劇作家 諱 祐鎭(극작가 휘 우진)
김우진(金祐鎭,1897-1926)는 일제강점기 연극인이며 극작가로 字(자)는 元剛(원강), 號(호)는 焦星(초성), 水山(수산)으로, 서기 1897년 丁酉(정유) 高宗(고종) 光武(광무) 元年(원년) 9월 19일, 중시조 三塘公(삼당공 吏曹參議 諱瑛) 後裔(후예), 承議郞公(승의랑공) 克派(극파)로, 玄祖(현조)는 學生公(학생공) 諱應洛(휘응락)이고, 高祖(고조)는 塘翁公(당옹공) 諱繼淳(휘계순)이며, 曾祖(증조)는 都正公(도정공) 寧陵參奉(영능참봉) 壽階通政(수계통정) 敦領府都正(돈령부도정) 諱木+奭根(휘석근)이니, 할아버지는 延豊公(연풍공) 通政大夫(통정대부) 延豊縣監(연풍현감) 諱炳昱(휘병욱)이요, 아버지는 巡察使公(순찰사공) 通政大夫(통정대부) 江原道(강원도) 巡察使(순찰사) 長城郡守(장성군수) 諱星圭(휘성규)의 3男(남) 5女(녀) 中(중) 長男(장남)으로 태어났다.7세 때 어머니를 잃고 福多(복다)한 가정 속에서 고독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公(공)을 남달리 사랑한 아버지는 엄격한 儒家的(유가적) 법도에 따라 가르쳤다.목포공립심상소학교 고등과 1년을 마친 뒤, 1915년 乙卯(을묘) 일본으로 건너가 가업을 이어 받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구마모토[龍本] 농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이듬해 잠시 귀국해 동래정씨 정점효와 혼인하였다. 일찍이 16세 때부터 단편〈공상문학〉을 썼던 공은 문학에의 꿈을 꺾을 수 없어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1919년 己未(기미)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들어가 희곡을 전공하였다. 이때 영국의 사회개혁 사상가 쇼(G. B. Shaw), 스웨덴의 표현주의 극작가 스트린드베리(J. A. Strindberg)의 희곡에 심취했고, 니체·마르크스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졸업논문은 쇼를 주제로 한〈인간과 초인〉이었다. 재학 중이던 1920년 조명희 · 유엽 · 홍해성 · 고한승 · 김영팔 등과 '극예술협회'를 조직했다. 1921년 辛酉(신유) '동우회순회연극단'을 만들어 국내에서 40여 일 동안 문화계몽운동을 벌였으며, 이때 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우에노[上野] 음악학원에서 성악을 공부하던 신여성 윤심덕을 만났다. 대학 졸업 후 가업을 이어 상성합명회사 사장이 되었으나, 아버지와 잦은 마찰을 일으켰다. 1926년 丙寅(병인) 8월 2일 마침내 가출, 일본에서 關釜(관부 = 시모노세끼와 부산) 연락선을 타고 돌아오던 중 情人(정인) 윤심덕과 함께 현해탄에 투신하였다. 그 때 공의 나이 哀壽(애수) 29세였다.配位(배위)는 河東鄭氏(하동정씨)로 서기 1899년 己亥(기해) 高宗(고종) 光武(광무) 3년 12월 27일에 태어나, 卒年(졸년)은 未詳(미상)이다. 아버지는 經學院(경학원) 講士(강사) 鳳鉉(봉현)이고, 祖(조)는 在華(재화)이며, 曾祖(증조)는 商烈(상열)이니, 外祖(외조)는 宋炳來(송병래)로 本(본)은 新平(신평)이다.膝下(슬하)에 1男(남) 1女(녀)를 두니, 1男(남)은 文學博士(문학박사) 서울大學敎授(대학교수) 芳漢(방한)이고, 1女(녀)는 辰浩(진호)로 光山人(광산인) 金祥俊(김상준)에게 出(출)하였다. 墓所(묘소)는 全羅南道(전라남도) 務安郡(무안군) 三鄕面(삼향면) 芝山里(지산리) 壹番山(일번산)[元大峙里(원대치리) 南馬係山(남마계산) 上峰(상봉)]에 있다. ※안동김씨대동보(갑자보)참조
情人(정인) 尹心悳(윤심덕)은 本貫(본관)은 坡平(파평), 號(호)는 水仙(수선)으로 公(공)과 같은 해인, 서기 1897년 丁酉(정유) 高宗(고종) 光武(광무) 元年(원년)에 平安南道(평안남도) 平壤(평양)에서 태어났다.
1918년 戊寅(무인)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하고 강원도 원주에서 1년 간 소학교 교원으로 근무했다. 그해 조선총독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성악과에 입학했으며, 1921년 辛酉(신유) 동우회에서 주최한 국내순회공연에 참여했다가 公(공)을 만나게 되었다. 1922년 壬戌(임술)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로 1년 간 근무한 뒤, 1923년 癸亥(계해) 귀국하였다. 경성사범부속학교 음악선생으로 있으면서 극예술협회 등의 연극공연에 출연해 풍부한 성량과 뛰어난 외모로 이름을 떨쳤고, 1925년 乙丑(을축) 公(공)의 권유로 토월회 무대에도 섰으나, 성악을 전공한 입장에서 연기력이 부족해 그만 두었다.
당시 성악만으로는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어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으며, 방송에 출연하거나 레코드를 취입하기도 하였다. 1926년 丙寅(병인) 여동생 성진의 미국유학길을 배웅하기 위해 일본에 갔다가 닛토[日東] 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하고는 귀국길에 公(공)을 만나 겐카이나다(玄海灘)에 몸을 던져 개화기에 신여성으로 한편에 비련의 사랑을 마무리하였다. 이는 신극운동 때의 유명한 연애사건으로, 박승희는 이들의 사랑을 주제로 한 〈사(死)의 승리〉를 토월회 재기공연 때 발표하기도 했다. 이바노비치 작곡인 〈도나우 강의 푸른 물결〉에 자신이 직접 노랫말을 쓴 〈사(死)의 찬미〉는 그녀가 죽고 난 뒤 더욱 유명해진 노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