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송대 체험수기 당선작 입니다.>
<할 수 있다, 엄마처럼...>
이제라도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 내겐 험난한 이 현실과 싸울수 있는 예리한 무기가 아무것도 없다.
< 등록일: 2008-07-21 오전 10:34:06 제1503호(2008-07-21) >
여름이 성큼 다가온 6월초, 거실 한편을 서성이다 책장 속에서 누렇게 빛이 바래 가고 있는 일기장 하나를 꺼내들었다. 오랜 세월을 병상에 누워계셨던 아버지로 인해 힘들게 입학했던 상업고등학교를 두 달도 채 못되어 자퇴를 했던 나의 사춘기가 일기장 속에 화석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 어떤 준비도 없이 남들보다 일찍 내던져진 세상은 참으로 만만치 않았다. 최종학력이 견고하지 못했던 나는 작은 봉제공장에서도 말단 보조인 시다생활로 오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여러가지 우여곡절 끝에 공장에서 만난 남자와 조금은 일찍 동거를 하게 됐고 두 아이도 생겼다.
직업에야 귀천이 없다지만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배움이 턱없이 짧았던 나와 남편이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열악한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보수도 웬만한 직장인들의 절반 수준인데다 4대 보험 같은 화려한 배경들은 딴 나라 이야기였으므로 반지하 월셋방을 옮겨 다녔고, 결혼식도 한참 뒤에야 겨우 올릴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십여 년째 답답하고 힘겨울 때마다 일기를 써왔고 그 안에는 수많은 슬픔과 얼룩들이 파리똥처럼 다닥다닥 말라 붙어있다.
완구공장에서 군복공장으로, 또는 청바지 공장으로, 블라우스공장으로, 바바리공장으로 떠돌아다니는 중에 언제부턴가 봉제공장들이 맥없이 문을 닫기 시작했다. 임금을 받는 날보다 받지 못하는 기간이 더 많아지면서 나는 노점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만만치 않았다. 딱히 내 자리가 없는 노상에서 하루에도 수없이 단속에 쫓기고 벌은 액수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금으로 물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먼저 자리 잡았다는 상인들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폭언과 난동에 하루에도 수없이 보따리를 풀었다 접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창가 어귀에 목돈을 주고 구입한 야식장사 리어카로 창녀들에게 밤새도록 야식을 팔던 남편이 안개가 자욱한 새벽에 귀가를 하다 교통사고로 어느 노인을 치고 말았다. 일순간 남편은 구속되었고 세 살, 여덟 살 남매를 둔 나는 망연자실 넋이 나가고 말았다.
청색 죄수복을 입고 힘없이 면회실로 끌려 나오던 유리벽 너머의 남편과, 밤마다 울며 아빠를 찾아대던 세 살, 여덟 살 남매 사이에서 내게는 좌절할 시간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눈덩이처럼 단단해져가는 피해자의 협박과 감당할 수 없는 억대의 합의금을 강요당하는 공포 속에서 피해자 유가족들을 만나러 다녔다.
영정 앞에 엎드려 죽을죄를 지었다고, 살려달라고, 용서해 달라고 빌고 또 비는 동안 성난 유가족들에 의해서 내 옷이 찢어지고 등에 업힌 어린 딸아이가 내동댕이쳐지기를 여러 번, 결국 합의를 포기했다. 나는 아이를 업고 평택시 전체를 누비며 신발과 물집이 함께 터져서 뒤범벅이 된 몸으로 구속된 남편을 꺼내기 위해 140명의 탄원서를 모으고 그 당시 내가 가진 전 재산인 300만원을 털어서 공탁을 걸어 호소하였다.
하늘이 돌봐서였을까. 남편은 석 달 만에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나는 더 이상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온 몸과 정신이 지쳐 있었다. 이대로는 아무것도 다시 시작할 의욕도 없었고 희망도 보이지 않았기에 겨우 생각해냈던 것이 강원도 양양에 있는 낙산사로의 여행이었다.
남편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나는 혼자 무작정 가방하나를 꾸려서 집을 나섰다. 도시의 터미널을 떠나 청량리역에 도착하니 다행히도 마지막 기차가 있었다. 가파른 강원도 고개를 밤기차로 넘어가며 한 동안 정신없이 걸어온 나의 30년 인생이 일기장 속에서 또다시 젖어 들고 있었다.
배움이란 것, 학력이라는 것, 사회로 나간다는 것, 내가 일할 직장을 갖는다는 것, 결혼을 한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어찌 보면 첫 단추의 중요성을 빼놓고는 이야기의 시작이 어려운 문제들일 것이다. 십여년 전 가방 하나에 지친 정신과 몸을 끌고서 강원도의 차디찬 밤기차 안에서 힘없이 차창을 바라보며 서른 살의 여자가 얻은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이제라도 공부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지금 내겐 험난한 이 현실과 싸울수 있는 예리한 무기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이었다. 낙산사를 내려오면서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두 아이에게 줄 선물 하나를 준비했다.
그것은 바로 “공부하는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이다! 1998년 11월 25일 낙산사에서 엄마가….” 눈물과 한탄스러움이 응집된 나무판에 뜨거운 인두로 심장에 흉터처럼 새긴 불꽃같은 문장이었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모세가 애굽에서 탈출시킨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사십년을 헤매다 시내산에 올라가 품에 안고 내려왔던 십계명 돌판처럼, 나도 견고한 문장이 새겨진 나무벽걸이를 품에 안고 내려오는데 쓰라린 바다바람과 함께 눈발이 휘몰아쳤다. 지금은 기억이 흐릿해졌지만 ‘첫 눈’이라고, 그날의 일기에 적혀있으니 첫눈이리라.
그 후 나는 그날 새겨온 문장을 심장에 품고서 십여년을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었다. 무려 열세가지 직업으로 길거리를 좌판삼아 넘나들었다. 화물차를 끌고 새벽시장 과일장사로, 짐꾼으로, 의료기 외판원으로, 칫솔장사로, 붕어빵장사로, 분식장사로, 양말장사로, 책장사로. 그러는 사이에 어렸던 아들아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나는 아들과 같은 해에 고졸자격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그리고 그 해 겨울에는 내 오랜 꿈이었던 신춘문예에 내 창작시가 당선 되어 시인이 되었다. 마흔을 넘긴 지금 나는 남들보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값진 삶의 목표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대학에 들어가서 국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걸어가야 할 삶의 방향임을 다시 한 번 알게 된 요즘을 살아가고 있다.
낙산사를 내려 온 지 어느 덧 십년이 흘렀다.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2학년 김명희. 지금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름표를 달고 살아간다. 비록 아직도 월세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지만 오래전의 나는 이미 아니기 때문이다. 국문과 공부를 하면서 막히기 시작한 한문 실력을 보충하기 위해 1학년 2학기에는 한문공부도 병행 했다.
고등학생 아들아이의 뒷바라지를 위해 낮에는 생계 일을 하고, 내 몫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밤이면 한문 학원으로 뛰었다. 그 결과 몇 달 전에는 한문지도강사 자격증을 취득하는 복을 덤으로 얻었다.
내겐 너무도 소중한 방송통신대학교에서 생각만 해도 향기로운 국문학 공부를 시작한지 2년째다. 그 옛날, 가난에 등 떠밀려 자퇴하고 교문을 나온지 23년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은 어엿한 대학생이면서 시인과 한문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우리 방송대학교에서 교양과목으로 배우는 여러 가지 이론과 지식이 한문 강의에서 한 몫을 단단히 해줄 때마다 하늘 높이 날아오를듯한 행복감에 나는 이따금 강의실 창문 밖을 향해 소리 없는 환호성을 날리곤 한다.
한낮의 태양이 지붕을 익힌다. 이제는 퇴색된 나의 일기장을 소중히 덮고서 청소기를 들고 아이들 방으로 간다. 지난밤을 아들아이와 뒹굴었을 컴퓨터는 낮잠으로 졸고 있다. 책상 한쪽에 어지럽게 널린 책들과 간밤의 간식이 남긴 비닐 쓰레기를 모으다 문득 발견한 메모장 하나. 그것은 아들아이가 공부에 지친 자기 자신에게 보냈던 쪽지인 듯하다.
“공부하는 고통은 잠깐이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이다! 할 수 있다! 엄마처럼!”
오늘은 저녁식사로 한 동안 잊고 있던 카레라이스를 좀 만들어 봐야겠다. 언제 왔는지 오후의 태양이 걸쭉한 서녘 노을이 되어 창가에서 맛있게 끓고 있다.
체험수기 가작은 다음 호에 연재됩니다. <편집자 주> 당선소감 ▲ 김명희 (국문 2)
주유소에 들러 바닥난 열망 안쪽에 휘발성의 세월을 주입한다. 거리의 사람들은 그 새 몇 리터의 태양을 장만했는지 제 몫의 더위를 챙겨, 하나 둘…. 계곡 쪽 달력을 살피느라 분주하다.
그들의 일기예보 사이를 가로지르다… 문득, 잊고 있던 세월 너머로 내가 많이 존경하는 K선배의 얼굴이 떠오른다. 9년 전 그날도 나는, 몇 조각 남지 않은 내 안의 희망들을 꿰매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던 것 같다.
겨울 어느 날 “네 속은 온통 詩로 가득 차 있다” 무심코 한마디 던지고 간 선배. 늦은 나이에 국문과 입학 하던 날도 그 선배의 격려가 컸었고 오늘까지 달려오는 동안 그 선배는 늘 나를 채우는 무서운 연료였다.
더 무슨 말이 필요하리…. 오늘은 그 선배 불러내 술 한 잔 거나히 하련다.
주저리 늘어놓은 한 사람의 부끄러운 일상들에 꽃을 달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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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오네요..가슴이 벅차고 눈앞이 흐려지고..모든이의 귀감이 되는 밝은 빛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