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서원(誓願)
- 대난(大難)을 극복하는 생명 오저의 힘
♣ 어문
***** 일본국에 이것을 아는 사람은 다만 니치렌(日蓮) 한 사람이니라.
이것을 한마디라도 입 밖에 낸다면 부모 형제 사장(師匠)에다 국주의 왕난(王難)이 반드시 닥치리라. 말하지 않는다면 자비가 없음과 같다고 사유(思惟)되어, 법화경(法華經) 열반경(涅槃經) 등에 이 두 가지를 대조해 보내, 말은 아니 하면 금생(今生)은 무사(無事)하나 후생(後生)은 반드시 무간지옥(無間地獄)에 떨어질 것이고, 말하면 삼장사마(三障四魔)가 반드시 다투어 일어나리라고 알았노라.
둘 중에서는 말해야 할 것이로되, 왕난 등이 일어났을 때 퇴전(退轉)할 양이면 아예 그만둘까 하고 잠시 망설이고 있노라니 보탑품(寶塔品)의 육난구이(六難九易)가 생각났느니라.
우리들 같이 힘 약한 자가 수미산(須彌山)을 던질지라도, 우리와 같은 무통(無通)한 자가 건초(乾草)를 지고 겁화(劫火)에는 타지 않을지라도, 우리들 같이 무지(無知)한 자가 항사(恒沙)와 같은 경(經)을 읽고 외을지라도 법화경은 일구일게(一句一偈)도 말대(末代)엔 갖기 어렵다고 설해짐은 이것이로다. 이번에 강성한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 퇴전 않겠다고 원했노라. (어서 200쪽 9행 ~ 16행)
♣ 통해
***** 일본국에서 이것 (불교의 모든 종파가, 방법(謗法)의 가르침을 설하고 사람들을 악도(惡道)에 떨어뜨리는 악연(惡緣)이 되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만 니치렌 한 사람뿐이다.
이것에 대해 한마디라도 입 밖에 내면 부모 형제 스승에 의한 난, 나아가 국주에 의한 난이 반드시 닥칠 것이다. 말하지 않으면 자비가 없는 것과 같다고 생각되어 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이 두 가지가를 법화경 열반경에 비추어 검토해 보니, 말하지 않으면 금세에는 별일이 없으나 내세에는 반드시 무간지옥에 떨어지고, 말하면 삼장사마가 반드시 다투어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다. 이 양자 중에서 말하는 쪽을 취해야 한다. 그렇지만 국주에 의한 난 등이 일어났을 때 퇴전할 정도라면 처음부터 그만둘까 하고 잠시 망설였는데 보탑품의 육난구이란 참으로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우리같이 힘이 약한 자가 수미산을 던질 수 있을지라도, 우리같이 통력(通力)이 없는 자가 건초를 등에 지고 겁화 속에 타는 일은 없을지라도, 또 우리같이 무지한 자가 갠지스 강의 모래와 같은 제경(諸經)을 읽고 외울지라도, 말법(末法)에서 비록 일구일게의 법화경을 수지하기는 어렵다"라고 설한 것은 이것이 틀림없다. 나는 이번에 반드시 강성한 구도심을 일으켜 퇴전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서원(誓願)한다.
♣ 강의
'정신의 힘'은 인간을 연마해서 강하게 하고 풍부한 인격을 만듭니다. 확고한 철학과 틀림없는 '신념'이 위대한 인간의 풍격(風格)을 만듭니다.
<개목초>는 이를테면 '가장 깊은 철학'과 '가장 강한 신념'을 설한 어서입니다.
'가장 깊은 철학'은 , 전 인류를 구제하는 자비의 극리인 범부성불이라는 대법을 설해 밝혔기 때문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무상(無常)이라는 범부의 생명에 상주(常住)의 묘법을 통찰하고, 그 묘법의 힘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나타내는 길을 확립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전 인류에게 참된 희망과 용기를 주는 가장 깊은 철학을 우러러볼 수 있습니다.
'가장 강한 신념'은 어떤 장마(障魔)가 와도 물리치고 전 인류를 구제하는 이 대법을 홍통하겠다고 맹세하는, 광선유포에 대한 위대한 신념입니다. 그 근저에는, 대법을 아끼는 마음과 더불어 인간의 고뇌에 동고(同苦)하며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사랑하는 대자비를 간직하고 있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대성인은 이 어서 전반에서 문저(文底)의 대법인 사(事)의 일념삼천을 말법유포 * 민중구제의 법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 대체적인 애용은 이미 배독했습니다.
그리고 후반에는 그 대법을 넓히고 진정한 법화경 행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셨습니다.
즉 성불은 이루는 근본이 되는 '법(法)'을 밝힌 후 그 법을 넓히는 '인(人: 사람)'으로 초점을 옮기셨습니다.
그 후반부 첫머리에서 대성인은 자신이 말법유포에 일어선 이른바 '입종시(入宗時)'에 세운 '서원(誓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밝히셨습니다.
방법(謗法) = 성불을 믿지 못하는 무명(無明)
말법에 광선유포가 얼마나 어려운가. 대성인은 이 점에 대해 <개목초>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십니다.
"말법에 정법의 자는 손톱 위의 흙과 같이 적고, 방법(謗法)의 자는 시방 국토의 흙과 같이 많다. 세간의 죄에 의해 악도에 떨어지는 자는 손톱 위의 흙과 같이 적지만, 불법에 의해 악도에 떨어지는 자는 시방의 흙보다 많다. 더구나 재가보다 승(僧) * 이(尼)가 많이 악도에 떨어진다."(어서 199쪽, 취의)
말법은 시대가 탁하고, 사람들의 기근도 열등하며 승니(僧尼)도 타락이 극에 달한 때입니다. 그와 같은 문제는 물론이고 말법홍통이 정상이시(正像二時)보다 휠씬 어려운 근본 이유는, '방법(謗法)'이라는 문제를 빼놓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방법'은 '정법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그 근저에는 정법에 대한 '불신'이 있습니다. 정법은 만인성불을 설한 법화경입니다. 만인이 성불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도 성불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기 어렵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처는 인간과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래된 권위주의적 종교관과 신앙관을 가진 사람은,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법화경의 정법을 도저히 믿지 못합니다. 또 자신이 부처가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인생 경험상에서 보더라도 쉽게 믿기 어렵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고경에 처했을 때, 이렇게 고생하는 자신이 부처가 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반대로 인생이 평탄할 때는 이렇게 행복하다면 부처가 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정법을 믿기는 대단히 힘듭니다.
이렇게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말은 믿기 어려우므로, 자칫하면 인간에게서 동떨어진 신불(神佛)을 설하게 됩니다. 또 신불과 인간 사이에 성직자라는 매개자를 두는 권위주의적인 종교로 기울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종교관과 신앙관이 지배하는 사회에 만인성불을 위해 싸우는 법화경 행자가 출현하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기성 종교관을 완고히 고집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실한 불법(佛法)을 실천하는 법화경 행자를 증오하며 박해합니다.
예를 들면 법화경 권지품에는 삼류(三類)의 강적(强敵)이 법화경 행자에게 '그대들은 모두 부처인가'하고 조롱한다고 설합니다.
이와 같이 법화경 행자를 박해하는 근저에는 만인성불을 설한 정법에 대한 불신과 방법(謗法)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소승교와 권대승교는 석존을 특별한 존재라고 하여, 인간이 석존과 같이 될 수는 없다고 설합니다. 또는 아미타불 * 대일여래와 같이 인간에게서 동떨어진 부처를 설합니다.
이 가르침을 근본으로 삼은 종파가 정법과 상법 시대에 생겨나 인간에게서 동떨어진 부처를 설하기 때문에 권위주의화 했습니다.
말법에 들어서면서 법화경의 진의(眞義)를 알 수 없게 되어 더욱더 권위주의적 종교가 옳다는 생각에 속박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에게서 동떨어진 신불의 힘에 의존하는 신앙관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종교에 더욱 강하게 집착하고 "소승으로 대승을 타파하고 권교로 실교인 법화경을 파한다"라는 뒤바뀐 사고방식이 횡행합니다. 법화를 비방하는 불교 종파가 횡행합니다. 그리고 결국 이 종파들이 악연(惡緣)이 되어 법화불신 * 법화비방하는 사람이 많이 나타나고 "불교로 인해 악도에 떨어지는 자가 시방의 흙과 같이 많다"라는 엄청난 사태가 일어납니다.
불법은 본래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불교를 믿음으로써 사람들은 악도에 떨어집니다.
이것이 말법 '법멸(法滅)'의 모습입니다.
대성인은 그와 같은 말법 * 법멸 시대에 사는 사람들을 구제하고자 홀로 일어섰습니다. 그러기 위해 불교 여러 종파에 잠재한 마성의 정체를 철저히 간파하셨습니다.
이 어서에서는 법화경 행자로서 홀로 설 때의 서원을 말씀하시기 전에, 사람들을 방법의 가르침으로 타락시키고 악도에 떨어뜨리는 모든 종파의 마성을 '악귀입기신(惡鬼入其身)'이라고 간파하고 엄하게 타파하셨습니다.
악귀입기신한 고승이 방법의 원흉
대성인은 이 어서에서, 악귀는 언뜻 보기에 불법을 완전히 깨달은 것같이 보이는 고승의 몸 속에 들어가 민중을 속인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즉 사회에서 정신적인 영향력이 강한 자에게 악귀가 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해 악도에 떨어뜨린다는 것입니다.
석존이 설한 이전(爾前)의 교법(敎法) 자체가 방법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교법에 집착해서 법화경을 비방하고 악용하는 악인이며, 그것이 방법의 원흉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런 방법의 승(僧)을 지지하는 민중의 무명(無明)을 극복하지 않는 한, 말법의 홍통은 이뤄 낼 수 없습니다.
"원품(元品)의 무명은 제육천의 마왕으로 나타났으니" (어서 997쪽)라고 말씀하시듯이, 제육천의 마왕의 본질은 모든 사람의 생명에 자리잡은 원품의 무명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자기가 품고 있는 무명을 불식하려면 악연과 악지식에 의연히 대처하여 타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불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악연과 악지식에 대한 "방심하지 마라" "간파하라" "투쟁하라"라고 설합니다.
말법에 들어선 지 200여 년. 악귀입기신한 악승의 본질을 바로 보신 분은 오직 니치렌 대성인 한 분이셨습니다.
정의를 망각했을 때, 법화경 행자가 진실을 외치며 민중을 기만하는 무리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날까 두려워서 법화경 행자를 박해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기만당한 민중은 속고 있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정의로운 사람을 멀리하고 악구하고 원질하여 결국은 박해합니다.
방법이 가득 찬 사회는 필연적으로, 진실을 외치는 법화경 행자가 탄압당하는 사회가 되고 맙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이것도 자세히 아셨습니다. 그리도 민중을 위해 홀로 일어서기로 다짐하셨습니다. 입종선언을 하시기 전의 강인한 사색과 장절한 정신 투쟁에서 그 뜻을 배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색의 일부분을 자신의 술회로서 <개목초>에 쓰셨습니다.
여기서 배견할 수 있는 대성인의 숭고한 혼의 발자취는 인류의 정신사(精神史)에 새겨야 할 중요한 부분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서원을 통해 홀로 서다
"일본국에 이것을 아는 사람은 다만 니치렌 한 사람이니라". 즉 방법의 악연이 나라에 가득 찬 사실을 한 사람은 오직 대성인 한 분이셨습니다.
법화경과 열반경 등 경문에 비추어 보면, 방법이 가득 찬 사실을 사람들에게 말하면 틀림없이 삼장사마(三障四魔)가 다투어 일어날 것입니다.
한편 말하지 않으면 무자비가 되므로 후생에는 반드시 무간지옥에 떨어질 것은 경문에 비추어 명백합니다.
그래서 대성인은 "말할 것인가" "말하지 말 것인가" 중에서 "말해야 한다"라고. 경문에 비추어 결론을 내렸다고 말씀하십니다.
거친 파도에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어려움과 어둡고 깊은 바닷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고뇌를 비교하면, 정면으로 용감하게 어려움을 도전해야 한다는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말법에 정법을 홍통하기란 난사(難事) 중의 난사입니다. 권력이 가혹하게 탄압할 때 불어 닥치는 마성의 폭풍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정신적, 육체적 타격을 줍니다.
만인의 성불을 설하는 정법을 완전히 깨달은 대성인은 인간의 불성을 깊이 통찰하셨으므로, 정법을 방해하는 마성이 얼마나 두려운지도 깊이 간파하셨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왕난(王難) 등이 일어났을 때 퇴전할 양이면 아예 그만둘까 하고 망설이고 있노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항해 도중에 파도가 소용돌이친다고 해서 돌아갈 것이라면 처음부터 출항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성이 미친 듯이 날뛰어 퇴전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할 때는, '단념해도 괜찮지 않을까' -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의 작용이 격심합니다. 그러므로 대성인은 감연히 행동에 옮기기 전에 잠시 사색을 거듭하셨습니다.
물론 여기서 퇴전할 정도라며 단념하려고 하신 것은 결코 비겁하거나 마음이 나약해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싸워야 할 마성의 본질을 아시므로 전 우주에 만연한 마군을 완전히 타파하는 일이 얼마나 험난한지를 깊이 사색한, 진실한 용자(勇者)로서 생각입니다.
"망설이고 있노라니"라는 표현과 반대로, 묵묵히 숙고하며 미동도 하지 않는 대성인의 가슴속에는 장절한 혼의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때 혼의 투쟁을 계속한 젊은 대성인의 마음에 떠오른 것은 법화경 보탑품의 '육난구이(六難九易)'입니다.
'육난구이'는 석존이 보살들에게 멸후홍통(滅後弘通)의 맹세를 권유하려고 설한 말씀입니다.'구이'라고 설한 9가지 '쉬운 일'은 "수미산을 잡아 타방(他方)의 무수한 불토(佛土)에 던진다"든지 "마른 풀을 등에 지고 대화(大火) 속에 뛰어들어도 타지 않는다" 등, 실제로 거의 실현 불가능한 난사입니다. 그 이상으로 난사 중의 난사가 '육난', 즉 멸후에 법화경을 수지(受持)하고 홍통(弘通)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석존은 명확히 말씀하면서 어떤 고난도 극복하고 멸후 법화홍통에 매진하겠다는 '서언(誓言)'을 말하라고 보살들에게 권유합니다. 후에 <개목초>에서 이 권유를 '보탑품 삼개(三箇)의 봉조(鳳詔)' 가운데 하나로 드셨습니다.
부처 멸후의 법화홍통은 삼세제불(三世諸佛)의 소원입니다. 부처는 그 어려움을 모두 파악한 후, 후계의 보살들에게 "도전하라"라고 외치셨습니다.
육난구이는 이를테면 '불의(佛意)'를 표현합니다. 부처는 멸후의 법화홍통이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명확히 밝히며 엄연히 '서언'하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서원'을 세워 법화경에 대한 신(信)을 확립하면 극복하지 못할 난은 없다"라는, 말법의 법화경 행자에게 주는 엄연한 메시지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대성인이 언급하신 '구이'의 예 중에서 세 가지 비유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대성인은 '우리와 같이 힘이 약하자' '우리와 같이 무통(無通)한 자' '우리와 같이 무지(無智)한 자'라는 표현을 하며 범부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육체적인 힘이 없어도, 신통력이 없어도, 지혜가 없어도 누구나 확고한 서원을 세워 부처와 함께 걸으면, 무한한 힘, 무한한 용기, 무한한 지혜가 용솟음쳐 어떠한 대난도 극복할 수 있다는 무한한 희망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요.
무력한 범부라도 악세에서 서원을 세워 신(信)을 관철하면 자기 생명의 오저에서 불계의 힘을 용현하여 고난을 극복하고 자신을 바꿀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장사'라도, '신통력'을 가진 자라도, '지혜'있는 자라도 인간 생명을 변혁하기는 어렵습니다.
불교에서 보는 서원의 본의(本義)
여기서 비로소 대성인은 '서원'을 세우십니다.
"이번에 강성한 보리심을 일으켜 퇴전하지 않겠다고 원했노라"
'보리심'은 보리<부처의 깨달음>를 구하는 마음입니다. 따라서 '강성한 보리심'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불을 구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보살의 서원'입니다.
대저 대승의 보살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세우는 것이 보살이 되는 근본 조건입니다. 즉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량서원단(煩惱無量誓願斷)' '법문무진서원지(法門無盡誓願知)'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등 네 가지 광대한 서원입니다.
이 '보살의 서원'의 원형이라고 해야 할 말이 법화경 약초유품(藥草喩品) 제5에 있는 '부처의 서원'입니다.
"아직 건너지 못한 자는 건너게 하고, 아직 깨닫지 못한 자는 깨닫게 하며, 안온하지 못한 자는 안온케 하고, 아직 열반하지 못한 자는 열반을 득하게 하리라."
이 부처의 서원은 총체적으로 '중생무변서원도'를 표현합니다. 부처가 단호히 만인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운 것을 전합니다. 또 사홍서원에서 다른 세 가지에 통하는 표현도 이 말에서 볼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 '서원'은 숙업의 쇠사슬을 끊고 과거에 묶인 자신을 해방하여 새로운 미래를 향해 자기를 키우는 힘을 말합니다. 부처의 가르침으로 자신을 연마하고 마음을 확고히 하여 자신의 미래를 정하고 그것을 실현하려는 노력을 지속하는 것이 '서원의 힘'입니다.
서원은 이를테면 '변혁의 원리'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변혁은 물론, 약초유품에서 설한 부처의 서원에서 볼 수 있듯이 전 민중을 변혁할 수 있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묘법 * 불성에 대한 신(信)
특히 말법에서 만인성불이라는 서원을 성취하기 위해 대성인이 강조하신 것은 '신력(信力)'입니다.
이른바 묘법의 당체로서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것이 법화경의 진수입니다. 그것은 묘법에 대한 깊은 '믿음<信>'임과 동시에 인간에 대한 투철한 '신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법화경에 나온 말법홍통의 모범인 '불경보살(不輕菩薩)'도 그렇습니다. 불경보살은 사중(四衆)에게서 장목와석(杖木瓦石)의 난을 받았지만 예배행을 관철했습니다.
어떤 때는 와석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피하며 다시 상대방을 향해 큰 소리로 "그대도 나는 당신들을 예배합니다. 당신들은 모두 부처가 될 것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자기를 비난하며 폭력까지 가하는 사람들에게도 예배를 계속합니다.
이 불경보살의 실천은 모든 인간에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불성이 있다는 철학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불경보살은 무엇보다 만인에게 불성이 내재한다고 깊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와 대조를 이룬 것이 걸안(乞眼)의 바라문(婆羅門)의 가책에 패해 소승에 떨어진 사리불(舍利佛)입니다.
자신의 선의(善意)가 유린당했을 때 사리불은 '이 사람은 구제받기 어렵다'라고 무의식적으로 외쳤습니다.
이를테면 사리불은 결과적으로 만인에게 내재해 있는 불성에 대한 '신(信)'을 잃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걸안의 바라문은 제육천의 마왕의 화신(化身)이었습니다. 마의 본성은 만인의 불성이 발현하는 것을 부정합니다.
"만인이 모두 부처다"라는 '믿음'을 파괴하려는 것이 마의 본성입니다. 자기가 구제하려고 생각했던 상대방에게서 증오와 박해를 당합니다.
부당하다면 부당하지만, "그래도 나는 당신을 예배한다"라고 계속해서 외친 불경보살과 같이 깊은 '신념'을 관철하는 것이 말법의 불법자가 실천해야 할 행동입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인간이 지닌 선(善)의 본성을 일관되게 '신뢰'하고 그것을 근본으로 삼아 깊은 '낙관주의'를 견지하는 것이 '서원'의 힘입니다.
니치렌 대성인은 깊은 서원을 세우고, 홀로 법화경 행자로서 엄연히 일어서셨습니다. 방법의 악연에 미혹하여 헤매는 모든 사람을 구제하려는 행동을 단호히 관철하셨습니다.
그 결과로 대성인이 예견한 바와 같이 일본의 모든 사람들에게서 미움받고 폭풍우 같은 대탄압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대성인은 "기뻐서 가로되, 본래부터 알고 있었던 일이니라" (어서 910쪽)라는 마음으로 "그러나 아직 단념하지 않노라" (어서 1056쪽) 또 "니치렌은 한 번도 물러설 마음이 없었노라" (어서 1224쪽), "지금에 이르기까지 싸움은 그치지 않느니라"(어서 502쪽)라는 결연한 심정으로 투쟁하셨습니다.
대성인이 일생에 걸쳐 펼치신 장절한 투쟁을 도와준 원동력은 오로지 '서원의 힘'이었습니다.
서원을 관철함으로써 부처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생명 오저에서 불계의 무한한 힘을 용현할 수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탁세에 인간 불신을 조장하는 마의 책모를 타파할 수 있는 것은 만인구제를 맹세하는 '서원'의 힘 이외에는 없습니다.
첫댓글 cafe 번창하시길 염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