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월 1일 유네스코 지정 종묘 및 창덕궁 탐방
출발시간 : 7시 30분
출발장소 : 비산초등학교 옆 숭오박물관
준비물 : 도시락 필기도구 챙있는 모자
회비 : 4월 참가자 37.000원 5월 참가자 40.000원(창덕궁 & 후원 입장료 포함)
종묘
종묘는 조선 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생전에는 왕이 아니었으나 죽은 후에 왕이나 왕비의 칭호를 얻은 이들의 신주(神主)를 봉안한 사당이다. 중심 건물은 정전(正殿)으로, 태조 이성계의 묘(廟)가 있어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역대 왕과 왕후의 신주는 사후에 일단 종묘에 봉안했다가, 그 후 일정한 때가 지나면 공덕이 높은 제왕들의 신주는 세실(世室 : 종묘에 있는 신위를 모신 방)로 그 이외의 신주는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이를 조천(祧遷)이라고 한다.
정전에는 현재 19실(室)에 왕의 신주 19위(位)와 왕후의 신주 30위를 모셔놓고 있다. 정전 서쪽에 있는 영녕전에는 모두 16실에 정전에서 조천한 왕의 신주 15위와 왕후의 신주 17위, 그리고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 황태자(懿愍皇太子: 영친왕, 1897~1970년)의 신주를 모셔 놓고 있다.
종묘의 모든 건물에는 현판이 붙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유네스코는 1995년에 종묘를 세계 문화 유산으로, 2001년 종묘 제례와 종묘 제례악을 인류 구전 및 무형 유산 걸작으로 지정했다.
창엽문(倉葉門) 위치와 연혁 : 종묘의 정문으로 외대문(外大門)이라고도 한다. 정면 3칸, 측면2칸의 맞배 지붕이며, 좌우로 종묘 외곽 담장과 연결되어 있다. 창엽문이라는 이름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이 붙였다고 전한다. 뜻풀이 : '창엽(倉葉)'은 '푸른 잎'이라는 뜻이다. 푸른 잎처럼 조선 왕조가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제작 정보 : '창(倉)'자를 파자(破字)하면 '十十','八','君'이 되므로 스물 여덟 임금이라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향대청(香大廳) 위치와 연혁 : 종묘의 정문을 지나 망묘루 북쪽에 있는 건물이다. 종묘의 제사에 쓰이는 향(香),축폐(祝幣) 등을 보관하기도 하고, 제향(祭享)을 앞두고 참여할 헌관(獻官)들이 대기하기도 하던 장소이다. 남북으로 자리한 긴 뜰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으로 두 채가 배치되어 있다. 뜻풀이 : '향대청(香大廳)'은 '향을 봐관하는 대청(大廳)'이라는 뜻이다. 이 건물의 몇 가지 지능 중 향을 보관하는 것을 대표로 들어서 '향'자를 붙인 것이다. 대청은 원래 집채 가운데에 있는 마루로 된 방인데, 관가(官家)나 제각(祭閣)의 대청은 그 규모가 훨씬 클 뿐만 아니라 난간과 천장에 여러 가지 조각과 단청(丹靑)을 하기도 하였다. '청(廳)'은 '마루·건물·관아'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망묘루(望廟樓) 위치와 연혁: 종묘의 정문을 지나 동쪽에 있는 건물이다. 종묘에 제사를 지내러 온 왕들이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정면7칸, 측면2칸의 규모이며 연못 방향으로 난 한 칸은 다락처럼 높게 지은 누마루로 되어 있다. 망묘루 옆 연못은 1443(세종 25)년에 만들었다. 사각형의 연못에 둥근 섬이 들어서 있는데 이는 '천원지방(天圓地方)','곧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졌다'는 고대의 우주관을 상징한다. 뜻풀이 : '망묘(望廟)'는 '종묘의 정전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의 업적을 기리고 종묘와 사직의 안위를 생각하라는 속뜻을 담고 있다.
어숙실(御肅室) 위치와 연혁 : 어숙실은 정전의 동쪽에 자리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이다. 임금이 목욕재례하고 깨끗한 의복으로 차려 입고서 세자와 함께 종묘에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이다. 어숙실 마당을 중심으로 앞 쪽에 보이는 것이 어숙실이고, 오른쪽으로 세자가 제사에 참여할 준비를 하는 세자재실(世子齋室), 왼쪽으로 임금이 목욕을 하는 어목욕청(御沐浴廳)이 있다. 뜻풀이 : '어숙실(御肅室)'은 '임금이 엄숙하게 제사 준비를 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를 재궁(齋宮)또는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임금이 엄숙한 마음으로 재계(齋戒)를 하는 집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어숙실
종묘宗廟의 뜻풀이
'종묘(宗廟)'는 조종(祖宗)의 사당(祠堂)'이라는 뜻이다. '조종(祖宗)'은 역대의 임금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임금의 비(妃)까지 포함한다. '묘(廟)'는 죽은 이의 신주를 모셔놓고 제사 지내는 장소이다.
정전
국보 제227호인 종묘의 정전은 종묘의 중심 건물이다. 조선 초에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목조, 익조, 도조, 환조) 신위를 모신 건물이었다. 그 후 당시 재위하던 왕의 4대조와 조선 시대 역대 왕 가운데 공덕이 있는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하는 곳이 되었다. 정전은 영녕전과 구분하여 태묘라고 부르기도 한다.
정전은 처음에 태실(太室) 7칸, 좌우에 딸린 방이 2칸이었으나 1592(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1608(광해군 즉위)년에 고쳐 지었다. 그 후 영조와 헌종 때 증축하여 현재 태실 19칸으로 되어 있다. 현재 정전에는 서쪽 제 1실에서부터 19명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각 칸을 1실로 하여 모두 19개의 방에 모시고 있다. 이 건물은 맞배지붕 형식이며 칸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은 매우 단순한 구조이다. 19칸이 옆으로 길게 이어져 우리 나라 전통 건축물 가운데 단일 건물로서는 가장 긴 건물이다.
정전은 역대 왕과 왕비 49분의 신주를 19실에 모셨습니다. 종묘건물의 전각에 어떤 장식도 하지않는 구성과 배치가 단순함은 조상신의 영혼이 깃든 존엄하고 신성한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영녕전(永寧殿)
위치와 연혁 : 정전의 서쪽에 있는 별묘(別廟)이다.
전체 16칸이며 34위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정종(定宗, 1357~1419년)이 승하하자
종묘 신실(神室)에 여유가 없어 1421(세종 3)년 10월에 새로 지었다.
처음 지은 건물이 임진왜란으로 불 타 1608(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지었다.
그 후 1667(현종 8)년과 1836(헌종 2)년에 그 규모를 늘려 현재에 이른다.
현재 영녕전에는 역대 왕의 신주 7위와 추존 왕의 신주 8위, 의민황태자(영친왕)의
신주 1위까지 모두 16위의 신주와 함께 그들의 왕비 신주 17위와 황태자비 신주 1위가 모셔져 있다.
뜻풀이 : ‘영녕(永寧)’은 ‘길이 평안하라’는 뜻이다.
이 곳에 모신 혼령들이 내내 평안하길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뜻풀이: '정전(正殿)'은 '여러 채로 구성된 건물 군(群) 가운데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을 뜻한다. 각 궁궐의 정전에는 '근정전(勤政殿)','인정전(仁政殿)','명정전(明政殿)'등 고유한 이름이 있으나 종묘의 정전에는 특정한 이름이 없다.
조천(眺遷/제사를 지내는 대(代)의 수가 다되어 신주를 딴곳에 옮긴다는 뜻인데 저가 보기엔 권력과 먼분들이 이곳에 모신듯...)되신 왕과 왕비34분을 16실에 모신 영녕전입니다.
위치와 연혁: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 동쪽에 있다. 국가와 왕실에 공을 세운 신하들을 기리고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임금의 생존 시에 공로가 큰 신희들의 신위를 해당 임금의 묘정(廟庭)에 함께 모셨다. 고려 때는 이러한 목적의 건물을 대부분 사찰에 건립하였으나, 조선 시대에는 종묘에 세웠다. 태조의 공신 조준(趙浚, 1346~1405년)을 비롯하여, 27대 임금인 순종의 공신 서정순(徐正淳, 1835~1908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19분의 임금 신위에 배향된 83위의 공신이 모셔져 있다. 창건 당시에는 5칸짜리였으나 공신들이 늘어남에 따라 그 규모가 계속 커져 지금은 모두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이 곳에 모신 공신은 이른바 배향 공신으로, 국가의 위난과는 상관없이 생전에 공적이 많은 사람을 해당 임금의 사후에 선정한 것이다. 개국공신·정사공신·좌명공신 등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공을 세운 28종류의 공신과는 성격이 다르다.
뜻풀이: '공신당(功臣堂)'은 '공신(功臣)'을 모신 사당'이라는 뜻이다.
칠사당七祀堂
위치와 연혁: 정전의 남쪽 신문으로 들어가 서쪽에 있다. 각종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사명(司命)·호(戶)·조·문(門)·여·행(行)·중류(中류)라는 신들이 있고, 이 모두를 합쳐 칠사(七祀)라 부른다. 계절에 따라 각각 다른 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봄에는 사명과 호, 여름에는 조, 가을에는 문과 여, 겨울에는 행과 중류를 모셨다. 이 가운데 사명과 여를 제외한 다섯 신은 따로 오사(五祀)라고 한다.
뜻풀이: '칠사당(七祀堂)'은 '일곱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당'이라는 뜻이다. 사명(司命)은 삼명(三命)의 감찰을 주관하고, 호(戶)는 출입을 주관하고, 조는 음식을, 문(門)은 출입을 주관하고, 여는 살상과 형벌을 주관하고, 행(行)은 도로의 행작(行作)을 주관하고, 중류는 거처를 주관한다.
위치와 연혁: 정전 동문의 담에 잇대어 북쪽 방향으로 자리한 4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이다. 제사를 준비하는 관원들과 종묘를 지키고 청소하고 제사를 준비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 거처하는 집이다.
뜻풀이: '수복(守僕)'은 조선시대 종묘서나 향실을 관장하던 교서관을 비롯해 각 단(壇)·능(陵)·궁(宮) 등에 소속되어 청소하는 일을 담당하던 잡직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 건국 이후 고려 시대의 제도를 계승하여 '상소(上所)'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1438(세종 20)년에 의정부의 건의에 따라 수복으로 개칭하여 「경국대전」에서 제도화되었다. '수복방'은 이들이 거처하는 방이라는 뜻이다.
전사청典祀廳
위치와 연혁: 정전의 동북쪽에 위치하며 종묘의 제사에 사용하는 제사 음식을 장만하던 곳이다. 부엌의 기능을 하였으므로 신주(神廚)라고도 한다. 마당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건물을 'ㅁ'자형으로 배치하였다. 마당에는 제수를 준비하던 돌절구 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주실은 정면 7칸, 측면 2칸이고 옆에 온돌과 마루방을 들여 행각으로 꾸몄다.
뜻풀이: '전사청(典祀廳)'은 '제사를 맡은 집'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제사에 쓰이는 여러가지 용품을 관장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전(典)'은 '맡는다','관장한다'는 뜻이고 '사(祀)'는 제사를 뜻한다. '전사(典祀)'는 원래 주나라 때 춘관에 속하여 제사를 맡아 보던 관직 이름으로도 쓰이던 말이다.
악공청樂工廳
위치와 연혁: 종묘 제례 때 음악을 담당한 악공들이 준비하며 연습도 하고 대기하던 곳이다. 악공청은 두 군데로 정전과 영녕전 밖 서남쪽에 각각 있다.
정전에 부속된 악공청의 경우 지금은 개수하여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으며 문짝 없이 기둥만 남아 있다. 영녕전에 부속된 악공청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정전의 악공청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 규모가 작다. 이들의 원래의 모습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뜻풀이: '악공청(樂工廳)'은 '악공(樂工)들이 대기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제례에는 으레 음악이 연주되었으므로 악공들이 대기하는 장소가 필요하였다.
한국음악 최고의 명작, 종묘제례악!
아침에 비가 내려서일까 가을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푸르다.
10월17일 오전 종묘 정전에서는 국립국악원 정악단의 종묘제례악 공연이 열려
종묘를 찾은 국내외 관람객 700 여명으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다.
종묘제례악은 예악을 소중히 여긴 조선왕조 500년의 시대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600년 가까이
살아 숨 쉬며 이어져온 역동적인 음악으로, 제례시기인 매년 5월 첫째 주 일요일을 제외하고
10월에 종묘 정전에서 열리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 하월대 악대 헌가 - 집박 >>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국립국악원이 주관한 이번 공연은 ‘궁궐 자원화’ 정책의 일환으로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영원의 소리 우리음악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종묘 현장에서 경험 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 무형문화유산을 관광 상품으로 정례화 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다.
종묘제례악은 종묘에 올리는 제사음악으로 지난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 유네스코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어,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고 소중히 이어가야 할 음악으로 인정받았다.
종묘 제례는 국왕의 효심이 하늘과 땅의 도움을 받아 나라와 백성의 평화롭기를 기원하는
축제 성격의 의례다. 제례의 모든 절차와 주악, 춤, 음식, 의상의 구성은
각각 하늘(天), 땅(地), 사람(人)과 음양의 의미를 담고 있다.
<< 상월대 악대 등가 - 집박 >>
<< 상월대 악대 등가 >>
종묘제례악은 연주 위치와 악기 편성에 따라 등가와 헌가로 나뉜다.
정전에 가까운 계단 위쪽(상월대)에 배치되는 등가는 노랫말이 없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고,
<< 하월대 악대 헌가 >>
아래쪽 뜰(하월대)에 배치되는 헌가는 노랫말이 있는 음악을 연주하는 악단이다.
화려하고 시원한 음색과 아름답고 장대한 음률은 엄숙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특히 중간 중간에 울리는 서슬 퍼런 박 소리는 종묘제례의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 편경 >>
<< 편종 >>
종묘제례악의 편성은 편종, 편경, 방향, 축, 어, 절고, 진고 등의 아악기와
박, 당피리, 아쟁, 해금, 대금, 장구, 징, 태평소 등의 당악기와 향악기로 구성되어
제례악으로서의 위엄과 풍성한 음양의 조화로움을 들려준다.
<< 보태평 음악에 맞춰 문무의 춤 ... 왼 손에 약, 오른 손에 적 을 들었다 >>
<< 문무의 춤 - 팔일무 >>
종묘제례악의 춤은 일무(佾舞)이다.
모두 64명이 추는 종묘제례의 팔일무는 가로8명, 세로8명씩 줄을 지어 춤을 춘다.
보태평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을 문무(文舞)라고 하는데
무원들은 왼손에 약(龠 관악기의 일종), 오른 손에 적(翟 꿩 깃털로 장식한 긴 막대)을 들었다.
반면 정대업 음악에 맞춰 추는 무무(武舞)는 목검과 목창을 들고 춤을 춘다.
<< 약과 적을 들고 문무 퇴장 >>
<< 무무 입장 ...정대업 음악에 맞춰 손에 목검을 들고 무무를 춘다 >>
창덕궁
창덕궁은 조선 태종 5년(1405) 경복궁의 이궁으로 지어진 궁궐이다. 하지만,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소실된 후 1868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258년 동안 역대 국왕이 정사를 보살피는 본궁으로 쓰였다.
창덕궁 안에는 가장 오래 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 쓰이던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공적인 공간이 있으며, 왕과 왕후가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과 산책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의 후원 등 사적 공간이 있다. 정전 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하였고, 침전 건축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위락 공간인 후원에는 자연 지형을 위압하지 않도록 작은 정자각을 많이 세웠다.
창덕궁은 자연스런 산세에 따라 자연 지형을 크게 변형시키지 않고 산세에 의지하여 건물이 자연의 수림 속에 포근히 자리를 잡도록 배치하였다. 또, 왕들의 휴식처로 사용되던 창덕궁 후원은 300년이 넘은 거목과 연못, 정자 등 조원 시설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창덕궁은 조선 시대의 전통 건축으로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한 건축과 조경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창덕궁은 사적 제122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1997년 12월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부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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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계는 글자 뜻 그대로 꽃을 심어 만든 계단을 말하는데 궁궐 뿐만 아니라 사대부 집이나 정자, 누대 등이 서 있는 주변에 구릉이 있는 곳이면 화계를 꾸민다. 우리나라는 전국토 2/3가 산지이기 때문에 곳곳에 산과 구릉이 많아서 이런 화계를 (부용정에 새겨진 물고기)두는 것이 일반적인 정원의 모습이다. 그리고 화계는 특히 뒤뜰 뒷동산을 중심으로 두기 때문에 예부터 뒷동산을 잘 가꾸어 왔고 이를 가꾸는 사람을 "동산바치"라 불렀다. 부용정 화계위에는 석함이 있고 석함에는 괴석이 담겨져 있는데 일종의 정원을 꾸미는 석물이다. 괴이하게 생긴 그러나 운치 있는 괴석을 담아 두는 석물이라 하여 석함이라 부르며 때로 괴석을 받쳐주는 대라는 뜻으로 괴석대라고 도 한다. 석함은 일반적으로 정방형이나 장방형이지만 때로 육각형, 팔각형이기도 하다. 그 높이도 다양하여 바닥에 닿는 낮은 것에서부터 높은 대를 세우고 그 위에 다시 괴석을 담은 석함을 올려놓기도 한다. 또 부용정 기둥에는 기둥마다 주련들이 걸려 있는데, 여기에는 한시들이 초서체로 새겨져 있어 이들 시구를 감상하노라면 저절로 시흥에 젖고, 더더욱 부용정의 공간정서에 몰입하게 된다.
천 떨기 고운 자태 아름다운 놀 흐르고 십리에 퍼진 맑은 향기 사향을 터트린 듯 낭원의 신선들 푸른 일산 펄친듯 대라천 일천 부처 향성에 싸여 있듯. 붉은색 푸른색 어리 비쳐 맑은 물에 드리웠고 꽃도 잎도 향기로워 발속에 스며드네 활짝 핀 꽃봉오리 삼천궁녀 취한 볼이요 연잎의 빗방울은 오백 나한 염주알이라. 거북이 놀고 고기 헤엄치는 맑디 맑은 가을 물속이요 이슬 짙고 바람 좋은 서늘한 초가을일레.
부용정에는 넓다란 장방형 연못이 있다. 이 방지의 크기는 세로 34,5m 가로 29.4m나 되는데 가장자리는 장대석들을 바른층 쌓기로 하여 마감하였다. 또 못 가운데에는 장대석으로 바른층 쌓기를 한 둥근 섬이 하나 있다. 연못이 네모나고 섬이 둥근 것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고 하는 천원지방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연못은 대개 네모나고 또 가운데에는 둥근 섬이 하나씩 있다. [삼국사기]의 백제 무왕때 기록을 보면 "궁궐남쪽에 못을 파고,20여리 밖으로부터 물을 끌어드리고 네 가장 자리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 가운데 방장 선산을 모방하여 섬을 만들었다"고 쓰여져 있다. 곧 부용지의 조영에는 음양론, 도가사상 등이 크게 작용하였으며 이러한 오래된 조형 원리에 근거한 것임을 알 수 있다. |
희우정
이곳은 당초 초가였는데 임금이 기우제를 지내자 마자 비가 내려 기와를 덮은 곳이라 함.
연경당 들어가는 장락문(달에 있는 신선의 궁궐인 장락궁에서 가져온 이름)
연경당은 1828년 순조대왕의 왕세자인 효명세자가 사대부집을 모방하여 궁궐안에 지은 120칸의 민가형식의 집
연경당 사랑채(사대부 집을 본딴 것으로 단청을 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음)
선향재(서책을 보며 손님을 맞이하던 곳)
연경당 안채(여성들이 생활하던 곳)
부용정과 부용지
왕이 급제한 이들에게 축하연을 베풀어 주던 장소
부용정(열십자 모양의 정자)
어수문과 주합루
왕이 신하들과 정사을 논하고 연회를 베풀던 학문과 예술의 전당
주합루로 오르기 위해 왕은 어수문으로 신하는 어수문 옆의 작은 문으로 올랐다고 함
부용지에 있는 잉어로써 물고기가 현명한 물을 만나 어룡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인재의 등용을 상징적으로 표현
영화당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으로 광해군때 만든 것으로 숙종 08년때 복원한 것임
영화당 앞에 있는 앙부일기(해시계)
영화당에서 대금을 공연하고 있네요..
불로문(왕의 무병장수를 기원하던 것으로 연경당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음)
불로문 안에 있는 불로지와 정자
반도지와 관람정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합죽선 정자인 관람정과 한반도 지형를 닮은 반도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합죽선 정자인 관람정 정면
관람정 옆면
관음정에서 본 관음지
취한정
이곳은 원래 소나무가 울창하여 한기를 느낄 정도라고 하여 취한정으로 불렀으나
일제시대때 소나무를 베어내어 현재는 소나무가 별로 없더이다.
취한정
옥류천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술잔을 띄우고 시를 논했던 곳으로
소요암에는 인조가 쓴 옥류천이라는 글씨와 숙종이 지은 시가 새겨져 있다.
청의정
임금이 직접 벼를 재배하면서 농부들의 삶을 이해학자 한 곳
태극정
소요암 주변의 모습
천연기념물인 다래나무
후원관람 후 창덕궁 나가는 도로옆에 있는 750년된 향나무 전면
이 향나무 끝에 있는 원숭이
궁중의 日常食
(1) 초조반(初朝飯)
궁중에서는 아침 수라가 10시경에 드시므로 보약을 드시지 않는 날에는 유동식이며 보양이 되는 죽·응이·미음 등을 이른 아침에 드린다.
아침 일찍 드시는 조반이므로 초조반 또는 지릿조반이라 하고 정리의궤에서는 죽수라 라고 칭하였다.
궁중에서는 죽은 아플 때 먹는 것이 아니고 초조반 또는 낮것상에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죽으로 흰죽 잣죽 낙죽(酩粥;우유죽) 깨죽 흑임자죽 행인죽 등을 올린다.
미음으로 차조 인삼 대추 황률 등을 오래 고아서 밭친 차조 미음이나 멥쌀만을 고아서 밭인 곡정수 (穀精水), 찹쌀과 마른 해삼 홍합 우둔고기를 한데 고은 삼합미음 등이 있다.
응이에는 율무응이 갈분응이 녹말응이 오미자응이 등이 있다.
초조반상은 죽이나 응이나 미음 등 유동식이 주식인 상으로 찬품이 아주 간단하다. 죽상을 차릴 때는 죽 미음 응이 등을 합에 담고, 따로 덜어먹을 공기와 수저를 놓는다.
찬품으로는 어포 육포 암치보프레기 북어보프레기 자반 등의 마른찬을 두세 가지를 차리고, 조미에 필요한 소금 꿀 청장 등을 종지에 담는다.
김치는 국물김치로 나박김치나 동치미가 어울린다. 죽상에 놓는 조치는 맑은 조치로 소금이나 새우젓국으로 간을 맞춘 찌개이다.
(2) 수라상
밥에 대한 표현이 받은 이의 위상(位相)에 따라 밥 진지(進支) 메 수라 등으로 각기 다르게 부른다.
임금님의 진지는 '수라(水剌)'라 하는데 이는 우리 고유의 말이 아니고 고려 말 몽고의 부마국(駙馬國;사위의 나라)이던 시대에 몽고어에서 전해진 말이다. 조선조 궁중 에서는 이 말이 전하여져서 임금과 왕비가 평소에 받는 진지상을 수라상이라 하였다.
수라를 드시는 것을 '수라를 젓수신다'라고 하여 '진지를 잡수신다'보다 더 높여 올려서 표현한다. 왕자나 왕녀에게는 진지라 하였다.
궁중에서는 이른 아침에 보약을 드시거나 또는 미음, 응이를 드시고 아침수라(朝水剌) 는 10시가 지나야 드시고 저녁수라는 저녁 5시경에 드신다.
평상시의 수라상은 수라간(水剌間)에서 주방 상궁들이 만들어 왕과 왕비께서 각각 동온돌과 서온돌에서 받으시며 결코 겸상을 하는 법은 없다.
그리고 왕족인 대왕대비전과 세자전은 각각의 전각에서 따로 살림을 하며 거기에 딸린 주방에서 만들어 올린다.
수라상에 올리는 찬물은 왕의 침전과 거리가 떨어져있는 수라간에서 만들어서 지밀에 부속되어있는 중간 부엌의 역할을 하는 배선실(配膳室)인 퇴선간에서 일단 받는다.
퇴선간 에서 식은 찬물들을 덥히고, 수라를 곱돌솥이나 새옹에 백탄을 피워서 짓어서 상을 차려서 올린다.
㉮ 수라상의 찬품(饌品)
평소의 수라상은 12첩 반상차림으로 수라와 탕을 두 가지씩과 기본 찬품과 쟁첩에 담는 12가지 찬물들로 구성된다.
기본음식으로 수라는 백반(白飯)과 팥 삶은 물로 지은 찹쌀밥인 붉은 빛의 홍반(紅飯) 두 가지을 수라기에 담고,
탕은 미역국(藿湯)과 곰탕을 두 가지를 모두 탕기에 담아 올리어 그날에 따라 좋아하시는 것을 골라서 드시도록 준비한다.
조치는 토장조치와 젓국조치 2가지 을 준비하고 찜 전골 침채 3가지가 기본 음식이다.
그리고 상위에 놓이는 조미품으로 청장 초장 윤집(초고추장) 겨자집 등을 종지에 담는다. 쟁첩에는 12가지 찬물을 다양한 식품재료로 조리법도 각기 달리하여 만든다.
㉯수라상의 기명(器皿)
수라상은 큰 원반과 곁반인 작은 원반과 책상반의 3개 상에 차린다.
대원반은 붉은색의 주칠(朱漆)을 하고 중자개로 문양을 넣거나 다리에 용트림 장식이 조각되어있다. 대원반은 중앙에 놓이며 왕이나 왕비가 앉아서 드시는 상이다. 곁반으로 소원반과 네모진 책상반이 쓰인다. 책상반 대신 때로는 둥근 소반을 쓰이기도 한다.
찬물을 담는 그릇은 철에 따라 달리 쓴다. 추운 철인 추석부터 다음 해의 단오 전까지 는 은반상기(銀飯床器)를 쓰고, 더운 철인 단오에서 추석 전까지는 사기(砂器)반상기를 쓰고, 수저는 연중 내내 은수저가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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