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1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전 유성룡은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했다. 한번에 7품계 상승이라는 파격적인 인사였기에 조정대신들의 반발은 대단했다. 당시 사간원은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기대에 부응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좌수사로 승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그 폐단은 막기 어려우니 빨리 중지시키소서.”
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하지만 당시 유성룡에게 우의정과 이조판서를 겸직시킬 정도로 두텁게 신임하고 있던 선조는 여러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에게 전라좌수사의 관직을 맡겼다.
임진왜란의 3대 대첩은 한산도대첩, 행주대첩, 진주대첩이다. 이순신, 권율, 김시민이 거둔 승리였다. 유성룡은 이중 이순신과 권율을 발탁하여 임진왜란을 대처하는 재상으로서의 소임을 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성룡의 추천으로 이순신은 7계급 특진을 하여 전라좌수사에 임명되었고, 권율은 정5품 호조정랑에서 임진왜란 1년전 의주목사로 천거되어 군사적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유성룡과 이순신은 오랜 인연이 있었다. 유성룡의 고향은 경상도 안동이었지만 한양에서 관직을 맡은 아버지를 따라 오늘날 서울시 중구 필동 근처 지금의 충무로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이순신이 어린 시절 살던 건천동(현재 을지로 4가와 충무로 4가 사이)과 아주 가까운 거리였고 이순신의 형인 이요신과 친구로서 어린 시절의 경험을 공유하였다. 당시 이순신의 4형제는 중국 역대 3황5제의 이름인 복희씨와 요, 순, 우임금의 이름을 시대순으로 따서 형 희신과 요신에 이어 3째 순신과 동생 우신으로 지었다. 유성룡의 <징비록>에는
“이순신은 어린 시절 영특하고 활달하였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 때면 나무를 깍아 화살을 만들어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했다. 마음에 거슬리는 사람이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해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어린이들이 만든 군문 앞을 지나려고 하지 않았다.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가려고 하였다. 활쏘기를 잘 했으며 글씨를 잘 썼다.”고 기록하였다.
유성룡은 이순신을 발탁하여 천거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정읍현감 이순신을 발탁하여 전라좌수사로 삼았다. 이순신은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했다. 일찍이 조산만호로 있었는데 그 무렵 북방에서 변고가 많았다. 이순신이 배반한 오랑캐를 꾀로 유인하여 베어죽이니 이후로 오랑캐의 우환이 없어졌다. 이순신이 녹둔도를 지키고 있었는데 안개가 많이 낀 어느날 병사들이 10여 명만 남고 모두 추수하러 나갔는데 오랑캐 기병들이 갑자기 쳐들어왔으나 이순신이 성채 문을 열고 화살로 수십 명을 잇달아 쏘아 떨어뜨리자 모두 달아났다.
하지만 조정에서 그를 추천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에 오른 지 10여 년이 되도록 승진하지 못했다.
그후 늦게서야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때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이 퍼져가자 임금께서 비변사에 장수될만한 인재를 천거하라고 명하셨다. 내가 이순신을 천거했는데 현감에서 수사로 파격적으로 임명되자 사람들이 이를 의심하기도 하였다.”
유성룡은 강직한 성품 탓에 사방에 적이 많았던 이순신을 보호하는데 앞장섰으며, 전라좌수사로 부임한 이순신에게 <증손전수방략>이라는 병법서를 보내주었다. <난중일기>에는 “좌의정 유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이라는 책을 보내왔다. 수전, 육전, 화공 등에 관한 일을 하나하나 논의해놓았다. 진실로 세상 그 무엇에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탁월한 이론이다.”라고 기록되었다.
유성룡의 <서애집>에는 1591년 선조가 비변사에 내린 전수도(戰守圖)를 유성룡이 보충하여 20여 조목으로 책을 만들었으나 이후 원본을 잃어버려 다 기억할 수 없다고 기록되었다. 조정에서 왜란이 발발할 것을 감지하여 최일선 장수들에게 책자로 배포되었던 병법서이다.
<난중일기> 1597년 4월 2일자에는 감옥에서 출소 후 유성룡과 면담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종일 비가 내렸다. 어두울 무렵 성으로 들어가 영의정 유성룡과 이야기 하다 닭이 울어서야 헤어져 나왔다.”고 적혔다. 당시 선조는 이순신이 자신의 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순신은 참으로 역적이다. 이제 가등청정(加藤淸正)의 목을 들고 온다 해도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임금과 조정을 기망했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는 험악한 분위기였다.
유성룡도 조정의 분위기 상 이순신을 변호하기 보다는 죄를 물어야 한다는 중론을 거스리지 않고 유연하게 처신하면서 훗날을 도모하였다. 이후 이순신은 심문과 백의종군의 고초를 겪은 후 기적처럼 통제사로 복권될 수 있었다.
훗날 유성룡은 이순신의 장렬한 순국을 슬퍼하는 안타까움을 기록하였다.
“이순신이 옥에 갇혔을 때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는데 옥리가 그의 조카 이분에게 ‘뇌물을 쓰면 나갈 수 있겠다’고 은밀하게 말했으나 그는 이 말을 듣고 이분에게 화를 내며 ‘죽으면 죽었지 어찌 도리를 어기면서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하였으니 그가 지조를 지킴이 이와 같았다.
선조도 이순신 전사 이후 내린 제문에...
"나는 그대를 버렸건만 그대는 나를 버러지 않았으니 이승저승 맺힌 원한 얼마나 슬픈손가.."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정하여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니 그의 뱃속에는 담기가 있어서 자기 몸을 잊고 국난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것은 평소에 수양을 했기 때문이다.
그의 형은 희신과 요신인데, 모두 순신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를 자기 자녀와 같이 돌보아주고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는 데도 반드시 형의 자녀를 먼저 보내고 자기 자녀는 뒤에 보냈다. 재간은 있어도 명운이 없어서 가지고 있던 재간 백 가지 중에 한 가지도 시행 못하고 죽었으니, 아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정조 임금은 유성룡를 가리켜 “참으로 우리나라의 장자방(한고조의 참모 장량)”이라고 평했고 허균은 “유성룡이 이순신을 등용한 1건이 나라를 중흥시킨 큰 기틀”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실학자의 중심인물인 이익은 “유성룡의 진정한 애국충정은 이순신 같은 명장을 추천한 것으로 그의 소임을 다했다.”고 평했으며 “현자를 추천하면 높은 상을 받는 것이 법도이다. 신하 본인이 현자이면 그가 죽으면 하던 일도 중단되지만, 추천한 이는 죽어도 그의 어짊은 길이 남는 법이다.”라는 글을 남겼다.
#今臣戰船尙有十二 지금 신(臣)에게는 아직도 12척의 전선(戰船)이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하여 싸우면 적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습니다.
#三尺誓天山河洞色一揮掃蕩血染山河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에 물들이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