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 1518. [역경의 열매] 유동부 (1-15) “암 투병 아들이 먹어도 될 건강한 빵 만들자”
군에 있던 아들 흉선암 선고받고 치료 중
오갈 데 없던 처지에 교회서 재기 힘 얻어
한 교인 본인 카페서 빵 만들어 팔라 제안
유동부 대표가 지난 6월 18일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의 사업장에서 치아바타 빵 제조 공정을 설명하고 있다. 춘천=신석현 인턴기자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스물다섯 살부터 제과점, 슈퍼마켓, 책 대여점, 우유 대리점, 2번째 제과점, 식품제조업, 제과점 카페까지 연속으로 7번 사업에 실패하다 보니, 돈 문제만 깔끔하게 해결된다면 영혼이라도 팔고 싶었다.
2014년 3월, 마지막 사업이 무너지던 때 군 생활 8개월째 되던 아들은 흉선암을 선고받고 수술 후 방사선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아내와는 떨어져 살 수밖에 없었고, 오갈 곳이 없었던 나와 아들은 강원도 춘천 한마음교회(김성로 목사)로 갔다. 김성로 목사님은 우릴 따뜻하게 받아주셨고 교회에 들어간 이후로 한 달 반가량을 매일 점심과 저녁을 사 주시면서 힘내라고, 내가 너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김 목사님으로부터 부활 신앙과 재림 신앙을 배우며 내 신앙관을 정립해 나갔고, 난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3개월쯤 지났을 때 춘천교대 안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던 교인이 1.2m짜리 테이블과 냉장고를 내어줄 테니 빵을 만들어서 팔아 보라고 제안했다. 그때 방사선치료 중인 아들은 뭘 먹어도 간지러워했고, 나는 그런 아들이 먹어도 되는 건강한 빵을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찾아낸 치아바타 빵은 환자나 몸이 약한 사람이 먹어도 몸에 거부반응이 일어나지 않았다. 점점 소문이 나기 시작했고 공중파 방송에 나가게 되면서 전국에서 6개월치의 주문이 들어왔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물량이었다. 그때 교회 부목사님과 청년들이 달라붙어 열흘 만에 춘천 외곽의 산 밑에 작고 아담한 59㎡(약 18평)짜리 공장을 만들었다. 그 외딴곳까지 전국에서 정말 많은 분이 찾아오셨다.
11개월 만에 시내에 있는 신축건물 1층과 2층을 얻어 확장 이전했다. 17명의 직원도 새로 입사했다. 2016년 10월 유동부치아바타라는 상호로 사업자등록을 했다. 이후 난 마치 ‘유동부’라는 제3의 인물을 보고 사는 것 같았다. 성경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내 안에 더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나의 사랑하는 예수님만이 사신 것이라는 말씀 그대로다. 지금의 사업체도 부활의 증인들이 모여 서로 사랑하고 믿고 격려하면서 빵을 만들어 팔고 있는 것뿐인데 하나님께서는 너무나도 빠른 속도로 ‘유동부치아바타’를 세상에 알려지게 하셨다.
7월 현재 유동부치아바타는 매일 4000개씩 생산한 빵을 전국으로 보낼 때 빠짐없이 예수님의 부활 메시지가 담긴 전도지도 함께 동봉한다. 유동부치아바타의 모든 가족은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은 부활의 증인이다. 생명도 물질도 모두 주님의 주권에 속해 있음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시작할 나의 고백은 이미 성공한 사람으로서 전하는 메시지가 아니다. 이제 막 신앙관을 정립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시작점에 서 있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겸손한 마음으로 담담하게 전하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다.
약력=전남 보성 출생. 1969년생. 유동부치아바타 대표, 춘천한마음교회 출석.
* [역경의 열매] 유동부 (1) "암 투병 아들이 먹어도 될 건강한 빵 만들자"
* [역경의 열매] 유동부 (2) 열여섯 어린 나이에 가정 폭력 피해 홀로 서울행
* [역경의 열매] 유동부 (3) 칠·용접 등 닥치는 대로 기술 배우며 홀로서기 시작
* [역경의 열매] 유동부 (4) 내 인생 송두리째 바꾸게 될 제과·제빵과의 첫 만남
* [역경의 열매] 유동부 (5) 암흑 같은 시절 안식처 돼 준 교회서 하나님 만나
* [역경의 열매] 유동부 (6) 첫 사업과 결혼, 모든 게 잘 풀리나 싶더니…
* [역경의 열매] 유동부 (7) 연이은 사업 실패로 '투잡' 뛰며 피나는 고통의 삶
* [역경의 열매] 유동부 (8) '예수 부활'이 유일한 증거? 이유 궁금해 미칠 것 같아
* [역경의 열매] 유동부 (9) 결정적 증거 '예수 부활'로 확실한 믿음의 눈 열려
* [역경의 열매] 유동부 (10) "영혼이라도 팔아 월세·전기세·인건비 해결된다면…"
* [역경의 열매] 유동부 (11) 언제나 주님 사랑으로 품어준 목사님과 교회공동체
* [역경의 열매] 유동부 (12) 카페 한쪽서 만든 '건강한 빵' 날개 돋친 듯 팔려
* [역경의 열매] 유동부 (13) "여러분을 기쁘게 해주고 싶습니다" 직원들에 진심 전해
* [역경의 열매] 유동부 (14) 장모님 눈높이에 맞춰 구원·복음 전하자 "아멘 아멘"
* [역경의 열매] 유동부 (15·끝) 내 사명은 '건강한 빵' 만들겠다는 첫 본질 지키는 것
정리=임보혁 기자 bossem@kmib.co.kr
***[역경의 열매] 유동부 (2) 열여섯 어린 나이에 가정 폭력 피해 홀로 서울행
직장 없이 떠돌던 아버지 식구들 폭행
어머니·형·동생과 함께 도망 다니다
중2 때 학업 그만두고 생활전선에 나서
유동부 대표가 2003년 7월 강원도 춘천의 한 호텔 앞에서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부인 박순정씨와 아들 태정, 딸 은진씨. 태정씨는 현재 유동부치아바타 제품개발생산팀장을 맡고 있다.
난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 삼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유년기는 그다지 좋은 기억은 없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탓이다. 아버지께선 별다른 직장 없이 떠돌이 생활을 많이 하셨던 거로 기억한다. 술도 술이지만, 방랑벽이 심하셨던 듯하다. 아버지는 집엔 자주 안 들어오셨지만, 이따금 집에 오시면 툭하면 어머니는 물론이고, 우리 삼 형제를 때리곤 하셨다. 그 탓에 남아나는 살림살이도 없었다. 폭력이 심할 때면 형을 거꾸로 매달고 때리거나, 집 앞 닭장에 날 묶어 놓고 때리던 때도 있었다. 어머니를 때리실 땐 동생과 난 이불 속에서 당시엔 잘 알지도 못했던 하나님께 그저 어머니가 더 맞지 않게 해달라며 기도했던 기억도 어렴풋이 있다. 어머니와 우리 삼 형제는 그런 아버지를 피해 순천, 전주, 임실, 조성 등 이름 모를 주변 소도시로 도망을 다녔다.
형은 폭력적인 아버지를 피해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 있는 친척 집에 맡겨졌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형과는 별다른 교류를 하지 못했다. 중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난 동생과 함께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았다. 어머니께선 돈을 벌기 위해 따로 나가서 사셨다. 이따금 아버지가 우리 형제의 집을 찾아오실 때면 먹을 것이 없다는 우리에게 설탕 한 포만 덜렁 던져두고 가셨을 뿐이었다. 한창 맛있는 것을 먹고 자라도 모자랄 나이에 먹을 것이 없던 우린 오죽했으면 잠을 잘 때면 겨드랑이 옆으로 지나가는 쥐를 쫓을 힘조차 없었다. 그나마 당시 다니던 학교 담임선생님께서 우리가 불우한 가정환경 가운데 있다는 걸 아시곤 도움을 주셨기에 버틸 수 있었다.
그 후로 아버지와는 뜨문뜨문 연락하면서 지냈고, 연락이 거의 끊기다시피 하다가 세월이 흘러 내 결혼을 앞두고 한 번 얼굴을 뵈었다. 그리곤 얼마 못 가 암에 걸리셨고, 결국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지금 와서 아버지께서 왜 그러셨을지 이해해보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시대를 지나오신 탓도 있지 않았을까 지레짐작만 할 뿐이다. 그때 이후로 난 절대 내 자녀들에게 손찌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중학교 2학년이 끝나가던 겨울, 난 학교를 그만뒀다. 곳곳을 전전하며 돌아다닌 탓에 학업에 집중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먹고 사는 것조차 변변찮았던 내게 학업은 사치와 같았다. 난봉꾼인 아버지가 무서워 어디로든 피하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겨울방학 때 어머니는 날 서울에 사시는 외삼촌 댁으로 보내셨다. 계속 아버지를 피해 도망만 다니면서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던 때라 지방에 살던 사람 중엔 무작정 일자리를 알아보러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많았다. 나도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순천에서 홀로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공부에 집중해야 할 열여섯의 어린 소년은 그렇게 생활전선에 내던져졌다.
***[역경의 열매] 유동부 (3) 칠·용접 등 닥치는 대로 기술 배우며 홀로서기 시작
전봇대 구인광고 보고 큰 공업사 취직
비인격적 대우와 폭력·다툼은 다반사
기숙사 생활하며 일 배우는 데만 집중
1989년 즈음 스무 살이던 유동부(맨 오른쪽) 대표가 춘천한마음교회 청년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당시 친구들은 대학 신입생이었지만, 유 대표는 빵집에서 일할 때였다.
1985년 즈음 열여섯의 나이로 서울에 홀로 올라왔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당시는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로 모여든 이들이 전봇대마다 부착된 구인광고를 보고 취직하던 일이 자연스러울 때였다. 나도 서울로 일단 올라가기만 하면 먹고는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외삼촌이 살던 구로구 가리봉동에 거처를 잡았다. 그곳에서 며칠을 머물며 이따금 인근 구로공단에 나가 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마냥 외삼촌 댁에만 머물 수 없을 것 같아 기숙사를 제공하는 회사 위주로 찾았다. 길을 헤매다 한 전봇대 구인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석유풍로와 연탄보일러 등을 만드는 철공소였다. 회사를 찾아갔다. 당시는 어린 나이의 학생에게도 일단은 한번 일해보라는 분위기였던 터라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회사가 마련해준 기숙사에선 20대 중후반 되는 형들과 함께 지내게 됐다. 오롯이 홀로서기의 시간이었다. 월급으로 7만원 정도 받았다. 나이가 어린 날 받아주기만 한다면, 기술만 배울 수 있다면야 급여는 중요하지 않았다. 규모가 큰 공업사였기에 사장님과 직접 대면하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같이 일하는 형들과 늘 함께 다녔다. 3년 정도 형들과 함께 지내며 페인트칠부터 용접, 프레스 기계 작업 등 닥치는 대로 일을 배웠다. 하지만 좋았던 추억은 별로 없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야말로 어두운 밑바닥 생활이었다. 인격적인 대우는 기대할 수 없었을뿐더러 술과 다툼, 폭력 등이 늘 내 주변을 에워싸고 있어 어른에게서 무언가를 본받을 만한 삶은 아녔다. 형들에게 석유풍로를 다듬던 망치로 머리를 맞은 기억부터 얼굴에 묻은 페인트 자국을 지우려고 ‘신나(시너)’라 불리는 페인트 도료 희석제로 세수를 하다시피 한 경우도 많았다. 한마디로 석유로 세수를 한 것과 다름없었던,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이없었던 기억들이다.
작은 프레스 기계를 다루다가 실수로 철판에 손등을 찢기는 사고가 난 적도 있다. 4~5바늘을 꿰맸는데 그 상처는 아직도 남아 있다. 하지만 당시 같이 일하던 형 중엔 손가락이 잘려서 병원에 실려 가는 경우도 많았던 터라 이 정도 사고는 아무것도 아녔다.
한 번은 같은 기숙사에 사는 형이 프레스 기계에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옆에 있던 난 당황한 나머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그 손가락을 공장 벽 아래 땅속에 파묻어 버렸다. 병원에 가져가면 접합수술을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 덕에 난 그 형의 병시중을 다 들었던 기억도 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명절 때는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엘 이따금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명절 전 공장 인근의 대중목욕탕을 찾을 때면 진풍경이 벌어진다. 명절을 앞두고 목욕탕을 찾은 이들로 금세 목욕탕 물이 시커메지기 일쑤였다. 목욕한 뒤 서울역에서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여러 번 갈아타고 나서야 겨우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어머니도 어머니대로 생존을 위해 정신없이 사시느라 경황이 없으셨지만, 그래도 항상 우리 삼 형제를 걱정하시며 최대한 뒷바라지하시려 헌신하신 점은 지금도 감사드린다.
***[역경의 열매] 유동부 (4) 내 인생 송두리째 바꾸게 될 제과·제빵과의 첫 만남
공장일 손에 익자 소자본 창업하고 싶어
비용 문제 고민 중 한 선배 제과점 추천
새벽부터 밤까지 고된 노동의 삶 시작돼
유동부 대표가 지난 6월 18일 강원도 춘천의 사업장에서 치아바타 빵에 들어가는 원재료를 설명하고 있다. 빵 제조 기술을 배우려 새벽같이 일어났던 그의 숱한 노력과 기도가 그를 지금의 자리로 이끌었다. 춘천=신석현 인턴기자
공장에서 일한 지 1년쯤 지나고 2년제의 비인가 야간고등학교에도 진학했다. 하지만 그저 졸업장이라도 따는 것이 목표였을 뿐 공부엔 관심이 없었다. 출석 도장만 찍는 것에 의의를 두고 공부는 뒷전이었다.
1987년 열여덟 살이 된 난 이제 어느 정도 첫 직장에서의 일도 손에 익었겠다, 소자본으로라도 나만의 장사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공업사를 차리기엔 창업비용이 너무 많이 들 것 같아 엄두가 안 났다. 당시 다니던 야간고등학교에서 알게 된 한 선배가 제과점은 어떠냐며 추천해줬다. 이때 처음 알게 된 제빵, 제과가 앞으로의 내 인생을 바꾸게 될 줄은 그땐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오가며 본 동네 제과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름때 묻혀가며 일해야 했던 공업사 환경에 비하면 너무나도 깨끗하고 좋아 보였다. 열심히 제빵 기술을 배우면 언젠간 내 가게를 차릴 수 있겠단 생각도 들었다.
그 선배는 내게 강원도 춘천에 있는 한 제과점을 소개해줬다. 서울에 정착한 지 3년여 만에 다시 또 낯선 땅 춘천으로 향했다. 첫 직장 공업사와 마찬가지로 먹여주고 재워주며 기술만 가르쳐준다면, 월급 같은 건 안 줘도 됐었다. 새벽 4시 30분부터 밤 11시까지 빵을 만들고, 배달하는 등 고된 육체노동의 삶이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빵 만드는 법을 바로 배울 수 있었던 건 아녔다. 말 그대로 처음 1년간은 주야장천 설거지만 했다. 요식업계가 그렇듯 제과점 업계도 지독한 계급사회였다. ‘시다’라 불리는 잡일을 하는 보조부터 오븐 등을 맡는 ‘가마돌이’ ‘가마장’, ‘주단파’라 불리는 반죽 담당을 거쳐, 케이크 등을 장식하고 성형하는 ‘주말이’, 매장관리 등 전체적인 총괄 ‘공장장’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단계마다 몇 년씩 걸리는 일은 다반사였다. 빵의 주재료인 밀가루 반죽조차 한 번 만져보려면 몇 년은 족히 걸렸다. 당시는 일할 사람도 넘쳐났던 터라 식사 때면 공장장에게 숟가락, 젓가락까지 갖다 바쳐서라도 기술을 배워야 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기술을 가르쳐 주면 금방 다른 데로 이직해버리고 할 때라 누구도 쉽게 기술을 가르쳐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혼자서라도 터득하고 살아남아야겠단 생각에 정해진 출근 시간보다 1시간씩 일찍 일어나 몰래 반죽을 만지며 곁눈질로 본 기술을 연습 삼아 시도해보곤 했다. 몰래 반죽에 팥 앙금을 넣어봤다 상사에게 걸려서 혼나기도 일쑤였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성격도 급하고, 이론에도 빠삭하지 않았던 난 기술적으로도 특화된 제빵사는 아니었다. 나중에 서울에 다시 올라와서 몇몇 빵집에서 일도 했지만, 처음부터 인정받지는 못했다. 지금도 난 타고난 제빵 기술이나 재능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어머니께 물려받았던 성실함 때문에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빨리 기술을 배워 조금 더 많은 월급을 받고, 하루빨리 내 사업장을 갖고 싶었다.
***[역경의 열매] 유동부 (5) 암흑 같은 시절 안식처 돼 준 교회서 하나님 만나
퇴근 후 마음 둘 곳 없어 거리 배회하다
교회의 좋았던 기억 떠올라 교회로 발길
한 청년의 영적세계 설명 듣다 성령 임재
유동부 대표가 1990년 초 당시 출석했던 서울 구로구 동천장로교회 청년회 모임에 참석한 모습.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 대표다.
철공소에서 생활하던 때나 빵 제조 기술을 어깨너머 조금이라도 배우려 기웃하던 당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암흑 같은 시절이었다.
상식과 예절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초를 배우고 사람의 기본이 되는 인격을 올바로 형성해야 할 시기였음에도 난 그저 생존을 위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고밖에는 표현이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날 안타깝게 여기셨는지 1988년 열아홉 살이란 비교적 이른 나이에 만나주셨다. 그때의 삶을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도, 하나님을 알게 된 것도 모든 게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었음을 느낀다.
당시 제과점 일을 마치고 나면, 난 그저 정처 없이 춘천 시내를 배회하곤 했다. 어린 나이에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낯선 곳에서 일에만 치여 사느라 이래저래 마음이 곤고하고 외로웠던 탓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날도 어김없이 정처 없이 거리를 떠돌던 내게 지붕 위 십자가와 함께 판자로 덧댄 누추한 교회가 눈에 들어왔다. 서울 구로공단에서 일할 때 우연한 기회로 동네 교회에 몇 번 나갔던 적이 있었다. 유일하게 날 사람답게 대해주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마치 안식처와 같았던 좋은 기억이 어렴풋하게나마 있어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게 교회로 발길이 향했다.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한 청년이 나를 반겼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본의 아니게 그와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는 춘천교대를 졸업하고 교사 발령을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대화를 나눠본 그는 ‘예수님’이란 사람에 대해 왠지 모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이 세상엔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가 있다고 설명을 해주는데 순간 내 눈앞에 까만 우주 공간에 하나님, 천사, 마귀, 인간 네 가지 부류의 영적 존재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펼쳐졌다. 당시 받은 성령의 역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신비하고 놀라운 비밀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말하는 예수가 누구인지, 믿음이란 건 무언지 반드시 알아내야 했고 그 중심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가 곧 내 것이 될 것만 같았고, 이들과 함께라면 지금 내가 겪는 암울한 현실에서 벗어날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 형은 한 선생님과 함께 신앙 훈련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 형과의 인연이 지금 내가 다니고 있고, 내 신앙관을 제대로 정립하게 만들어 준 춘천한마음교회와 그 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김성로 목사님과의 인연으로 이어지게 될 줄은 그땐 꿈에도 몰랐다.
당시 아무것도 모르고 그 형을 따라간 한 모임에서 귀신을 쫓는 역사가 일어나고, 사람의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충격적인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다.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그때부터 그 형과 본격적으로 신앙훈련을 시작하게 됐다. 우린 ‘네비게이토’란 선교단체에서 사용하던 교재로 성경공부를 했다. 훈련과정은 만만찮았다. 매일 말씀 30장 읽기, 1시간 기도하기, 말씀 한 구절 암송하기를 실천해야 했다. 이걸 안 하면 서로 말씀을 갖고 교제할 때 끼워주질 않았다. 새벽마다 일어나 시간을 쪼개가며 기를 쓰고 기도했다. 화장실에까지 성경을 갖고 가 읽었다. 점점 영적 세계에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유동부 (6) 첫 사업과 결혼, 모든 게 잘 풀리나 싶더니…
교회 청년부 봉사하다 아내 만나 결혼
사업 생각 키워 오다 한 제과점 인수
기술·경력 등 부족으로 결국 빚더미
유동부 대표가 1996년 경기도 성남시의 한 우유 대리점에서 우유 배달을 할 당시 목장 견학을 갔다가 첫째 아들, 아내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김성로 목사님께 양육을 받으며 구원의 확신, 기도 응답의 확신을 얻었다. 당시 목사님 메시지는 어두운 세상 가운데서 빛의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였다. 마치 그의 눈에선 불이 나오는 듯해 뜨거웠다. 금방이라도 세상을 빛의 세계로 바꿔 버릴듯한 그 힘은 지금 생각해도 전율이 느껴질 정도다. 목사님 스스로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으셨지만, 난생 처음 접하는 불같은 성령의 능력 앞에 우리 모두 굴복됐다.
1년여 동안 목사님의 양육을 받던 나는 어머니 요청으로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됐다. 당시 어머니는 서울로 올라오셔서 식당과 공장 등 닥치는 대로 일하시며 생계를 꾸려 나가셨다. 비록 단칸방이었지만, 다시 가족이 모여서 살 수 있게 됐다. 방이 좁아 서로 몸을 포개 쪽잠을 잤던 기억이 있다.
서울로 올라온 1993년, 스물넷이 된 나는 나만의 사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커졌다. 기술을 배우려고 제과점을 옮겨 다니던 나는 다리를 다쳐 장사를 접게 된 한 사장님으로부터 가게를 넘겨받게 됐다. 드디어 내 첫 사업장이 생긴 것이다.
그 무렵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도 했다. 일과 사랑까지 모든 게 순조로웠다. 앞으론 승승장구할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신앙생활은 서울에 올라와서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서울 구로구의 한 장로교회에 출석했다. 돈 버는 족족 교회와 전도, 선교에 다 썼을 정도였다. 교회 청년부 봉사도 열심히 했다. 부인도 그때 만났다. 부인은 당시 그 교회에서 피아노 반주 봉사를 했는데 그 모습이 좋아 보여 결혼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춘천에서의 뜨거웠던 1년간의 신앙생활만으론 버티기 힘들었나 보다. 그때 받은 신앙의 열정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생활만 이어지자 결국, 내가 제일 경멸했던 위선적인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사업도 기술이나 경력 등 모든 것이 부족했던 탓일까. 점점 여의치 않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치 소꿉장난하듯 열정만 갖고 뛰어들었으니 잘될 리가 없었다. 결국, 첫 사업은 빚만 남긴 채 실패했다.
춘천을 떠난 지 10년째인 1999년쯤에 이르러서는 더는 이렇게 타락하고 변질한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다는 애통함이 생겨 다시 춘천한마음교회를 찾게 됐다.
10년 전 그 뜨거움을 회복하고 싶다며 찾아온 내게 김 목사님은 기꺼이 교제권을 허락해 주셨다. 당시엔 토요일마다 예배를 드리러 춘천에 내려올 때면 너무 좋았다. 비로소 안식을 얻는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 더는 신앙생활을 이어가지 못하겠단 확신이 들었다. 춘천한마음교회를 섬기자고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는 지금도 아무 문제 없이 신앙생활 열심히 잘만 하고 있는데 뭐하러 그 먼 강원도까지 교회를 다니냐며 반대했다. 반대가 너무 심해 난 결국 무릎까지 꿇고 한 번만 가보자고 부탁했다. 겨우 한 번 마음을 열고 같이 춘천으로 내려온 아내는 첫 예배를 드리고선 ‘지금까지 내가 했던 신앙생활에 큰 문제가 있었구나’를 깨닫게 됐고 그 이후론 나와 한마음이 됐다.
***[역경의 열매] 유동부 (7) 연이은 사업 실패로 ‘투잡’ 뛰며 피나는 고통의 삶
경험 부족 등으로 시도한 사업 모두 실패
앞선 사업서 진 빚 갚으려 밤낮없이 일만
아내도 갓 난 아이 재워 두고 배달일 도와
유동표 대표가 1995년 서울 구로구 구로동에서 책 대여점을 할 당시 아내와 아들 모습. 유 대표는 당시 아내가 자신의 사업을 뒷바라지하느라 고생이 많았다고 회상했다.
1993년 6월 경기도 광명시에서 첫 사업으로 제과점을 시작했으나, 경험 부족 등으로 실패했다. 이듬해 3월 서울시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거목상회’란 이름으로 작은 슈퍼마켓도 열어봤지만,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95년 7월 즈음 인근 구로동에서 세 번째로 시작한 책 대여점 사업과 경기도 성남시로 자리를 옮겨 문을 연 우유 대리점 사업까지…. 실패의 연속이었다.
사업을 몇 번 하다가 망할 때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현금 흐름이 끊긴다는 점이다. 하지만 다시 취업해 직장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빚을 더 내서 다시 장사해야 현금을 계속 만질 수 있다는 역설의 함정에 빠져 계속 사업에 도전하게 된다.
그렇게 번듯한 나만의 사업장을 갖겠다는 도전은 계속됐다. 사업이 안정 궤도에 올라오기 전까지 한동안 두 개 일을 병행하는 이른바 ‘투잡’을 뛰는 일도 다반사였다. 앞선 사업에서 진 빚을 갚아야 했기 때문이다.
책 대여점을 할 땐 아내가 가게를 주로 보고, 나는 경광등을 만드는 회사의 운전기사로 일했다. 우유 대리점을 할 때도 한 도시가스 회사의 고지서를 출력하는 인쇄 업체에서 운전기사로 일했다. 밤새 우유 배달을 하고 낮에는 운전하다 보니 몇 개월도 안 돼 입안에서 실핏줄이 터졌다. 가만히 있어도 입에서 피가 날 만큼 고된 삶의 연속이었다. 결국, 운전기사 일은 그만뒀다.
덩달아 아내도 고생했다. 우유 배달을 할 때 아내는 갓 난 첫째 아이를 집에 재워놓고는 나와 밤새 함께 했다. 그럴 때면 아내는 우유 배달 하는 차 안에서 착유기로 젖을 짜내 가면서 도왔다.
고된 삶 가운데 유일한 낙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며 얻는 하나님의 위로하심이었다. 춘천한마음교회에 오게 된 것은 책 대여점을 하다가 망하고, 우유 대리점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반복되는 사업 실패로 인한 은행 대출 등으로 큰 빚을 지게 됐고, 급기야는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런 나를 위해 온 교회 성도들은 눈물로 함께 기도해 주셨다.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토요 찬양 집회가 끝나면 주일 새벽까지 함께 밤을 지새워가며 내 고민을 들어주고 기도해 준 형제들도 많았다.
우유 대리점이 망하고 재차 도전한 제과점이 또 망했을 때였다. 한 교회 형제가 불러준 ‘강하고 담대하라’라는 찬양이 내 마음을 울렸다. 난 그 찬양을 밤새 들으며 한 달 내내 잠도 못 자고 울기만 했다.
당시 난 나름 신앙생활도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계속 사업이 무너지니 악에도 받쳤었다. 하나님께 “십일조는 버는 돈이 있을 때 하는 것 아닌가요. 매월 적자가 나는데 이럴 땐 하나님이 오히려 손해나는 만큼 돌려주셔야 하는 것 아닌가요”라며 따지듯 묻고 싶은 마음도 내 속에서 끊임없이 올라왔다.
지금 생각하면 뜻도 안 되고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그땐 그렇게 정상적인 생각을 못 할 만큼 구석으로 몰렸던 나였다.
***[역경의 열매] 유동부 (8) ‘예수 부활’이 유일한 증거? 이유 궁금해 미칠 것 같아
수련회서 ‘부활은 역사적 사건’ 설교 듣고
지금껏 믿었던 십자가 사랑 신앙과 혼란
부활 사실 확인하려고 자료 파고드는데
유동부(왼쪽) 대표가 지난해 10월 그의 영적 스승인 김성로 춘천한마음교회 목사님과 함께 찍은 사진.
2001년 경기도 성남에서 우유 대리점 사업을 할 때다. 내가 부활의 증인이 된 잊을 수 없는 해다.
그해 나는 춘천한마음교회 청년, 대학생 친구들과 함께 수련회에 참석했다. 수련회 주제 말씀은 요한복음 2장 22절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였다.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수련회 주제는 우리 모두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목사님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증거는 부활 사건이고,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도 헛된 것이고, 또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고린도전서 15:14, 17)”이라고 하셨다. 당시 나는 이런 말씀이 성경에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십자가 사랑이 기독교의 처음이고 전부며, 오직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예수님의 사랑에 보답해야 한다는 ‘빚진 자’의 신앙으로 가득 찼던 나는 이 말씀이 처음 선포됐을 때 혼란스러웠다. 이후로도 이 같은 내용이 반복해서 선포되자, 혼란스러움을 넘어 분이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예수님 이름으로 겪은 수많은 능력과 기적, 은혜만으로도 하나님과 천국 지옥을 믿는데 부족함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부활만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유일한 증거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아닌 것 같았다. 생명보다 귀한 십자가 사랑의 신앙을 조금이라도 부활에 내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교회를 떠날 수도 없었고, 수많은 증거 중 하나인 부활이 갑자기 예수님이 하나님이신 유일무이한 증거라고 해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없어 정말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잠을 잘 수 없는 극심한 고통의 시간이 열흘째 될 즈음이었을까. 수련회 주제 말씀이었던 요한복음 2장 22절과 함께 선포된 사도행전 17장 31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란 말씀은 새롭고도 강렬하게 내 마음속에 꽂혔다.
특히 사도행전의 ‘모든 사람’이란 단어가 내 마음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개신교인뿐만 아니라 불교, 이슬람, 힌두교, 무신론자들 모두가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증거가 있다면 성경 말고 다른 책에도 그 증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내가 믿는 기독교가 절대 진리라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건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일단 성경이 아닌 다른 책에서 그 증거를 찾아보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근처의 한 중고 서점에서 고등학교 세계사와 중학교 사회과 부도를 보게 됐다. 책을 본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역경의 열매] 유동부 (9) 결정적 증거 ‘예수 부활’로 확실한 믿음의 눈 열려
중고 서점서 교과서와 사회과 부도 본 후
예수의 역사 배경·죽음·부활 사실 확인
그 후 어렴풋한 신념이 믿음으로 바뀌어
유동부 대표가 찾은 한 중학교 교과서 사회과 부도 속 ‘세계 연대표’에 BC 4년 ‘크리스트 탄생’이라고 적힌 모습(동그라미 안). 아래는 한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속 ‘크리스트교의 성립과 전파’란 단원을 유 대표가 밑줄을 그어가며 읽었던 흔적.
중고 서점에서 중학교 교과서 사회과 부도를 구입해 펼쳐봤다. 책 속 ‘세계 연대표’에 우리나라는 삼국시대였던 BC4년 ‘유럽에서 크리스트(예수) 탄생’이라고 떡하니 적혀 있었다. 그때 알았다. 그동안 난 한 번도 자문해 본 적 없이, 무의식중에 예수님을 제우스나 피터 팬 같은 신화나 동화 속 인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곧이어 펼쳐 본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의 중간쯤엔 ‘크리스트교의 성립과 전파’란 단원이 있었다. 예수라는 인물이 등장했을 때의 역사적 배경과 그의 죽음 그리고 그의 부활을 전하는 제자들에 의해 하나의 교파가 형성됐다는 내용이 나왔다. 313년엔 로마의 국교 중에 하나로 인정됐으며, 결국 392년엔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됐다는 내용도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아 한없이 울었다.
“아! 사도행전과 세계사는 따로가 아니라 하나였구나. 세계 역사를 사도행전이 설명해주고 있었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성경은 이스라엘의 역사책이었다.
난 나만의 신앙 피라미드에 갇혀 하나님이 주신 유일무이한 증거이자 역사적 사건인 ‘부활’을 붙잡지 못했다.
그제야 비로소 성경 요한복음 속 내용이 통째로 내 속에 들어왔다.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기적을 보고, 직접 행하기도 했던 제자들은(눅 9:6)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지 못하고 십자가 앞에서 모두 도망쳤다.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다”며 “내가 하나님인 유일한 증거는 부활이다. 다른 종교에도 있는 이적과 표적 말고 그 어떤 신도 흉내 낼 수 없고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부활의 몸을 너희에게 보여 주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믿을 수 있는 확실한 길이 열리는 거야”라고 하신 것이다. 신념이 믿음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란 말씀처럼 믿음은 내가 정한 신앙생활의 기준에 도달했거나, 믿어야 한다는 필요나, 믿어진다는 당연함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실과 증거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난 지금까지 검증된 적 없는 윤회설을 믿는 불교도와 다를 바 없는 신념의 소유자였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부활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이 확증되니 십자가 사랑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게 다가왔다. 창조주 하나님이 나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감당할 수 없는 사실 앞에 나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셨으면 나를 위해서 돌아가셨을까”하는 마음은 이전과 차원이 달랐다. 모래성처럼 쓰러지고 세워지고를 반복하던 나의 신앙은 부활이란 반석 위에 꼿꼿이 세워졌다. 2001년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님은 부활을 선포하고 계신다.
***[역경의 열매] 유동부 (10) “영혼이라도 팔아 월세·전기세·인건비 해결된다면…”
대기업 납품하며 실속 없이 규모만 커져
수익 확대하려 연 카페 수천만원씩 적자
제조업서 번 돈으로 메우다 더 어려워져
유동부 대표가 2014년 다시 일어서기 위한 사업을 구상했던 한 교회 지인이 운영하는 춘천교대 내 카페 전경.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명확히 가슴에 새기며 신앙은 한층 더 성숙해졌지만, 여전히 실제 삶은 녹록지 않았다.
2008년 6월 즈음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에서 조그맣게 조각 케이크 제조업을 시작했다. 6번째 도전이었다. 당시 아내는 꽁꽁 언 케이크를 무리하게 자르느라 손목에 무리가 많이 갔고 그로 인해 지금도 무거운 물건을 들 때면 손목이 아플 만큼 고생을 하고 있다.
6번이 넘는 사업 실패의 과정을 겪으며 지긋지긋하게 월세, 인건비, 관리비 걱정에 시달렸다.
한번은 건물 지하에서 빵이 가득 든 상자를 메고 1층에 있는 화물차에 싣는데, 어디선가 바람 한 점이 불어와 내 어깨에 부딪혔다. 그땐 그 바람의 무게가 마치 큰 산이 와서 날 짓누르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이 월세, 전기세, 인건비만 깨끗이 해결할 수 있다면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렇게 하고 싶다.’
당시 오죽 힘들었으면 가게 구석에 쳐진 거미줄을 떼어 낼 힘조차 없었다.
케이크를 대기업에 납품하며 사업은 조금 커졌으나, 연말이면 이른바 ‘단가 후려치기’ 등을 당하며 그해 번 수익을 다시 다 빼앗기기 일쑤였다.
사업의 다각화를 모색하며 수익을 확장하고자 케이크 제조업과 동시에 경기도 용인시에 베이커리 카페를 열기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야 배운 사실이지만, 서비스업을 하려면 사업 특성에 맞게 다시 인력도 구성하고 전략도 다르게 써야 하는데 제조업을 하던 인원을 빼 어설프게 시작하니 곳곳에서 적자가 나기 시작했다. 카페 1곳에서만 몇 천만원씩 적자가 났고 제조업으로 번 돈은 모두 그 적자를 메우기에 급급했다. 역할 구분도 제대로 안 돼 나중엔 내가 사장인지 배달기사인지 구분도 안 될 정도였다.
난 지금까지 사업의 실패 원인은 ‘근거 없는 확신’ 때문이라고 본다. 성공에 대한 확신에는 근거가 있어야 했는데 나에게 근거는 자신감, 환상, 기대, 필요, 절박함 등이 기형적으로 합쳐진, 그야말로 ‘근거 없는 근거’였다. 무작정 뛰어 들고 보는 용감함과 노력이 결국, 더 큰 실패를 불러왔다.
부활 신앙을 장착하기 전까지 ‘종교’ 생활은 나름으로 열심히 한다고는 했지만, 실제 선택했던 것을 돌아보면 목적도 방향도 없이 암세포처럼 닥치는 대로 그저 열심히만 살았던 것 같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인도하심을 구하기보다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란 생각으로 내 방식대로 만든 하나님을 멋대로 끌어들이면서 살았던 거다.
하나님은 1999년 그런 날 다시 춘천한마음교회로 이끄시면서 변화시켜 나가셨다. 교회 식구들과 교제를 나누며 조금씩 나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됐다.
어린 나이에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던 탓에 나라는 사람의 인격에는 ‘상대방’이 없었다. 오로지 날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몰상식이 가득 찼던 사람이란 걸 알기까지 20년의 세월이 걸렸다. 왜 내 주변에는 사람이 없는지, 왜 나는 아내와 자식들과 원수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해답을 구하는 내게 하나님께서는 30대 후반부터 50대 초반까지 복음으로 변해가는 공동체 지체들의 모습을 거울삼아 보게 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나를 돌아볼 기회를 계속 주셨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공동체 덕분에 초등학교를 거처 중학생 때쯤 형성돼야 할 사회성을 이제야 비로소 어느 정도 갖췄다고 할까.
***[역경의 열매] 유동부 (11) 언제나 주님 사랑으로 품어준 목사님과 교회공동체
7번째 사업까지 망하고 아내와도 불화
아들마저 흉선암 걸려 앞길 막막할 때
목사님 배려로 교회 생활관에 거처 마련
유동부 대표와 그의 아들 태정씨가 강원도 춘천시의 유동부치아바타 매장에 적힌 ‘부활’ 문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태정씨는 현재 유동부치아바타에서 생산팀장으로 재직 중이다.
사업의 실패 등 부침을 겪으며 춘천한마음교회 김성로 목사님과 교회 공동체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들은 내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언제나 힘을 주며 예수님의 사랑으로 날 품어줬다.
2004년 제과점 사업이 부도가 났을 때도 교회 공동체는 내 어려움을 보고만 있지 않았다.
상한 마음을 안고 참석한 어느 예배 시간이었다. 김 목사님은 설교 중에 “유동부 형제가 저렇게 망했는데 우리가 100만원씩만 모아줍시다. 우선 살려 놓고 잘 되면 받고, 안 되면 할 수 없고…”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난 교회 내 작은 카페에서 조각 케이크와 우유를 팔고 있었는데 교인들이 정말 많이 도와주셨다. 그 덕에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2014년 3월 마지막 7번째 사업마저 실패했다. 이젠 더는 재기가 불가능하다고 할 정도로 사업도 나도 망가졌다. 당시 경기도 성남시에서 장애를 지닌 초등학교 아이들을 돌보는 보조교사로 일하던 아내와도 불화가 생겨 별거에 들어갔다. 가정까지 파탄 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던 아들이 입대한 지 8개월 만에 이름도 낯선 흉선암에 걸렸다는 소식까지 듣게 됐다. 운동을 좋아해 체육대학교에 진학했던, 누구보다 건강했던 아이였는데 말이다. 그 소식을 듣고도 난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평소대로 내가 해야 할 일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희로애락’이란 인간의 기초 감정조차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영·혼·육이 피폐해져 있었다.
마지막 사업을 완전히 접고 오갈 데가 없는 난 춘천한마음교회로 향했다. 마침 주머니를 뒤져보니 수중에 남은 돈은 3만6000원이 전부였다. 몰골도 사람 몰골이 아녔다고 볼 정도로 말이 아니었다. 예전 같았으면 예배를 마치자마자 차가 막힐까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을 텐데 그러질 못하고 괜히 교회 건물 앞 개집 주변만 서성대고 있었다. 김 목사님께서 이런 날 보시며 집에 왜 안 가냐고 물으셨다. 하지만 도저히 목사님께 또다시 사업이 망했다는 말씀을 드릴 면목이 없었다. 그저 “하던 일이 뭐 좀…”하며 난 얼버무렸고, 목사님은 단번에 내 사정을 알아채셨다. 그날 저녁부터 목사님께선 한 달 반 동안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춘천의 맛집이란 곳은 다 데리고 다니시며 밥을 사주셨다.
마침 아들도 의병 제대한 후 암 수술을 받고 방사선 치료를 시작했다. 김 목사님께선 그런 우리 부자가 공기가 좋은 곳에서 지낼 수 있게는 해줘야겠단 생각에 교회 생활관에 머물 수 있도록 배려해주셨다.
어느 날은 김 목사님께서 날 춘천시 구봉산에 있는 한 멋진 카페에 데리고 가주셨다. 차를 사주시며 여러 좋은 말씀을 해주시던 목사님은 내게 “동부야, 너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난 그저 “네”라고 대답했지만,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1년, 2년 시간이 지나며 그 말씀이 내 머리에 맴돌았다. 그리고 점점 가슴을 파고들었다.
***[역경의 열매] 유동부 (12) 카페 한쪽서 만든 ‘건강한 빵’ 날개 돋친 듯 팔려
투병 중 아들 먹어도 되는 빵 고민하던 중
화학 첨가물 넣지 않는 ‘치아바타’ 알게 돼
원료 고민하며 많은 시행착오 끝에 성공
유동부 대표 가족사진. 아들인 태정씨가 해병대에서 군 복무하던 시절 잠시 휴가 나왔을 때 찍었다. 이때만 해도 유 대표는 아들 태정이에게 암이 발생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김성로 춘천한마음교회 목사님께서 내게 말씀하신 “너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란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쁘게 해 주고 싶다고. 이렇게 쫄딱 망해 거지처럼 폐인이 된 나를 기쁘게 해 주고 싶다고.’
하지만 점점 곱씹어볼수록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말씀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김 목사님의 그 말은 시간이 흘러 현재 유동부치아바타의 사훈이 됐다.
그렇게 춘천한마음교회 생활관에서 지낸 지 3개월쯤 지났을 때였다. 당시 춘천교육대학교 캠퍼스 내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던 한 교회 자매가 자신의 가게 한쪽에 1.2m짜리 테이블과 냉장고 윗칸을 내어줄 테니 빵을 한 번 다시 만들어서 팔아 보라고 제안했다. 다시금 빵과의 운명이 이어지는 순간이었다. 숱한 실패로 빵이라면 보기 싫을 법도 했지만, 그렇다고 대안도 딱히 없었다.
당시 방사선 치료 중이었던 아들 태정이는 면역기관인 흉선을 제거해서인지 화학첨가물이 들어간 것을 먹으면 온몸이 가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고 했다. 난 이왕 빵을 만들 거면 그런 태정이가 먹어도 되는 건강한 빵을 만들고 싶었다. 빵을 만들 때 농약이나 항생제가 들어간 원재료는 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우연히 반죽에 버터, 설탕, 우유, 계란을 넣지 않는 치아바타 빵을 알게 됐다.
유기농 밀가루에 물과 소금, 천연효모, 올리브유가 주원료가 된 빵을 만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저온 숙성시킨 반죽을 사용해서 만든 빵이 세상에 나왔다. 2014년 6월 19일 처음 내 손으로 만든 플레인 치아바타다. 햄버거와 콜라를 먹은 지 3분도 안 돼 온몸을 긁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기 몸을 치던 태정이는 내가 만든 빵을 먹고는 몸을 긁지 않았다.
그렇게 팔기 시작한 치아바타 빵은 알레르기, 아토피를 비롯한 각종 피부질환, 변비, 면역력 저하, 소화불량 등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먹어도 거부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점점 인근으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지역방송국에서 취재가 나왔고, 급기야 2016년 10월 KBS 프로그램 ‘아침마당’까지 출연하게 됐다. 공중파 방송에 나가게 되면서 전국에서 6개월 치의 주문이 들어왔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분량이었다. 춘천한마음교회 부목사님과 청년들이 자기 일처럼 달라붙어 사업을 도왔다. 교회도 춘천 외곽의 한 산 밑에 작고 아담한 59㎡(약 18평)짜리 공장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줬다. 그 외딴곳까지 전국에서 정말 많은 분이 찾아오셨다.
2016년 11월 ‘좋은 재료로 만든 건강한 빵’이란 기치와 함께 내 이름을 전면에 내건 ‘유동부치아바타’란 내 인생 8번째 사업이 시작됐다. 11개월 후인 2017년 9월 현재의 자리에 자리를 잡은 뒤 지금도 여전히 아들이 먹을 수 있는 건강한 빵을 만들겠단 다짐이 담긴 빵을 전국으로 배송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유동부 (13) “여러분을 기쁘게 해주고 싶습니다” 직원들에 진심 전해
거짓 없는 빵에 신뢰 쌓여 사업 급성장
성장 동력은 믿음으로 빵 만드는 직원들
사업 확장하며 내부 갈등 조짐 보이자…
유동부(두 번째 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 대표가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에 있는 유동부치아바타 매장 건물 뒤에서 직원들과 단합의 의미로 주먹을 쥐고 사진을 찍고 있다.
유동부치아바타의 매출은 매년 상승하고 있다. 난 특별히 내가 매출 상승을 위해 뭔가를 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기술로 가족 같은 소중한 분들에게 좋은 재료로 만든 건강한 빵을 제공하겠다는 첫 마음이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을 뿐이다.
난 빵에 들어가는 재료 하나를 선택할 때도 6개월 이상 검증하는 과정을 거친다. 전문가들에게 보내서 원재료, 화학기호 등까지 다 분석하고 전국에 있는 소비자들의 테스트 과정도 거친다. 그 덕에 재료비가 많게는 다른 곳보다 7배가 더 들 때도 있다.
하지만 유동부치아바타가 성장하는 주요 이유를 하나 꼽으라면 함께 하는 직원들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현재 60여명이 넘는 직원 중 40명 정도가 크리스천이다. 이들이 주축이 돼 하나님께 제물로 드린다는 신앙고백으로 빵을 만드니 이해할 수 없는 크고 비밀스러운 축복들을 주시는 것 같다.
지난해에는 한 방송국의 ‘서민갑부’란 제목의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며 얼굴도 알렸다. 하지만 난 고린도후서 4장과 6장 말씀처럼 회사가 크고 잘 돼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자체로 유명한 자가 됐다고 생각한다. 설사 단돈 만 원이 없더라도 내가 부자인 이유는 예수님이 지금 내 안에 계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고, 그렇기에 난 이미 모든 축복을 누리고 있는 부자라고 생각한다. 내가 죽어 천국 문 앞에 섰을 때 1000억원이 넘는 통장을 두고 온 것이 대수겠는가. 그래서 성경 속 바울도 감옥에 갇히게 된 상황에 부닥쳤음에도 그 안에서 기뻐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위기의 순간도 있었다. 개업한 지 11개월 만에 춘천 시내에 있는 신축건물 1층과 2층을 얻어 확장 이전했을 때였다. 17명의 직원도 새로 입사했는데, 얼마 안 가 이런저런 이유로 내부 갈등의 조짐이 감지됐다. 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준비된 원고를 읽었다.
“기존에 있는 직원 중에 춘천한마음교회에 다니는 사람도 있고 다니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빵을 만드는 데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난 내 정신과 기술 모두 여러분과 공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또 다른 나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100% 신뢰하고 있습니다. 이 회사는 기독교 회사이고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진 회사입니다. 나는 새로 오신 여러분을 섬기고 여러분에게 굴복하는 자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기쁘게 해주고 싶습니다. 그것이 저의 꿈입니다.”
비록 짧은 글이었지만 난 그 글을 읽는 중에 벅차오르는 감격 때문에 눈물을 삼켜야 했다. 작업의 효율성을 위한 속임수가 아니라 나의 진심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성로 춘천한마음교회 목사님께서 내게 해주셨던 말씀처럼 “여러분을 기쁘게 해주고 싶습니다”란 이 한마디에 모든 것이 평정됐다. 딴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직원들을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내 마음은 진심이었다.
***[역경의 열매] 유동부 (14) 장모님 눈높이에 맞춰 구원·복음 전하자 “아멘 아멘”
인생 흥망과 관계없는 신앙관 정립한 후
중풍으로 마비 온 장모께 믿음 확신 주려
재미있는 얘기로 풀어서 알기 쉽게 설명
유동부 대표가 가족들과 함께한 모습. 왼쪽부터 유 대표의 딸, 며느리, 유 대표, 아내, 아들, 모친.
춘천한마음교회를 다니며 부활 신앙관을 제대로 정립한 2014년 즈음. 여든이 넘으셔서 중풍으로 한쪽이 마비가 온 장모님 생각이 났다. 그동안 일한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는데 한 번 찾아가 뵙고 올바른 구원과 복음을 전해야겠다 싶었다.
그렇게 장모님을 찾아뵌 어느 날이었다. 그 날은 나도 모르게 복음을 장모님 눈높이에 맞춰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쉽게 풀어드리면 훨씬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가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단 말과 함께 장모님 다리를 정성스럽게 주물러 드리며 복음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제 하나님이 건강을 회복시켜주셔서 오래오래 사시다가 언젠가 천국 문 앞에 딱 서게 되시면 그 앞에 천사장이 지키고 서 있는데요. 뭐라고 하시면서 천국 문을 열어달라고 하시겠어요? 하나님께서 그 천사장에게 딱 두 가지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시고 그 답 말고 딴 답을 얘기하는 사람은 절대로 열어주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그 두 가지 답이 뭐겠어요?”
잠깐 생각하시던 장모님은 드디어 입술을 떼셨다.
“음…나도 두 사람을 전도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이래저래 해서 교회에 잘 안 나가.”
내가 “그래요? 그럼 전도한 것도 제대로 실적에 안 올라갔으니까 천국 문을 열어달라 할 수가 없겠네요. 그럼 그 옆에 있다가 마귀가 이리 오라고 하겠네요”라고 말하자, 장모님은 고개를 끄떡 끄덕 하셨다. 안 되겠다 싶었던 난 “어머니 그게 아니고요, 첫 번째 답은 ‘천국 문 안에 계신, 저 천국 안에 계신 예수님이 내 주인이에요. 그래서 난 저 안에 들어갈 수 있어요’란 대답이고요. 두 번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것, 이게 바로 그 증거예요’라고 대답해야 천사장이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어요”라고 설명해드렸다.
이어서 장모님이 행했던 전도는 천국 안에 들어가서 상 주실 때 물어보는 것이고, 귀신을 무지하게 쫓았다거나, 집 팔아서 건축 헌금했다는 이야기는 천국에 들어갈 때 아무 소용이 없다고 이야기해드렸다. 마지막으로 그게 바로 마가복음 1장 15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이란 설명을 드리자 장모님께서 “아멘. 아멘”하며 답하셨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렇게 내 삶 가운데 주변에 다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시작됐다.
부활 신앙관을 정립하며 내가 하는 사업이 잘되면 내 신앙을 자랑하고, 사업이 망하면 내가 믿은 하나님을 알리지 못하는 그런 마음이 없어졌다. 내 인생이 크게 성공하든 다시 쫄딱 망하든 더는 내 인생의 문제로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가리지 않게 됐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그 확증된 사랑 앞에서 내 인생의 문제를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냐고, 어떻게 해야 하냐는 질문은 생명이 없는 자의 아우성이거나 병든 자의 신음이라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유동부 (15·끝) 내 사명은 ‘건강한 빵’ 만들겠다는 첫 본질 지키는 것
예수 재림과 관련한 영화를 본 후
주님 맞을 준비 소홀했음을 깨닫고
다시금 삶의 초점을 주께 맞추게 돼
유동부(왼쪽) 대표가 강원도 춘천시 동내면에 있는 유동부치아바타 매장 앞에서 회사 생산팀장이자 아들인 태정씨와 함께했다. 이들 옆으로 회사의 사명인 ‘아들을 위한 빵,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빵을 만든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지난 3월 영화 ‘가나의 혼인 잔치:언약’을 보고 교회 공동체에서 다시 오실 예수님에 관한 재림 신앙이 선포된 후, 내 신앙은 완전히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됐다. 성경에 기록된 갈릴리 지역 가나의 결혼 풍습을 예수님의 재림에 비유한 영화를 보며 내 마음의 초점을 다시금 예수님께로 맞추게 됐다.
하루를 천년처럼 여기며 날 위해 다시 이 땅에 오실, 나의 신랑 되신 예수님의 사랑에 내 마음의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았음을 회개했다.
재림 신앙이 임하고 난 후 그동안 내가 왜 절름발이 신앙생활을 했는지 알게 됐다. 다시 오겠노라 약속하신 주님을 기다리는 재림 신앙이 빠졌던 것이다. 하늘나라에 내가 살 집을 다 지으시고 나를 데리러 오시고 싶은 예수님의 마음은 하루가 천년같이 길게 느껴지실 만큼임을 알게 되면서 나의 삶은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향하고 있다. 그 사랑을 받은 신부라면 항상 깨어있어 신랑이신 예수님을 기다려야 함이 너무나 마땅한데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취해서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지 못했다.
마땅히 지켜야 할 신부의 본분을 지켜내지 못한 마음은 빛이 아닌 어둠이었고, 그 어둠의 밭에는 미움, 자기연민, 우울, 두려움, 무정함, 무례함 등의 온갖 쓴 뿌리가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하루가 천년 같다는 예수님의 사랑이 부활로 확증되니 왜 오늘이 마지막인지 알게 됐다. 그것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오직 사랑으로만 풀어낼 수 있는 것이었다. 나를 향한 예수님의 그 간절한 사랑을 알게 된 순간 ‘언제 오시는가’란 질문은 의미가 없어졌다. 오직 다시 오겠노라 약속하신 그 신랑에게 정결한 신부로서 준비된 자로서 살며 기다리고 싶은 마음이 내 마음의 전부가 돼 버렸다.
신랑의 사랑이 임한 내 마음의 밭에는 미움, 자기연민, 우울, 두려움, 무정함, 무례함 대신 자신감, 절제, 경건, 신중, 기쁨, 자유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차로 말한다면 문짝을 새로 달거나 바퀴를 새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차를 폐차시켜버리고 공장에서 차를 새로 뽑은 것이다.
우선순위, 판단기준, 바라보는 곳 등 모든 것이 완전히 새롭게 된 나는 주님이 이끄시는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기다리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마라나타’ 신앙의 비밀을 이제야 분명히 알았다.
내 사업의 비전과 목표도 빵을 만드는 일을 산제사를 드린다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건강한 빵을 만들겠다는 것에 있다. 아픈 내 자식이 먹어도 간지럽지 않고 소화가 잘되는 빵을 만들겠다는 그 첫 본질을 지키는 것이 바로 내게 주어진 사명이다.
마지막으로 내 생명, 물질, 시간의 소유주는 예수님이시란 고백이 내 삶을 통해 실현되고 있음에 그저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는 고백을 지면을 빌어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