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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요한이 본 것들(15)
말씀: 계 4:1-11. 2024년 4월 7일 일요일 오전 11시
하늘에 한 문이 열리고 “이리로 올라오라”는 주의 음성을 듣고 “이후에 반드시 일어날 것들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즉시 영 안에서 하늘로 옮겨졌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가 장차 하늘로 올라갈 때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주님의 나팔 소리 같은 음성을 들을 것입니다. 동시에 눈 깜짝할 사이에 육체 속에 있던 우리는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땅에 있던 우리를 주께서 저 하늘로 채여 올라가 주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땅에 있던 요한이 즉시로 하늘로 올라갔듯이 우리 역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복된 소망, 영광스런 소망, 산 소망이라 합니다.
여러분은 이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요한이 주의 음성을 듣고 순식간에 저 하늘로 들림을 받았듯이 우리 역시 그러할 것이란 말은 성경의 약속이요, 우리가 가진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오실 은혜를 끝까지 바랄지어다.](벧전1:13).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는 ‘소망’이 바로 부활과 휴거의 복된 소망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정신을 차려서 끝까지 이 소망을 가지라고 합니다.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의 특징은 이것입니다.
[그분 안에서 이 소망을 가진 자는 다 그분께서 순결하신 것같이 자기를 순결하게 하느니라.](요일3:3). 주의 오심, 재림 신앙, 복된 소망을 가진 자는 현 세상에서 자신을 더러움, 정욕에 버려두지 않고 자기를 순결하게 합니다.
영 안에서 즉시 하늘로 올라 간 요한은 하늘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요한이 하늘에서 처음 본 것은 한 왕좌였습니다.
저 하늘에는 한 왕이 계십니다. 저 하늘은 무중력 상태의 빈 공간이 아니라 도시가 있고 맨션이 있고, 영들이 있고, 무수한 천사들이 있습니다. 저 하늘에는 하늘 왕국(Heavenly Kingdom)이 있습니다(딤후4:18). [그러나 너희는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과 무수한 천사들의 무리와 하늘에 기록된 처음 난 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모든 자들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완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재자이신 예수님과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들을 말하는 피 곧 뿌리는 피에 다다랐느니라.](히12:22-24). 이는 사도 바울이 저 하늘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 간략하게 언급한 장면입니다.
여러분이 하늘을 마음의 상태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면 성경을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하늘은 이 땅과 마찬가지로 문자적이고 물리적인 곳으로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곳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을 입고 살듯이 저 하늘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동일한 부활의 영적인 몸을 입고 살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고 있는 하늘은 첫째 하늘로 구름이 있고 해와 달과 별들이 보일 뿐입니다. 그러나 둘째 하늘을 지나 셋째 하늘엔 주께서 계시고 구원 받은 모든 성도들이 부활의 몸을 입고 영원히 살 곳입니다.
요한이 하늘에 올라가 처음 본 것이 왕좌였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왕이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으로 태어나시고(마2:2) 왕으로 죽으셨습니다(마27:37). 왕좌가 있다는 것은 왕과 왕국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왕좌는 성도들에게 은혜의 왕좌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왕좌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거부되셨지만 분명히 이스라엘의 왕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왕들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왕이십니다.
요한이 두 번째 본 것은 왕좌에 앉아 계신 한 분이셨습니다(계4:2).
왕좌에 앉으신 분이 왕이십니다. 요한은 왕좌에 앉으신 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계4:3-4절은 요한이 왕좌에 앉으신 분의 모습을 기록했는데 너무나 단순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앉으신 분의 모습은 벽옥과 홍보석 같고.......”(3). 그게 전부입니다.
이미 사도 요한은 1장에서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그 일곱 등잔대의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으신 분께서 발까지 내려오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계시더라. 그분의 머리와 머리털은 양털같이 희고 눈같이 희며 그분의 눈은 불꽃 같고 그분의 발은 용광로에서 달군 듯한 정제된 놋 같으며 그분의 음성은 많은 물들의 소리와도 같고 그분의 오른손에는 일곱 별이 있으며 그분의 입에서는 양날 달린 날카로운 검이 나오고 그분의 용모는 해가 세차게 빛나는 것 같더라.](계1:13-16).
이 모습은 요한이 “주의 날 성령 안에서” 하늘이 아니라 땅에서 본 모습입니다. 하늘에서는 왕좌에 앉으신 분의 모습을 매우 간략하게 “벽옥과 홍보석 같고...”(3)라고만 언급했습니다. 하늘의 왕좌의 모습과 왕좌에 앉으신 분의 모습은 에스겔서에 더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머리들 위에 있던 궁창 위에는 사파이어 보석 모양 같은 한 왕좌의 모습이 있었고 그 왕좌의 모습 위에는 사람의 모양을 닮은 모습이 그것 위에 위로 있더라. 또 내가 보니 그분의 허리 모양으로부터 위는 마치 속에서 사방으로 불타는 불의 모양과도 같았고 호박색과도 같았으며 내가 보니 그분의 허리 모양으로부터 아래는 마치 불의 모양 같았고 그것이 사방에 광채를 가지고 있더라. 사방으로 퍼지는 그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있는 무지개 모양 같았는데 이것은 {주}의 영광의 모습을 가진 모양이더라. 내가 그것을 볼 때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말씀하신 분의 음성을 들으니라.](겔1:26-28).
에스겔은 요한보다 훨씬 더 상세하게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을 묘사하고 있는데 허리를 중심으로 상체는 불타는 불의 모양 같고 호박색 같았는데 허리 아래로는 불의 모양 같았고 그것이 사방으로 퍼지는 광채가 ‘무지개 모양’과 같았습니다.
요한은 “왕좌 둘레에 보기에 에메랄드 같은 무지개가 있으며”(3) 매우 간략하게 기록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은 이들은 저 하늘에 갔을 때 자신이 읽었던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읽고 믿는 다는 것은 이미 저 하늘을 미리 경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왕좌에 앉으신 분으로부터 나온 영광의 광채로 말미암아 녹색 찬연한 무지개를 생각해 보십시오. 반원형의 희미한 무지개가 아니라 온전한 원형의 투명하고 깨끗한 무지개입니다. 무지개는 하나님께서 땅을 다시는 물로 멸하지 않겠다는 언약의 증표입니다. 하나님은 노아가 드린 희생물을 받으시고(창8:20) 언약의 증표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향기로운 헌물로 드리신 것을 받으시고 왕좌 주변에 언약의 무지개를 가지고 계십니다. 이 땅의 무지개가 일곱 색이라면 저 하늘의 무지개는 에메랄드 색 하나이거나 이 색이 주도적인 무지개입니다. 하나님은 큰 환란 때 엄청난 재앙으로 땅과 땅에 있는 것들을 치실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다 멸하지는 않으십니다.
[내가 보니 마침내 그 왕좌들이 무너져 내리고 [옛적부터 계신 분]께서 앉아 계시는데 그분의 옷은 눈같이 희고 그분의 머리털은 순결한 양털 같으며 그분의 왕좌는 맹렬한 불꽃같고 그분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같더라. 불같은 시내가 그분 앞에서 분출하여 나오는데 천천이 그분을 섬기고 만만이 그분 앞에 서 있으며 심판이 준비되었고 책들이 펴져 있더라.](단7:9-10).
다니엘은 왕좌에 앉으신 분을 보았는데 그분의 옷은 눈같이 희고 머리털은 순결한 양털 같다고 말합니다. 왕좌의 모습은 맹렬한 불꽃같고 그분의 바퀴들은 타오르는 불같습니다. 불같은 시내가 그분 앞에서 흘러나옵니다. 여기에는 천천이 그분을 섬기며 만만이 그분 앞에 서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심판석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불로써 심판 받을 것입니다. [각 사람의 일이 드러나리라. 그 날이 그것을 밝히 드러내리니 이는 그것이 불에 의해 드러나며 그 불이 각 사람의 일이 어떤 종류인지 그것을 시험할 것이기 때문이라. 어떤 사람이 그 기초 위에 세운 일이 남아 있으면 그는 보상을 받을 것이요, 어떤 사람의 일이 불타면 그는 보상의 손실을 당하리라. 그러나 그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에 의해 받는 것 같이 받으리라.](고전3:13-15).
이 심판은 행한 것에 따른 보상의 심판입니다. [이는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라.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 (고후5:10)
셋째로 요한이 하늘에서 본 것은 왕좌 둘레의 스물네 자리입니다.
“또 그 왕좌 둘레에 스물네 자리가 있더라.”(4).
스물네 자리에 대해서는 이미 구약적 배경을 살펴보았습니다. 모세는 산에서 보여준 양식대로 성막을 만들었고 다윗은 하나님께서 보여 준 대로 ‘양식’(청사진, 설계도)을 솔로몬에게 주어서 성전 건축을 하게 했습니다. [그때에 다윗이 주랑과 그것의 집들과 보고들과 다락방들과 내부 거실들과 긍휼의 자리를 놓을 곳의 양식을 자기 아들 솔로몬에게 주고 또 자기가 영으로 받은 모든 것의 양식 곧 {주}의 집의 뜰들과 사면의 모든 방들과 [하나님]의 집 보고들과 봉헌물들을 두는 보고들의 양식(樣式)을 주며](대상28:11-12).
성전에서 섬기는 이들 뿐 아니라 노래하는 자들, 문지기들까지 모두 24명씩으로 정했는데 이는 하늘의 성전 양식에 따른 것입니다. 하늘에 왕좌 둘레로 24개의 자리가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넷째, 요한은 흰옷을 입고 왕관을 쓴 스물네 장로들을 보았습니다(4).
요한은 주의 날 성령 안에서 하늘로 올라 왔는데 이미 하늘에는 자기 외에도 왕좌 주변에 스물네 장로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영계의 스랍들이나 천사들이 아니라 장로(사람)들이란 점에 주목하십시오. 천사는 장로가 아니고 장로는 천사가 아닙니다.
우리도 부활의 몸을 입고 저 하늘에 올라가면 “하나님의 천사들” 같습니다. [부활 때에는 그들이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으니라.](마22:30). 성경에는 하나님의 천사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귀와 그의 천사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해 영존하는 불을 예비하셨습니다. [그때에 그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르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마25:41). 모든 천사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죄를 지은 천사들을 지옥에 있습니다.
지옥은 본래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자녀들이 된 사람들, 마귀 편에 있는 사람들 역시 그곳으로 던져집니다.
하늘이 문자 그대로 실재 장소이듯이 지옥 역시 문자적으로 실재 장소입니다. 지옥은 마음의 상태가 아닙니다. 지옥은 비유나 상징이 아닙니다. 가상적인 공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죄지은 천사들을 아끼지 아니하사 지옥에 던지시고 어둠의 사슬에 넘겨주어 심판 때까지 예비해 두셨으며](벧후2:4). 죄를 지은 천사들은 현재 지옥에 있습니다. 자기들의 처음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은 영존하는 사슬에 묶여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어둠의 밑에 예비해 두셨습니다(유1:6).
천문학자들이 하늘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질학자들이 땅 속을 파도 지옥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실, 진리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읽고 믿는 자들에게 쉽고 정확하고 분명하게 발견됩니다.
하늘에는 왕좌 주변에 스물 네 장로가 흰옷을 입고 앉아 있고, 그들의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있습니다(계4:4). 24명의 장로들의 정체는 이미 다루었습니다. 계시록 5:9-10절에 보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 가운데서”구속 받은 신약의 크리스천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의 유대인 열두지파 대표 12명과 신약의 주님의 제자 12명이 아닙니다. 모두 다 주님의 피로 구속받은 크리스천입니다(계5:9). 우리는 말씀을 해석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생각대로 소설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영해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기록된 성경을 읽는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왕좌를 중심으로 배치도를 그려 보십시오. 왕좌가 있고 짐승들이 있고 장로들이 있고 이들을 둘러싼 많은 천사들이 있습니다. [또 내가 보고 왕좌와 짐승들과 장로들을 둘러싼 많은 천사들의 음성을 들었는데 그들의 수는 만만이요 천천이더라.](계5:11). 땅에서 사람은 천사들보다 더 낮게 지음 받았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은 저 하늘에서는 천사들보다 더 우위에 있습니다.
왕좌 둘레의 스물 네 장로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은 안식을 말합니다.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은 권세를 말합니다. 한 자리 차지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은 결코 앉을 수 없습니다. 또한 성막이나 성전에는 제사장들을 위해 마련된 앉을 의자가 없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요. 우리는 땅에서 믿음으로 걸어야 합니다. 섬겨야 합니다. 싸워야 합니다.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러나 하늘에는 앉을 의자가 있습니다.
장로들은 흰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육신의 장막을 벗고 하늘의 천사들 같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를 받습니다. 부활하신 후 영광을 받으신 예수님은 ‘흰 옷’을 입은 모습이었습니다. 금관은 성도들이 받는 상급입니다. 우리는 이 상을 받도록 모든 일에 절제하고 달려야 합니다.
24장로는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고 경배합니다(4:10). 저 하늘에서도 주님께 뭔가를 드립니다(5:8). 여러분은 주님께 무엇인가를 드려야 합니다. 자신의 몸을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고, 영적 희생물을 드려야합니다. [너희도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 집으로 건축되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적 희생물을 드리는 거룩한 제사장이 되었도다] (벧전2:5). 성도들이 만인제사장이라는 말은 즐거워하면서 제사장으로서 해야 할 일들에는 무관심합니다.
우리는 늘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간구하고 뭔가 쓸 것을 얻는데 집중하지만 사실은 뭔가를 드려야 하는 제사장이란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저 하늘에 있는 장로들이 주님께 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보십시오. 자신들이 받은 관을 주님 앞에 던져 드립니다(4:10).
24장로는 하프와 향이 가득한 금병들을 가지고 어린양 앞에 엎드립니다. [그분께서 그 책을 취하시매 네 짐승과 스물네 장로가 저마다 하프들과 향이 가득한 금병들을 가지고 [어린양] 앞에 엎드렸는데 이 향은 성도들의 기도라.](계5:8,8:4). 하프는 찬양을 드리는 악기이고 향은 기도입니다. 찬양과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찬양, 기도, 감사, 선을 행하는 것은 모두 우리가 이 땅에서 주님께 드리는 희생물입니다(히13:15-16).
24장로는 주님께 엎드려 경배합니다(계5:14, 11:16). 자기 자리에 앉아서 경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경배는 엎드려 절하는 것입니다. 24장로는 엎드려서 경배하며 “아멘, 할렐루야”(계19:4)를 외칩니다. 저 하늘에서 장로들이 하는 일은 우리가 장차 저 하늘에서 할 일이 무엇인지 보여 줍니다. 여러분들은 저 하늘에서 할 일이 없어 심심하거나 지루하거나 미칠 지경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저 하늘에서 완전한 안식 가운데서 주님과 함께 많은 일들을 할 것입니다.
다섯째, 요한은 왕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을 보았습니다.
[그 왕좌로부터 번개들과 천둥들과 음성들이 나오고 왕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4:5). 요한은 왕좌로부터 번개들과 천둥들과 음성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땅에서도 하늘에서 번쩍이는 번개들과 천둥들, 요란한 음성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저 하늘의 왕좌에서 그런 것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왕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일곱 등불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계4:5)고 말합니다. 왕좌 앞에 있는 일곱 영(계1:4)은 이미 요한이 하늘로 올라오기 전 주의 날 성령 안에서 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들이 왕좌 앞에서 타오르는 등불로 보였습니다.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많은 이들이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만 성경은 몸의 등불은 눈이라고 합니다. [몸의 등불은 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단일하면 네 온몸도 빛으로 가득하나 네 눈이 악하면 네 몸도 어둠으로 가득하니라.](눅11:34, 참고 마6:22). 눈을 감아 보십시오. 마음이 아니라 몸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영은 마음의 등불입니다. 주의 말씀은 영입니다(요6:63). 그래서 다윗은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말합니다. 왕좌 앞에 있는 하나님의 일곱 등불은 온 땅으로 보내어진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계5:6). 이것은 성막에서 성소를 비추는 일곱 촛대의 등불과 일치합니다.
여섯째, 하늘에서 요한은 왕좌 앞의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보았습니다.
[그 왕좌 앞에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6). 요한이 본 수정 같은 유리 바다는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의 표면이 얼어 있는(욥38:30)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물들, 바다를 말할 때 이 땅 위의 강물이나 바닷물을 말하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하늘(궁창) 위에도 물이(창1:6,7)있습니다. 이 사실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왕좌 앞에 있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다를 보았고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 하늘 위에도 물이 있고 바다가 있고 이 땅의 어떤 바다보다 더 많은 생물들이 살고 있다면 사람들이 믿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늘들의 하늘들아, 또 하늘들 위에 있는 물들아, 너희는 그분을 찬양할지어다.](시148:4). 하늘들 위에 물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에서 물들과 물들을 나누시고 그 사이를 궁창이라 부르셨습니다(창1:6-8). 우리는 낮에 첫째 하늘을 봅니다. 밤에 둘째 하늘을 봅니다. 믿음으로 셋째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늘들 위란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 위를 말합니다. 그 위에 물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첫째 하늘은 대기권의 허공입니다. 어떤 천문학자나 천체 물리학자도 하늘이 단단하거나 부어 만든 거울 같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록하신 성경을 신뢰합니다.
욥기를 펴서 살펴보십시오. [그대가 그분과 더불어 단단하고 부어 만든 거울과 같은 하늘을 펼쳤느냐?](욥37:18). 욥기에서 말하는 거울과 같은 하늘은 우리가 보는 첫째 하늘이 아닙니다. 대기권으로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을 나눕니다. 그리고 둘째 하늘과 셋째 하늘을 나누는 것이 깊음이라 불리는 바다입니다. 그 바다 위로 “단단하고 부어 만든 거울과 같은 하늘”이 펼쳐져 있습니다. 욥기에서 말하는 ‘단단하고 부어 만든 거울과 같은 하늘’은 둘째 하늘 위를 말하며 셋째 하늘과의 경계이며 셋째 하늘의 바닥입니다.
“부어 만든 거울과 같은 하늘”이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물들은 돌로 숨긴 것같이 숨겨져 있고 깊음의 표면은 얼어 있느니라.](욥38:30). 표면이 얼어 있는 이 물들로 인해 단단하고 부어 만든 거울과 같다고 했으며 이 얼음으로 인해 계시록에서 요한은 “수정 같은 유리 바다”라고 한 것입니다.
일곱째, 하늘에서 요한은 앞뒤에 눈이 가득한 네 짐승을 보았습니다(계4:6). 요한이 본 것은 “네 짐승”입니다. 왕좌를 중심으로 왕좌 한가운데와 왕좌 둘레에 있는 앞뒤에 눈이 가득한 네 짐승을 보았습니다. 짐승의 모양을 상상해도 머릿속에 그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습니다. 이들은 천사들이 아닙니다. 성경은 “짐승”(beast)이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그룹들입니다. 첫째 짐승은 사자, 둘째 짐승은 송아지, 셋째 짐승은 사람, 넷째 짐승은 독수리 같았습니다(7). 그런데 이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8절에 보면 “네 짐승 즉 그것들이 저마다 자기 둘레에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것들의 안쪽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8)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막을 만들 때 그룹들을 만들어 긍휼의 자리 양 끝에 두게 하셨습니다. 또한 그룹들을 성막 휘장에 수를 놓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셨지만 그룹들의 모양은 만들고 수를 놓게 하셨다는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주님은 그룹들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천사가 아니라 그룹들에게 명하여 사람들이 에덴의 동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게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에덴의 동산으로 들어 와 생명나무의 열매를 취하려 한다면 그는 그룹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룹들은 불타는 칼을 들고 있었습니다. 구약의 성막을 보십시오. 레위 지파가 성막을 지켰습니다.
[성막이 앞으로 갈 때에는 레위 사람들이 그것을 거두어 내리고 성막을 칠 때에는 레위 사람들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가까이 오는 낯선 자는 죽일지니라.](민1:51). “가까이 오는 낯선 자는 죽일지니라.”는 말씀은 두렵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 우리는 타국인이요, 낯선 자요, 하나님과 멀리 떨어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이제 두려움 없이 담대히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약의 낮선 자들처럼 어떤 두려움 없이 주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룹들에 대해서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그룹(케루빔-복수형)은 천사들이 아닙니다. 에스겔에 나오는 그룹은 날개가 넷인데 계시록에는 여섯 개라고 말합니다. 에스겔이 본 그룹들은 왕좌를 받치고 있었고 그분이 가고자 하는 대로 움직였습니다. 밑에는 바퀴가 있는 비행체였습니다. 그러나 두 날개는 왕좌를 받치고 있었습니다.
요한이 본 것은 하늘의 왕좌였고 그룹들은 왕좌 아래가 아니라 둘레에 있었기 때문에 온전한 모습을 본 것입니다. 요한은 바퀴에 대해서는 아무 말이 없는데 이는 이동을 위해 비행 중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그룹은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날 때 처음 등장합니다. 그룹은 신약 교회를 예표하지 않습니다. 복음서나 서신서에 그룹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천사나 마귀에 대해서는 공부하지만 ‘그룹’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습니다. 언약궤, 성막에 그룹들의 모습을 한 형상과 수놓은 그림이 있다는 것에 주목할 뿐입니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아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고후4:4),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골1:15),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분 자체의 정확한 형상”(히1:3)이신 그리스도를 봅니다.
하나님의 현현은 ‘주의 천사’입니다. 구약에서 주님이 아브라함이나 어떤 사람에게 오실 때는 주의 천사로 오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뭔가를 전달할 때는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그룹과 함께 오거나 그룹을 땅에 보낸 적은 없습니다. 그룹은 하나님의 왕좌 곁에, 둘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룹들의 가장 큰 사역, 임무는 주님의 왕좌를 이동하는 운송수단의 역할을 합니다. 세상의 왕들이 가마나 수레를 타고 이동할 때 종들이 그것을 끌 듯, 그룹들은 주의 왕좌를 이동할 때 왕좌를 받치며 날개가 있고 곁에 바퀴들이 있습니다.
겔10:9-10, [내가 보니, 보라, 그룹들 곁에 네 바퀴가 있었는데 이 그룹 곁에 한 바퀴가 있었고 저 그룹 곁에 다른 바퀴가 있었으며 그 바퀴들의 모양은 녹주석 색깔 같았고 그것들의 모양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들 넷이 한 모습을 가졌는데 그것은 마치 한 바퀴의 한가운데에 한 바퀴가 있는 것 같더라.]
이 모습은 마치 오늘날 흔히 말하는 원형의 UFO를 연상시킵니다. 날개와 바퀴가 회전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어디든지 방향을 바꾸어 움직이는 비행 등은 UFO 목격자들의 증언과 비슷합니다. 그룹들은 하나님의 왕좌를 움직이는 살아있는 비행체의 역할을 합니다.
[그분께서 그룹을 타고 나셨으니 참으로 바람의 날개들을 타고 나셨도다.](시18:10)라고 말합니다. 시편의 기록된 말씀들을 보면 그룹의 역할, 임무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룹들의 생김새는 너무나 독특합니다. 날개들이 있고 바퀴들이 곁에 있고 하나님께서 가시고자 하는 대로 움직이는 전자동 이동 장치를 하는데 기계가 아니라 생명체입니다. 이것은 공상 만화나 영화에 나오는 것보다 더 특이한 장면입니다.
[그룹들이 자기 날개들을 들어 올리고 내 눈앞에서 땅을 떠나 올라가더라. 그들이 갈 때에 그 바퀴들이 그들 곁에 있었고 그들은 각각 {주}의 집 동쪽 입구 문에 서 있었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영광이 위에서 그들 위에 머물러 있더라.](겔10:19). 그룹들이 자기 날개들을 들어 올렸다는 말에 주목하십시오. 그들이 땅을 떠나 올라갔습니다. 그룹의 움직임과 바퀴들은 함께 합니다. 바퀴들은 흡사 비행접시의 모양을 연상케 합니다.
자, 다시 언약궤와 성전 휘장에 수놓은 그룹들에 대해 살펴봅시다. 그룹들은 하늘을 날며 바퀴들이 함께 움직이며 주님의 왕좌를 수송하는 담당자들임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룹들을 타고 날기도 하시고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 사이에 앉아 계십니다. [오 요셉을 양 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주께서는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들 사이에 거하시는 분이여, 주께서는 빛을 비추소서.](시80:1). 주님은 그룹들 사이에 거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룹들은 언제나 주님 둘레에 있습니다.
[{주}께서 통치하시니 백성들은 떨지어다. 그분께서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시니 땅은 흔들릴지어다.](시99:1). 주께서 그룹들 사이에 앉아 계신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땅에서 성막이나 성전을 만들 때 주님은 지성소의 언약궤 안에 그룹들을 만들게 하셨습니다.
[한 그룹은 한끝에 다른 그룹은 다른 끝에 만들지니라. 즉 너희는 긍휼의 자리와 하나가 되도록 그것의 두 끝에 그룹들을 만들지니라. 그룹들은 날개들을 높이 펴서 자기 날개들로 긍휼의 자리를 덮을 것이요, 그것들의 얼굴은 서로 마주보며 그룹들의 얼굴은 긍휼의 자리를 향할지니라.](출25:19-20). 언약궤의 긍휼의 자리 양 끝에 그룹들을 만들었습니다. 긍휼의 자리는 하늘의 왕좌를 예표 합니다. 그룹들은 하늘의 왕좌 둘레에 있는 네 짐승들을 예표 합니다. 땅에 있는 성막은 하늘의 성막 모형이기 때문입니다.
[또 너는 가늘게 꼰 아마 실과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로 짠 열 개의 앙장으로 성막을 만들지니라. 너는 정교한 솜씨로 만든 그룹들을 수놓아 앙장들을 만들되](출26:1). 앙장이란 성막 덮개의 제일 안쪽, 즉 제일 밑 부분 덮개의 이름을 앙장이라고 합니다. 이 앙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리아’는 휘장, 폭, 천막, 장막 등의 의미인데 한자어로 앙장(仰帳)은 ‘천장에 치는 휘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앙장의 길이는 약 14m, 너비는 약 10m 정도인데 이 앙장에다 정교한 솜씨로 그룹들을 수놓아 만들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천사들이나 사람들이나 기타 어떤 인물이 아니라 그룹들을 수놓아 만들게 하셨는데 이를 통해 이스라엘 사람들은 쉽게 그룹들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너는 정교한 솜씨로 청색과 자주색과 주홍색 실과 가늘게 꼰 아마 실로 휘장을 만들되 그룹들을 수놓아 그것을 만들지니라.](출26:31).
휘장은 성막의 지성소와 성소를 구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기에도 그룹들을 수놓아 그것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성막으로 들어가려면 바깥뜰에서 동편 문으로 들어갑니다(출27:16). 레위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4개의 휘장 덮개가 있는 성막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나오는데 제사장만 출입할 수 있습니다(출26:36-37).
그 안으로 들어가면 세 번째 문이 있는 지성소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이곳에 그룹들이 수놓인 휘장이 있습니다. 이곳은 대제사장만 1년에 한 번 속죄일에 양의 피를 들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히9:7). 그룹들은 언제나 주님 곁에 그분 둘레에 함께 있습니다. 그룹들이 수놓인 휘장 속으로 들어가는 일은 두려운 일입니다. 어린양의 피 없이 들어가는 자는 죽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끗이 제거하지 않고 들어가도 죽습니다. 그룹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룹들은 타락한 아담 이후로 에덴을 지킬 때부터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주님 앞으로 두려움 없이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까?
[해가 어두워졌으며 성전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더라.](눅23:45).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전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졌습니다. 주님의 몸이 찢어지고 그분이 숨을 거두실 때 성전의 지성소를 가로 막던 휘장이 찢어짐으로 이제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휘장이 찢어질 때 휘장에 수놓인 그룹들 역시 모두 찢긴 것입니다. 이제 아무도 하나님 앞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자들이 없습니다. 새롭고 살아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에 의거하여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을 얻었는데 이 길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휘장 곧 자기 육체를 통해 거룩히 구분하신 것이니라.](히10:19-20).
“휘장 곧 자기의 육체”란 말씀에 주목하십시오. 휘장은 예수님의 육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그 몸이 찢기고 죽으심을 당할 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육체를 죽음에 내어 드린 것은 휘장을 걷어 내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이 소망은 혼의 닻과 같이 확실하고 굳건하여 휘장 안에 있는 것 속으로 들어가는데](히6:19). 우리는 휘장 안에 있는 것 ‘언약궤’-왕좌로 나아갑니다. 저 하늘에 있는 그룹들은 성도들이 오는 것을 막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과 함께 주님께 경배하고 그분을 찬양합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왕좌 둘레에 있는 네 짐승은 에스겔서에 언급된 ‘그룹들’이 분명합니다. 수가 같습니다. 얼굴의 모양이 같습니다(겔1:10, 계4:7). 모두 왕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겔1:26, 계4:6). 모두 눈이 가득합니다(겔1:1, 계4:8). 왕좌 둘레에 있는 무지개가 동일합니다(겔1:28, 계4:3). 에스겔이 본 그룹들과 요한이 말한 네 짐승은 동일 대상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경을 좀 더 알고 싶은 욕구가 있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스랍들입니다. 스랍은 그룹과 이름이 다른데 이들은 날개가 여섯이고 하나님의 왕좌 둘레가 아니라 위에 있습니다. [그것 위에는 스랍들이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진 채 서 있었으며 그가 두 날개로는 자기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자기 발을 가리며 두 날개로는 날더라.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외쳐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군대들의 {주}여, 그분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니](사6:2-3).
성경 전체에서 여기 딱 한 번 등장합니다. 에스겔의 그룹들이 4개의 날개를 가졌다고 나오는데 이사야의 스랍들은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지고 있습니다. 에스겔의 그룹들은 주님의 왕좌를 운반하며 호위하는 자들로 나오는데 이사야에 나오는 스랍들은 왕좌 위에 있습니다.
스랍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데 계시록 4:8에 언급된 것처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외칩니다. 계시록에 나오는 네 짐승은 여섯 날개를 가졌고(계4:8),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외칩니다. 이들은 왕좌와 그 둘레에 있습니다. 위치, 날개, 모양 등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차이는 그들의 지위, 신분, 역할이 다른데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 하늘에서 다양한 영적 존재들을 볼 것입니다. 이 땅에 수많은 종류의 생물들을 각각 그 종류대로 창조하신 것처럼 저 하늘에도 주님께서 그 종류대로 창조하신 많은 창조물들이 있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전설이나 신화로 생각하는 유니콘, 사티로스, 용들, 리워야단, 불말 등 별별 것들이 실제로 다 있습니다. 이 땅에 70억이 넘는 사람이 살고 있듯 저 하늘에는 헤아릴 수 없는 천사들이 있습니다. 이 땅을 만드신 분이 저 하늘을 만드셨습니다.
하늘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있고, 식물들이 있고, 많은 건축물이 있고, 도로가 있고, 도시가 있고, 동산이 있고, 낙원이 있습니다. 생명나무와 같이 나무들도 있고, 생명수가 흐르는 강도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저 하늘을 정신적, 가상적, 영적인 어떤 곳으로 생각하고 맙니다. 하늘은 우리가 살면서 생활할 곳입니다. 땅에서 하늘로 삶의 터전이 바뀌는 것뿐입니다.
성경에는 이들 그룹 외에 또 하나의 그룹이 있습니다. 그는 마귀, 사탄이라 불리는 루시퍼(사14:12)입니다. [너는 기름 부음 받은 덮는 그룹이니라. 내가 너를 그렇게 세우매 네가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고 불타는 돌들 한가운데서 오르내리며 다녔도다.](겔28:14).
기름 부음 받은 덮는 그룹이었던 루시퍼는 자신을 높여 하나님과 같게 되려 하며, 그분의 왕좌 위로 올라가려 했다가 심판을 받았습니다. 사탄은 기름부음을 받았기에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또 다른 그리스도가 있는데 그가 적그리스도입니다. 사탄은 그룹이었으므로 자신을 빛의 천사로 변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니 사탄도 자기를 빛의 천사로 변형하느니라.](고후11:14).
우리말로 가장한다는 말이 “변형 한다”(transformed)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형체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습니다. 용으로, 옛 뱀으로, 마귀로, 혹은 귀신으로, 빛의 천사로 자신을 마음대로 변형해서 보일 수 있으며 사람들을 속입니다. 사탄은 기름부음 받은 덮는 그룹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산 위에 있었던 자였지만 지금은 끌어 내려져 둘째 하늘에서 ‘공중 권세 잡은 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신(God)이며 통치자입니다.
하나님은 큰 환란이 끝날 무렵 사탄을 결박하여 바닥없이 깊은 구덩이에 가두어 두실 것입니다(계20:2). 천년 왕국이 끝날 무렵 사탄은 잠시 풀려납니다(계20:7). 사탄의 최후 반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단 번에 모두 다 멸하십니다. 사탄이 자신을 빛의 천사로 변형한다면 사탄의 사역자들이 의의 사역자들로 가장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마귀는 자신을 높입니다. 우리가 누구의 마음을 지녔는지 아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왕좌 둘레의 네 짐승들”은 사람, 사자, 소, 독수리의 모습입니다. 넷이란 사람들이 땅에서 전부를 나눌 때 쓰는 구분법입니다. 동서남북 네 방향은 전 방향을 말합니다(시75:6).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은 1년 전부를 말합니다. 땅의 사람들을 나눌 때 성경의 구분법은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으로 전체를 표현합니다. 몇 구절만 보십시오.
“족속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계5:9, 7:9, 11:9, 13:7, 14:6).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일컬을 때 이렇게 넷으로 말합니다. 주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때 네 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나의 네 가지 혹독한 심판 곧 칼과 기근과 해로운 짐승과 역병을 예루살렘에 보내어 사람과 짐승을 그곳에서 끊을 때에는 얼마나 더 그러하겠느냐?](겔14:21). 넷으로 전부를 표현하는 일은 일상에서나 성경에서나 허다한 일이기에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땅의 짐승들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짐승들과 모든 가축과 기는 것들과 날아다니는 날짐승과](시148:10). 에스겔에 나오는 네 그룹들의 얼굴이나 계시록에서 요한이 본 네 짐승들의 얼굴 모양은 전부를 일컫는 것입니다.
사자는 야생 짐승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사자는 밀림의 제왕일 뿐 아니라 백수(百獸)의 제왕이란 타이틀로 불립니다(잠30:30). 소는 가축들의 대표입니다. 독수리는 날짐승의 대표입니다. 사람은 이 땅의 모든 창조물의 머리입니다(히2:7).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로 삼으셨습니다.
창세기 1장으로 가서 동물들의 창조 과정을 봅시다. 물에서 날짐승들이 나왔습니다(창1:20,21).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땅은 살아 있는 창조물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되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그것의 종류대로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께서 땅의 짐승을 그것의 종류대로, 가축을 그것들의 종류대로, 땅에서 기어 다니는 모든 것을 그것의 종류대로 만드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24-25).
가축, 땅의 짐승, 땅에 기는 것이 나옵니다.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주님은 날짐승들, 땅의 짐승들, 가축, 땅에서 기는 것, 사람 이렇게 넷이 아니라 다섯을 언급하셨습니다. 노아의 홍수 전에 이들은 방주로 들어왔습니다. [그들과 모든 짐승이 그것의 종류대로, 모든 가축이 그것들의 종류대로, 땅에서 기어 다니는 모든 기는 것이 그것의 종류대로, 모든 날짐승 곧 모든 종류의 모든 새가 그것의 종류대로 들어가고](창7:14).
그들(사람), 모든 짐승(사자), 모든 가축(소), 땅에서 기는 모든 것, 모든 날짐승(독수리). 특이한 점, 이상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땅에서 기는 모든 것들에 대한 대표가 없습니다.
주님은 사람을 물고기에 비유하셨고 주님의 사도들을 ‘사람 낚는 어부’라고 하셨습니다. 물과 땅과 하늘에서 모두 활동할 수 있는 짐승이 파충류입니다. 왕좌 둘레에 있는 네 짐승들 중에 땅에 기는 것(파충류)을 대표하는 짐승이 보이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사탄은 옛 뱀이라 불리며, 용인데 파충류입니다. 그는 덮는 그룹이었습니다. 사탄은 용으로도 불리고 뱀으로도 불리는데 그는 기는 것들을 대표하는 그룹입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왕좌 둘레에 있지 않습니다. 그는 하늘에서 끊어져 끌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4장에서 요한이 하늘로 올라가 본 것은 하늘의 성막이었습니다. 왕좌와 그 위에 앉으신 분, 스물 네 장로와 네 짐승들, 왕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영들), 수정 같은 유리 바다는 하늘의 성막입니다. [이 제사장들은 모세가 성막을 만들려 할 때에 [하나님]께 권고받은 바와 같이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를 섬기나니 이는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는 조심하여 산에서 네게 보여 준 양식에 따라 모든 것을 만들라, 하시기 때문이라.](히8:5).
히브리서는 모세의 성막에서 제사장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들의 본보기와 그림자”를 섬긴다고 말합니다. 땅에 있는 성막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입니다. 모세는 산에서 하나님이 보여 주신 성막의 양식을 보고 그대로 성막을 지었습니다.
스데반이 증언하기를,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성막이 있었는데 이것은 그분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며 정하여 주사 그가 몸소 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행7:44)했습니다. 이 성막은 주님이 오실 때까지의 모형이었습니다(히9:9).
요한은 유대인입니다. 그는 살아서 성전을 보았고 거기서 경배를 드리고 희생 헌물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런 요한이 이제 하늘로 와서 직접 실체를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땅에서 만든 성막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들이 직무를 맡아 섬겼는데 실체가 아닌 본보기와 그림자를 가지고 섬겼습니다. 하늘의 성막과 땅의 성막은 실체와 그림자의 관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땅의 성막, 성전에서 섬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손으로 만든 성막이 아니라 “하늘의 성막”에서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다가올 좋은 일들의 대제사장으로 오시되 손으로 만들지 아니한 성막 곧 이 건물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더 완전한 성막을 통해 오셔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가 아니라 자기 피에 의거하여 한 번 거룩한 곳에 들어가사 우리를 위해 영원한 구속을 얻으셨느니라.](히9:11-12). 예수님은 자기 피를 가지고 하늘의 지성소로 곧 바로 들어가셨습니다.
하늘의 성막과 땅의 성막은 실체와 모형으로서 유사합니다. 히브리서 9:2-8절은 성막에 대한 매우 간략한 기록입니다. 성막 안에 등잔대, 상과 보여주는 빵이 있는데 이것이 성소입니다. 휘장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라 불리는 곳이 있고 그 안에는 금향로, 언약궤가 있습니다. 언약궤 속에는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아론의 싹 난 막대기, 언약의 돌 판들이 있습니다. 언약궤 위에는 긍휼의 자리를 덮는 그룹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막은 현재 곧 이때까지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히9:9). 이 성막은 육신에 속한 규례들로만 유지되어 개혁의 때까지 그들(유대인들)에게 부과된 것이라고 말합니다(히9:10). 구약적 배경이 있는 분들은 이 글을 읽을 때 쉽게 이해할 것입니다.
자, 이 장면이 모형이라면 요한이 본 왕좌는 긍휼의 자리에 해당합니다. 네 짐승들은 영광의 그룹들에 해당합니다. 스물 네 장로는 성막에서 섬기는 제사장들에 해당됩니다. 왕좌 앞에 있는 일곱 영들은 성소에 있는 일곱 등불입니다. 왕좌가 있는 곳은 지성소이며 스물 네 장로가 있는 곳은 향을 피우는 곳입니다. 유리 바다는 제단 사이에 있는 물들입니다.
솔로몬은 놋으로 만든 바다(왕상7:23-45)에 물을 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요한에게 “이리로 올라오라.”고 말씀하시고 즉시로 하늘에서 보여 준 것이 “하늘의 성막”이란 점에 주목하십시오. 이 성막에서 예수님이 오셨고, 이 성막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하늘의 성막 안 지성소로 들어가며 그분의 왕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두려움 없이 담대히 언제나 필요한 때에 도우시는 은혜를 구하기 위해 이 왕좌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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