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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의 작품 감상
Caravaggio, - Supper at Emmaus
엠마오에서의 저녁식사(Supper at Emmaus)
1600-1601 Oil on canvas 54 3/4 x 76 3/4 in.
National Gallery, Londo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그들과 함께 걸어가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동행하는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으로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새로운 영의 눈이 필요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위하여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탁에 앉으시고 빵을 들어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각자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참모습은 그분의 외모에서가 아니라, 주님의 식탁, 곧 미사성제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찬의 전례를 통하여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미사성제 안에서, 특별히 성체성사 안에서 매일같이 체험하고 있습니다. 이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과거에 존재하셨던 역사적인 한 인물인 예수님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신앙의 그리스도이십니다.
2007년 4월 11일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에서
Michelangelo da Caravaggio의 작품
성 프란체스코의 오상(The Stigmatization of Saint Francisco.)
1596 Oil on canvas 36 7/8 x 50 5/16 in (92.5 x 127.8 cm) Wadsworth Atheneum, Hartford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들고 있는 유딧 (Judith Beheading Holofernes)
1598 Oil on canvas,
56 3/4 x 76 3/4 in. Galleria Nazionale dell'Arte Antica, Rome유딧이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다.
유딧기 제13장
1 저녁때가 되자 홀로페르네스의 종들이 서둘러 물러갔다. 천막을 밖에서 잠근 바고아스가 시종들까지 자기 주인 앞에서 내보내니, 그들도 잠자리에 들었다. 사실 연회를 오래 끌었기 때문에 모두 지쳐 있었다.
2 천막에는 유딧만 혼자 남았다. 홀로페르네스는 술에 잔뜩 취하여 자기 침상 위에 쓰러져 있었다.
3 유딧은 여종에게 침실 밖에 서서 다른 날처럼 자기가 나오는 것을 기다리라고 미리 일러두었다. 기도하러 나가겠다고 말하였던 것이다. 바고아스에게도 같은 말을 해 두었다.
4 모든 사람이 홀로페르네스 앞에서 물러가고, 침실에는 낮은 자에서 높은 자까지 남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에유딧은 홀로페르네스의 침상 곁에 서서 마음속으로 말하였다. ‘모든 권세의 하느님이신 주님, 이 시간 예루살렘의 영예를 위하여 제 손이 하는 일을 굽어보아 주십시오.
5 바로 지금이 당신의 상속 재산에 도움을 베풀고, 저희를 치러 일어선 적군들을 멸망시키려는 저의 계획을 실행할 때입니다.’
6 이어서유딧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맡에 있는 침대 기둥으로 가서 그의 칼을 집어 내렸다.
7 그리고 침상으로 다가가 그의 머리털을 잡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 오늘 저에게 힘을 주십시오.” 하고 말한 다음,
8 힘을 다하여 그의 목덜미를 두 번 내리쳐서 머리를 잘라 내었다.
9 그러고 나서 그의 몸뚱이를 침상에서 굴려 버리고, 닫집을 기둥에서 뽑아 내렸다. 잠시 뒤에 유딧은 밖으로 나가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자기 시녀에게 넘겼다.
마태오를 부르심(The Calling of Saint Matthew)
1599-1600 Oil on canvas 10' 7 1/2" X 11' 2"
Contarelli Chapel, Church of San Luigi dei Francesi, Rome사도 성 바오로의 개종(The Conversion of Saint Paul)
1600-1601 Oil on canvas 90 1/2 x 70 in
Cerasi Chapel, Santa Maria del Popolo,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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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1-02 Oil on canvas 42 1/8 x 57 1/2 in. Neues Palais, Pots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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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쟁이(The Fortune Teller)
1594-95; Canvas; Louvre
십자가에서 내려지시는 그리스도(The Deposition)
1604; Pinacoteca Vaticana in Rome
성모님의 임종(The Death of the Virgin)
1605-06; Oil on canvas; Lou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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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붓을 들던 카라바조가 '대화가' 되기까지
카라바조는 17세기 이탈리아의 바로크 미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화가입니다. 그는 39년이라는 짧은 생애 대부분을 로마에서 보내면서 14세기에서 16세기까지 당시 전성기였던 르네상스 미술의 흐름을 급격하게 변화시켰습니다. 르네상스가 종말을 맞이할 즈음, 인간의 내면과 종교내용을 주제로 회화에 집중하던 당시 미술세계에, 현재 밀라노 박물관에 소장된 '과일 바구니'란 정물화를 제작하여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주제를 도입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종교적 리얼리즘과 강한 명암의 대비를 바탕으로 인간의 격정을 힘차게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카라바조의 시적 사실주의 화풍은 기성의 화가로부터 반발을 받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젊은 예술가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음으로써 새로이 전개하려고 하는 이탈리아 바로크 회화의 전반에 결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그의 그림 앞에 선 관람객을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목격자로 승격시킴으로써 당시의 회화에 혁명을 일으킵니다.
그는 1571년 9월 29일, 이탈리아 밀라노 근처에 있는 카라바조라는 작은 마을에서 건축가였던 가난한 페르모 메리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카라바조의 본래 이름은 미켈란젤로 메리시였습니다.
그런데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 유럽의 미술을 지배하고 압도했으며 카라바조보다 한 세대를 먼저 살았던 화가, 미켈젤로 부오나로티와 구분하기 위하여 그의 가문이 있던 마을 이름인 카라바조를 따서 그의 이름으로 대신 부르게 되었습니다.
6살에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13살인 1584년부터 밀라노에서 티치아노의 제자인 시모네 페테르차노 선생 밑에서 그림을 공부하였으나, 1590년에 어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기근에 시달렸습니다. 먹고 살아야 했으므로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려 팔거나 싸구려 그림을 그리는 화가 밑에서 제단그림을 모사하거나 정물그림들을 그려 주는 것으로 끼니를 해결하였으며, 오랫동안 병을 앓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카라바조를 후원해 준 프란체스코 델 몬테 추기경과의 운명적인 만남이 계기가 되어 예술가로서의 삶을 시작합니다. 그는 카라바조가 외부에서 공식적으로 주문받은 콘타렐리 카펠레 제단화를 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며 그의 실험적인 초기 그림을 수집함으로써 경제적으로 지원하였습니다.
▲ 카라바조의 자화상
살인자, 기사, 화가... 39세로 죽다.
초기에 그는 정물과 초상을 치밀한 사실기법으로 묘사하여 바로크양식을 확립하였습니다. 1602년에 제작된, 로마 콘타렐리 성당에 그린 '성 마태오의 일생'은 카라바조의 사실주의적 자연주의가 충만하게 배어있는 작품들입니다. 1600년경에 완성한 이 그림들은 미술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관람자를 극적 절정의 장면 속으로 끌어들였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현재 전해지는 대부분의 그림만큼이나 그는 격정적인 삶을 살았는데, 어려움 속에서도 화가로서 인정받으며 차츰 부와 명예를 쌓아가고 있을 무렵인 1606년,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그만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그때부터 카라바조는 체포를 피해 고단한 도망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1607년, 기사 수도회 총장인 알로프 드 비냐쿠르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인정받게 되어 몰타 기사단의 기사로 지명되기도 하며, 비록 도망자의 신분이었지만 이 시기 동안 그는 훌륭한 그림들을 많이 남깁니다.
이렇게 불안한 삶을 살던 카라바조는 긴장과 피곤으로 병을 얻어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던 1610년 7월 18일, 예전에 그와 다툰 적이 있는 한 귀족이 보낸 자객의 칼에 맞았습니다. 낯선 지중해 해변가에서 말라리아병으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고, 결국 39세의 젊은 일기로 안타까운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오늘 감상할 아래 그림의 배경이 되는 성경책의 이야기를 앞붙여 옮깁니다.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성경의 다른 서신과 비교하면, 인물에 대해 따스하고 세세하게 묘사하고 있으므로, 읽는 내용을 상상하면서 해당 그림을 비교해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언하는 대천사 가브리엘
▲ 예수 탄생 예고(The Annunciation)
1608-9, Oil on canvas, 285 x 205 cm,
Musee des Beaux-Arts, Nancy, Lorraine, France
예수님의 탄생 예고
루카복음 제1장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1609, Oil on canvas, 314 x 211 cm, Museo Nazionale, Messina
목자들의 경배
루카복음 제2장
15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
16 그리고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
17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18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
19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
20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며 돌아갔다.
▲ 로레토의 성모 마리아 (Madonna di Loreto)
1603-1605, Oil on canvas, 125 x 93cm,
Galleria Nazionale d'Arte Antica, Rome, Italy
위 세 작품을 모두 감상한 바와 같이, 오늘 그림과 그의 그림 대부분의 특징은 강한 빛과 짙은 어둠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빛과 그림자의 날카로운 대비를 기교적으로 구사하고 형상을 힘차게 조소적(彫塑的)으로 묘사함으로써, 근대사실의 길을 개척한 것입니다.
세 그림 모두 측면에서 사선으로 들어오는 빛이 극적인 행위로 가득찬 한 장면을 비추고 있습니다. 마치 등장한 인물들의 몸짓이나 자태가 조명을 받은 연극무대의 배우들처럼 연출된 느낌을 주며, 빛의 그림자나 색채의 명암보다는 사물의 전체적인 윤곽과 선이 강조되었습니다.
이런 그는 성모와 성자를 주제로 한 그림에 로마의 빈민들을 등장시켰는데, 이는 귀족적 품위를 중시했던 당시의 학술적 화풍과 그 때까지의 모든 관습이나 전통에 도전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리아나 예수의 모델이었던 인물이 위엄과 품위가 없고 실제 삶에 지나치게 가깝다고 여겨져서, 당시에는 거부당하거나 다소 냉소적인 평가를 듣습니다.
또한 카라바조의 작품에는, 깊은 종교적 정신이 일상적인 삶 속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주인공들의 모습과 배경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꾸밈없는 모습입니다.
특히 세 번째로 소개한 마지막 작품은 소박하지만 매우 깊은 감동을 주며, 한번 보고도 뇌리에 깊이 각인된 듯 깊은 인상을 줍니다.
여기서 마리아는 이전까지의 그림에서 그려진 전통적인 형태의 모습과는 다르게 매우 평범한 여성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더러운 누더기 옷을 걸친 순례자들이 마리아와 예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데, 이들이야말로 이 그림의 진정한 주인공입니다.
순례자들은 독자들에게 더럽고 짓무른 발을 들이밀고 있는데, 이러한 다소 충격적이고 사실적인 세부묘사가 카라바조의 동시대인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불러일으킨 이유입니다.
위 그림 모두 성스럽거나 신비한 성자로서의 예수가 아닌, 천하고 서민적인 정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서 살펴본 칼 하인리히 블로히의 그림보다도 더 강조되었으며,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만큼 훨씬 더 과장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우리 곁에 태어난 한 인간의 일상을 보는 듯 평범하고 자연스러우며, 숙명으로 받아들인 듯한 고요한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배어 있습니다.
강한 빛과 짙은 어둠의 혁신적인 명암법으로 자연주의적 화풍 완성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종교적인 주제를 이상적으로 표현하는 전통을 경멸하고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소재로 대치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그는 모든 이상적이고 관념적인 미술을 부정하였으며, 오직 살아 숨쉬는 진실만을 그리기를 원했습니다.
이번에 소개한 그림들에서도 마치 내 눈앞에서 사건이 벌어진 것처럼 주인공들의 동작과 심정적인 표정이 생생합니다. 관람자가 마치 사건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함께 동참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관람자에게 단순한 관찰자가 아닌 목격자의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회화의 혁명을 일으킵니다.
전체적인 카라바조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면, 그의 초기 작품들은 금색을 바탕으로 한 밝은 색을 조화롭게 구성하였으나 만년의 작품에서는 억제된 빛으로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습니다. 오늘 감상한 말년의 세 작품들에서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하였을 것입니다. 비슷한 세대를 풍미했으며 카라바조풍을 발전시킨 화가, 오라치오 젠틀레스키의 종교그림과 같은 성스럽고 우아한 느낌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르네상스 미술이 퇴조하면서, 그가 주로 사용한 이런 혁신적인 명암법은 바로크 회화의 주요 특징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가 그린 소재들은 이후 정물화·풍경화·인물화 등 장르화라는 새로운 분야로 발전했습니다.
이렇듯 카라바조는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선구자이자 당시 '자연주의'라고 불린 사실주의적 화풍을 연 개척자였지만, 그 당시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래서 이제는 '저주받은 화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바로크 미술의 정의와 간략한 특징
"바로크(baroque)"라는 낱말은 "일그러진, 불규칙한, 지나친"이란 뜻에서 유해한 말입니다. 대략 17세기 초에서 18세기 전반(1600년경부터 1750년까지)에 걸쳐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가톨릭 국가에서 발전한 미술 양식을 말합니다.
14세기에서 16세기에 이르기까지의 당시 유행하던 르네상스 미술은 단정하고 질서정연하며, 표현도 조화롭고 이성적이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바로크 미술은, 강한 왕권과 함께 귀족과 고위 성직자, 그리고 부유한 상인계급의 등장으로 나타났으며, 거칠고 과장된 표현과 남성 경향의 17세기 미술양식을 말합니다.
르네상스와 비교해서 바로크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보다 빛나는 색채, 음영과 질감의 풍부한 대비 효과, 자유로운 표현과 붓질 등으로 비고전적, 동적, 남성적, 불규칙적인 성격과 심한 과장성의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당 건축과 함께 궁전 건축에서 그 특징들을 찾을 수 있는데, 베르사이유 궁전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17세기 초의 대표적인 미술가는 오늘 그림의 카라바조입니다. 그의 사실주의는 이상화된 사실이 아닌 현실자체의 표현으로 등장하는 성인의 모습에는 이상화된 성인이라기 보다는 현실속의 사람입니다. 그는 사건을 보다 진실하고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위 그림들처럼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극적을 사용하였습니다.
대표적인 화가들로는, 스페인의 궁정화가였던 벨라스케즈와 거대한 화면에 사물을 운동감있게 배치하고 색과 명암을 풍부하게 묘사한 루벤스 등이 카라바조의 뒤를 이었으며, 집중적인 광선의 표현과 깊은 인간내면을 표현하여 바로크 미술의 절정을 이루었던 렘브란트, 초상화가로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반다이크, 프랑스 근대화가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푸생, 그리고 부드러운 빛과 정밀한 색채의 조화로 평온한 정취를 자아낸 베르메르 등을 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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