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海平吉氏(해평길씨)
본관(本貫): 평해(平海)
시조(始祖): 길당(吉塘)
유래(由來):
길씨(吉氏)의 중국(中國) 풍익(馮翊)에 연원(淵源)을 두고 있으며, 당(唐) 나라에서 귀화(歸化) 해온 8학사(八學士) 중의 한 사람인 길당(吉塘)이 고려(高麗) 문종(文宗)때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내고 해평백(海平伯)에 봉해져 그 시원을 이루었다.
우리나라 길씨(吉氏)의 본관(本貫)은 해평(海平)과 개성(開城)을 비롯하여 하음(河陰:강화지방)과 여주(驪州) 등 28본까지 있는 것으로 전(傳)하나 모두가 해평길씨(海平 吉氏)의 세거지명(世居地名)에 불과하므로 현존(現存)하는 관향(貫鄕)은 해평(海平) 단본(單本)으로 알려졌다.
해평 길시는 해평백(海平伯) 길 당(吉塘)의 후손에서 1백여 년간 계대(系代)가 실전(失傳)되어 고래 때의 성균진사(成均進士)인 길시우(吉時遇)를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길재(吉再)
고려가 기울기 시작한 1353년(공민왕 2) 지금주사(知錦州事) 원진(元進)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박분(朴 )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도학(道學)을 밝혔다.
1386년(우왕 12)에 사마(司馬)에 합격하고 3년 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창왕(昌王) 때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어머니를 봉양하니 향리 사람들이 그 효도를 칭찬하였다. 조선(朝鮮)이 개국(開國) 한 후 태종(太宗)은 일찌기 태학관(太學館)에서 시경(詩經)을 읽었던 동문(同門)인 관계로 그를 불러 정종(定宗)에게 아뢰어서 봉상박사(奉常博士)의 벼슬을 주었으나, 그는 사은숙배(謝恩肅拜)하지 않고 말하기를 "옛정(情)으로 부르시니 왔을 뿐 벼슬하는 것은 재(再)의 뜻이 아닙니다."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자네의 말은 삼강오상(三綱五常)의 불역지도(不易之道)이니 그 뜻을 빼앗기기 어려우나 자네를 부른 사람은 나요. 자네에게 벼슬을 준분은 상(上:정종)이니 상에게 사의를 표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정종(定宗)이 그 절의를 가상히 여겨 우대하여 보내주고 그 집에 대해서는 납세(納稅)와 부역(賦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67살에 임종이 가까워지자 부인 신씨(申氏)가 벼슬을 하고 있는 아들 사순(師舜)을 불러 올 것을 권하자 "아비는 임금과 같은 것이다. 임금 옆에 있으면 아비 옆에 있는 것과 같다. 아들은 없어도 있는 것이다."하며 쓸쓸히 일생을 마치고 경북 칠곡군 복삼면 오태동 낙동강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묻혔다. 그의 묘소 앞 강변의 단애(斷崖:깎아 세운 듯한 낭떠러지)에는 지주비(砥柱碑)가 서있는데, 중국 황하(黃河)의 탁류를 이겨내는 지주비를 탁본 떠와 그대로 전면(前面)에 세기고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뒷면의 글을 지어 1587년(선조 20)에 세운 것이다.
길겸(吉謙) 길회(吉誨) 형제
그외 해평 길시를 빛낸 인물(人物)로는 송당(松當) 박영(朴英)의 문인(文人)으로 이름난 면지(勉之)의 아들 겸(謙:현감을 역임)과 회(誨)가 유명했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회(誨)는 임진왜란 때 피난가는 대가(大駕) 앞에 길을 막고 엎드려 변방에 왜적의 염탐군이 있어 해침을 받을가 염려되오니 가마대신 말을 타시도록 진언했고, 뒤에 원종일등공신(原從一等功臣)에 추록되었다.
길선주(吉善宙)
한말(韓末)에 와서는 3·1운동의 주역인 선주(善宙)가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독립협회(獨立協會) 평양지부(平壤支部)를 조직하고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바침으로서 충절(忠節)의 가문(家門) 해평 길씨(海平 吉氏)를 더욱 빛냈다.
해평 길씨는 1985년 인구조사 결과 총 7,360가구에 30,390명으로 전체 성씨 중 73위로 나타났다.
吉再(길재)선생의 전설.
청렴한 선비.
1389년(창왕 1)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미리 알고서 이듬해 봄에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선산(善山)으로 돌아왔다.
그가 어머니를 효성을 다해 봉양하니 아내 신씨(申氏)도 그 뜻을 본받아 끼니가 없으면 옷가지를 팔아서라도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었다.
군사(郡事) 정이오 (鄭以吾)가 이러한 그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오동동(梧桐洞)의 묵은 밭을 주어서 농사지어 모친 봉양에 쓰도록 하였다.
1400년(정종 2) 가을에 세자 방원이 그를 불러 태상박사(太常博士)에 임명했으나 글을 올려 충신은 자고로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뜻을 말 하니, 왕은 그 절의를 갸륵하게 여겨 예를 다해 대접해 보내주고, 그 집안의 세금과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1403년(태종 3)에는 군사 이양(李楊)이 그가 사는 곳이 외지고 농토가 척박해 살기에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오동동의 전원(田園)으로 옮겨 풍부한 생활을 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는 꼭 소용에 필요한 만큼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모두 되돌려 보냈다.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하며 항상 즐거움으로 근심을 잊고 부귀와 영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항상 그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講解)하였다.
오백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대 없네
어즈버 태평(太平) 연월(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吉再(길재) 선생의 일화.
吉再(길재)의 자는 재보이괴 호는 冶隱(야은)이다.
아버지 윈진이 보성대판이 되어 임지로 떠나가게 되자, 吉再(길재)는 외가에 맡겨졌다.
이때 길재의 나이 여덟 살이었다.
길재는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남계에 놀면서 석별가를 지었다. 어머니는 생활이 몹시 어려워 어린 길재를 떼어 놓고 남편의 임지인 전라도보성으로 떠났다.
부모를 여인 길재는 강가에서 놀다가 커다란 자라를 한 마리 잡았다.
그리고 잡았던 자라를 보고 시를 한 수 지었다.
자라야 자라야, 너 역시 어머니를 잃었느니라.
나 역시 어머니를 잃었더다.
내가 너를 잘아 사람아 먹을 줄 알건만
어머니를 잃은 것이 나와 같아 너를 놓아준다.
吉再(길재)는 잡았던 자라를 물에 던져 버리고 어머니가 그리워 울부짖었다.
마을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모두 달려와 어린 길재를 끓어 안고 울었다.
吉再(길재) 선생의 일화.
길재의 아버지 원진이 송도에서 벼슬을 할 때 노씨에게 장기를 들었다. 이때 길재의 어머니가 남편을 몹시 원망했다. 길재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 아내가 남편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비록 불의의 일을 저질렀다고 해도, 결코 그릇된 마음을 먹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인륜의 변고는 성인도 어쩔 수 없으니 다만 정당하게 처신할 뿐입니다.”
어머니는 길재의 말을 듣고 매우 감동했다.
하루는 길재가 어머니에게 하직 인시를 올렸다.
“어머니, 아버님께 오랫동안 문안을 여쭙지 못했습니다. 이 일은 자식의 도리가 아닙니다. 찾아가 뵈옵겠습니다.”
길재는 스승 박분을 따라 선주에서 송도로 가서 작은어머니 노씨를 만났다. 이때 노씨는 길째를 함부로 대했다.
그래도 그는 공경과 효도를 다 바쳤다. 마침내 노씨가 감동하여 길재를 더없이 훌륭한 사람으로 대접했다.
길재는 송도에서 선주로 돌아왔다. 이때 어머나 김씨가 나이가 환갑이 가끼워 아침저녁으로 길재가 이부자리를 보살폈다. 아내가 이러한 일을 대신하려고 하면 길재가 말리며 말했다.
“어머니께서 매우 늙으셨으니 뒷날 어머니를 위해 이런 일을 하려 한들 할수 없지 않겠소? 이 일만은 내게 맡겨 주시오”
아내 신씨는 남편에게 감동을 받아 몰래 자기 옷을 팔아 시어머니를 봉양했다.
그리고 시어머니가 이 일을 알지 못하도록 항상 조 심했다.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보는 곳으로 한다.
여기 실린 이 자료는 한국의 성씨> <
[출처] 海平吉氏(해평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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