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고독 그리고 슬픔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어르신.
독고양훈의 음성은 어두웠다.
받지 않는다.
나직하게 독고양훈의 말을 받는 양천종의 음성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인천국제공항의 입국 심사대였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독고양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윤 찬경이 전화를 받지 않아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선 마당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을 향해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 두 명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몸을 비스듬히 돌렸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양천종의 모습이 그의 몸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었다.
회색 양복을 입은 사내들은 삼십대 중반 정도의 나이였는데 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독고양훈과 양천종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은 강렬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나이가 좀 더 많아 보이는 사내였다.
실례합니다. 독고양훈 씨죠?
사내는 중국어로 말하고 있었다. 독고양훈이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습니다만? 독고양훈은 내색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내들은 공안 기관의 인물이라는 냄새를 팍팍 풍기고 있었다.
저는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에 근무하고 있는 윤정명이라고 합니다. 뒤의 분과 함께 저희를 따라가 주셔야겠습니다.
국정원의 윤 정명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의 사무적인 어투에서 위협적인 뉘앙스가 느껴졌다. 따라가지 않는다면 서슴없이 물리력을 행사할 기세였다.
무슨 일입니까?
자신의 예상이 맞자 독고양훈은 더욱 긴장했다. 한국의 국정원이 자신과 양천종을 조사할 일이라는 게 있을 리가 없다. 그들은 한국에 왔던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중국 내에서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다.
중국 삼합회의 마약 판매책 몇 명이 국내로 들어온다는 정보가 있었는데 선생님과 뒤의 분이 그와 관계되어 있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조사는 몇 시간 정도면 충분합니다. 혐의가 없다면 오늘 중으로 나오실 수 있습니다.
터무니없는 혐의라는 것을, 말하는 윤 정명도 알고 있을 것이고 듣는 양천종과 독고양훈도 잘 알고 있었다. 마약이라니, 말도 안 되는 혐의다.
공항 청사 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태양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독고양훈은 양천종을 돌아보았다.
양천종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그의 눈에 허허로운 기색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독고양훈은 이를 물었다.
저들을 따라가자. 이미 이곳에서의 상황은 끝이 난 것 같구나.
어르신!
독고양훈은 나직하게 양천종을 불렀다. 무언가 말을 하려던 독고양훈은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의 머릿속으로 양천종의 음성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양천종의 입은 굳게 다문 상태였다. 전설에나 나오는 심어술(心語術)이다.
일본에 연락을 하거라. 저들은 막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우리를 알아보았다는 것은 임한이라는 아이가 우리를 알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가 마음먹는다면 이곳이 시체의 산으로 변하리라는 걸 아는 아이다. 저들에게 우리를 핍박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붙잡아두게는 했겠지만.
잠시 끊겼던 양천종의 말이 이어졌다.
찬경이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는 것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들이 우리를 찾은 것은 한국 내의 상황이 이미 천외천부에 의해 장악되었다는 것을 뜻해.
일본지회의 아이들이 이곳으로 온다면 호랑이 굴로 들어오는 것을 격이다. 찬경이와 한국지회가 이곳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임한이란 아이를 찾지 못하고 뒤를 내줄 수밖에 없어. 지피지기(知彼知己)일 때만 백전불패(白戰不敗)일 수 있다. 더 이상의 희생은 무의미하다. 세월의 힘은 무섭다. 천부가 완전히 부활한 듯 하구나.
양 천종의 말을 들은 독고양훈은 이를 악물며 고개를 떨궜다. 양화군과 장로들이 쓰러졌다면 한국지회의 수뇌부는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었다. 회를 지키기 위한 자결은 회의 일원이 되면서 하는 첫 번째 맹세였다. 그들은 맹세를 지킬 것이다.
양천종은 수세보원기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는 천외천부가 백두대전 이후 불과 십 수 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호국회의 근저를 뒤흔들 정도로 강력하게 성장한 배경을 믿기 힘들었다. 의심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심을 풀어줄 만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다.
국정원 요원들 사이에 서서 걸음을 옮기는 양천종과 독고양훈의 어깨는 많이 쳐져 있었다.
인천공항의 활주로에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고 있는 시간이었다.
쾅!
앉은뱅이책상이 갑작스런 충격으로 주저앉는 듯했다. 늘 정적에 잠겨 있던 정원은 분노의 격랑에 휘말려 있었다. 김정만은 두 손은 바닥에 대고 넙죽 엎드렸다. 한형규의 분노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가 있더란 말이냐?
한 형규의 고함에 정자가 뒤흔들렸다.
국정원과 검경의 전격적인 작전이었습니다. 한충우가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냈다고 합니다.
그 덜떨어진 죽일 놈이 감히 내 꿈을 망쳐!
한 형규의 분노는 당연했다. 대명회로부터 다음 날 자금을 지원하겠다는 연락을 받은 후 기다리던 대금은 그의 비밀 계좌로 입금되지 않았고 들려온 것은 대명회의 붕괴 소식이었으니까.
그들의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잠시 후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힌 한 형규가 김 정만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흥분은 가라앉지 않은 듯 했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의 손끝은 아직도 파르르 떨고 있었다.
국정원에서 경기도 양주에 있는 회의 본부를 찾아냈습니다. 대성원이라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대명회의 수뇌부가 모두 극약을 먹고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허허허.
한 형규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모두 죽었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지원하기로 했던 자금은 사라진 것이로군.
그의 말에 김정만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꼭 그렇게만 보긴 어렵습니다. 회와 관련되어 있던 폭력 집단들도 일망타진되고 있긴 하지만 회는 조직 전체가 무너진 것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전에 남국현을 만났을 때 회의 규모에 대해 언뜻 들은 말이 있습니다.
그는 말을 할 때 축소하면 했지 과장하지는 않는 스타일의 사람이었는데도 당시 그는 회의 총인원이 이천 명 수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저는 회의 규모가 그보다 더 크다는 느낌을 받았었지요.
김정만의 말을 들은 한 형규의 눈이 빛을 발했다.
그들의 뿌리가 뽑히지 않았다는 말인가?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그들은 이번 검거 작전으로 큰 타격을 받기는 하겠지만 완전히 붕괴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까지는.
아직까지라.
그렇습니다. 아직입니다. 하지만 국정원과 검경의 추적이 계속된다면 회는 이번에 완전히 뿌리가 뽑힐 것입니다.
그렇다면 적절한 수준에서 작전을 그만두게 해야겠군.
그것이 회의 남은 세력을 유지하게 만들 수 있는 마지막 방법입니다.
김정만은 입을 다물고 한 형규를 지켜보았다. 십여 분이 지났을까. 입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겨있던 한 형규가 말문을 열었다.
선이 닿는 여야 의원들에게 은밀히 연락을 하게. 검경의 회와 조폭에 대한 검거작전으로 전국이 난장판이야.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네.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것이 국민들의 불안감을 없앨 수 있어. 국정원이든 검경이든 커다란 공을 세운 상태이니 이미 벌어진 일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충분한 논공행상이 이루어질 수 있지.
의원들을 설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단지.
충분한 정치 자금을 약속하도록 하게. 회의 정보력은 아주 탁월했었지. 아직 그들의 세력이 남아 있다면 그들이 연명하게 되었을 때 그것이 누구의 덕인지 바로 알 수 있는 자들이야. 그들은 나를 찾게 되어 있네. 나만이 그들을 보호할 수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정자를 내려와 섬돌에 놓인 신발을 신고 있는 김정만의 얼굴에 무거운 기색이 떠올랐다. 예상치 못한 시련의 시간이었다.
김동성은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이 건네준 꾸러미를 살펴보고 있는 형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책상에 올려진 명패에는 수사관 윤영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김동성은 윤 영준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전봇대처럼 키가 크고 눈초리가 살짝 쳐져 있어서 순한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그가 건네준 꾸러미를 받은 이후 윤 영준의 눈빛이 칼끝을 연상시킬 정도로 날카롭게 변한 것을 보며 그는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지금은 어서 빨리 형사계 사무실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꾸러미를 살펴보던 윤 영준이 고개를 들며 말문을 열었다. 경기도 광주에 사는 김동성이라고 자신을 밝힌 사내는 오십대 중반의 중늙인이였는데 힘들게 세상을 살아온 듯 이마에 주금이 가득해서 육십은 넘어 보였고 들어올 때부터 형사계 사무실 안을 계속 둘러보는 것이 불안해 보였다.
아저씨, 이 물건을 어떻게 손에 넣게 되셨다구요?
그가 들고 있는 것은 갱지에 싸여 있었는데 내용물이 책 종류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모양새였다. 포장되어 있는 모양이 어설픈 것이 김동성이 내용물이 무엇인지 확인해보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윤 영준은 갱지 위에 쓰인 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았다. 갈색의 갱지 위에는 어지럽게 흘려 쓴 글씨로 수원동부경찰서의 임한형사에게 전해주시기를 이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급박하게 휘갈겨 쓴 글씨체였다.
김동성은 어색하게 손을 맞잡으려 대답했다. 그는 머리털 나고 형사계에 들어온 적이 처음이었다. 그는 살아오며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기 했지만 공연히 주눅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아직도 그의 뇌리에 경찰은 일제시대 순사와 같은 이미지가 남아 있었다.
시대도 변하고 경찰도 변했지만 나이든 사람들의 경찰에 대한 인식은 그리 변하지 않았다.
화물을 배달할 일이 있어서 충청도에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 고가 밑을 지나는데 위에서 떨어진 것이유. 적재함에서 쿵 소리가 나서 차를 세우고 확인해보니까 그것이 적재함에 떨어져 있었수. 겉에 쓰인 걸 보니 버리려고 던진 것 같지는 않기에 가져 온 거요. 사실은 뭐가 들었나 풀려보긴 했는데 한문으로 된 책 한 권하구 공책 한 권이 들어 있더만요. 공책에 적힌 걸 보니 한문으로 된 책은 불설의족경이라는 불경이고 공책은 그 내용을 해석한 것 같은데 말이 어려워서 도통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는 책이었수. 내가 안을 좀 보긴 했지만 너무 타박하진 마시구랴.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김 동성은 민망한 듯 말끝을 흐렸다.
윤 영준이 중얼거리자 김 동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었수, 허지만 고가 위까지 올라갈 방법이 없었구 나도 일이 급해서 누가 그걸 던졌는지 확인은 못 해봤수. 이제 가도 가도 되는 거유. 젊은 형사 양반?
어쨌든 고맙습니다. 임 형사님은 지금 다른 곳에 파견 나가서 이곳에 없습니다. 제가 보관하다가 그분을 뵙게 되면 전달하겠습니다.
휴우 속이 다 시원하네. 그럼 난 형사님만 믿고 가겠수. 왠지 부담스러운 책이어서 버리리도 그렇구 갖고 있기도 그런 책이었거든.
김 동성은 후련한 표정으로 형사계를 나섰다.
김 동성의 모습이 철문 밖으로 사라지자 윤영준은 책상 위에 놓인 꾸러미를
물끄러미 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반복해서 핸드폰을 누르던 윤 영준은 미간을 찡그리며 핸드폰을 접었다.
핸드폰을 꺼놨나? 바쁘신가 보군. 나중에 복귀했을 때 전해도 되겠지.
윤 영눈은 임한이 한가하게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은 지금 본청에 파견 나가 있는 상황인 것이다. 전달된 경로가 특이하기 했지만 그는 급하게 전할 물건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김 동성에게 받은 꾸러미를 서랍에 집어넣은 윤 영준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료에게 온 소포에 정신을 팔고 있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수원동부경찰서 강력반도 지난밤의 대명회와 조폭에 대한 검거 작전에 반수 이상의 직원이 동원되었던 것이다.
새벽의 차가운 햇살에 밀려난 어둠이 조금씩 사그라질 때 공동묘지에 새로운 무덤 하나가 생겨났다.
때를 입히지 않아 붉은 황토가 그대로 드러난 무덤 앞에는 1미터가 채 못 되는 돌로 된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바위를 깎아 만든 비석에는 이름 석자 외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비석 앞에 정좌를 하고 앉아 있던 한은 고개를 들어 동녘을 바라보았다. 불끈 치솟은 태양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사형, 아버지와 말씀이 잘 통하실 겁니다. 사형과 같은 무인(武人)을 만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인 분이셨으니까 말입니다.
비석에 적힌 이름은 오 제문이었다.
한은 오 제문의 시신을 안고 포천까지 왔다. 이곳은 그의 부모가 묻혀 있는 포천의 공동묘지였다. 오 제문의 무덤 바로 옆에 있는 무덤의 비석에는 임 정훈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의 안색은 시체의 그것처럼 창백했다. 격전 이후 지금까지 그는 쉬지 못했다.
이곳에 온 이후 쉴 시간을 얻었지만 오 제문의 죽음은 그에게 쉴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죽었다.
오 제문의 죽음으로 비게 된 자리는 생각보다 컸다. 그는 한의 숨겨진 능력을 온전히 알고 있었고, 그로 인해 평범한 삶을 살 수 없게 된 한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을 사랑했다.
대한호국회회를 상대할 수단으로써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한을, 다시는 오제문과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한은 잘 알고 있었다.
세 개의 무덤에 차례로 절을 하고 몸을 돌리는 그의 가슴으로 깊은 슬픔과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그것은 그처럼 강인한 사람도 견디기 힘들 만큼 컸다.
이 수진은 꽃이 있는 풍경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눈 밑으로진 어두운 그늘이 나이보다 몇 살은 어려 보이던 그녀를 본래의 나이로 보이게 했다. 점심나절을 지난 주택가는 뛰어다니는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공항에 배치시킨 수보기의 형제들을 제외한 나머지를 이끌고 한의 뒤를 아대성원에 도착했을 때 상황은 이미 끝난 후였다. 나기호가 이끄는 국정원의 요원들이 현장을 정리하는 것을 숨어서 지켜본 후 그녀는 수원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할 일이 없었던 것이다.
대성원에 남은 흔적은 한도 무사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기에 그녀는 불안했다. 한이 태기산에서 입은 상처만으로도 수보기의 형제들이라면 자리를 펴고 누웠어야 할 중상이었다. 그 상처에 다른 상처가 더해졌다면 한의 생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었다.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던 이 수진은 거친 엔진 음과 함께 가게 앞에 멈춘 자동차로 인해 생각에서 벗어났다.
구형 검은색 지프차 한 대가 가게 무을 틀어막으며 서 있었다.
차의 시동이 꺼지고 보닛 쪽으로 걸어오는 장신의 사내를 본 이수진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임 형사님!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한은 예의 무심한 표정으로 이수진을 응시하며 가볍게 목례를 했다. 여전히 안색은 백지장처럼 창백했지만 한은 흔들림 없는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와 책상 앞에 섰다.
괜찮으세요?
이수진의 음성은 반가움과 걱정이 복잡하게 혼합되어 있었다.
견딜 만합니다.
한의 입가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평소와 같은 검은빛 일색의 점퍼와 티, 바지를 걸친 그는 창백한 안색만 아니라면 늘 보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언제 오신 거예요?
한 시간쯤 전에 수원에 도착했소. 집에 들렀다가 나오는 길입니다.
한의 음성은 부드러웠지만 이수진은 일정한 거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생사를 함께 하긴 했지만 동료일 뿐이었다.
한의 말이 이어졌다.
호국회의 한국지회는 수뇌부가 전멸하면서 붕괴되었소. 점조직인 그들 조직의 특성상 다른 수뇌부가 구성되기 전에는 하부의 인물들은 조직을 재건할 수 없을 거요. 누가 조직원인지 회의 전모를 아는 자가 없으니까. 최소한 이 땅에서는 회의 추적이나 그들의 공격을 염려할 필요는 없어졌다고 할 수 있소.
잠시 말을 멈추고 이수진을 바라보던 한이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고맙소.
짤막한 한마디였지만 이수진의 얼굴이 노을처럼 붉게 변했다. 당황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한은 국정원 차장인 한 충우를 만났을 때도 고개만 까닥이며 인사했던 사람이다.
이수진은 한이 진심으로 자신에게 고마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의 사무적인 말에 왠지 허전하게 비워졌던 그녀의 마음이 기쁨으로 가득 차 올랐다.
이러지 마세요. 제가 해야 할 일이었을 뿐이에요. 당신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일이었고요.
한은 숙였던 허리를 폈을 뿐 이수진의 말에 대꾸를 하지 않았다.
한결 부드러워진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한을 향해 이수진은 말을 이었다.
당신의 예상처럼 양천종은 수하 한 명을 대동하고 중국에서 바로 날아왔어요. 공항에 있던 형제가 그들을 알아보고 국정원에 연락했죠. 그들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갔어요. 한국지회가 붕괴되었다는 것을 느낀 것 같아요. 그리고 일본지회에서 한국으로 온 사람은 없었어요. 그들의 움직임은 파악하지 못했어요. 중국이나 일본 본토에는 수보기의 형제들이 없기 때문에.
그 정도로 충분합니다. 고생하셨소.
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혼자였다면 오늘날의 상황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그는 인정하고 있었다. 고마울 따름이었다.
이 수진은 고개를 저었다.
전 몽골 사람이에요. 제가 너무 어렸을 때 할아버지가 저를 거두셔서 고향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지 않긴 하지만 당신의 일은 저와 무관하지 않아요. 단군조선제국이 열국(列國)으로 분열되기 전에는 몽골도 당신과 다른 민족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녀의 눈빛이 따스해졌다. 자신과 수보기는 한이 혼자 힘으로 호국회를 상대하기 전까지는 함께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한이 그 정도 힘을 키우려면 짧게 잡아도 십 년은 소요될 것이다. 그녀에게 남은 시간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간 한이 가게를 벗어나 청운의 집으로 향하는 것을 보며 이수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곳에 오기 전 내 꿈은 은자림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당신을 만나고 난 후 생각기 바뀌었다는 것을 당신은 아나요? 난 당신과 함께 호국회와 싸우겠어요. 언제까지라도!
한이 사라진 골목길을 바라보던 이수진의 두 눈이 별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나다.
그래 넌 줄 안다, 임마!
수화기 건너에서 한의 말을 받는 김 석준의 음성은 높았다. 반가운 것이다.
어니냐?
남문에 있다, 갈까?
됐어. 며칠 쉴 생각이다.
그래라. 검경이 전국을 뒤집어놓았다. 수원도 난리였어. 네 덕에 수원이 완전히 무주공산이 되었다. 지금은 움직이기 어렵지만 잠잠해지면 곧 사업에 착수할 수 있다.
김 석준의 음성에서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다시 연락하마.
쉬어라.
심보영이 그가 전화기를 내려놓는 것을 보며 근심스런 안색으로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한아, 많이 아파 보여. 며칠 푹 쉬어야 할 것 같구나.
괜찮습니다. 어머니!
한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지연 씨는 언제나 국수 먹여준답니까?
그의 질문에 심보영은 빙긋 웃었다.
궁금하니? 그 아이는 청운이와 죽고 못 사는 사이면서도 일을 손에서 떼지 못하는구나. 연말께나 돌아올 수 있다는데 그때는 담판을 지을 생각이다. 청운이 녀석은 헤헤거리며 지연이에게 꼼짝도 못하니 저대로 두었다간 내 머리카락이 희어질 때까지 손자를 안아보긴 틀렸다.
그녀는 혀를 차며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집 안에는 한과 심보영뿐이었다. 청운을 비롯한 다른 가족들은 아직 일터에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한을 향했다. 애정과 근심이 함께 서린 눈빛이었다.
네가 돌아온 후 계속 바늘방석에 앉아있는 기분이었어. 너를 믿지만 위험이 네 주변을 떠나지 않는 것 같아서 불안하구나.
어머니, 이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하는 일이 거의 마무리되었어요. 제 주변에서 저를 위험하게 만들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정말이니? 심보영은 다행스럽다는 듯 반색한 얼굴이었다.
예, 제가 언제 빈말하는 거 보셨어요?
심보영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한의 옆자리로 옮겨 앉아 자신보다 머리 하나 반은 더 큰 한을 두 팔로 끌어안았다.
한은 오제문의 죽음으로 받았던 충격이 조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는 심보영을 마주 안았다. 잊고 있었던 가족의 사랑이 그녀에게서 전해져 왔다.
나는 제가 큰일을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청운 아빠와 나는 네가 덜 위험하고 평범한 경찰관으로 생활하다가 좋은 여자 만나 결혼하는 걸 보고 싶구나. 네가 아이를 낳는다면 내가 키워줄 테니 어서 장가가거라.
예.
한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심보영의 말은 그대로 그의 바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룰 수 없어진 바람이었다.
심보영을 안고 있는 그의 눈가로 쓸쓸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남기호에게서 연락이 온 것은 한이 청운의 집에서 돌아온 다음 날 아침이었다.
수원에 들어선 이후 한은 공개적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에 남기호가 그의 행적을 파악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날세, 몸은 괜찮나?
예.
대성원은 정리되었네. 공식적으로 대명회는 붕괴되었어. 정말 고생했네.
아닙니다.
그들 사이에 대화가 잠시 끊겼다.
침묵을 깬 것은 남 기호였다.
상황이 조금 묘하게 돌아가고 있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한은 긴장했다. 남 기호의 어투에서 떨떠름한 기색을 눈치 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진급 여야 국회의원 십여 명과 행정부 내의 고위 관료 중 몇 병이 검거 작전을 중단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모양일세.
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 형규가 움직이고 있군요.
나와 차장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네. 하지만 그들의 의견을 무조건 무시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야. 대규모 검거 작전으로 국민들이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사실이니까. 게다가 지금까지 드러난 회의 규모가 너무 작네. 대통령께서도 지금처럼 국정원 요원들과 검경 전체를 동원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고 있으신 듯하고.
남기호의 말을 들은 한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들이 증거를 폐기시켰기 때문에 회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겁니까?
그의 음성은 조용했지만 그 안에 서린 분노를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남기호는 수화기 건너편에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모를 리가 있겠나. 얼마나 머리가 좋은 양반들인데. 짐작들은 하고 계시겠지. 하지만 정치란 것이 우리 마음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이 문제일세. 드러난 회의 조직원에 대한 검거는 각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걸세. 조금 더 지켜보아야겠지만 대규모 검거 작전은 오늘이나 내일 중으로 마무리될 듯하네. 회의 한국지회가 붕괴되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듯허이. 너무 아쉬워하지 말게.
알겠습니다.
공권력을 움직이는 것은 한이 아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계급과는 전혀
상관없는 무게를 가지고 검거 작전에 개입했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역할도 끝이 났다. 검경과 국정원의 수뇌부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는 듯했다.
한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남기호가 전해 준 내용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는 대명회의 흐트러진 하부 조직 전부를 뿌리 뽑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금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회의 한국지회 수뇌부는 붕괴되었다. 수원으로 돌아온 직후 그가 공개적으로 움직인 것은 회에 대한 마지막 확인 작업이었다. 그가 정상이 아닌 이상 한국에 남아 있는 회의 인물 중 초강자가 있다면 그를 요격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회는 침묵했다.
그것은 한국 내에 더 이상 초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국내에서 활동하던 회에 소속된 초인들이 전멸한 것을 확인한 이상 평범한 하부 조직원들은 김 석준에게 맡겨도 될 터였다. 모르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회에 소속되었던 자들은 매국노였다. 그들은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한은 국정원과 검경의 상부와는 달랐다. 그는 회의 하부 조직원에 대한 징치를 포기할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사람들은 광풍처럼 몰아쳤던 조폭에 대한 대규모 검거를 언제 그랬냐는 듯 잊었다.
대명회는 단 한 번도 세상에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사라졌다.
국정원도 검경의 수뇌부도 회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언론에 공개할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회가 언급된다면 그들의 목적도 언급된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중국과의 외교관계를 악화시킬 것이었다.
국회 내에선 연일 민생 현안과 상관없는 싸움질이 계속되었고, 국민들은 어려운 경제 현실 속에서 허덕였다. 세상은 늘 그렇듯이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가고 있었다.
좋군.
사무실 안을 둘러본 한이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
며칠 전보다 얼굴이 많이 나아졌구나.
한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김 석준이 툭 뱉은 말이었다.
남기호의 전화를 받은 다음 날 한은 김 석준을 잠깐 만났다. 김 석준이
걱정된다며 그의 집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그때의 한은 반 시체 같은 낯빛이어서 김석준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한의 집을 나왔었다.
한은 그날 이후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내외상의 치료에 전념했다. 그의 상처는 구할 이상 회복된 상태였다. 천단무상진기가 십이성의 경지에 접근하면서 그의 자연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해지고 있었다.
김 석준은 한을 소파에 앉으라고 손짓한 후 여직원 자리에서 녹차 두 잔을 만들어 가지고 왔다.
유리로 된 벽 건너편은 불야성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인데도 네온사인은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이 찾아온 곳은 수일 전 김 석준이 인계동에 마련한 회사 사무실이었다.
세무서에는 유통업을 주업으로 하는 회사로 신고했다. 김 석준이 지은 상호는 대륙상사였다.
찻잔을 한의 앞에 놓은 김 석준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무주공산을 접수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야.
힘들겠구나.
인력이 모자라긴 하지만 빠르게 충원되고 있다. 자금이야 충분하니까. 옥석을 가리느라 시간이 좀 걸릴 뿐이야. 워낙 경찰이 박살을 낸 탓에 검거되지 않은 거물들도 감히 움직일 생각을 못하고 있어. 방해가 없는 덕택에 사업장을 접수하는 시간이 많이 단축되고 있다.
한의 무심하던 얼굴이 풀어졌다.
고생하고 있는데 쉬라는 말은 못하겠다.
한의 말에 김 석준은 피식 웃었다.
내가 고생할 일이 뭐 있냐. 사장님이 고생이지.
대륙상사의 사장은 김 중식이다. 김 석준의 말이 계속되었다.
수원의 업소로 통하는 인력 공급 망과 주류 쪽은 완전히 장악했다. 강 인묵씨가 큰 역할을 했어. 수원에서 그 양반의 영향력이 건재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달 안에 수원의 나이트클럽 두 개와 특급 룸살롱 다섯 개 정도를 인수할 생각이다. 지금 협상이 진행 중이야. 그리고 경매로 나온 건물 두세 개 정도를 매입할 생각이다. 여러 모로 필요해 .장기적으로는 대부업과 부동산 그리고 건설 쪽으로도 진출해야 한다. 조폭이 손대지 않는 사업은 거의 없어. 그들이 다시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영역을 전국적인 규모로 구축하려면 인력과 자금이 정말 천문학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확장하면서 자금을 만들어내고 그 자금을 재투입하는 식으로 갈 수밖에 없다.
흡.
첩첩산중이지만 한 걸음씩 전진하고 있어. 다음 달까지는 안양, 안산, 평택과 이천 지역을 장악할 수 있다. 그리고 올해 말 정도면 서울로 진출할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는 듯하고. 지금 갖고 있는 자금 대부분이 소모되겠지만 그때쯤이면 우리도 고정적인 자금원을 갖게 될 테니 자금 문제도 빡빡하긴 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다.
김 석준의 말에 확신이 서려 있었다.
내년 상반기까지는 서울을 장악해야 한다. 그 이상의 시간이 걸리면 전쟁을 피할 수 없어.
한은 차분한 눈길로 김 석준을 응시하며 말했다.
잘 알고 있다.
김 석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년 상반기가 지나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며 눈치를 살피던 조직들이 기지개를 켤 것이다. 군웅할거 시대가 오기 전에 대륙상사는 서울에 뿌리를 내려야 했다. 그가 아무리 좋은 뜻을 품고 있다하더라도 조직 간의 전쟁은 검경의 개입을 피할 수 없다. 국정원의 남기호가 그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그 보호막이 무한정 계속될 수는 없는 것이다.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자식, 뜬금없이 무슨.
김 석준은 피식 웃으며 한의 어깨를 툭 쳤다.
이 이상 네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다는 말이냐. 네 덕에 주먹 세계가 텅 비어버렸는데. 발길 닿는 곳이 모두 내 땅이나 다름없게 된 것이 네 덕인데 ;그 무슨 섭섭한 말이냐!
한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이 시간에 김 석준을 찾은 것은 별다른 이우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가 김석준과 만나는 것이 다른 사람 눈에 띠어서 좋을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관계는 그가 경찰을 그만두지 않는 한 계속될 것이다.
생각은 해봤냐?
한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진중한 기색이었다.
생각할 거나 있나, 네 뜻이 내 뜻이다. 이 땅에서 다른 나라 놈들이 제 세상인 듯 날뛰게 둘 수는 없는 일 아니겠냐. 그들이 지금까지 십 몇 년 동안 이 나라 거대 조직들을 좌지우지 해왔다는 것도 죽고 싶을 만큼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한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김 석준은 웃고 있었지만 그 음성은 단호했다.
한은 김 석준을 만났을 때 천외천부와 대한호국회의 전쟁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그는 김 석준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김 석준의 천부 가입 문제는 강요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고 김 석준이 거절한다면 그는 김 석준에게 미련을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금 김 석준은 한의 제안을 기꺼이 수락한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오늘과 내일 몇 군데 들르고 나서 한 달 정도는 칩거할 생각이다. 모레부터 우리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 중 재질이 있고 성정이 바른 사람을 골라서 우리 집으로 보내 줘. 일주일에 한 명씩. 한 달이면 긴 시간은 아니지만 네 명까지는 감당할 수 있다.
그들도 그렇지만 너도 죽어나겠군.
김 석준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한이 자신에게 대법을 베풀 때 두 사람 모두 빈사상태에 빠졌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재미없는 놈.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을 보며 김 석준은 툴툴거렸다. 하지만 저 성격을 어찌 할까.
한을 배웅하는 김 석준의 얼굴은 환했다.
흐흐흐, 네 놈에게 무예를 배운 녀석들이 늘어난다는 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즐겁다. 나중에 그 녀석들을 데리고 세계 정복이나 해볼까?
뭐?
하하하!
김 석준의 농담에 한도 결국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나직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몸을 돌리는 그를 보며 김 석준도 따라 웃었다. 출입문을 닫고 돌아서는 김 석준의 눈빛은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임한, 너와 함께라면 지옥이라도 간다.
이 준하의 자택에서 한을 맞이한 사람은 이 세영의 처 유민경과 이제 열 다섯 살이 된 이 태일이었다. 그들은 이준하와 이세영의 사망 소식을 듣고 캐나다에서 귀국한 후 바로 장례 절차를 밟았다.
그들의 무덤은 광주 외곽의 공동묘지에 있었다. 그들의 장례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고 했다. 이 준하가 일가친척이 없는 사람인 탓도 있었지만 그가 외부인과 교류가 거의 없던 사람이 탓이 더 컸다. 몇몇 같은 생각을 하는 사학자들 외에는 조문객도 없었다고 했다.
유민경의 안내를 받아 공동묘지를 다녀온 한은 이 준하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태일은 시차 적응이 도지 않은 상태에서 치렀던 장례식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는지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이태일을 건넌방에 눕힌 한이 안방으로 건너왔다.
껍질을 벗긴 감을 잘라 한의 앞에 놓인 접시로 옮기는 유민경을 보며 한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의 안색은 무거웠다. 이준하와 이세영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때문이다.
유민경은 사십대 초반으로 얼굴이 둥글어서 선한 인상이었다. 이세영과 그녀를 보는 사람들은 모두 남매로 착각할 정도로 그들은 닮은 사람들이었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큼 금슬이 좋았었다.
그녀는 온화한 눈길로 한을 보고 있었다. 그녀도 시아버지와 남편이 한을 얼마나 아꼈는지 알았다. 그녀에게 한은 시동생과 같았다.
죄송합니다. 형수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도련님,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아버님과 그이의 장례식을 치를 때 도련님을 비롯한 경찰이 얼마나 바빴는지 저도 알고 있어요. 그분들도 이해하실 거예요.
언제 가실 겁니까?
친정에 들렀다가 닷새 정도 후에 떠날 생각이에요. 이곳도 정리해야 하니.
유민경은 복잡한 눈길로 집 안을 둘러보았다. 퇴락한 고택이지만 곳곳에 그녀의 시아버지와 남편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녀가 아들 태일이의 공부를 위해 캐나다로 가면 이 집을 돌 볼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집을 팔기 위해 내놓은 상태였다.
건물은 낡았지만 대지가 넓어서 사겠다는 사람이 몇 명 있다고 부동산에서 연락이 왔어요.
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집안일이다. 그는 이 준하와 이세영의 추억이 가득한 이 고택을 아꼈지만 그녀에게 집을 팔지 말라고 할 수 없었다. 그도 이곳을 돌볼 시간이 없기는 그녀와 다를 바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도련님, 가능하면 아버님과 그이가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도련님이 처리해주셨으면 해요. 가지셔도 되고 버리셔도 되고요.
알겠습니다. 제가 가지고 가겠습니다.
한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유민경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대답했다. 이준하와 이세영이 평생을 두고 연구하던 서적들이다. 버리다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형수님.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한이 진지한 음성으로 유민경을 불렀다.
예?
갑작스럽게 두 분이 가셨지만 형수님과 태일이는 제가 돌보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제게 말씀해주십시오.
고마워요. 도련님.
유민경의 눈매가 부드러워졌다.
두 분의 죽음에 얽힌 자들에 대한 생각은 잊고 태일이를 잘 키우는 데만 전념하세요. 그분들을 돌아가시게 한 자들은 응징을 받게 될 겁니다.
한의 음성은 나직했다. 하지만 유민경은 시아버지와 남편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 생겼던 가슴 속 응어리가 스스르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이준하와 이세영만큼 그녀도 한을 믿었다.
예, 도련님.
고개를 숙인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들썩였다. 한은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의 두 눈도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이준하와 이세영은 두 번 죽었다. 그들의 사인을 규명하기 위해서 그들의 시신을 부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을 부검한 부검의도 그들의 사인을 명확하게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의학지식으로는 외부의 상처가 전혀 없이 어떻게 뇌가 부숴졌는지 설명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유 민경의 울음을 그치고 밝은 표정이 되었을 때 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올라가야 할 시간이었다. 이준하와 이세영의 장례식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정운의 다비식(茶毘式)은 아직 거행되지 않았다. 그에겐 그나마 위안이 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