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기문/매암 이숙량
명종계해(1563)년 여름 향시에 필요한 학업을 익히는 향중 선비들이 학당에 모여 글을 읽고 짓는 여가에
서로 팔을 잡고 탄식하여 이르기를 서원(書院)이 우리나라에 있어서 전후에 들은 바가 없었더니 무릉(武陵)주선생(周先生)이
처음으로 백운동(白雲洞)에 세움에 시청을 고동시키고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였으니 참으로 우리나라 위대한 사업의 으뜸이었다
그 소문을 듣고 일어난 것으로 해주의 문헌서원(文憲書院)과 성주의 연봉서원(迎鳳書院)과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과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같은 것이 있다.따라서 크고 작은 고을에 파급되어 서로 다퉈가며 추모하고 점차 확장하였으니
이러한 것들이 어찌 모두 수령들에 의해서 건립되었으며 또 어찌 모두 반드시 어진이의 숭배를 위주하여 설치한 것이겠는가
고을 사람들이 능히 스스로 분발하여 강학의 장소로 세운 것이 간혹 있었으니 도의를 강마하고 풍속을 격려하는 데에 있어
어찌 도움이 적다 하겠는가
우리 고을은 한 도(道) 가운데 선비의 후손이 많은 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몸을 사사롭게 하고
선비들은 그 학문을 사사롭게 하여 활과 말의 기예에만 따르고 문학에는 힘쓰지 않았다
그 사이에 또한 어찌 호걸스런 재목과 기위(奇偉)한 사람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 퇴폐한 풍습속에서 능히 스스로 분발한 사람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풍속이 이로 말미암아 아름답지 못하고 인심이 이를 예사로 여겨 날마다 나빠졌으니 이 어찌 다만 우리 고을의
수치였겠는가 또한 국가의 불행이었다
지나간 것을 따를 수 없고 다가오는 것을 힘쓸 수 없으니 지금 어진 임금을 만났으며 하잖은 고을에서 어진 성주를 얻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고을 풍속을 혁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다.
옛말에 이르기를 [모든 공인(工人)이 제자리에 있으면서 그 일을 이룬다]고 하였으니
학문을 하는 데에 있어서만 어찌 그렇게 하겠는가 그렇다면 선비가 있을 자리는 서원이 아니고 어디겠는가
이에 목욕 제계하고 성주에게 들어가 뵙고 서원 세울 뜻을 고하였으니 이때 성주는 밝은 성주 박응천(朴應川)이었다
그 향약의 마음을 아름답게 여기고 사람의 아름다움을 이루어 주는 것을 즐겁게 여기고 즉시로 명령하여 이르기를
[내가 비록 능히 주관할 수는 없으나 그 일로써 와서 말하면 들어 주겠다]고 하였으니 또 이르기를 [집을 세우는 데에는
기와가 가장 큰 일이니 이것은 내가 마련해 주겠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일을 하는 데에는 유사(有司)보다 더 앞서는
것이 없으니 유사의 우두머리를 선택하라]하였다
제생들이 그 명령을 듣고 뛸듯이 기뻐하며 물러 나왔다
다음날 향사당(鄕射堂)에 향중 부호들을 모아놓고 역시 서원 세울 뜻을 말하니 모두 말하기를 [감히 동심협력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이에 일을 주관할 사람을 세우고 또 재력(財力)의 규모를 계획하여 대소인원을 차례로 써서 그 빈부에 따라 돈과 곡식을
거두었으며 노력을 내는 데에도 역시 이와같이 하였다 이에 공인(工人)들을 먹일 곡식과 노임으로 줄 포백들이
단시일에 집합되었다
이에 마땅한 기지를 살펴 팔공산 기슭에 세우도록 작정하였다
고을에서 20리쯤 떨어진 곳에 마을이 있어 위의 마을은 지묘(智妙)라 하였고 아랫마을은 무태(無怠)라 하였으며
서원은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이름을 연경(硏經)이라 하였으니 당초에는 잡초가 우거진 묵밭이었던 것을
전임 성주가 공유지로 교환하였다
한 줄기의 맑은 냇물이 그 남쪽을 지나 잔잔하게 흐르며 구비구비 산을 따라 서쪽으로 10리를 체 못가서 호(湖)에 이르렀다
그 상류의 두 마장쯤 되는 지점에 왕산(王山)이 있어 웅장하게 서려있고 높이 솟아 아름다운 기운이 매우 짙었다
그 왕산을 호위하듯 그 남쪽에 벌려섰는 중첩된 봉우리가 마치 용이 날으고 봉이 춤추는 듯 굽고 방박한 것은 서원의 동남쪽 경관이다
서원의 북쪽산을 성도(成道)라 일렀으니 봉우리가 높이 솟고 골짜기가 아늑하고 깊어 흰 돌과
푸른 소나무가 은은하개 비추었으며 서쪽으로 달리다가 갑자기 큰 바위가 깍은듯이 높이 서있어 화암(畫巖)이라 일렀으니
이는 즉 서원의 서쪽 진(鎭)이라 붉은 언덕 푸른 절벽이 높이 서 있어 기괴한 형상들이 저절로 아름다운 그림을 이루었으니
화암이라고 한 이름이 이 때문이었는가? 그 아래 푸른 못이 잇어 깊고 맑아 잠겨있는 고기들이 헤아릴 수 있었으니 이는 즉
서원에서 굽어보는 경관이다.
갑자년 봄 삼월에 상량하여 그 명년겨울 시월에 공사를 마쳤으니 집이 모두 40여칸이었다
그 정당(正堂)은 세칸으로 기둥이 높고 처마가 날으는듯 하였으며 산과 물의 형세가 다 그 안을 밝혀 읍하는 듯 하였으니
참으로 인자(仁者)와 지자(知者)가 좋아할만한 곳이라 그 이름을 인지당(仁智堂)이라 하였다
그 왼쪽 채는 넓고 깊어 그윽한 형세가 존엄하였으므로 수방재(收放齋)라 일렀으며 오른쪽 채는 상쾌하고 시원하여
마음이 저절로 가다듬어졌음으로 경타재(警惰齋)라 일렀다 그리고 동쪽 집을 보인(輔仁) 서쪽 집을 시습(時習)이라 일렀으며
긴 행랑의 중간에 초현문(招賢門)이 있고 초현문의 서쪽 곁에 동몽재(童蒙齋)가 있으며 그 동쪽의 양헌(涼軒) 두 칸을
양정당(養正堂)이라 일렀으며 그 서쪽 온실 세칸을 유학재(幼學齋)라 일렀다
그 밖에 주방과 창고를 동편에 붙여 세우고 원장은 서쪽으로 둘려있다 이러한 것을 모두 합하여 [연경서원]이라 일렀다
집은 이미 이루어졌으나 모든 용품이 미비하였다 이에 또 권고하는 안을 내어 향중 동지들과 의논하고 스스로 원하는 바에
따라 받아드렸으니 적게는 소반과 기명이요 크게는 돈과 곡식과 서책들이었다 그들의 재력에 따라 드려 놓았으니 한 고을의
동심합력이 참으로 가상할만 하였다
대개 서원의 건립이 비록 지방사람들의 공통된 소원에 근본하였으나 모든 계획과 처치에 있어서는 전후 성주의 힘이 많았다
당초 재목을 모으고 기와를 구울적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성주가 담당하여 엄한 호령으로 순하게 인도하고 태만한 것을 이끌었으며
토지 노속의 배치 선비를 기르는 경비의 근본대책 등유 식염의 규정에 이르기 까지 모두 용의조치 하다가 완수하지 못하고 전임됨에
고을 사람들이 실망하고 중도폐지 될까 염려하였더니 우리 유학에 행운이 깃들어 또다시 어진 성주를 만나게 되었다
부임하자 곧바로 서원건립에 마음을 기울여 모든 고하는 것을 그대로 들어주었다
인부들이 부역이며 경비의 계속에 용의주도 하였으며 수호하는 군정과 주방의 식모들 까지도 힘써 주었으니
문학을 숭상하고 교화를 일으키는 뜻이 전임자와 후임자가 똑 같았다 우리 고을 많은 선비들의 다행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그러나 두분 성주의 공적이 어찌 다만 구구하게 집을 짓는 사이에 베푼 조치의 말단에만 있었겠는가
뒷날 원근에서 이 서원을 찾아와 노는 사람들이 두분 성주의 근념과 서원을 건립한 뜻을 생각하여 글을 읽는 데에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으로 근본을 삼고 문장을 서술하는 데에는 미사여구로 다듬는 것을 말단으로 삼아
학문은 자신의 수양을 위하고 외부의 물욕에 뜻을 빼았기지 말며 진실을 알고 성실하게 시행하여 다른 잡기에 현혹되지 아니하며
맑은 냇물에 임하거든 [가는 것이 이와 같다]고 한 공자의 말씀을 추모하고 높은 바위를 우러러서는 맹자의 기상을 상상하여
뛰어난 사람은 심오한 학문의 진리를 얻게 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라도 오히려 어진 것을 잃어버리지 아니할 것이라
궁하여서는 가문과 시속의 모범이 되고 현달하여서는 임금을 존경하고 백성을 비호하여 충과 효를 다하는 인재가 많이 나올 것이니
두분 성주의 공적이 이에 커져서 장차 화암과 더불어 우뚝 솟아 떨어지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지금 성주의 이른은 승간(承侃)이니 전임 성주와 성이 같으며 아름다운 치적도 잘 이었다
이 때 고을사람들이 나를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공사를 주관토록 하였으며 완공된 뒤에 또 나에게 서원건립의 내력을
써서 퇴계선생에게 기문을 청하도록 책임을 지웠다 이에 퇴계선생에게 청하였더니 선생이 병환으로 사양하시면서 내가 쓴 내력이
기문에 적합하다 하시고 칭찬하시며 발문을 뜻 깊게 써 주시고 반드시 기둥사이에 같이 계시도록 하였다
내가 감히 안된다고 사양하면 이것은 졸작인 나의 글 때문에 발문까지 버리게 되며 나의 글을 버리고 발문만을 취하면
서원건립의 전말을 알 수 없게 된다 이에 감히 옳지 못한 죄를 범하면서 마침내 썼으니 뒷날 군자들은 못난 사람의 글이라 하여
버리지 말고 특별히 관용하여 주면 매우 다행이겠다.
명종22년 (1567)정묘 10월16일 진사 이숙량 기(記)
硏經書院記 ( 硏經書院記 )
嘉靖癸亥夏,鄕士之隷解業者,多聚于黌含,讀書綴文之暇,相與㧖腕而歎曰,書院之於吾東方前後無聞焉,武陵周先生創立於白雲洞,其聳動觀聽,作新人才,實我靑丘偉事之赤幟也,聞風而興起者,有若海之文憲,星之迎鳳,臨皐之於永,西岳之於慶,以及大小州縣,爭相競慕,寢廣而寢備,是豈皆出於守令之建立,豈必皆主於尙賢而設置,鄕人之能自奮發, 而爲立講學之所者,亦或有之,其爲講劘道義,激勵風俗,豈曰少補之哉,至如吾鄕居一道之中,衣冠之裔,不爲不多而,人私其身士私,其學善趨,弓馬之技, 不務文藝之習,其間亦豈無豪傑之才,奇偉之人,而能自振發於頹波之中者,其有幾者,風俗由是,而不美,人心職此而日渝,豈獨吾鄕之大可羞抑,亦國家之所不幸也,往不可追來者可勉,今代遭逢聖主, 陋邦得賢侯,此實鄕風革舊鼎新之機會也,語曰,百工居肆,以成其事,至於爲學,何獨不然,然則士之所居之隷,非書院乎,於是乎,薰沐齋祓,入謁於土主,以立院之意,告之于時,土主乃朴明府應川也,美其向學之心,而樂其成人之美也,卽命曰,吾雖不能專主凡以其事來告,則聽,又曰,立屋瓦事最鉅,此則吾當辦,又曰,作事莫先有司擇有司之長,諸生聞命,踴躍而退,翊日會諸鄕中父老于鄕射堂,亦以立院之意告之,咸曰,敢不同心戮力,於是旣立主事之人,又畫財力之規,列書大小人員等,其豐約而收其錢穀,出其力,而亦如是,於是餉工之粟,酬勞之布,不日而集, 乃相土地之宜經始于入公山之麓,去州里二十有許,其上有村曰,智妙,其下曰無怠院之宅,居其間坊,
名曰,硏經初不過爲荒草野田,我前侯以公田換之玉溪一帶經其南淙潺回互循山,而西未十里達于湖,其上流二里許,有王山,雄盤斗起,佳氣蔥鬱,護王山列,其南層巒疊嶂,龍飛鳳舞,蜿蜒而磅礴者,院之東南望也,院之北山曰,成道峯巒偃謇,洞壑窈窕,白石蒼松,隱暎而西馳,忽有巨巖削立千仞曰,畫巖卽院之西鎭也,丹崖翠壁,岌嵂撑拄奇形怪狀,自成圖畫,巖之得名,其以此歟,其下有碧潭,涵泓澄澈,游魚可數,卽院之俯瞰也,歲甲子春三月上樑越明年冬十月工訖,凡爲屋四十餘間,其正堂三,楹棟宇悛起,簷阿軒翔,山形水勢咸拱,其中眞仁智之攸樂,名之曰,仁智堂,其左翼,則宏深幽閴,體勢尊嚴,曰,收放齋, 其右翼,則爽割淸涼,心自警愓,曰,警惰齋,東齋曰,輔仁,西齋曰,時習,長廊之中,有招賢門,門之西旁有童蒙齋,其東之涼軒二間,曰,養正堂,其西之溫房三間, 曰,幼學齋,庖廩附于東偏,垣墻繚于西面,合以名之, 曰,硏經書院,屋宇旣成,百用未備,於是,又出勸剳論,諸鄕人之同志者,從其自願而入,小則盤盂器皿,大則錢穀,書冊隨其有而納之,其爲一鄕之同心,可尙矣,大抵院之立,雖本於土人之所共願,至於施措處置,大槩則前後邑宰之力居多焉,當其鳩材陶瓦之始,私力之所未及,則侯旣當之,嚴其號令,道其順而率其慢,以至土田藏獲之施,養士廩祿之本,書油貿鹽之規,無不用意措置,措置未究,不意見遞,鄕人失望,方恐九仞之,將虧斯文有幸復値,今侯之仁賢,下車未久,銳意畢休,凡所告稟聽之如流,其於力役之助,財用之繼,終始無倦,以及守護之丁,炊爨之婢,亦爲之致力焉,其右文興化之意,前後同一轍也,則吾一鄕多士之幸,爲何如哉,然二侯之功,豈獨在於區區營造之間,措置之末哉院中,他日遠近來遊者,念 二侯之勤,思立院之義讀書,而以格致誠正,爲本綴文,而以繪句雕章,爲末學而爲己,不奪於外物,眞知實踐,不眩於他技,臨淸流,則慕宣尼如斯之歎仰,高巖則想孟氏巖巖之氣,高者可入室,而升堂下者,猶不失爲仁人窮而爲範家表俗達而爲尊主庇民爲忠爲孝,人才蔚興,則二侯之功,於是爲大將與畫巖同其屹立而不墜也,無疑矣,今侯諱承侃,與前侯同姓,而繼美焉時鄕人不以余爲無似,旣令主管院,事旣成,又責余具述其迹,請記於退溪先生,先生辭以疾,乃以拙作敍事近於記誤借推奬因跋其尾深致
意焉,必欲同掛楣間,然後已某欲強辭不敢,則是以余拙文之故,幷與跋語而置之,欲捨此取彼,則院之顚末,無以考其實,乃敢犯不韙之罪,而遂書之,後之君子,勿以人廢言,而特恕之幸甚,隆慶丁卯,陽月旣望,進士李叔樑記
출처 영천이씨 대종여로
[출처] 대구 연경서원(硏經書院)기문/매암 이숙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