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은 보통 12시 40분쯤에 먹습니다.
붐비는 시간에 혼자 테이블을 차지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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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점심시간이 되기 전에 배가 고프거나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밥 생각이 없어서 난처할 때가 있습니다.
전에는 점심시간 전에 배고플 때가 많았는데
언젠가부터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밥 생각이 없을 때가 더 많아졌습니다.
이 또한 나이 먹은 티를 내느라 그런 것인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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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은 죽을 먹습니다.
겉으로 내세우는 이유는 밥값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밥값보다 비싼 게 함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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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최애 메뉴는 흑임자죽입니다.
다른 죽은 8,000원이나 9,000원인데
흑임자죽은 8,500원이어서 저금통에 500원을 저금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책상에 500원짜리 동전만 저금하는 저금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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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흑임자죽이라고 할까요?
검은깨죽이라고 하면 안 되나요?
검은깨죽이라고 하면 누구나 알아들을 텐데
흑임자죽이라고 하는 바람에 못 알아듣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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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우리말보다 한자어를 더 격조 있는 언어인 양 여기는 풍조는 은근히 불만입니다.
짚이는 데가 있습니다.
옛날 양반님들은 다 한자어를 쓰고
촌무지렁이들이 우리말을 쓰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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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8,500원이라는 가격이 마음에 들어서 흑임자죽을 주문한 적이 있는데
너무 달았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갈 때마다 설탕을 넣지 말아 달라고 따로 얘기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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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점심때도 밥 생각이 없었습니다.
흑임자죽을 주문하고는 앉아 있노라니
주방에서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가게가 좁습니다.)
“설탕을 넣어버렸는데 어떡하지?”
“물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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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는 저한테 묻습니다.
“저, 죄송한데요, 설탕을 넣어버렸는데 어떡하죠?”
그런 경우에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요?
괜찮다고 하는 것이 정답이겠지요.
이미 들어간 설탕을 빼 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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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달달한 흑임자죽을 먹었습니다.
(“달달하다”는 국어사전에 없는 말입니다.
그런데 왜 썼느냐 하면, 국어사전에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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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 먹은 힘으로 『Let’s Go 히브리서』를 말하는 것이라
평소보다 설득력이 덜할 수도 있겠습니다.
달달한 말로 유혹해야 하는데 “달달하다”가 국어사전에 없는 말인 것을 뻔히 아는 처지라 그것도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