變成(有, bhava) : 變身(헤쳐→모여)
→ 非夢似夢(非想非非想)
aññathābhāvī bhavasatto loko bhavamevābhinandati
세상은 이처럼 다른 상태로 되어가면서 존재[有]에 집착하고 오직 존재를 기뻐한다.
무명 혹은 갈애에 의해서 도미노 현상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가는 것을
苦集인 이른바 12緣起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경문에 의하면 '무엇(전자)이 있기 때문에 무엇(후자)이 있는가?'라는
예를 들어 '老死(후자)는 무엇(전자)이 있기 때문인가?'라는 질문이다.
그 답은 주지하듯이 무엇(전자)은 生이라는 말씀이다.
같은 방법으로 '生(후자)의 원인은 무엇(전자)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지면
그 답은 주지하듯이 무엇(전자)은 有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은 고리가 모두 나타나는 것이 이른바 12緣起이지, 즉
無明에 의해서 생겨난 법이 行등의 법인 것이지
無明에 의해서 行등의 법이 반드시 생겨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즉 老死의 원인이 되는 법은 生이고 生의 원인이 되는 법은 有이지만
有에 의해서 반드시 生이 생겨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는 有에 대한 의견이다.
有라고 흔히 번역하는 bhava는 아래 경문의 용례와 사전에 의하면
bhavati(hoti)의 명사형으로 쓰였다.
bhavati(hoti)는 karoti(to do, to make)처럼
쯔위(cvi, 起動) 동사라고 하고, 경문에 많은 용례들이 있다.
to be, 혹은 to become이라는 의미가 혼재된 단어인 것으로 보인다.
bhava(有, 變成)는 흔히들 '존재'라고 번역하는데
여기서는 to be(有)보다는 to become(變成)에 가까운 의미로 생각된다.
즉 bhava(to become)의 결과가 '존재(有)' 내지 生(jāti)이후의 법들로 이해한다.
문법용어로 bhavati(√bhū)의 과거수동분사형인 bhūta<MV>는 '과거시제'로 쓰이고
미래형인 bhavissantī는 '미래시제'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bhūtapubbaṃ
*온라인 자료
한자어 '존재'(存在)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들이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 동사 "존재한다"는 "있다"와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예컨대 "증거가 존재한다"는 문장은 "증거가 있다"라는 말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게 일반이다. 혹은 "존재한다"는 말은 단순히 "있다"는 말에 더하여 "현실에 실제로 있다"는 말과 비슷하다는 직관도 있는 것 같다. 더불어 명사 "존재"는 "사물", "있는 것", "대상" 등과 비슷한 의미로 쓰인다. 그런 면에서 우리말 "'없다'", "무(無)" 등과는 반의어 관계에 놓인다. 비슷한 뜻인 한자어 "有"가 매우 오래 전부터 쓰였고, 또 비슷한 뜻인 "存"과 "在" 한자 각각이 모두 오래 전부터 쓰인 것에 반하여, 두 글자가 합쳐진 "존재(存在)"는 근대에 서양 문물을 번역하면서 생겨난 말로 추정된다. 한자어 "존재(存在)"는 인도유럽어족에서 존재 동사 및 계사로 쓰이는 표현들, 예를 들어 영어의 그 유명한 Be-동사로부터 비롯된 어휘들, 대표 격인 "being"이나 "existence"에 대응한다. 즉 "being"과 "existence"[1] 모두 각각 쓰임새에 따라 "존재"로 번역되고는 한다. 다만 철학에선 다양한 전통 및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한국어 번역어가 쓰이기도 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실존주의 철학에서 "existence"를 ''실존"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게 대표된다. 비슷한 맥락에서 "현존" 같은 표현도 종종 쓰인다. 따라서 철학에서 "존재"라는 말이 등장할 땐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맥락을 세심히 살펴야 한다. |
“yasmiñca pana, bho gotama, samaye imañca kāyaṃ nikkhipati,
satto ca aññataraṃ kāyaṃ anupapanno hoti,
imassa pana bhavaṃ gotamo kiṃ upādānasmiṃ paññāpetī”ti?
고따마 존자시여, 그런데 중생이 이 몸을 내려놓고 아직 다른 몸을 받지 않았을 때는
어떤 것이 연료라고 고따마 존자께서는 천명하십니까?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무명·行·識·名色·六入·촉·수·애·취· 有 · 生 ·노·사 - cuti:[f.] shifting; passing away; vanishing.
生jāyati - 老jīyati - 死mīyati - 有cavati變成 - 生upapajjati
變身(헤쳐死→ 間 →生모여)
여기에 나타나는 bhavo는 生 이전의 법이다.
즉 태어나기 이전, 태어남의 원인이 되는 법을 말하고 있다.
만약 상좌부에서 주장하듯이 죽는 즉시 태어난다면 즉 死生 사이(間, antarā)가 없다면
cavati(cuti)라든지 antarāparinibbāyissa라는 말씀도 있을 수 없다.
變身(모여生→ 間 →死헤쳐)
하여튼 여기서는 生 이전의 법이지만 生死 사이(間, antarā)에서도
bhavo라는 표현을 쓸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것이 긍정적인 측면이면 이른바 修行(bhāvanā)이라고 해서, 태어나기는 욕계에 태어났지만
욕계의 법들을 (일시적이라도) 벗어나는 팔정도의 바른 修行(to become)을 하신 분들이라면
그 결과는 최소한 色界(禪, 正定) 초선이다.
이와 같이 [이 禪을 즐기고, 이것을 바라고, 이것으로 만족을 느낀다.
그는 여기에 굳게 서고 여기에 확신을 가지고 여기에 많이 머물고 이것으로부터 물러서지 않아서
죽은 뒤에]도 색계에 태어나겠지만 만약 완전히 벗어났다면 욕계 세상에 살고 있지만
색계에 태어난 중생들과 다르지 않은 마음상태로 생활하시는 분들로 생각된다.
즉 죽고 나서 to become도 있겠지만 그것은 이미 현생에서 to become이 되시는 분들이다.
이와 같은 분들이 5하분결을 해결하신 불환자이시다.
혹자는 바른 삼매(팔정도의 마지막 지분)도 禪에 대한 갈애이고 취착이라고 폄하하는데
욕계 보다 수승한 색계(선)에 대한 갈애와 취착이 없다면 팔정도를 수행할 수가 없다.
반드시 필요한 것이 禪에 대한 갈애이고 취착이다. 그 결과는 取에 의한 有이다.
물론 삼계를 모두 벗어나려면 이러한 갈애와 취착(5상분결)도 해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때 이분들은 '된(becomed)' 분들이고 '尊者(bhavaṃ)'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어른들이시다.
“yāvakīvañca, bhikkhave, bhikkhū uppannāya taṇhāya ponobhavikāya na vasaṃ gacchissanti;
vuddhiyeva, bhikkhave, bhikkhūnaṃ pāṭikaṅkhā, no parihāni.
비구들이여, 비구들이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갈애가 생겼더라도 그것의 지배를 받지 않는 한,
비구들은 퇴보하는 일은 없고 오직 향상이 기대된다.
“avijjānīvaraṇānaṃ kho, āvuso,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tatratatrābhinandanā —
evaṃ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ī”ti.
“yāyaṃ, āvuso visākha, taṇhā ponobbhavikā nandī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ṃ —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ayaṃ kho, āvuso visākha, sakkāyasamudayo vutto bhagavatā”ti.
有결박(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生결박(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아래 [有결박-生결박]이 나타나는 경문을 참고하라.
生결박은 해결했지만 有결박을 해결하지 못하여
bhava상태에서 해탈한 성자를 中盤열반자라고 하고
전생의 욕계 기준으로는 불환자(욕계로는 돌아오지 않을 분)로 분류한다.
[antarāparinibbāyissa. Imassa kho, bhikkhave,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no ce diṭṭheva dhamme paṭikacca aññaṃ ārādheti, no ce maraṇakāle aññaṃ ārādheti,
no ce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antarāparinibbāyī hoti,
no ce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upahaccaparinibbāyī hoti,
no ce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no ce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sasaṅkhāraparinibbāyī hoti,
atha pañcannaṃ orambhāgiyānaṃ saṃyojanānaṃ parikkhayā uddhaṃsoto hoti akaniṭṭhagāmī.
(7) 만일 지금 · 여기에서 구경의 지혜를 성취하지 못하고,
죽을 때에도 구경의 지혜를 성취하지 못하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지 못하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수명의] 반이 지나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지 못하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노력 없이 쉽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지 못하고,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노력하여 어렵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지 못하면,
그는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를 완전히 없애고
더 높은 세계로 재생하여 색구경천에 이르는 자가 된다. 191)
191) 이러한 다섯 유형의 불환자에 대한 주석서적인 설명은 이미 『인시설론』(Pug.16~17)에 나타나고 있으며, 『인시설론 주석서』 (PugA.198~201)에서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보디 스님은 이 다섯 유형의 불환자를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① 더 높은 세계에 화현하여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antarā-parinibbāyī)를 중유(中有, antara-bhava)의 단계에서 반열반에 드는 것으로, ② 수명의 반이 지나서, 때로는 죽음이 임박해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upahacca-parinibbāyī)를 내생에 닿자마자(upahacca) 즉 다음 생에 태어나자마자 반열반에 드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는 북방의 몇몇 부파들의 견해를 들고 있다. 『앙굿따라 니까야』「불환자가 태어날 곳 경」(A7:52/iv.70~74)과 「족쇄 경」(A4:131/i1.134)도 이 견해를 뒷받침할 수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족쇄 경」의 “태어남을 얻게 하는 족쇄들은 제거하였지만 [재생으로서의] 존재를 얻게 하는 [조건의] 족쇄들은 제거하지 못했다(uppattipaṭilābhik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honti. bhavapaṭilābhikāni appahīnāni honti).”는 구절을 들 수 있다.(보디 스님, 1902~1903쪽 65번 주해 참조) 더 자세한 논의는 Harvey, The Selfless Mind, pp.98~108을 참조할 것.
다섯 가지 기능을 완전하게 하고 완성하기 때문에 아라한이 된다.
이보다 더 약하면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수명의] 반이 지나서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노력 없이 쉽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노력하여 어렵게 완전한 열반에 드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더 높은 세계로 재생하여 색구경천에 이르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일래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한 번만 싹 트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성스러운 가문에서 성스러운 가문으로 가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최대로 일곱 번만 다시 태어나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법을 따르는 자가 되고, 이보다 더 약하면 믿음을 따르는 자가 된다.
bhava : 'becoming','process of existence',consists of 3 planes:
sensuous existence (kāma-bhava),fine-material existence (rūpa-bhava),
immaterial existence (arūpa-bhava)
The 2-fold division,kamma and upapatti ,is probably found for the first time in Vibh.
of the Abh.Canon,but it expresses throughout the genuine teaching of the suttas.
:m.[〃<bhū] 有,存在,生存,繁栄,幸福./ 令你變成,令你存在
bhavati:[bhu + a] becomes; to be; exists.
bhāva [fr.bhū] being,becoming,condition,nature; very rarely by itself
bhāvanā :mental development
“seyyathāpi, bhikkhave, appamattakopi gūtho duggandho hoti;
evamevaṃ kho ahaṃ, bhikkhave, appamattakampi bhavaṃ na vaṇṇemi,
antamaso accharāsaṅghātamattampi”.
비구들이여, 아무리 적은 양의 똥일지라도 그것은 악취를 풍긴다.
나는 아무리 짧은 기간일지라도 존재[有, bhava]로 태어나는 것을 칭송하지 않나니,176)
하다못해 손가락을 튀기는 기간만큼이라도 [존재로 태어나는 것을] 칭송하지 않는다.”177)
176) 원문은 appamattakampi bhavaṃ na vaṇṇemi(조금이라도 존재를 칭송하지 않는다.)인데 주석서에서 “짧은 기간(kāla)일지라도 존재에 재생 연결하는 것(paṭisandhi)을 칭송하지 않는다.”(AA.ii.34)로 해석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177) 아무리 짧은 기간일지라도 존재한다는 것은 괴로움이다. 마치 아무리 적은 양의 똥이라도 악취가 나듯이. 그러니 결코 존재하지 말라는 부처님의 간곡한 말씀이다. 당신의 외아들 라훌라를 출가시키면서 간곡하게 하신 말씀,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말라”(Sn.339)와 일맥상통한다. 존재하지 말라. 아니 존재를 칭송하지 말라. 부처님은 단 한순간이라도 존재를 칭송하지 않노라고 단언하시지 않는가!
bhūtā bhūtassa upapatti hoti; yaṃ karoti tena upapajjati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bhūtamidanti, bhante,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i.
bhūtamid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bhūtass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panno hoti.
“세존이시여, [비구는]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봅니다.
'이것은 되어있는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
되어있는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습니다.
tadāhārasambhav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i.
tadāhārasambhavanti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disvā
āhārasambhavassa 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panno hoti.
그것은 음식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바른 통찰지로 봅니다.
그것은 음식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본 뒤
음식에서 생겨난 것에 대해서 염오하고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위해서 도를 닦습니다.
cattārome, āvuso, āhārā bhūtānaṃ vā sattānaṃ ṭhitiyā, sambhavesīnaṃ vā anuggahāya.
katame cattāro?
kabaḷīkāro āhāro oḷāriko vā sukhumo vā, phasso dutiyo,
manosañcetanā tatiyā, viññāṇaṃ catutthaṃ.
도반들이여, 네 가지 음식이 있으니, [*食=取]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중생들을 부양하고 [* 生死간의 業有 → ↙能招未來有 ]
존재하게 될 중생들을 도와줍니다. ....... [* 死生간의 生有 → ↖ tasmiṃ bhūte ]
무엇이 넷입니까?
거칠거나 미세한 덩어리진 [먹는] 음식이 [첫 번째요], 감각접촉[觸]이 두 번째요,
마음의 의도가 세 번째요, 알음알이가 네 번째입니다.
taṇhāsamudayā āhārasamudayo, taṇhānirodhā āhāranirodho,
ayameva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āhāranirodhagāminī paṭipadā,
viññāṇāhāro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paccayo,
識食 · 能招未來有 · 令相續生 ·
tasmiṃ bhūte sati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有有故 有六入處 · 六入處緣觸
有有 bhavo hoti ?
kittāvatā nu kho, bhante, bhavo hotī”ti?
세존이시여, 도대체 어떻게 존재가 있게 됩니까?
“kāmadhātuvepakkañca, ānanda, kammaṃ nābhavissa, api nu kho kāmabhav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아난다여, 욕계의 과보를 가져오는 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욕계의 존재를 천명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iti kho, ānanda, kammaṃ khettaṃ, viññāṇaṃ bījaṃ, taṇhā sneho .
“아난다여,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알음알이는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avijjānīvaraṇānaṃ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hīnāya dhātuyā viññāṇaṃ patiṭṭhitaṃ
evaṃ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i.
중생들은 무명의 장애로 덮이고 갈애의 족쇄에 계박되어 저열한 [욕]계에 알음알이를 확립한다.528)
이와 같이 내생에 다시 존재[再有]529) 하게 된다. 아난다여, 이런 것이 존재이다.
“iti kho, ānanda, kammaṃ khettaṃ, viññāṇaṃ bījaṃ, taṇhā sneho.
avijjānīvaraṇānaṃ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majjhimāya dhātuyā cetanā patiṭṭhitā patthanā patiṭṭhitā
evaṃ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i”.
아난다여, 이처럼 업은 들판이고 알음알이는 씨앗이고 갈애는 수분이다.
중생들은 무명의 장애로 덮이고 갈애의 족쇄에 계박되어 중간의 [색]계에
의도를 확립하고 소망을 확립한다. 이와 같이 내생에 다시 존재하게 된다.
*識住(patiṭṭhā viññāṇassa)
ārammaṇe sati patiṭṭhā viññāṇassa hoti.
tasmiṃ patiṭṭhite viññāṇe virūḷhe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hoti.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yā sati
āyatiṃ jāti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조건264)이 있을 때 알음알이가 확립된다.
알음알이가 확립되고 증장하면265)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정신 · 물질)266)이 있게 된다.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이 있게 되면
내생의 <*jāti>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yañca, bhikkhave, ceteti yañca pakappeti yañca anuseti ārammaṇametaṃ hoti viññāṇassa ṭhitiyā.
ārammaṇe sati patiṭṭhā viññāṇassa hoti.
tasmiṃ patiṭṭhite viññāṇe virūḷhe nati hoti.
natiyā sati āgatigati hoti. āgatigatiyā sati cutūpapāto hoti.
cutūpapāte sati āyatiṃ jāti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3. “비구들이여, [67] 어떤 것을 의도하고 어떤 것을 계속해서 사유하고
어떤 것에 대해서 잠재성향을 가지면 그것은 알음알이가 머무는 조건이 된다.
조건이 있을 때 알음알이가 확립된다.
알음알이가 확립되고 증대하면 [마음의] 경도(傾倒)273)이 있고,
[마음의 경도됨]이 있으면 [업의 표상 등이] 나타남에 의한 [알음알이의] 오고감이 있고, 274)
[업의 표상 등이] 나타남에 의한 [알음알이의] 오고감이 있으면 죽고다시 태어남이 있고, 275)
죽고 다시 태어남이 있으면 내생의 태어남과
늙음 · 죽음과 근심 · 탄식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이 발생한다.
이와 같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苦蘊]가 발생한다.”
“kabaḷīkāre ce, bhikkhave, āhāre atthi rāgo atthi nandī atthi taṇhā,
patiṭṭhitaṃ tattha viññāṇaṃ virūḷhaṃ.
4. “비구들이여, 만일 덩어리진 [먹는] 음식에 대한 탐욕이 있고 즐김이 있고 갈애가 있으면
거기서 알음알이가 확립되고 증대한다.357)
yattha patiṭṭhitaṃ viññāṇaṃ virūḷhaṃ, atthi tattha nāmarūpassa avakkanti.
알음알이가 확립되고 증대하는 곳에358) 정신 · 물질이 출현한다.
yattha atthi nāmarūpassa avakkanti, atthi tattha saṅkhārānaṃ vuddhi.
정신 · 물질이 출현하는 곳에 의도적 행위들이 증장한다. 359)
yattha atthi saṅkhārānaṃ vuddhi, atthi tattha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의도적 행위들이 증장하는 곳에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정신 · 물질)360)이 있다.
yattha atthi āyatiṃ punabbhavābhinibbatti, atthi tattha āyatiṃ jātijarāmaraṇaṃ.
내생에 다시 태어남의 발생이 있는 곳에 내생의 태어남과 늙음 · 죽음이 있다.
yattha atthi āyatiṃ jātijarāmaraṇaṃ, sasokaṃ taṃ, bhikkhave, sadaraṃ saupāyāsanti vadāmi.
내생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이 있는 곳에 근심과 고뇌와 절망이 있다고 나는 말한다.
iti kho, bhikkhave, lobho kammanidānasambhavo, doso kammanidānasambhavo,
moho kammanidānasambhavo. lobhakkhayā kammanidānasaṅkhayo,
dosakkhayā kammanidānasaṅkhayo, mohakkhayā kammanidānasaṅkhayo”ti.
비구들이여, 이처럼 탐욕은 업을 일으키는 근원이며, 성냄도 업을 일으키는 근원이며,
어리석음도 업을 일으키는 근원이다.
탐욕이 다하면 업을 일으키는 근원이 다하고, 성냄이 다하면 업을 일으키는 근원이 다하고,
어리석음이 다하면 업을 일으키는 근원이 다한다.
1. “비구들이여, 일곱 가지 족쇄가 있다. 무엇이 일곱인가?”291)
291) 일반적으로 족쇄는 열 가지 족쇄로 정리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본경에는 이처럼 일곱 가지로 정리되어 나타나고 있으며, 『디가 니까야』제3권 「합송경」(D33) §2.3 (13)에도 일곱 가지 족쇄로 나타난다. 열 가지 족쇄는 본서 제2권 「족쇄 경」(A4:131) $1의 주해와 『아비담마 길라잡이』 7장 $$10~11을 참조할 것.
kāmabhavo, rūpabhavo, arūpabhavo — ime tayo bhavā pahātabbā.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 imā tisso taṇhā pahātabbā.
anunayasaṃyojanaṃ, paṭighasaṃyojanaṃ, diṭṭhisaṃyojanaṃ, vicikicchāsaṃyojanaṃ,
mānasaṃyojanaṃ, bhavarāgasaṃyojanaṃ, avijjāsaṃyojanaṃ.
imāni kho, bhikkhave, satta saṃyojanānī”ti.
2. “동의의 족쇄,292) 적의의 족쇄, 견해의 족쇄, 의심의 족쇄, 자만의 족쇄,
존재에 대한 탐욕의 족쇄, 무명의 족쇄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일곱 가지 족쇄가 있다.”
292) “'동의의 족쇄(anunaya-saṃyojana)'란 감각적 욕망의 족쇄(kāmarāga-saṃyojana)다. 이들은 묶는다(bandhana)는 뜻에서 족쇄라 한다고 알아야 한다." (AA.iv.2)
kāmarāgānusayo, paṭighānusayo, diṭṭhānusayo, vicikicchānusayo, mānānusayo,
bhavarāgānusayo, avijjānusayo. ime kho, bhikkhave, satta anusayā”ti.
kāmāsavāpi cittaṃ vimuccati, bhavāsavāpi cittaṃ vimuccati, avijjāsavāpi cittaṃ vimuccati
evaṃ vutte aññataro bhikkhu there bhikkhū etadavoca —
“nāmaṃ kho, āvuso, eko anto, rūpaṃ dutiyo anto, viññāṇaṃ majjhe, taṇhā sibbinī;
taṇhā hi naṃ sibbati tassa tasseva bhavassa abhinibbattiyā.
ettāvatā kho, āvuso, bhikkhu abhiññeyyaṃ abhijānāti, pariññeyyaṃ parijānāti,
abhiññeyyaṃ abhijānanto pariññeyyaṃ parijānanto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hotī”ti.
이렇게 말하자 또 다른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정신이 첫 번째 극단이고 물질이 두 번째 극단이며
알음알이[識]가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왜냐하면 갈애가 그것을 기워서 이런저런 존재로 태어나게 합니다.
도반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압니다.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알 때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
evaṃ vutte aññataro bhikkhu there bhikkhū etadavoca —
“cha kho, āvuso, ajjhattikāni āyatanāni eko anto, cha bāhirāni āyatanāni dutiyo anto,
viññāṇaṃ majjhe, taṇhā sibbinī;
taṇhā hi naṃ sibbati tassa tasseva bhavassa abhinibbattiyā.
ettāvatā kho āvuso, bhikkhu abhiññeyyaṃ abhijānāti, pariññeyyaṃ parijānāti,
abhiññeyyaṃ abhijānanto pariññeyyaṃ parijānanto diṭṭheva dhamme dukkhassantakaro hotī”ti.
이렇게 말하자 또 다른 비구가 장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도반들이여,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內入處]가 첫 번째 극단이고,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外入處]가 두 번째 극단이며
알음알이[識]가 중간이고 갈애가 바느질하는 여인입니다.
왜냐하면 갈애가 그것을 기워서 이런저런 존재로 태어나게 합니다.
도반들이여, 비구는 이렇게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압니다.
최상의 지혜로 알아야 할 것을 최상의 지혜로 알고 철저하게 알아야 할 것을 철저하게 알 때
지금여기에서 괴로움을 끝내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태어남도 없고 늙음도 없고 죽음도 없고 떨어짐도 없고 생겨남도 없는
그런 세상의 끝을 발로 걸어가서 알고 보고 도달할 수가 있습니까?
‘‘yattha nu kho, bhante, na jāyati na jīyati na mīyati na cavati na upapajjati,
sakkā nu kho so, bhante, gamanena lokassa anto ñātuṃ vā daṭṭhuṃ vā pāpuṇituṃ vā’’ti?
‘‘Yattha kho, āvuso, na jāyati na jīyati na mīyati na cavati na upapajjati,
nāhaṃ taṃ gamanena lokassa antaṃ ñāteyyaṃ daṭṭheyyaṃ patteyyanti vadāmī’’ti.
"세존이시여, 참으로 태어나지 않고, 늙지 않고, 죽지 않고, 괴멸하지 않고, 생성되지 않는
그 세계의 끝을 걸어서 알 수 있고, 볼 수 있고, 도달할 수 있습니까?"
upādānapaccayā bhavo, bhavapaccayā jāti,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sambhavanti,
무명·行·識·名色·六入·촉·수·애·취· 有 · 生 ·노·사 - cuti:[f.] shifting; passing away; vanishing.
生jāyati - 老jīyati - 死mīyati - 有cavati變成 - 生upapajjati
*有결박(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生결박(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katamassa, bhikkhave,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uddhaṃsotassa akaniṭṭhagāmino.
imassa kho, bhikkhave,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비구들이여, 더 높은 세계로 재생하여 색구경천에 이르는 사람은
낮은 단계의 족쇄들은 제거하였지만 태어남을 얻게 하는 족쇄들은 제거하지 못했고
[재생으로서의] 존재를 얻게 하는 [조건의] 족쇄들도 제거하지 못했다.”
“katamassa, bhikkhave,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antarāparinibbāyissa.
imassa kho, bhikkhave,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upapatti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bhavapaṭilābhiyāni saṃyojanāni appahīnāni.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사람은 낮은 단계의 족쇄들도 제거하였고
태어남을 얻게 하는 족쇄들도 제거하였지만
[재생으로서의] 존재를 얻게 하는 [조건의] 족쇄들은 제거하지 못했는가?
비구들이여, 수명의 중반쯤에 이르러 완전한 열반에 드는 사람은
낮은 단계의 족쇄들도 제거하였고 태어남을 얻게 하는 족쇄들도 제거하였지만
[재생으로서의] 존재를 얻게 하는 [조건의] 족쇄들은 제거하지 못했다.”
“dveme, bhikkhave, dhammā. katame dve? bhavadiṭṭhi ca vibhavadiṭṭhi ca.
ime kho, bhikkhave, dve dhammā”ti.
“비구들이여, 두 가지 법이 있다. 어떤 것이 둘인가?
존재에 대한 견해와 비존재에 대한 견해이다.299)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법이 있다.”
299) “'존재에 대한 견해(bhava-diṭṭhi)'와 '비존재에 대한 견해(vibhava-diṭṭhi)'는 각각 상견(常見, sassata-diṭṭhi)과 단견(斷見, uccheda-diṭṭhi)을 뜻한다.” (Ibid)
“katamo ca, bhikkhave, kāmānaṃ vipāko?
yaṃ kho, bhikkhave, kāmayamāno tajjaṃ tajjaṃ attabhāvaṃ abhinibbatteti
puññabhāgiyaṃ vā apuññabhāgiyaṃ vā, ayaṃ vuccati, bhikkhave, kāmānaṃ vipāko.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감각적 욕망의 과보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적 욕망이 있을 때는 늘 그것에 어울리는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을 만들게 된다.
그 존재가 공덕이 되건 악덕이 되건 말이다.204)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감각적 욕망의 과보라 한다.
bhavagga / attabhāva:[m.] personality; individuality.
parābhavati:[parā-bhū] 敗亡; 打勝
pātubhavati :[pātu + bhū + a] becomes manifest; appears.
paccanubhavati:[pati + anu + bhū + a] undergoes; experiences.
paribhavati also paribhoti to treat with contempt,to neglect,despise
bhavaṃ:m.[cf.bhavant.bhavati の ppr.nom.] 現存者は,勝存者は; 尊師は.cf.bho.
taṇhaṃ dukkhassa sambhavaṃ
manasikārasambhavā sabbe dhammā
sambhavati,sambhuṇāti & sambhoti [saṁ+bhavati] 1.to be produced,to arise
abhisambhavati:abhisambhoti [abhi-saṃ-bhū] 能(夠),(獲)得,到達
paccanubhavati:[pati + anu + bhū + a] undergoes; experiences.
♦ “yehi jātehi nandissaṃ, yesañca bhavamicchisaṃ.
♦ te maṃ dārehi saṃpuccha, sāva vārenti sūkaraṃ.
4. “나는 그들의 탄생을 기뻐하고
그들의 성공을 진심으로 원했건만
devo no bhavaṃ bhavissatī”ti?
존자께서는 신이 되실 것입니까?”
na ciraṃ tathāgatassa parinibbānaṃ bhavissati.
오래지 않아서 여래는 반열반에 들 것이다.
esāhaṃ bhavantaṃ gotamaṃ saraṇaṃ gacchāmi dhammañca bhikkhusaṅghañca .
upāsakaṃ maṃ bhavaṃ gotamo dhāretu ajjatagge pāṇupetaṃ saraṇaṃ gatan”ti.
저는 이제 고따마 존자께 귀의하옵고 법과 비구승가에 귀의합니다.
고따마 존자께서는 저를 재가신자로 받아주소서.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옵니다.
“yo ca kho so, bhikkhave, bhikkhu arahaṃ khīṇāsavo vusitavā brahmacariyo
katakaraṇīyo ohitabhāro anuppattasadattho parikkhīṇabhavasaṃyojano sammadaññā vimutto,
비구들이여, 한 비구가 있어 그는 아라한이고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했고403) 짐을 내려놓았으며404) 참된 이상405)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부수었으며,
바른 구경의 지혜로 해탈했다.
‘akuppā me vimutti , ayamantimā jāti, natthi dāni punabbhavo’
so tadassādeti taṃ nikāmeti tena ca vittiṃ āpajjati,
tatra ṭhito tadadhimutto tabbahulavihārī aparihīno kālaṃ kurumāno
ākiñcaññāyatanūpagānaṃ devānaṃ sahabyataṃ upapajjati.
ākiñcaññāyatanūpagānaṃ, bhikkhave, devānaṃ saṭṭhi kappasahassāni āyuppamāṇaṃ.
그는 이 禪을 즐기고, 이것을 바라고, 이것으로 만족을 느낀다.
그는 여기에 굳게 서고 여기에 확신을 가지고 여기에 많이 머물고 이것으로부터 물러서지 않아서
죽은 뒤에는 무소유처에 도달한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비구들이여, 무소유처에 태어난 신들의 수명의 한계는 6만 겁이다.
tattha puthujjano yāvatāyukaṃ ṭhatvā yāvatakaṃ tesaṃ devānaṃ āyuppamāṇaṃ
taṃ sabbaṃ khepetvā nirayampi gacchati tiracchānayonimpi gacchati pettivisayampi gacchati.
거기서 범부는 그 신들의 수명의 한계만큼 거기 머물다가
그 수명이 모두 다하면 지옥에도 가고 축생의 모태에도 가고 아귀계에도 간다.
bhagavato pana sāvako tattha yāvatāyukaṃ ṭhatvā yāvatakaṃ tesaṃ devānaṃ āyuppamāṇaṃ
taṃ sabbaṃ khepetvā tasmiṃyeva bhave parinibbāyati.
그러나 세존의 제자는 그 신들의 수명의 한계만큼 거기 머물다가
그 수명이 모두 다하면 바로 그 [무색계의] 존재에서 반열반에 든다.
‘‘Idha pana, sāriputta, ekaccassa puggalass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honti,
so diṭṭheva dhamme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upasampajja viharati.
“사리뿟따여, 여기 어떤 사람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들을 버리고
지금 여기에서 비상비비상처를 증득하여 머문다.
So tadassādeti, taṃ nikāmeti, tena ca vittiṃ āpajjati;
tattha ṭhito tadadhimutto tabbahulavihārī aparihīno kālaṃ kurumān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ūpagānaṃ devānaṃ sahabyataṃ upapajjati.
그는 이 선[禪]을 즐기고, 이것을 바라고, 이것에 만족을 느낀다.
그는 여기에 굳게 서고 여기에 확신을 가지고 여기에 많이 머물고
이것으로부터 물러서지 않아서 죽은 뒤에 비상비비상처의 신들의 동료로 태어난다.
So tato cuto anāgāmī hoti anāgantā itthattaṃ.
그는 거기서 죽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자(불환자)가 되어
이러한 상태로 되돌아오지 않는 자가 된다."
atītaṃ vā, bhikkhave, addhānaṃ ārabbha kathaṃ katheyya —
‘evaṃ ahosi atītamaddhānan’ti.
anāgataṃ vā, bhikkhave, addhānaṃ ārabbha kathaṃ katheyya —
‘evaṃ bhavissati anāgatamaddhānan’ti.
etarahi vā, bhikkhave, paccuppannaṃ addhānaṃ ārabbha kathaṃ katheyya —
‘evaṃ hoti etarahi paccuppannamaddhānan’”ti .
비구들이여, '과거에 이런 것이 있었다.'라고 과거에 관하여 대화를 한다.
비구들이여, '미래에 이런 것이 있을 것이다.'라고 미래에 관하여 대화를 한다.
비구들이여, '현재에 이런 것이 있다.'라고 현재에 관하여 대화를 한다.”
ucchinnā bhavataṇhā, khīṇā bhavanetti, natthi dāni punabbhavo”ti.
존재에 대한 갈애는 잘라졌고,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12)은 부수어졌으며,
다시 태어남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2) “갈에의 동의어이다. 이것으로 중생을 마치 소처럼 목덜미를 잡아서 각각의 존재로 인도하기 때문에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bhava-netti)이라 한다.”(AA.iii.2)
“katamo ca, bhikkhave, kāmānaṃ vipāko?
yaṃ kho, bhikkhave, kāmayamāno tajjaṃ tajjaṃ attabhāvaṃ abhinibbatteti
puññabhāgiyaṃ vā apuññabhāgiyaṃ vā, ayaṃ vuccati, bhikkhave, kāmānaṃ vipāko.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감각적 욕망의 과보인가?
비구들이여, 감각적 욕망이 있을 때는 늘 그것에 어울리는 [불변하는]
자기 존재가 있음을 만들게 된다.
그 존재가 공덕이 되건 악덕이 되건 말이다.204)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감각적 욕망의 과보라 한다.
abhabbo diṭṭhisampanno puggalo aṭṭhamaṃ bhavaṃ nibbattetuṃ.
견해를 구족한 사람이 [욕계에] 여덟 번째 존재246)를 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tulamatulañca sambhavaṃ, bhavasaṅkhāramavassaji muni.
ajjhattarato samāhito, abhindi kavacamivattasambhavan”ti.
“성자는 제한적인 것과 무량한 것
태어남의 원인과 존재의 상카라[行]를 포기했노라.205)
안으로 기쁘고 삼매에 들어206)
외투를 벗듯이 자신의 안에서 생긴
[오염원을]207) 벗어버렸노라.”
205) '성자는 제한적인 것과 무량한 것 / 태어남의 원인과 존재의 상카라를 포기했노라.'로 옮긴 원문은 tulam atulañca sambhavaṃ, bhava-saṅkhāram avassaji muni이다.
주석서는 여기서 '제한적인 것'으로 옮긴 tula란 욕계의 업을 말하고 '무량한 것'으로 옮긴 atula란 고귀한(즉, 색계와 무색계) 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혹은 욕계와 색계의 업이 제한적인 것이고, 무색계의 업이 무량한 것이다. 혹은 과보가 적은 것이 제한적인 것이고, 과보가 큰 것이 무량한 것이다. '태어남의 원인'으로 옮긴 sambhava는 태어남을 가져오는 원인(sambhava-hetu-bhūta)이라고 설명한다.(AA.iv.153~154)
'존재의 상카라(bhava-saṅkhāra)'란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는 상카라(bhava-abhisaṅkharaṇa)를 뜻한다. 즉 과보를 가졌다는 뜻에서 태어남의 원인(sambhava)이라는 이름을 얻고, 존재로서의 업형성력이라는 뜻에서 존재의 상카라라고 이름을 얻은 '제한적인 것과 무량한 것'이라고 불리는 세간적인 업을 내려놓았다는 뜻이다. 마치 전쟁에서 무사가 갑옷을 버리듯이 자신의 안에서 일어난 오염원도 기뻐하면서 침착하게 버린다는 뜻이다.(Ibid)
아울러 주석서는 다시 양자택일의 설명을 더하고 있다. tula란 견주어보다, 조사하다의 뜻으로 현재분사이고, atulañca sambhavam은 열반과 태어남을 뜻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설명한다.(Ibid)
'존재의 상카라를 포기했다(bhava-saṅkhāram avassaji)'는 것은 '다섯 가지 무더기들[五蘊]은 무상하지만 이런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소멸인 열반은 항상하다.'라는 등으로 재어보면서 부처님께서는 존재에서 위험과 열반에서 이익을 보신 뒤, 무더기들의 근본이 되는 존재의 상카라인 업(bhava-saṅkhāra-kamma)을 '업을 소멸하는(kammakkhaya) 것이 있다.'(M59/i,389)라고 설하신 대로, 업을 소멸하는 성스러운 도를 통해서 포기하셨다고 한다.(AA.iv.153~154) 그러므로 이 구절은 ‘잴 수 없는 [열반과] 태어남을 견주어보고, 성자는 존재의 상카라를 포기했노라.'라고 옮길 수도 있다.
206) '안으로 기쁘다.'는 것에 대해서 주석서는 자기 자신이 기쁘다는 뜻이라고 설명하고 있고,(AA.iv.153) 복주서는 “계속해서 일어나는 자기의 법들에 대해서 위빳사나를 하고 또 영역을 반복함으로써 기쁘다.”(AAȚ.iii.258)고 덧붙이고 있다.
“삼매에 든다는 것은 근접삼매와 본삼매에 든다는 뜻이다.” (AA.iv.153)
207) “'자신의 안에서 생긴 것(atta-sambhava)'이란 자신에게서 생긴 오염원(kilesa)을 말한다.”(Ibid)
“bhavataṇhāmpāhaṃ, bhikkhave, sāhāraṃ vadāmi, no anāhāraṃ.
ko cāhāro bhavataṇhāya? ‘avijjā’tissa vacanīyaṃ.
비구들이여, 존재에 대한 갈애는 자양분을 가지고 있지, 자양분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무엇이 존재에 대한 갈애의 자양분인가? 무명이 그 대답이다.
“‘jātipaccayā jarāmaraṇan’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jātipaccayā jarāmaraṇaṃ.
jāti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
devānaṃ vā devattāya, gandhabbānaṃ vā gandhabbattāya, yakkhānaṃ vā yakkhattāya,
bhūtānaṃ vā bhūtattāya, manussānaṃ vā manussattāya, catuppadānaṃ vā catuppadattāya,
pakkhīnaṃ vā pakkhittāya, sarīsapānaṃ vā sarīsapattāya ,
tesaṃ tesañca hi, ānanda, sattānaṃ tadattāya jāti nābhavissa.
4.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生緣老死]고 말하였다.89)
아난다여,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신들이 신이 되고, 간답바90)들이 간답바가 되고, 약카91)들이 약카가 되고,
정령92)들이 정령이 되고, 인간들이 인간이 되고, 네발짐승들이 네발짐승이 되고, 새들이 새가 되고,
파충류들이 파충류가 되는 이런 태어남이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없다고 하자.
그러면 이런저런 중생들의 이런 태어남은 결코 없을 것이다.
89) 이상으로 9지 연기의 전체 골격을 드러내시고 이제 연기의 정형구 각각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전개하신다. 그래서 주석서도 “이제 그들 각각의 조건들이 참되고 거짓되지 않고 다르지 않게 조건짓는 상태(paccaya-bhāva)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태어님을 조건으로 늙음·죽음이 있다[生緣老死]'는 등을 말씀하신다.”라고 적고 있다.(DA.ii.498)
90) 간답바(gandhabba, Sk gandharva)는 중국에서 건달바(乾関婆)로 옮겨졌는데, 초기경에서 크게 두 문맥에서 나타난다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사대왕천(Cātummahārājika)에 있는 신들이다. 본서 「자나와사바 경」 (D18) §20에서 그들은 가장 낮은 영역의 신들이라고 불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간답바는 천상의 음악가로 불리는데(Jā.ii.249 등) 본서「제석문경」(D21) §1.2 이하에서도 빤짜식카 간답바가 벨루와빤두 루트를 켜면서 연주하고 노래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본서 제3권 「아따나띠야 경」(D32) §4에 의하면 간답바들은 사대왕천의 동쪽에 거주하며 다따랏타가 그들의 왕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향기(gandha)나는 곳에 사는 신들을 뜻한다. 『상응부』에서 부처님께서는 간답바의 신들(Gandhabbakayika devā)은 나무의 뿌리나 껍질이나 수액이나 꽃의 향기(gandha)에 거주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설하고 계신다.(S.ili.250.) 그래서 본경의 주석서에서도 “간답바는 뿌리의 무더기 등에 사는 신들” (DA.ii.498)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91) 약카(yakkha, Ske yakṣa)는 중국에서 야차(夜叉)로 한역되었다. 이 단어는 √yakṣ(to move quickly)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문자적으로는 ‘재빨리 움직이는 존재'를 뜻한다. 그러나 주석서에서는 √yaj(to sacrifice)에서 파생된 명사로 간주하여 “그에게 제사 지낸다. 그에게 제사음식을 가져간다고 해서 약카라 한다.”(VvA.224) 혹은 “예배를 받을 만한 자라고 해서 약카라 한다.”(VyA.333)라고 풀이하고 있다. 본서「빠야시 경」(D23) §23에서 보듯이 약카는 일반적으로 비인간(amanussa)으로 묘사되고 있다. 주석서에 의하면 그들은 아귀(peta)들보다 위로 묘사되고 있으며 선한 아귀들을 약카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PvA.45; 55) 그들은 많은 계통이 있는데 후대 문헌으로 올수록 우리말의 정령, 귀신, 요정, 유령, 도깨비 등 나쁜 비인간인 존재들을 모두 일컫는 말로 정착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힌두 문헌의 삐샤짜(piśāca, 도깨비, 악귀)와 거의 같은 존재를 나타낸다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약카는 힘이 아주 센 비인간을 뜻하는데 그래서 본서「암밧타경」(D3)에는 금강수 약카가 금강저를 손에 들고 부처님 곁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래서 신들의 왕인 삭까(Sakka, Indra)도 약카로 표현되기도 하며(M.i.252; Jā.iv.4; DA.i.264.) 게송에서는 부처님도 약카로 묘사하고 있기도 하다.(M. i. 386) 자이나교에서도 약카는 신성한 존재로 숭배되고 있는데 이러한 영향이 아닌가 한다.
한편 본서 제3권「아따나띠야 경」(D32) §7에 의하면 약카는 사대왕천의 북쪽에 거주하며 꾸웨라가 그들의 왕이라고 한다. 『마하바라따』(Mahābhārata) 등의 힌두 문헌에도 약카(Sk. Yakṣa)는 꾸웨라의 부하들로 묘사되고 있다.
92) '정령'으로 옮긴 원어는 bhūta이다. bhuta는 √bhū(to become)의 과거 분사로서 기본적인 의미는 '존재하는 것, 생긴 것'의 의미이다. 초기경에서 bhūta는 크게 세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첫 번째는 '존재하는 것 = 생긴 것, 있는 것 = 진실, 사실'의 의미로 쓰인다. 중국에서 여실지견(如實知見)으로 옮긴 단어 가운데 여실(있는 그대로)에 해당하는 것이 yathā-bhūtaṃ이다. 초기경에 아주 많이 나타나는 표현이다. 두 번째는 '존재하는 것 = 기본 요소 = 지·수·화·풍 = 근본물질'로 쓰였다. 이것은 사대(四大, 네 가지 근본물질, cattāri mahā-bhūtāni)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세 번째가 본문에서 처럼 ‘존재하는 것 = [살아있는] 존재'라는 뜻으로 쓰여 특히 유령 등 초자연적인 존재를 뜻하는 경우로도 많이 나타난다. 그래서 '정령'으로 옮겼다.
[유령 등 초자연적인 존재]
* bhūta: becomed ☞ 變身(헤쳐→모여)하여 질병을 일으키는 非人間(ex. 병원체)
아유르베다에서는 惡鬼로 취급을 했지만, 나중에 대승에서는 호법신으로도 받아들여졌다.
“‘bhavapaccayā jātī’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bhavapaccayā jāti.
bhavo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 kāmabhavo vā rūpabhavo vā arūpabhavo vā,
sabbaso bhave asati bhavanirodhā api nu kho jāti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jātiyā, yadidaṃ bhavo”.
5.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有緣生]고 말하였다.
아난다여,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알아야 한다.
아난다여, 만일 욕계의 존재, 색계의 존재, 무색계의 존재 - 이러한 존재가
어떤 것에 의해서도 어떤 식으로도 그 어디에도 그 누구에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자.
아난다여, 존재가 소멸해버려 존재가 어떤 식으로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데도
태어남을 천명할 수 있겠는가?”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난다여, 그러므로 이것이 바로 태어남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존재이다.”
“‘upādānapaccayā bhavo’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upādānapaccayā bhavo.
upādānañ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 kāmupādānaṃ vā diṭṭhupādānaṃ vā sīlabbatupādānaṃ vā attavādupādānaṃ vā,
sabbaso upādāne asati upādānanirodhā api nu kho bhavo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bhavassa,
yadidaṃ upādānaṃ”.
“‘taṇhaṃ paṭicca pariyesanā’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tadānanda,
imināpetaṃ pariyāyena veditabbaṃ, yathā taṇhaṃ paṭicca pariyesanā.
taṇhā ca hi, ānanda, nābhavissa sabbena sabbaṃ sabbathā sabbaṃ kassaci kimhici,
seyyathidaṃ —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sabbaso taṇhāya asati taṇhānirodhā api nu kho pariyesanā paññāyethā”ti? “no hetaṃ, bhante”.
“tasmātihānanda, eseva hetu etaṃ nidānaṃ esa samudayo esa paccayo pariyesanāya,
yadidaṃ taṇhā.
iti kho, ānanda, ime dve dhammā dvayena vedanāya ekasamosaraṇā bhavanti”.
idaṃ sutvā devā tāvatiṃsā ekaggā samāpajjiṃsu —
“obhāsametaṃ ñassāma, yaṃvipāko bhavissati, sacchikatvāva naṃ gamissāmā”ti.
이 말을 들은 뒤 삼십삼천의 신들은 모두
'우리는 이 광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알아야겠다.
그것이 눈앞에 가시화되면 그때 그에게 다가가야겠다.'라고
하나로 동의를 했습니다.[*ekaggā samāpajjiṃsu]
‘nandī dukkhassa mūlan’ti —
iti viditvā
‘bhavā jāti bhūtassa jarāmaraṇan’ti.
tasmātiha, bhikkhave, ‘tathāgato sabbaso taṇhānaṃ khayā virāgā nirodhā cāgā
paṭinissaggā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ti vadāmi.
그는 즐김이 괴로움의 뿌리라는 것을 알았으며,90)
존재로 인해 태어남[生]이 있고,91) 중생들의 늙음과 죽음이 있다고 알았기 때문이다.92)
비구들이여, 그러므로 여기 여래는 갈애들을 모두 끊고 빛바래게 하고 소멸하고
포기하고 놓아버려 위없는 정등각을 완전하게 깨달았다고 나는 말한다.”
90) “'즐김이 괴로움의 뿌리라는 것을 알았으며(nandī dukkhassa mūlan ti iti viditvā)'에서 '즐김(nandī)'이란 이전의 갈애들을 말한다. 즉 이전의 갈애들이 괴로움인 이 오온의 뿌리(mūla)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다.”(MA.i.52)
91) “'존재[有]로 인해 태어남[生]이 있고(bhavā jāti)'에서 '존재[有, bhava]'는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이고 '태어남[生, jāti]'은 과보로 나타난 오온(vipāka-kkhandhā)을 말한다.” (MA.i.52)
즉 여기서 존재는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 upapatti-bhava]가 아니라 업으로서의 존재[業有, kamma-bhava]를 말하며, 이러한 업으로 인해 그 과보인 오온이 생긴 것을 태어남[生]이라고 부른다는 말이다.
92) 이것은 12연기에서 유연생(有緣生)과 생연노사(生緣老死)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주석서에서 여기서 유를 업유(業有)로만 해석하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12연기의 유(존재)에는 업유(業有)와 생유(生有)가 다 적용되는 것으로 설명한다.(『상윳따 니까야』제2권 「분석 경」 (S12:2) §6의 주해 참조 업으로서의 존재[業有]와 재생으로서의 존재[生有]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청정도론』 XVII.250~251을 참조할 것.) 그러나 북방의『구사론』에서는 12연기의 유를 업유로만 보고 있다.(『초기불교 이해』250쪽, 권오민 역, 『아비달마 구사론』 454쪽 참조) 그런데 본 문단에 대한 주석서에서도 이것을 업유로만 보고 있어서 유념할 필요가 있다.
dhammadāyādā me, bhikkhave, bhavatha, mā āmisadāyādā.
비구들이여, 그대들은 내 법의 상속자가 되지 재물의 상속자가 되지 마라.
“yattha nāmañca rūpañca, asesaṃ uparujjhati.
taṃ te dhammaṃ idhaññāya, acchiduṃ bhavabandhanan”ti.
정신 · 물질 남김없이 소멸하는 곳
여기 [이 교법]에서 그 법을 알아
그들은 존재의 속박 잘랐습니다.
Imāni bhavaṅgāni yadā samaggāni nibbattāni bhavanti,
이 *變成[을 이루는] 부분<*變成/有-分: 바왕가>들이 합쳐져서 발생하는 것이 있을 때
so bhavo.
그것이 존재(有)<*變成>이다.
Taṃ saṃsārassa padaṭṭhānaṃ.
그 *變成은 윤회의 근접요인이다. <경전이해의 길 124~125쪽 참조>
“rūpassa tveva, bhikkhave, aniccataṃ viditvā vipariṇāmaṃ virāgaṃ nirodhaṃ ,
pubbe ceva rūpaṃ etarahi ca sabbaṃ rūpaṃ a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n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e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te pahīyanti.
tesaṃ pahānā na paritassati, aparitassaṃ sukhaṃ viharati,
sukhavihārī bhikkhu ‘tadaṅganibbuto’ti vuccati.
5. “비구들이여, 그러나 물질의 무상함과 변화와 빛바램과 소멸을 체득하여
이전의 물질과 지금의 물질, 그 모든 물질은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들은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을 모두 버린다.
이런 것들을 버리면 갈증 내지 않는다.122)
갈증 내지 않으면 행복하게 머문다.
행복하게 머무는 비구를 [위빳사나의] 측면에서 [삼독의 불이] 꺼졌다고 한다. 123)
122) '갈증 내지 않는다(na paritassati).'에 대해서는 위의 「취착에 의한 초조함경」1(S22:7) §4의 주해와 본서 제2권 「철저한 검증 경」(S12:51) §9의 주해를 참조할 것.
123) '[위빳사나의] 측면에서 [삼독의 불이] 꺼졌다고 한다.'는 tadaṅga-nibbuto를 풀어서 옮긴 것이다. '꺼진'으로 옮긴 nibbuta는 nis+√vā(to blow) 혹은 nis+√vṛ(to cover)에서 파생된 과거분사인데 초기불전에서는 열반을 증득한 자를 표현하는 단어로 쓰인다. tad-aṅga-는 '그 측면'으로 직역할 수 있는데 아래 주석서의 설명을 참조하면 여기서는 위빳사나의 측면에서 열반을 증득한 자라는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물론 모든 면에서 완전한 열반을 증득한 것이 아니라 어떤 한 측면을 통해서만 그것에 근접하는 경지를 얻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전체는 '어떤 측면에서 열반을 얻은 자'로 해석할 수 있다. 주석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 위빳사나의 측면에서(vipassan-aṅgena) 오염원들이 꺼졌기 때문에(kilesānaṃ nibbutattā) tadaṅga-nibbuta라 한다. 본경에서는 위빳사나 만을 설하셨다.”(SA.ii.268)
다시 말하면 오온의 통찰을 통해서 삼독의 불이 꺼지게 되는 이런 수행은 위빳사나에만 적용되지 삼매나 사마타를 통한 증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청정도론』에서 말하는 마른 위빳사나를 닦은 자나 순수 위빳사나를 닦은 자(suddha-vipassaka, 『청정도론』 XVIII.8)와 관계가 있다. 본서 제2권 「수시마 경」(S12:70) §14의 주해를 참조할 것.
tadaṅganibbuto: 그 지分이 解消 - 그 有分(바왕가, bhava-aṅga) = 色 지分 아래 受-想-行-識 지分 |
vedanāya tveva, bhikkhave, aniccataṃ viditvā vipariṇāmaṃ virāgaṃ nirodhaṃ,
pubbe ceva vedanā etarahi ca sabbā vedanā aniccā dukkhā vipariṇāmadhamm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e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te pahīyanti.
tesaṃ pahānā na paritassati, aparitassaṃ sukhaṃ viharati,
sukhavihārī bhikkhu ‘tadaṅganibbuto’ti vuccati.
saññāya...
saṅkhārānaṃ tveva, bhikkhave, aniccataṃ viditvā vipariṇāmaṃ virāgaṃ nirodhaṃ,
pubbe ceva saṅkhārā etarahi ca sabbe saṅkhārā aniccā dukkhā vipariṇāmadhammā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e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te pahīyanti.
tesaṃ pahānā na paritassati, aparitassaṃ sukhaṃ viharati,
sukhavihārī bhikkhu ‘tadaṅganibbuto’ti vuccati.
viññāṇassa tveva, bhikkhave, aniccataṃ viditvā vipariṇāmaṃ virāgaṃ nirodhaṃ,
pubbe ceva viññāṇaṃ etarahi ca sabbaṃ viññāṇaṃ aniccaṃ dukkhaṃ vipariṇāmadhammanti,
evametaṃ yathābhūtaṃ sammappaññāya passato
ye 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 te pahīyanti.
tesaṃ pahānā na paritassati, aparitassaṃ sukhaṃ viharati,
sukhavihārī bhikkhu ‘tadaṅganibbuto’ti vuccatī”ti.
비구들이여, 느낌의 … 인식의 … 심리현상들의 …
알음알이의 무상함과 변화와 빛바램과 소멸을 체득하여
'이전의 알음알이와 지금의 알음알이, 그 모든 알음알이는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변하기 마련인 법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른 통찰지로 보는 자들은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을 모두 버린다.
이런 것들을 버리면 갈증 내지 않는다.
갈증 내지 않으면 행복하게 머문다.
행복하게 머무는 비구를 [위빳사나의] 측면에서 [삼독의 불이] 꺼졌다고 한다.”
atthāvuso, nevasaññānāsaññāyatanūpagā devā, idaṃ bhavānaṃ aggan”ti.
도반이여, 비상비비상처에 태어난 신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존재 가운데 으뜸입니다.
“sameti kho idaṃ āyasmato bhaddajissa, yadidaṃ bahunā janenā”ti?
밧다지 존자가 [으뜸이라고] 동의한 것은 일반 대중들이 이야기 하는 방식일 뿐입니다.”
yathā bhūtassa anantarā āsavānaṃ khayo hoti, idaṃ bhavānaṃ aggan”ti.
도반이여, 존재할 때 바로 그에게 번뇌들이 다하는 그 존재가 존재 가운데 으뜸입니다.
upaga:[adj.] (in cpds.) going to; reaching; coming into; being at; producing.
“idha, bhikkhave, bhikkhu evaṃ paṭipanno hoti —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와 같이 도를 닦는다.
‘no cassa no ca me siyā, na bhavissati na me bhavissati, | *assa-bhavissati 있기 때문에(Opt.3단)-될(有/to become) 것. me siyā-me bhavissati 나에게/의 있기 때문에-나/의 될 것 |
yadatthi yaṃ bhūtaṃ taṃ pajahāmī’ti upekkhaṃ paṭilabhati.
'[과거에 지금의 존재를 태어나게 할 업이] 있지 않았다면
[지금] 나의 존재는 있지 않았을 것이고,
[지금 현재에 미래의 존재를 태어나게 할 업이] 없다면
[미래의] 나의 존재는 있지 않을 것이다.
<cf. 無我라면 斷滅한다고 주장하는 外道.
‘no cassaṃ, na bhavissāmi, no ca me siyā, na me bhavissatī’ ti.
evaṃdiṭṭhino, bhikkhave, etaṃ pāṭikaṅkhaṃ —
‘yā cāyaṃ bhave appaṭikulyatā, sā cassa na bhavissati;
yā cāyaṃ bhavanirodhe pāṭikulyatā, sā cassa na bhavissatī’ti.
이러한 견해를 가진 자에게는 이런 것이 예상되나니,
존재에 대해 혐오하지 않음도 그에게는 생기지 않을 것이고,
존재의 소멸에 대해 혐오함도 그에게는 생기지 않을 것이다. >
“idhānanda, bhikkhu evaṃ paṭipanno hoti —
‘no cassa, no ca me siyā;
na bhavissati, na me bhavissati;
yadatthi, yaṃ bhūtaṃ — taṃ pajahāmī’ti.
evaṃ upekkhaṃ paṭilabhati.
“아난다여, 여기 비구는 '이것이 없었다면 이것은 내 것이 아니었을 것이고,
있지 않다면 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있는 것, [265] 존재하는 것, 그것을 나는 버린다.'라고 이와 같이 닦는다.
이와 같이 하여 그는 평온을 얻는다.
so taṃ upekkhaṃ abhinandati, abhivadati, ajjhosāya tiṭṭhati.
tassa taṃ upekkhaṃ abhinandato abhivadato ajjhosāya tiṭṭhato
tannissitaṃ hoti viññāṇaṃ tadupādānaṃ.
saupādāno, ānanda, bhikkhu na parinibbāyatī”ti.
그는 그 평온을 기뻐하고757) 환영하고 고수한다.
그가 그 평온을 기뻐하고 환영하고 고수하기 때문에
그의 알음알이는 그것에 의지하고758) 그것에 취착한다.
아난다여, 취착이 남아있는 비구는 열반을 얻지 못한다.” 759)
“kahaṃ pana so, bhante, bhikkhu upādiyamāno upādiyatī”ti?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ṃ, ānandā”ti.
11. “세존이시여, 그러면 그 비구가 취착할 때 무엇을 취착합니까?”760)
“아난다여, 비상비비상처에 취착한다.”
“so rūpassa vibhavā, vedanāya vibhavā, saññā vibhavā,
saṅkhārānaṃ vibhavā, viññāṇassa vibhavā,
8. “비구여, 물질이 없어지고 느낌이 없어지고 인식이 없어지고 심리현상들이 없어지고
알음알이가 없어지기 때문에
evaṃ kho, bhikkhu, ‘no cassaṃ, no ca me siyā, nābhavissa, na me bhavissatī’ti —
evaṃ adhimuccamāno bhikkhu chindeyy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ī”ti.
“evaṃ adhimuccamāno, bhante, bhikkhu chindeyya orambhāgiyāni saṃyojanānī”ti.
'[업 지음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의 [오온도]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업 지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나에게는 [다시 태어남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와 같이 확신하는 비구는 낮은 단계의 족쇄[下分結]를 자를 것이다.
“rūpe kho, rādha, yo chando yo rāgo yā nandī yā taṇhā ye upayupādānā
cetaso adhiṭṭhānābhinivesānusayā — ayaṃ vuccati bhavanetti.
tesaṃ nirodho bhavanettinirodho.
vedanāya... saññāya... saṅkhāresu ... viññāṇe yo chando ... pe ... adhiṭṭhānābhinivesānusayā —
ayaṃ vuccati bhavanetti.
tesaṃ nirodho bhavanettinirodho”ti.
“라다여, [191] 물질에 대한 욕구, 탐욕, 즐김, 갈애, 집착과 취착,
그리고 그런 [갈애와 사견이라는] 마음의 입각처와 [여기에 대한] 천착과 잠재성향417)을 일러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이라 하고 이들의 소멸을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의 소멸이라 한다.
느낌에 대한 … 인식에 대한 … 심리현상들에 대한 …
알음알이에 대한 욕구, 탐욕, 즐김, 갈애, 집착과 취착,
그리고 그런 [갈애와 사견이라는] 마음의 입각처와 [여기에 대한] 천착과 잠재성향을 일러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이라 하고 이들의 소멸을 존재에 [묶어두는] 사슬의 소멸이라 한다.”
“kathaṃrūpaṃ, bhante, attabhāvapaṭilābhaṃ sevato
a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kusalā dhammā parihāyanti?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자기 존재의 획득을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듭니까?
sabyābajjhaṃ {sabyāpajjhaṃ (sī. syā. kaṃ. pī. ka.)}, bhante, attabhāvapaṭilābhaṃ
abhinibbattayato apariniṭṭhitabhāvāya
a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kusalā dhammā parihāyanti;
세존이시여, 고통이 함께하는 자기 존재63)의 획득이
생길 때 그에게 생존을 끝낼 수 없도록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듭니다.
63) '고통이 함께하는'은 sabyābajjha(악의 있음, 병 있음)를 옮긴 것이다. 주석서에서 “고통이 함께하는(sadukkha)”(MA.iv.100)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이렇게 옮겼다.
“'고통이 함께하는 자기 존재(sabyābajjha atta-bhāva)'는 존재(bhava), 즉 윤회를 끝낼 수 없다. 고통이 함께하는 자기 존재(sabyābajjh-attabhāva)는 [범부,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의] 네 부류가 있다. 범부(puthujjana)는 자기 존재(atta-bhāva)로 존재를 끝낼 수(pariniṭṭhāpetuṃ) 없다. 그의 재생연결(paṭisandhi)부터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은 줄어들어 고통이 함께하는 자기 존재로 태어난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류자와 일래자와 불환자도 고통이 함께하는 자기 존재이다.
범부는 고통이 함께하는 존재인 줄 알겠는데 어떻게 불환자가 고통이 함께하는 자기 존재로 태어나고, 어떻게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abhivaḍḍhanti) 유익한 법들이 줄어드는가(parihayānti)? 불환자도 정거천(suddhāvāsa)에 태어나서는 정원에서 천상의 깝빠 나무(uyyāna-vimāna-kappa-rukkha)를 보면서 '행복해, 행복해'라는 감흥어를 읊는다(udānaṃ udāneti), 불환자의 존재에 대한 탐욕(bhava-lobha)과 존재에 대한 갈애(bhava-taṇhā)가 제거되지 않는다. 그 갈애가 제거되지 않기 때문에 해로운 법들이 증장하고, 유익한 법들이 줄어들고, 고통이 함께하는 자기 존재로 태어나고, 존재를 끝내지 않았다(apariniṭṭhita-bhava)고 한다.”(MA.iv.100~101)
세존이시여, 그러면 어떤 자기 존재의 획득을 받들어 행할 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이 증장합니까?
abyābajjhaṃ, bhante, attabhāvapaṭilābhaṃ abhinibbattayato pariniṭṭhitabhāvāya
akusalā dhammā parihāyanti, kusalā dhammā abhivaḍḍhanti.
세존이시여, 고통이 없는 자기 존재64)의 획득이 생길 때 그에게
생존을 끝낼 수 있도록 유익한 법들이 증장하고 해로운 법들이 줄어듭니다.
64) “'고통이 없는 자기 존재(abyābajjha atta-bhāva)'에도 [범부,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의] 네 부류가 있다. 범부도 자기 존재로 존재를 끝낼 수 있어서 다시 재생연결을 받지 않는다. 그가 [금생의] 재생연결을 받는 순간부터 해로운 법들은 줄어들고 유익한 법들만 증장한다. 고통이 없는 자기 존재(adukkha atta-bhāva)로 태어나서 존재를 끝낸다고 한다.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도 그와 같다.
예류자 등이 존재를 끝낼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범부가 어떻게 고통 없는 자기 존재로 태어나고, 어떻게 해로운 법들이 줄어드는가? 범부도 마지막 존재(pacchima-bhavika)로 태어나 그 자기 존재로 존재를 끝내는 것이 가능하다. 마치 앙국리말라가 999명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그의 자기 존재는 고통이 없었고(abyābajjha), 존재를 끝낼 수 있었고, 해로운 법들은 줄어들었고(hāyati), 안으로(gabbhaṃ) 위빳사나를 닦고 있었다고 한다.”(MA.iv.101)
bhavasaṃyojane ca kho pahīne bhavopi pahīno hotī’ti
antarāparinibbāya
natiyā asati āgatigati na hoti.
āgatigatiyā asati cutūpapāto na hoti.
cutūpapāte asati nevidha na huraṃ na ubhayamantarena.
esevanto dukkhassā’”ti.
망각의 강 - 레테 {Jātakatthavaṇṇanā (65)
tvaṃ ca pana bhavantarena paṭicchannattā taṃ kāraṇaṃ na sallakkhesī ti}
however, you have forgotten, because re-birth has hidden it from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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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자료
<간답바(gandhabbha)는 중국에서 건달바(乾達婆)로 음역되었고 할 일 없이 빈둥빈둥 노는 자를 뜻하는 건달이라
는 우리말도 여기서 나왔다. 일반적으로 빨리 삼장에서 간답바는 세 가지 문맥에서 나타난다.
(1) 사대왕천(四大王天, Cātummahārājika)에 있는 신들이다. 이들은 가장 하위계급의 천인들로 천상의 음악가이다.
이들은 사대왕천의 동쪽에 거주하며 대국천왕(待國天王, Dhataraṭṭha)의 통치를 받는다. 본문에 나오는 간답바는 바
로 이 천상의 음악신을 가리킨다.
(2) 향기(gandha)나는 곳에 사는 신을 뜻한다. 상윳따 니까야(S.iii.250f)에 따르면 간답바의 신은 나무의 뿌리나 껍
질이나 수액이나 꽃의 향기에 거주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3) 잉태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 즉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이다.
주석서와 복주서에서는 문법적으로 이 간답바를 간땁바(gantabba)로 설명한다.
여기서 간땁바는 동사 어근 √gam(가다)의 미래수동분사(grd)이다. 그래서
그 의미는 ‘가야만 하는 (것, 자)’가 된다. 중생들은 업에 의해서 죽은 다음에 반드시 재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자)’ 즉 ‘잉태될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라는 뜻이 된다.
그래서 주석서에서는 이 간답바를 재생연결식(paṭisandhi-vinñāṇa)이라고 설명한다.>
to become -> w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