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 선배와 함께
지난 주말부터 찾아온 강력한 한파가 주춤한 십이월 넷째 화요일이다. 모레면 주중 머무는 와실에서 철수할 예정이라 아침밥을 지어 먹은 전기밥솥과 도마는 분리수거장으로 내보냈다. 저가 제품에다 내구연한이 다 되어 이삿짐에 넣을 목록이 못 되어서다. 퇴근 후 저녁은 옥포에 사는 퇴직 선배와 식사가 약속되어 있고 남은 두세 끼는 냄비로 떡국이나 라면을 끓여 먹을 생각이다.
아침 기온은 여전히 영하권이라 들녘과 천변 산책을 줄이고 교정으로 들어섰다. 여명에 둘러본 연못 분수대는 고드름 결정체가 어제보다 더 솟아오른 듯했다. 앞뜰에서 본관을 돌아 뒤뜰 쓰레기 분리배출 장소를 둘러보고 실내로 들었다. 전날 교무부장이 보내온 메신저에 방학 중 복무 신청을 하십사는 연락이 와 자가 연수를 신청했다. 방학식을 하는 날은 하루 연가를 내어놓았다.
화요일은 월요일과 마찬가지로 교실 수업이 네 시간인데 가정학습을 신청한 학생들로 빈자리가 많았다. 그런 가운데 독서 발표가 늦은 한 반에서 네 명의 학생이 준비를 잘 해와 진지하게 경청했다. 일과를 마치면 어김없이 내가 지도를 맡은 청소구역인 쓰레기 분리배출 장소로 내려갔다. 학년말이 되니 학급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량이 현저히 줄어들어 일거리가 많지 않아 수월했다.
퇴근 시각에 맞추어 저녁 식사를 같이 들기로 한 옥포 사는 선배가 학교 앞으로 차를 몰아왔다. 내가 거제로 부임해 오기 전 거제 관내 교장으로 퇴직한 교육대학 선배였다. 고향이 진주권인데 중년에 거제 지역과 인연이 닿아 옥포에서 토박이처럼 살고 있다. 퇴직 후 옥포대첩 기념공원으로 산책을 나가고 동호인들과 테니스를 즐겨 치면서 건강 관리를 모범적으로 잘하는 분이다.
선배는 거제에 오래도록 살아 맛집에 대해서도 훤한 편이었다. 지난 두 차례 만남에선 고현의 횟집과 옥포 굴구이집에서 자리를 가졌더랬다. 이번엔 연초면과 이웃인 하청면 해안의 자연산 횟집으로 가자면서 운전대를 잡았다. 하청은 진동만과 접한 칠천도가 있는 내해로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했다. 굴과 홍합 양식장이 많기도 하지만 얕은 바다에 그물을 놓아 활어도 잡히는 곳이다.
연초삼거리를 지나 덕치를 넘으니 하청면 면소재지였다. 저만치 진동만엔 칠천도와 다리가 보였다. 유계와 덕곡으로 돌아가는 해안가 횟집으로 향했다. 선배가 현직에 있을 때 안면을 트고 지내던 횟집인 듯했다. 내가 재작년 부임했던 봄에 같은 부서 동료들과 한 번 들렸던 곳이기도 했다. 선배가 전화를 미리 해 두어 밑반찬이 차려져 있었고 돔이 썰어진 생선회 접시가 나왔다.
선배도 교육대학을 졸업해 초등에서 출발한 공통점이 있으나 나는 평교사로 교직을 마감하나 선배는 전문직과 관리자를 두루 거친 이력을 가졌다. 근래 부인께서 지병으로 요양원에 머문다는 얘길 들어 하루속히 건강이 좋아지길 바랐다. 선배는 하루 소일거리가 아침나절은 댁에서 가까운 절을 찾아 마음을 닦는 일로 시작해서 점심 식후는 테니스 동호인들과 건강을 다진다고 했다.
선배에게 맥주를 채운 잔을 권하고 나는 맑은 술을 채워 비웠다. 선배가 나에게 퇴직 후 무슨 계획이 있느냐고 물어와 별다른 대책 없이 그냥 떠밀리다시피 정년을 맞는다고 했다. 기회가 닿으면 경주와 부여를 비롯한 고도를 답사하고 글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4대강 자전거길을 따라 걸으며 산하를 스케치하듯 글로 남기면 좋겠으나 현실적인 여건이 허락될지는 미지수라고 했다.
횟집 상차림에는 생선회 말고 삶은 문어와 소라 등 해산물이 곁들여져 안주가 좋아 나는 맑은 술을 한 병 더 시켜 선배가 채워주는 잔을 넙죽넙죽 비웠다. 내보다 서너 살 연상이지만 근무지에서 대학 동문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관계로 고향 형님처럼 친밀감이 느껴졌다. 이제 거제를 벗어나게 되면 만날 기회가 드물 선배였다. 식당을 나오니 진동만은 어둠이 짙게 깔린 밤바다였다. 21.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