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정규답사를 다녀와서
-임진왜란 전라좌수군의 핵심 흥양의 수군진을 찾아서-
답사 일시 : 2014년 11월 1일
답사일정 : 녹도진 – 발포진 – 정걸 장군 유적지 – 사도진 – 여도진
‘이순신을 배우는 사람들’의 까페 회원이 되고 처음 정규 답사길에 올랐다. 답사지 ‘고흥’은 나로우주센터, 가족들과 제주도 여행을 가기 위해 배를 탔던 장소 등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고흥은 임진왜란 당시 흥양현이었으며, 이순신이 지휘한 전라좌수영의 5관 5포 중 1관 4포가 있었던 지역으로 전라좌수군의 핵심적 역할을 했던 곳이다. 또한 조선의 수군 명장으로 이순신 장군에게 경험을 전수한 정걸장군이 탄생한 곳이다. 이순신 장군에 대해 공부하기 전에는 역사적 인식이 되지 않아 그 지역의 유적을 둘러볼 생각조차 못해 부끄럽기만 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새벽 6시 45분, 격군님의 댁 근처에서 창원(구 진해) 지부 회원들이 함께 모였다. 답사자료집 만들기부터 답사시 안내설명을 하시는 격군님께서 운전까지 하시며 살신성인하시는 모습을 보며 열심히 배우고 배운 것을 퍼뜨리는 것이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천 만남의 광장에서 전국의 이배사 식구들이 집결했다. 처음 뵙는 분들이지만 온라인에서 사진으로 뵌 분들이 많아 전혀 낯설지만은 않았다. 같은 지역에서 가신 동자갑선님을 비롯해 많은 이배사 회원들이 친절히 대해 주셔서 가족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감사했다. 이동하는 차 안에서 각자 소개를 할 때 “이~렇게 좋은 날은 ~~~~... 이배~사와 함께~~~”라며 목청 크게 뽑으며 화합의 장을 열어주신 동자갑선님의 노래 가락으로 분위기는 무르익었다. 아침을 먹지 않고 왔을 회원들을 생각해 들깨죽을 쑤어오신 류성룡님의 정성, 간식부터 모든 일정을 꼼꼼히 챙기신 총무님, 좌석이 부족해 뒷 승용차로 따라오시던 뱀밭님께서 깨끗이 씻어오신 오이, 처음 참석하시며 귤 한 상자를 사가지고 오신 분 등 여러 분들이 이배사회원들의 빈 속을 채워주시기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든든하게 먹고, 머릿속에도 꽊꽉 채워넣는 알찬 일정이 되리라는 기대에 마음이 부풀었다.
이번 답사는 격군님, 일심님 뿐 아니라 고흥 군청 문화관광과 임정모 계장님과 양미소 학예사님께서 함께 참석하시어 자세한 안내를 해 주셨다. 문화관광지를 제대로 복원해서 살리자면 전문가의 검증이 필수다. 답사를 다니다 보면 잘못 기록된 부분을 가끔 보게 되는데 이것은 전문가의 조언을 받지 않고 일을 진행했기 때문에 생기는 오류일 것이다. 고흥군에서 ‘이순신 프로젝트’ 계획 및 일정을 자료집으로 만들고, 답사 관련 자료까지 준비해 오시어 설명을 해주시니 그 적극성과 열정이 전해져왔다.
차 안에서 답사지에 대한 설명을 듣는 사이 어느 새 첫 번째 목적지인 녹도진 성지에 도착했다. 녹도진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북쪽의 잔존성벽, 쌍충사와 그 입구 비석군이 전부라고 한다. 녹도만호 이대원 장군과 정운 장군을 모신 쌍충사에 도착해 참배를 드렸다.
1587년 정해왜변으로 손죽도에서 전사하신 이대원 장군은 손가락을 끊어 피를 내 절명시를 남겼다 한다.
절명시(지혈시) 원문
日暮轅門 渡來海 (일모원문 도래해)兵孤勢乏 此生哀 (병고세핍 차생애)
君親恩義俱無報 (군친은의구무보) 恨入愁雲結不開 (한입수운결불개)
역 문: 해 저문 진중에 바다 건너와
외로운 군사 힘 다하여 끝나는 일생 슬프다
나라와 어버이께 은혜 못 갚아원한이 구름에 엉켜 풀릴 길 없네.
부산포해전에서 일본군이 대통에서 쏜 총통에 맞아 전사한 정운장군을 보고 이순신 장군께서는 “우리나라가 오른팔을 잃었다.”고 할 정도로 크게 슬퍼하였다고 한다.
녹도진성 앞에서 “이 녹도진성이 천연적으로 위치가 참 좋아요. 앞 쪽에 소록도와 거금도가 있어 외부에 잘 보이지도 않고 파도도 막아줘서 수군진보로서의 요건을 잘 갖추었어요.”라는 격군님의 설명을 들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책에서 읽는 것과는 다른 현장감이 느껴졌다. 명나라군과 연합하여 처음으로 벌인 전투 절이도 해전! 여기서 절이도는 거금도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소가 아름다운 양미소 학예사님의 설명에 의하면 고흥에서 직접적으로 일어났던 전투로 고증된 것은 절이도 해전 뿐이란다. 임진왜란과 고흥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고흥의 인적자원과 물적자원이 이순신 장군이 싸울 수 있는 뒷받침이 되었다는 것이다. 자료에 따라 약간씩 다르긴 하지만 옥포해전에서 한산도해전까지 전라좌수군의 전사자와 사상자의 숫자가 고흥출신이 50%를 차지한다고 한다.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신 이순신 장군의 옷을 입고 북을 치면서 전투를 이끈 송희립 장군, 거북선의 초대 선장 신여량 장군, 이순신 장군의 한산도대첩과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에 모두 참여해 대승을 거두게 한 숨은 공신으로 흥양현감 시절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명을 받아 전선을 제조해 일본 수군을 격파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배흥립 장군은 고흥출신이다. 나주 출신 최희량은 흥양현감으로 수군을 재건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순신 장군도 1582년 36~38세까지 발포에서 수군 지휘관으로 근무한 경험이 있다. 고흥군에서는 앞으로 고흥과 임진왜란의 관계를 연구할 예정이라고 한다. 요즘은 스토리텔링이 대세이니 유적지와 역사적 사실을 재미있게 잘 엮어나가면 좋을 것 같다.
흥양 현감 최희량이 흥양지역의 전투상황을 보고서 형태로 이순신에게 알린 것이 임란첩보서목인데, 이를 통해 1598년도의 여러 가지 전투를 확인할 수 있다.
임란첩보서목
1587년 벌어진 정해왜변으로 임진왜란 직전에 가장 임진왜란과 근접한 시기에 일본 수군과 붙어본 경험이 있어서 전라도 좌수군이 실전경험을 토대로 승리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하는 일심님의 의견을 들으니 경험치의 중요성 뿐 아니라 그 경험을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경험을 하고도 느끼고 대처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순신장군의 장계를 보면 화약무기, 활, 화공법 등 재래식 무기와 신무기를 적절히 조합하여 전투력을 극대화시켜 해전전술을 완성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버스를 타고 발포진으로 이동했다. 발포진은 전라좌수영 휘하 수군진에서 유일하게 이순신 장군의 흔적이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2년 전에 부임해 와서 1년 6개월 정도 만호로 재임하였다. 당시 이순신 장군을 잘 알 수 있는 오동나무 일화가 있다. 1580년 이순신이 발포만호로 부임했을 때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로 사람을 보내 만호영의 객사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이순신은 이 오동나무는 나라의 땅 위에 있으니 나라의 물건입니다. 사사로운 용도로 쓸 수 없다고 거절해 오동나무를 지켜냈다고 한다. 이 일화를 볼 때 이순신의 공과 사를 구분하는 원칙주의 뿐 아니라 상관의 명령이라도 옳지 않은 것을 거절할 줄 아는 용기를 엿볼 수 있다.
발포진성에 도착했다. 발포진성은 문화재이름이 발포만호성이라 지정되어 있어 발포만호성이라고도 한다. 발포진성의 성곽 위에 올라가보니 성안으로 보이는 부분은 민가가 들어서 있어서 과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성곽 위에서 잘못 내려오다가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야단맞은 사건이 기억이 남는다. 성벽을 개인 담장으로 연결해 사용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보니 그 아주머니도 자신의 재산피해가 갈까봐 큰소리치는 상황이 벌어져 씁쓸했다. 발포만호성의 성벽은 여장까지는 복원하지 못하고 성벽의 일부분만 복원한 상태다.
마을 앞에서 바닷가의 수군진성에서만 볼 수 있는 굴강의 흔적을 처음으로 보았다. 굴강은 선박을 수리하거나 보관하던 곳이다. 도하 쪽에 흥양 수군이 있었던 곳에 선소가 있어서 흥양현감 배흥립 등의 사람들이 배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 군수물자의 하역이나 선박의 정박용으로 사용된 군사시설로 방파제와 선착장 역할을 했다는 선소. 굴강과 선소의 차이점을 명확히 구분해 달라는 한 회원님의 질문에 격군님께서는 정확한 자료를 조사해서 다음에 알려주시겠단다. 알면 알수록 더 정확하고 깊이 알려는 이배사회원님들의 모습에 모두가 전문가 이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지 상태로 와서 설명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나의 모습과는 상반된 깊이 알고자 하는 태도에 고개가 숙여진다.
굴강
이어 발포역사전시체험관으로 갔다. ‘임진왜란과 고흥의 수군’안내문 사상자의 숫자에서 전라좌수영 고흥출신이라는 문장이 빠져 있어 잘못 이해하기 쉬우므로 문장을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양미소 학예사님은 “역사 사업이 과도기다. 앞으로는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답변하시며 일을 제대로 해보겠다는 의욕을 보이셨다. 역사관에서는 흥양출신의 인물들, 당포전양승첩지도, 삼국의 전투함, 취타신호 등 수군과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당포전양승첩지도는 2점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당시 해전에 참가 했던 신여량과 노홍에게 선조가 하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오늘날 함평노씨 문중과 신여랑 집안에 전해져 내려와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 그림을 보면 그 당시 갑옷 입은 사람은 3명밖에 보이지 않는다. 영화 명량에서 우리 수군들에게 전부 갑옷 입힌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자료가 된다.
당포전양승첩지도
아이들처럼 포토존에 가서 수군들 배경 사이에서 “진격하라~”는 포즈로 사진 한 컷 찰칵!하고 찍으니 장군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출정이다~ 장군의 구령과 북소리에 맞춰 노를 저어라~”등의 체험존 등 활동을 통해 임진왜란 등의 역사에 아이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에 쫓기다보니 천천히 둘러볼 여건이 되지 않아 아쉬웠다.
이순신을 기리는 사당 충무사는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 때 만든 것이므로 역사적 가치는 없지만 그 정신을 기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이다.
점심식사를 위해 포두면 사무소 옆 일조식당으로 갔다. 처음 계획은 갈비탕이었는데 메뉴가 돼지 갈비로 바뀌었다. 정걸장군의 후손께서 점심식사를 대접해주셔서 감사했다. 조상의 업적을 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시는 후손의 모습을 보면서 뿌리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점심 식사 후 정걸장군 유적지로 향했다. 정걸장군은 83년의 생애동안 판옥선의 개발, 왜구의 격퇴, 전라좌수군의 군비 확보, 행주산성에서 권율이 이길 수 있도록 화살 등 군수물자를 적시에 싣고 와 보급지원을 한 것, 조방장으로서 이순신 장군에게 조언과 군사자문을 한 것 등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선무공신으로 책봉되지 못해 아쉽다. 올해 대기업 입사시험에 인문학 소양을 갖춘 사람을 뽑기 위해 나온 문제가 떠오른다. 현대자동차 시험 문제 중'우리나라 위인 가운데 시대적 상황에 의해 역사적으로 저평가된 인물을 골라 서술하라'는 에세이 문제가 출제되었는데 단순히 암기만 하는 역사지식이 아닌 깊이 느껴보는 공부를 한 사람이어야 풀 수 있지 않았을까, 이배사 회원이라면 어렵지 않게 풀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걸장군유허비와 신도비를 보았다. 신도비는 묘소 입구에서 신이 지나가는 길에 세워두는 것, 유허비는 흔적이 남아있는 곳에 그 분의 일생을 담은 비를 세워둔다고 한다. 원래는 따로 있었는데 한 군데 모아두었다. ‘자헌대부병마절도사 정공걸 유허비’ 자헌대부는 정2품이라는 벼슬을 의미한다. 그 당시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하신 후 낙향하셨기 때문에 마지막 관직이름으로 유허비를 새겨놓았단다. ‘정걸 장군의 묘소는 시간관계상 가지 못했다. 정걸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안동사에 도착해 참배를 하였다. 건물 지붕이 이중으로 되어 있어 특이하다는 생각이 들어 여쭤보았더니 비오는 것을 막으려고 만든 오래되지 않은 것이라고 한다. 안동사에는 향교에서 모신 위패가 함께 있어 정걸장군만 모실 수 있는 사당을 건립하는 게 후손들의 희망사항이라고 한다. 정걸장군이 재조명되어 부각하기를 기대해본다.
사도진에 가면 화장실이 없어서 7월 7일 개장한 캠핑장으로 향했다. 지역 안내자가 있으니 참 편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창만 오토캠핑장은 밀물과 바다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서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느낌을 준단다. 저렴하며 맛좋은 음식, 휴가철에도 붐비지 않는 조용함, 잘 보존된 자연 등으로 전라도 여행을 즐기는 가족과 함께 이 캠핑장에 한 번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뱀이 개구리를 넘보는 섬이라 사도라 불렀다는 장소의 사도진으로 이동하였다. 사도진은 전라좌수영의 핵심 첨사진이었다. 이 지역에 사시는 향토사학자분의 말씀에 의하면 자신이 어릴 때는 순천만에서 사도로 들어올 때는 전부 배로 다녔다고 하셨다. 학교도 배로 다닐 정도였으니 사도는 고흥이 아니라 여수권의 생활권이었다고 강조하셨다. 우리가 서 있던 곳은 예전엔 바다였다고 하며, 지금은 매립한 지역이라고 한다. 이 마을의 가구수는 202호인데 농토가 많고 갯벌이 있어 수산자원이 많이 나는 동네라서 가구수가 줄지 않는다는 자랑을 은근슬쩍 하셨다. 100년 전에 화재로 소실되어 사도지역에 소장된 문헌이 모두 소실되고 없어, 성터 사진 등의 문헌은 규장각에서 발췌해서 사용하고 있다는 안타까움을 전하셨다.
마지막 답사지인 여도진은 여호마을이다. 고흥군에서는 주민의견을 수렴해서 내년에 여도마을로 개명할 계획을 갖고 있다고 하신다. 여호항을 끼고 있고 여기도 180가구 정도 되는데 부촌이다. 여도진은 외곽 전체가 성터라고 볼 수 있고, 가운데가 경작지다. 농기계가 못 올라가니까 조선시대 화전민들이 가꾼 경작지와 비슷하단다. 흙 반, 기와 반으로, 지금도 기와 파편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시간 관계상 기와파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경작지까지는 가보지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여도진에는 진성이 20~30% 정도가 그나마 온전하게 남아있으며, 여도진의 굴강은 그 위치가 현재 갯밭으로 사용 중이어서 정확한 형태는 찾아볼 수 없으나 그 흔적은 확인할 수 있단다. 갯벌 속에 있던 상당히 많은 양의 목재가 나와 목수 분들이 파서 배를 만들기도 했고, 또 개인이 가져가 소 여물통을 파기도 했다며 어릴 때 기억을 들려주시는 어촌계장님 덕분에 생생한 역사현장을 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70년대 초반 새마을 운동을 하면서 다 허물어졌다고 아쉬워하시는 모습을 보며 보존과 개발의 양면을 생각하게 된다.
여도진 비석군은 마을 공동화장실 입구에 있다는데 공동화장실을 찾기가 어려웠다. 지역민의 안내가 없었다면 찾아다니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입구에 있었던 비석을 현재의 위치로 이동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 7~8개의 비석이 서 있는 것을 보았는데 원형도 높이가 상당히 컸으며 지금은 동강이 난 상태로, 70년대 새마을 사업을 하며 훼손되었다고 한다. 역사적인 산 증거물들을 몰라서 많이 훼손시킨 부분이 지금 생각하면 아쉽기만 하다. 돌이라고 생긴 것은 다 가지고 와서 해안도로를 만들거나 방파제를 쌓는데 사용했다는데 이 비석은 “ 야~ 이게 뭔지 모르니까 놔 둬 보자.”라고 누군가가 말해 현재 상태로 남게 된 것이라고 한다. 어릴 때 기억으로 마을 입구 삼거리에 서 있는 비석군을 빨리 지나가며 “비석거리만 오면 귀신이 물러간다”하며 비석거리를 지나며 뛰어오던 기억이 남아있다고 하시는 말씀을 들으며 당시의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대대선창집에서 짱뚱어탕으로 저녁식사를 하였다. 순천의 특미라는데 짱뚱어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고 갈아서 추어탕처럼 만들어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쫓기듯 빡빡한 일정 덕분에 어느새 하루해가 졌고, 지식∙감사∙훈훈함을 안고 돌아왔다. 책상에 앉아 읽는 책도 도움이 많이 되지만, 현장에 가서 듣고 보는 것이 더 생생하고 팍팍 꽂힌다. 오늘 일정을 통해 정걸장군을 만났고, 4개진을 둘러보며 그 지역의 사람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하고, 전해 들었던 점이 좋았다. 답사만 졸졸 따라다녀도 횟수만 거듭하면 쉽게 많은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노력 대비 효과 만땅! 앞으로 시간만 허락한다면 이배사 회원님들과 함께 하고 싶다.
이 자리를 빌어 수고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꾸벅^^
많은 분들의 깊이 있는 글을 보며 배워나가는 중입니다.
함께 했던 시간들을 돌려볼 수 있었다니 저도 감사합니다.
잘봤습니다......수고하셨습니다......다음에 뵐 수 있기를....
네~ 다음에 뵐께요
깊은 내공의 깔끔한 필력, 알차고 탄탄한 문장력...뭐 또 없나요..
이 답사기 인쇄해서 두고 두고 써 묵을 랍니다.
도움이 된다면 저 또한 감사한 일이죠~~ㅎㅎ
더 이상의 칭찬은 없을것 같아서 ~ 잘보고 또 배우고 있습니다 ^.~ 진해현감님 짱 ~
감사합니다^^
@진해현감 진해현감님이 맞을까?
다른분 얼굴은 생략~~~
@뱀밭(種傑) 네! 넘 이쁘게 변신시켜주셨네요~
감사합니다^^
@진해현감 원래 이쁘셔
진해현감님 흥양현감 최희량은 고흥 출신이 아니고 나주 출신입니다.
오자를 바로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