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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는 길을 가르쳐 준 스승과 제자
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스승한테
“성공하는 길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라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이쪽으로 가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쪽으로 계속 갔죠.
그러나 아무리 가도 성공이 없어서 돌아왔어요.
그리고 또 다시 돌아와서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다시 같은 방향을 가리키며
“이쪽으로 가라”
고 했답니다.
다시 같은 방향으로 갔죠.
그러나 성공은 보이지 않자 되돌아와서 화가 나서 제자가 따졌습니다.
“스승님,
왜 자꾸 그릇된 길을 가르쳐주십니까?”
그러자 스승이 대답했습니다.
“너는 항상 성공에 가까이 다가갈 무렵이면 돌아오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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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자체가 짐이다
한 개그맨이 TV에서 ‘인생의 짐을 함부로 내려놓지 마라’는 강연을 해 큰 반향을 일으킨 적이 있다
대학생들 앞에서 그는 지리산 등반 때 일화를 소개하면서
“지고 가는 배낭이 너무 무거워 벗어버리고 싶었지만 참고 정상까지 올라가 배낭을 열어보니 먹을 것이 가득했다”며
“인생도 이와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요즘 들어 그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세상 살기가 팍팍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인생의 짐을 지고 헉헉거리는 것 같아서다.
특히 대지진과 쓰나미, 원전 방사능 공포로 이어진 일본의 대재앙 소식을 접하면서 부쩍 더해진 것 같다.
짐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나서 저마다 힘든 짐을 감당하다가 저 세상으로 간다.
생각해 보면 어느 한때 시리고 아픈 가슴 없이 살아본 적이 있었나 싶다.
기쁨과 즐거움의 햇살이 비치는가 하면 어느 한쪽 슬픔과 아픔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인생 자체가 짐이다.
가난도 짐이고, 부요도 짐이다.
질병도 짐이고, 건강도 짐이다.
책임도 짐이고, 권세도 짐이다.
헤어짐도 짐이고, 만남도 짐이다.
미움도 짐이고, 사랑도 짐이다.
살면서 부닥치는 일 중에서 짐 아닌 게 없다.
이럴 바엔 기꺼이 짐을 짊어지자.
다리가 휘청거리고 숨이 가쁠지라도 자신에게 주어진 짐이라면 지는 게 현명하다.
언젠가 짐을 풀 때가 되면 짐의 무게만큼 보람과 행복을 얻게 될지 아는가.
아프리카의 어느 원주민은 강을 건널 때 큰 돌덩이를 진다고 한다.
급류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란다.
무거운 짐이 자신을 살린다는 것을 깨우친 것이다.
헛바퀴가 도는 차에는 일부러 짐을 싣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짐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정호승 시인의 ‘내 등의 짐’이라는 시는 감동적이다.
시인은 자신의 등에 있는 짐 때문에 세상을 바르게 살았고, 사랑과 용서와 겸손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 짐이 자신에게 선물이고 스승이고 조련사였다고 했다.
이 정도면 짐을 피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짐은 무겁다. 가벼우면 짐이 아니다.
그래서 짐은 지는 것이다.
손쉽게 들거나 주머니에 넣을 수 있다면 그건 짐이 아니다.
짐을 한번 져 보자.
자연스럽게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워진다.
절로 고개가 수그러지고, 허리가 굽어진다.
자꾸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짐을 지고서는 기고만장 날뛸 수 없다.
그래서 짐을
지는 것(負)은
지는 것(敗)이고,
지는 것(沒)일지도 모른다.
생태계 교란종
[펌] / 방석순 / 2013.08.06
주택가 화단에 고양이 한 마리가 엎드려 있습니다. 짙은 잿빛 털에 덩치가 큰 강아지 만합니다. 애완용으로 수입된 외래종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지나가던 차에 치였는지 엉덩이 쪽에 피가 흥건합니다. 가까이 다가가자 경계하듯 “야옹~” 하고 날카로운 소리를 냅니다.
119가 온갖 민원에 시달린다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동물구조단체 전화번호만 물어보았습니다. 몇 차례 음성 안내 단계를 거쳐 간신히 통화가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다루지 않으니 구청으로 전화해 보라”고 말합니다. 구청에선 서울시청 다산콜센터(120)로 연락해 보라고 미룹니다. 다시 120에서 안내해 준 번호는 맨 처음 119에서 알아보라던 동물구조단체 번호였습니다. 10여 분 동안 이곳저곳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결국 헛심만 쓴 꼴입니다. 결국 그들의 전화번호 안내는 친절인지, 책임회피인지 알 수 없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직은 고양이의 경고 소리도 높고 눈매도 매서워 섣불리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천생 기진해서 더 이상 회생이 불가능해진 다음에야 수습이 가능한 지경입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한 개는 물론 야생의 들짐승, 날짐승이 대부분 동물구조단체나 119의 긴급 출동으로 생명을 구하던데 유독 고양이만은 구호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는 모양입니다. 구호는커녕 아예 인근에서 사라져 줬으면 하는 눈치들이 역연합니다.
한 50년 전쯤일까요. 그때는 고양이가 안방의 재롱둥이였습니다. 안방마님 치마 끝에 매달려 재롱을 떠는 고양이를 누구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거의 집집마다 고양이는 안방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개들에게 고양이는 부러움과 질시의 대상이었지요. 어쩌다 방안을 기웃거리던 어리숙한 강아지들은 머리통이고 볼기짝이고 마구 얻어터지고 걷어차여 쫓겨나곤 했습니다.
세상이 뒤바뀌어 요즘엔 안방이 개판입니다. 견공들이 오뉴월에도 꽃수를 놓은 의상(?)을 걸치고 갖가지 색깔의 매니큐어, 페디큐어로 치장하고 쥔아줌마 품에 안겨 다닙니다. 주인보다 더 비싼 요금으로 이발하고 풀장에서 유영을 즐기며 값비싼 호텔에 투숙하기도 합니다. “3번아, 잘 있거라, 6번은 간다” 하고 개가 바깥주인보다 서열이 높음을 풍자한 유머가 유행한 지도 오랩니다.
반면 고양이는 주택가 화단이나 자동차 그늘에 숨었다가 음식물 쓰레기를 뒤지고, 들켜서 돌멩이 세례를 받기도 합니다. 물론 아직도 애완동물로 사랑받는 고양이가 없진 않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었습니다. 주택가에서 쫓겨나 일찌감치 산으로 들로 거처를 옮겨간 고양이도 부지기수입니다. 이들은 들쥐를 쫓거나 등산객이 먹다 버린 음식으로 연명합니다.
한때 그렇게 호강하던 고양이 신세가 어쩌다 저 지경이 됐을까요. 개와 고양이 처지가 저렇게 뒤바뀔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혹시 인간의 주거가 시멘트 옹벽으로 무장되고, 성가신 쥐의 출몰이 잦아들면서 불침번 고양이의 효용 가치가 떨어진 탓일까요. 그래도 대부분의 가정에서 고양이는 애완용, 개는 경비용, 아니면 식용이 맡은 바 제 역할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큰 변화의 원인은 인간의 변심으로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변덕이 한때 잠자리까지 내어주던 고양이를 집 밖으로 내몰고, 마루 밑에 웅크리고 있던 개를 방안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한 종은 반려동물로 인간 이상의 대접을 받게 되고, 또 한 종은 태어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은 종자로 학대를 받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곰, 여우, 황새를 복원하고 방생해 자연 생태계를 되살린다는 마당에 인간에게 한때 가장 사랑받던 한 종이 인간에 의해 학대받고 박멸의 대상처럼 경원시된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생존의 문제와 상관없이 오로지 기호에 따라 인간에게 한 종을 선택해 양육하거나 추방할 권한이 있는 것인지.
처음부터 인간에 의해 집안으로 끌려 들어가 애완동물이 되지 않았던들, 지금으로선 가당치도 않은 인간의 사랑을 받지 않았던들, 오늘날 고양이가 저렇게 온 길바닥, 산기슭을 헤매는 종의 비극을 맞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처음 자연에서 태어났던 대로 살았더라면 뒤늦게 인간의 변덕에 의해 저런 구박 덩어리로 내쳐질 리도 없었을 것입니다.
인간은 새를 조롱 속에 가둬놓고, 물고기를 어항 속에 가둬놓고 사랑으로 돌본다고 말합니다. 사슴벌레, 비단구렁이, 이구아나도 애완동물이라며 안방으로 끌어들입니다. 그러나 일단 인간에게 찜을 당한 동물의 미래는 불확실하고 불안합니다. 그 종에게는 불행한 일입니다. 언제 고양이처럼 구박 덩어리로 내쫓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동물을 정말 사랑하고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자연 생태계에서 그들이 살아가던 방식대로 살아가도록 놓아두고 간섭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애완동물로, 가축으로 길들여진 동물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인간의 심심풀이를 위해 자연 상태의 야생동물을 새삼스럽게 안방으로 끌어들이는 짓은 삼가야 합니다.
한때 우리의 식욕을 충족시키기 위해 들여왔던 황소개구리와 블루길, 베스 등 외래어종들이 고유 어족의 씨를 말린다고 야단들입니다. 자연 생태계의 교란종으로 지목되어 박멸작업이 한창입니다. 이 역시 인간의 탐욕이 자초한 일입니다. 결국 자연 생태계에 교란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바로 인간인 셈입니다.
인공위성이 찍은 지구의 모습은 유리구슬처럼 아름답습니다. 그런 지구를 황폐화하는 유일한 종이 인간이라면 너무 자학적인 표현일까요. 자연 훼손, 환경오염, 종의 차별과 학대… 때때로 인간은 주체할 수 없는 탐욕과 변덕으로 언젠가 닥치게 될 최후의 날을 예비해 매값을 벌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필자소개 /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부국장, 경영기획실장,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 역임. 올림픽, 월드컵축구 등 국제경기 현장 취재. 스포츠와 미디어, 체육청소년 문제가 주관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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