅 뜨게 하는 진지한 성찰을 안겨준다. 우리 사회 음성적인 일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칡뿌리에 비유하는 대목은 서늘한 감동마저 준다. 악의 뿌리란 화두를 다잡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작가의 모습이 신성한 구도자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끊임없는 지성의 길로 자아를 내모는 세계에 대한 정면적 대결로 빚어지는 허석의 자기 고백록은 두 가지 측면에서의 의미있는 성찰을 제공한다. 하나는 그가 보여준 반성적 자기 성찰이 근래 수필의 한 경향인 내성적 경향을 긍정적인 의미에서 심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견고한 의식과 상징적 비유를 동반하면서 고백을 ‘고백’ 아닌 것으로 끌어올리는 힘이야말로 허석의 문학적 저력을 확인하게 한다. 다른 하나는 그의 수필이 행하는 작가적 자기 반성이 문학적 가치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세계와 맞서 싸우려고 결연한 자세 없이는 글쓰기에 대한 반성적 통찰 또한 가능하지 않다는 측면에서 그의 도전은 유의미하다.
고연숙의 <뒷모습이 아름답다>도 좋은 수필이다. 대단한 성찰이 빛난다. 인용된 진술을 토대로 그녀 수필의 문예성이 세포 속으로 스며들어 오는 감동의 순간을 만나 보자.“사람이 떠난 자리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한다. 꾸밀 수 없는 뒷모습에서 떠난 사람의 진실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의 실체는 정작 본인이 떠난 뒤 그가 머문 자리에 향기로 남는다. 앞모습보다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고 싶다.”이 수필에서는 내면과외면이,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이 하나로 조응하여 일체가 된다. 그 관조의 경계에서 수필가는 잠시라도 고독을 잊는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사르트르의 ‘응시’의 미학을 발견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언제나 응시하고 주시하고 있는 우주의 타자를 느낀다. 우리는 나를 응시하는 타자의 눈과 내가 바라보는 타자의 존재에서 상극과 갈등을 밀어내고 조응과 조화와 관조의 상호보존성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수필은 사람들의 눈이 미처 이르지 못하거나 별스럽게 보이지 않아 스쳐 지나간 것을 찾아내어 그것이 갖고 있는 소중한 가치와 진실한 의미를 세상에 전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 작품은 이런 역할을 잘 해내고 있어 감동을 준다. 뒷모습에 대한 인식은 인생에 대한 작가의식의 총체물로써 남다른 관심이 투사된 작품이다. 이로서 우리는 고연숙이 서정의 물기가 잔뜩 배인 과거의 어느 날에서부터 먼 미래의 찬란한 날까지 하루도 자신의 영역에서 이탈하지 않고 진리를 품어 안고 사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배제된 수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수필은 인간학으로 인간을 향한 순수한 애정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이와 대상 사이에 애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대상은 온기와 냉기를 품는다. 무정물의 대면은 그것에 의미를 주는 인식을 중개로 해서 이루어진다. 수필 <뒷모습이 아름답다>는 우리가 소홀히 하는 보이지 않는 면을 소재로 해서 본질의 완성이라는 주제를 겨냥하고 있는 자기 성찰적 수필이다. 고연숙 수필 미학의 핵심 하나를 여기서 확인한다. 자기 반성적 성찰과 함께 작품 구성의 중심적 역할을 하는 다른 하나는 인간관계에 대한 가치 부여와 사랑과 그리움에 대한 작가의 따스한 시각이다. 보이지 않는 면을 대하는 작가의 시선은 어머니의 뒷모습, 친구의 뒷모습을 통해 구체적 메시지를 전한다. 이 수필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이는 시계 밖의 다른 세상에까지 따뜻함을 주고 싶은 마음의 확장이기도 한다. 뒷모습은 작가에게 있어 삶의 현재이며, 미래다. 고연숙의 수필을 지탱해 주는 힘의 한 축으로 파악된다. 이는 수필 창작에 효과적인 요소로서 고연숙이 체험을 형상화해 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생동하는 묘사를 통해서 수필에 안정감과 중량감을 가져오게 한 점도 좋았다. 근래 보기 드물게 깊은 감동을 전달하는 작품이다. 작가는 이 수필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면을 진리의 한 모습으로 구체화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과 같이 외면에 치중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이 수필을 읽고 생각하며 반성하는 계기를 삼았으면 한다.
성종화의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황혼의 사랑을 그린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보고 난 후 쓴 일종의 감상수필이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40 수년을 같이 살아온 아내에게 아직 한 번도 말해 보지 못한 말 한마디를 용기를 내어 하여야겠다는 단단한 각오를 하였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이 말을. 현관을 들어서면서 주방 쪽을 보니 오늘 영화에서 본 바로 그 노파 또래의 희끗희끗한 머리를 한 여인이 채소를 고르고 있다가 앉은 채로 ”오늘은 좀 늦었네요. 저녁은?”“응! 먹었어.”그러면서 내가 그렇게 벼르고 온 그 한마디 말은 목구멍 안으로 꿀컥 삼켜져 버렸다. 끝내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는 마지막 결구가 진한 아쉬움을 준다. 영화 한 편이 주는 감동을 자신의 삶으로 끌어들여 성찰로 이어가고자 하는 정신은 성종화의 수필을 반짝거리게 하는 핵심이다. 이 반짝거림이야말로 수필의 공감을 확대해 주는 밑바탕이다. 노부부의 아름다운 사랑을 그리는 이 수필은 황혼기 어르신들의 애정에 걸친 문제들을 그들의 입장에서 인정어린 시선으로, 부드러운 필치로 다루고 있다. 그 영화 속 연인처럼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자 하나 결국 하지 못했다는 마지막 후회 멘트가 안타까움을 남기지만, 삶은 예측한 대로 흐르지 않는다는 걸 잘 말해주는 것 같다.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를 읽는 듯이 사랑의 마력 속으로 빨려 들어감을 느낄 수도 있어서 좋았다.
어렵고 난해한 서사구조로 쓰인 수필들이 반짝 사람들을 신선하게 하고 감동하게 할지는 모른다. 그러나 수필이거나 소설이거나 간에 보통사람에게 오랜 세월 동안 감동을 주는 것은 굳이 난해한 글들은 아니라고 본다. 더구나 수필이란 그 저층에 ‘서정’이라는 아름다운 정서를 깔고 있지 않으면 생명이 없는 글이 되고 만다. 그것이 쉬운 듯 깊은 상징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수필은 그 은유적 함축성으로 하여 이 세상에서 오래도록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위로하며 그들의 생을 아름답게 이어줄 것이다. 내적인 정에서 표료된 주변 인식을 통해 진실의 추구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 이 수필의 특징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수필을 통하여 작가와 같은 사랑의 가치를 잘 아는 인도주의적 성격의 지식인이 건전한 부부애를 성장시켜 가는 모습을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체험의 고해성사란 새로운 출발을 예감하는 ‘통과의례’일 뿐 그 자체가 미래의 길이 될 수 없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성종화 수필의 완성태가 아니라, 그의 수필이 앞으로 걸어나갈 기나긴 장정을 알리는 ‘출사표’로서 우리 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약속과 신의 속에 생명의 참된 의미가 존재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통해 성종화는 잔잔한 감동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황혼의 어두운 현실에 잠겨 매섭고 싸늘한 인생의 눈길 위에 주저앉아 있는 모든 어르신들에게 이 수필을 권해본다.
III.
자신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면 모든 것이 수필감이 된다. 그러나 소재에서 얻는 경이와 충격만으로 수필이 되지 않는다. 수필의 출발점이 제재이고 결승점이 그것의 의미화이기 때문이다. 주제의식을 제재와 연결시켜내는 것이 수필을 문예화하는 데 중요한데, 지금까지 다룬 작가들은 이런 일을 잘 해내고 있다. 관조하는 작가의 주관에 의해서 제재의 소성이 교감되고 새로운 의미가 부여될 때 비로소 문학성이 수필에 담기는 법이다. 이들 수필가처럼 다른 방향에서 오랜 시달림과 방황 끝에 마침내 구심력을 향해서 돌아오는 동작구조, 그 회귀행위의 근저에 스스로 낮추고 한없이 겸허해진 자아가 자리잡지 않았다면, 얼마나 적조했을까.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그립고 그리운 사람들과 더불어 열린 가슴으로 현실에 부딪치는 일이 이 땅의 크는 이를 사랑하는 문학인의 사명이 아니겠는가.
작가 자신이 혼신의 힘으로 그려낸 이런 성격의 수필은 그 작품이 생산된 21세기 한국 수필, 나아가서는 한국 수필 전체와 맞서 있는 거대한 기념품이라 하겠다. 서정과 체험에 의존함으로써 형상과 상상력에 소홀한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은 앞으로 우리 수필이 나아갈 방향에 적지 않은 시사를 던져준다고 하겠다. 어떤 대상이든지 단일 개념으로 규정짓지 않는 열린 태도, 그 대상의 안과 밖 그리고 이 측면 저 측면을 두루 살펴 전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구축적 태도는 개념적 진단과 단순화 그리고 명료화의 강박관념에 갇혀 있는 우리 수필을 열어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힘을 지닌 것이다. 이 작품들은 인간 영혼의 안쪽을, 한 시대의 복잡한 얽힘을 원심력과 구심력의 반복을 통해 한 세계 속에 담아낸 수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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