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통건축도면과 건축계획
건축발전 및 인식 구조와 건축도면
건축에서 도면을 작성하는 목적은 건축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함이다. 도면을 그리는 내용과 방법은 두 가지 원인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첫 번째는 짓고자하는 건물의 성격과 난이도이고 두 번째는 사물을 인식하는 사고체계이다. 첫 번째 요소와 두 번째 요소가 서로 완벽하게 구분되어 검토될 것은 아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에 각각의 요인으로 구분하는 것은 힘들다. 그러나 두 요소는 어느 정도 독립된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두 번째 문제는 사물을 인식하는 체계 속에서 도면을 읽고 표현하는 방법에 대한 근본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더 우선되고 중요한 문제일 수 있으나 좀더 광범위하고,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별도로 보다 심도 있게 검토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본 글에서는 첫 번째 문제위주로 검토하여 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사물이 복잡할수록 그것을 표현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평면의 형태로 끝나는 도형의 경우 한 장의 도면으로 모든 것이 표현된다. 정사각형의 경우는 투상도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입체가 복잡해지면 많은 도면을 그려야만 그 내용을 올바르게 그려낼 수 있다. 따라서 입체가 얼마나 복잡한가가 도면의 양과 정밀도를 결정한다. 그러나 아무리 복합한 구성이라 하더라도 다년간의 경험에 의하여 도면의 숙지가 가능하다. 이런 경우 도면의 중요성이 떨어지게 된다. 우리의 건축은 재료와 구조 방식이 한정되어 다년간의 경험으로 건물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한계 때문에 시공을 위한 도면의 발달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양한 건물은 설계와 시공의 분리 및 도면의 성격과 질에 영향을 준다. 기존의 건물과 전혀 다른 성격의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새로운 설명이 필요하다. 공장과 학교가 다르고 극장과 경기장이 다르다. 따라서 다양한 건축은 다양한 기법의 시공이 요구되어 설계와 시공의 분리를 가져온다. 이렇게 전문 분야로 분리되면 서로간의 대화의 매개물이 필요하다. 설계자와 시공자간의 대화의 매개물은 다름 아닌 도면이다. 따라서 설계와 시공의 분리는 도면 발전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게 된다. 설계와 시공이라는 서로 다른 분야가 다른 시간과 장소에서 작업을 하게 됨에 따라 보다 의사전달을 위한 정밀한 도면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다음으로는 그림을 그리는 도구의 발달이 도면의 발전을 촉진한다. 정밀한 도면을 그리기 위해서는 정밀한 도구의 발전이 필수이다. 도구는 필요에 따라 개발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좋은 도구가 정밀한 도면의 발전을 촉진하기도 한다. 그간 동양에서 보다 정밀한 도면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도면을 그리는 도구가 발전되지 못한 측면도 있다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인식체계와 도법의 발전에 대하여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도법은 인식체계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동양의 그림과 서양의 그림이 서로 다름은 사물을 인식하는 체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는 방법도 전혀 다르다. 오주석은 삼원법(고원법/高遠法,심원법/深遠法,평원법/平遠法)을 설명하면서 옛 그림 보는 방법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우리 옛 산수화에서는 어디까지나 산수 자체가 주인공이다. 사람은 주인공인 산을 소중하게 한가운데 모셔 두고서 치켜다보고(고원법), 내려다보고(평원법), 비껴보고(심원법), 휘둘러봄으로써 산수의 다양한 실제 모습에 접근하려 한다. 산수화의 목적이 자연의 형상뿐만 아니라 거기서 우러나는 기운(氣韻)까지 담아내는 것이라고 할 때, 서양의 一點透視는 일견 과학적인 듯 보이지만 카메라 앵글처럼 포용력이 부족한 관찰 방식이다. 一點透視는 인간중심주의적 사고의 산물인 까닭에 자연의 살아 있는 모습을 따라잡는 데는 실로 많은 어려움을 드러낸다. 애초 산이란 것이 하나의 숨쉬는 생명체라면 그것은 자연과 인간의 상호 양보를 전제로 하는 동양의 고차원적 인본주의, 즉 회화적으로는 삼원법에 의해서만 충분히 표현된다.”(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즉 한국의 그림은 서양그림처럼 사람이 어느 고정된 시점에서 중심이 되어 사물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풍경을 관조하는 마음으로 풍경을 그려내 간다. 또한 우리 그림은 우에서 좌로 위에서 아래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습관은 책을 보는 방법에서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지금의 책은 좌에서 우로 보지만 예전의 책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읽고 다시 우에서 좌로 글을 읽었다.(오주석의 한국의 미특강/오주석/25-31쪽 참조) 이러한 그림의 보는 방법 때문에 고저원근법(高低遠近法)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또한 우에서 좌로 보는 방법 때문에 대부분의 의궤도에서 투상도를 그릴 때도 오른쪽으로 기울어진 그림을 그리게 된다.(그림 1참조)
(그림 1) 명성왕후홍릉산릉도감의궤 도면
앞서 언급한 다시점(多視点)의 묘사방식은 도면에서도 나타난다. 도면을 그릴 때 한 도면에서 많은 것을 보여주려는 시도를 하게 되는 것이다. <화성성역의궤>의 장안성 내도(長安城內圖/그림 2참조)를 보면 전반적으로는 일반적 묘사법을 따르고 있지만 계단의 표현을 위해서 역투시도법을 이용하고 있다. 이것은 다시점관찰법(多視点表現法)을 활용하여 건물전체를 보여주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렇게 다른 방식의 사물관찰법은 전혀 다른 방식의 그림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그림2) 장안문사진과 내도
우리나라 건축도면의 활용의 역사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도면의 발전은 건축의 발달과 무관하지 않다. 아직 원시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곳에서 집을 짓은 과정을 보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특별한 도면이 없이 집을 짓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건축과정은 전통민가에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았다. 민가의 경우 집을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짓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방식에 따라 집을 짓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순한 집짓기는 사회요구가 변화됨에 따라 변화되어 간다. 건축에서 도면이 필요하게 된 것은 집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많은 사람이 동원되기 때문에 집짓기에 관여된 사람들에게 집을 짓는 목적과 의도를 따로 전할 필요가 있게 되고, 집짓기 전에 효율적으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사전에 검토하여할 상황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현재 설계는 <계획설계>, <기본설계>, <실시설계>로 구분한다. <기획설계>라는 단계가 있지만 일반적인 단계는 아니다. 어쨌든 각각은 단계별 특성을 보인다. 계획설계는 건축가의 의도를 확정하는 단계이고 그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는 공사를 위한 도면을 만들기 위한 단계이다. 즉 건축주와 관련된 의사결정의 대부분이 계획설계에서 확정된다. 기본설계와 실시설계는 주로 기술적인 부분을 검토하는 단계이다.
이러한 구분이 과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건축과 지금의 건축은 완전히 다르다. 집을 짓는 과정도 지금과 완전히 다르다. 이러한 과정은 분명 다른 의사결정과정을 요구한다. 과거 우리나라에서 양반이 사는 대가의 경우라고 하더라도 집주인과 대목의 협의 하에 간단한 도면만으로도 집을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그림 3 참조) 그러나 대규모의 궁궐은 전혀 다르다. 어떠한 시설을 어디에 위치할 것인가를 사전에 미리 검토하지 않으면 큰 낭패를 볼 수밖에 없다. 단순히 건물을 배치하는 것만 아니라 공사인원의 동원 및 관리 방법을 계획하는 것도 일종의 설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사전 검토하는 작업이 바로 설계라고 정의 할 수 있다.
(그림 3) 예천권씨종택 평면도
과거의 건축과정에서도 이러한 과정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조선시대에는 <화성성역의궤>를 비롯한 각종 의궤가 후대의 참고자료로서 이용하기 위하여 그려졌다. 여기에 첨부되어 있는 많은 도면들은 의궤작성을 위해 별도로 만들어진 도면은 아닐 것이다. 의궤나 실록에는 초기부터 도면의 검토가 있었다는 기록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국장을 당하여 산릉을 만들 때 화원을 보내어 산의 형상을 그려 올렸다. 그리고 임란 후 파괴된 궁궐을 재건할 때 궁궐영조도감의 당상관과 낭청은 액정사지와 목구, 화원을 거느리고 궁궐터로 가서 궁궐터를 그림으로 그려 근거자료로 삼았다. 또한 성균관과 종묘 등을 정비할 때도 도형을 그려 계획을 수정하는 등의 논의가 있었다.(조선시대궁중기록화 연구/41쪽 참조)
이러한 자료로 볼 때, 의궤에 포함되어 있는 도면은 초기 계획과정에서 논의되었던 도면을 기본으로 하여 작성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도면을 이용한 계획은 분명 존재하였고 그에 따른 발전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건축설계의 발전을 시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의 건축을 보면 이미 삼국시대에 많은 발전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고구려의 평양성의 계획이나 안학궁(그림 4참조)의 규모를 보면 지금과 그리 다를 것이 없으며 황룡사 구층목탑을 건설한 것을 보아도 목조 건축기술이 현재의 수준보다 나았으면 나았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쌍봉사 철감선사 부도에서 나타나는 부연과 서까래의 모습은 최소한 통일 신라 말의 건축의 기본 구조는 현재와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림 4) 안학궁 배치도
고구려의 평양과 경주의 도시구조를 보면 정전법으로 되어 있고 도로의 설계에도 일정한 원칙이 있었다. 그리고 안학궁을 보면 대규모의 공사로서 사전에 계획되지 않으면 실행이 불가능한 공사이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안압지와 옆에 건설된 임해전(그림 5참조)을 보면 정밀한 건축기술이 필요하다. 특히 안압지는 자연 곡선처럼 보이는 의도된 곡선과 직선의 만남은 웬만한 능력이 아니고서는 시행할 수 없는 기법이다. 이러한 기법은 단순히 감각으로 처리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사전에 면밀히 검토되고 계획되지 않으면 쉽게 시행할 수 없는 작업이다.
(그림 5) 임해전 및 안압지 배치도
따라서 어느 정도의 설계가 이루어졌던 것은 확실하다. 그 수준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는 아직 확인할 수 없다. 중국의 예를 보면 일찍부터 도면과 모형에 의한 검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주례/周禮>라는 책에는 건축의 분야를 다룬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라는 것이 있고, 한나라 때 도성을 계획한 사람의 이름이 남아있고, 송나라 때 우문개가 ‘여러 설을 연구하여 총괄적인 도면을 그리고 나무로 모형을 만들었다(중국고전건축의 원리/462쪽)’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당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목결구 모형이 발견되었고, 11세기 초 유호(喩皓)가 모형으로 구조를 검토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유호는 <목경>이라는 책을 저술하였고, 1103년 북송 때 <영조법식/營造法式>이라는 책이 나왔다.(중국고전건축의 원리/12장 1,2절 참조) 이러한 중국의 목조기술의 발전은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과 같은 수준의 설계기술은 아니어도 우리 나름대로의 설계기술을 발전시켜 왔을 것이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설계기술을 지니고 있었는가에 대하여는 회화의 발달정도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도면의 그리는 수준은 일차적으로 회화의 발전의 정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고구려시대의 벽화를 보면 상당한 수준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미 요동성도나 건물도를 벽화에 그려 놓은 것을 보면 건축적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벽화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면 매우 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그림 6 참조) 그리고 담징이라는 화가가 일본에 파견되어 벽화를 그렸고 솔거라는 화가가 그린 나무에 새가 앉으려고 하였다는 설화에서 보듯 그림의 수준도 높았을 것이다. 이러한 건축적 감각과 회화의 수준이 기본적인 계획 검토가 가능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도면작성의 수준은 고려시대에 들어 한결 높은 수준으로 발전되었을 것이다. 고려의 변상경도를 보면 건물의 그림이 매우 수준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회화수준의 발전은 곧 도면의 발전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도 꾸준한 도면의 발전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림 6) 무영총 벽화 수렵부분
도면에 대한 많은 자료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조선시대이다. 조선시대는 많은 의궤를 작성하였다. 의궤는 궁중에서 행한 각종 행사를 기록한 문서이다. 의궤는 단순히 건축도 만을 작성한 것은 아니다. 의궤는 행사를 기록함으로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후대에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서 작성되었다. 또한 의궤에는 풍부한 건축자료가 남겨져 있다. 특히 건물을 지은 후 만들어진 의궤는 건축을 위한 자료로서 활용가치가 있다. 의궤는 현재의 개념으로 볼 때 준공보고서에 해당된다.
준공보고서란 건물이 지어지고 난 후 그 과정이나 결과물을 기록하는 보고서이다. 지금도 준공보고서에는 결과물 위주로 작성되기 때문에 과정에서 그려졌던 도면을 생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결과물이라는 것은 과정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의궤에 수록된 도면들은 분명 계획과 논의 과정에서 활용되었던 도면을 기준으로 작성된 것일 것으로 추측된다. 의궤의 내용에 보면 도면을 그리는데 사람을 파견해달라고 하는 내용이 있으며 또한 그림을 보고 임금이 의견을 제시하였다는 내용(조선시대 영건의궤의 건축도 연구/52쪽,140쪽 참조)도 있는 것으로 보아 계획초기에 어떠한 형식인지는 불명확하지면 도면이 활용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어진용은 현재의 투시도와 비슷한 부감법으로 그린 건물도가 사용되었을 것이고 기타 규모를 확인하기 위해 의궤에 기록되어 있는 수준의 배치도가 활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하였듯이 의궤에 수록된 도면은 건축의 과정에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궤의 내용에는 현장에서 사용할 도면을 작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도면의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건축설계과정에서의 <계획도면>과 <실시도면>의 차이는 시공을 위한 상세도면의 차이도 있지만 실제로 지어질 수 있도록 표기하는 치수에 있다. 이러한 차이는 과거 의궤에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의궤에 실린 도면에 명확한 치수가 없는 것은 바로 계획도면과 시공도면과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한다. 그리고 현재도 현장에서 별도의 시공도를 그리는 경우가 있다. 즉 의궤에 실린 도면은 지금의 계획도면에 가깝고 현장에서는 각 작업자들에게 작업의 내용을 설명하는 별도의 도면이 작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현재도 한옥 시공 현장에서 <양판>이라고 하는 부재제작용 도면이 활용된다. 과거의 건축현장에서는 의궤의 도면과는 달리 각 건물간의 거리가 명기되어 있는 전체 배치도와 각각의 건물규모를 파악할 수 있는 도면, 그리고 각 부재의 제작용도면이 같이 활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확인하기 힘들다. 다만 <영조법식>의 도면과 <화성성역의궤>의 도면 그리고 일본에 있다는 16세기의 도면이 매우 상세하였다는 증언을 고려할 때 상당한 수준이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이러한 의궤의 백미는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이다. <화성성역의궤>는 정조세운 화성의 준공보고서이다. 과거의 의궤와는 달리 다양한 형식의 도면이 기록되어 있어 건축발달의 정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의궤에 있는 다양한 도면은 당시의 제도기술를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건물의 형식에 있어 조금은 왜곡되어 표현한 부분은 있지만 철저하게 현장의 모습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과거의 의궤에서는 보이지 않는 건물 내부의 단면상태를 보여주는 도면이 있어 다시 구조물을 축조하더라도 자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돋보인다.
이렇게 내부의 모습을 보여주는 단면도(裏圖라고 표현함/그림 7)가 많이 그려진 것은 화성이 방어를 위하여 축성된 성이라는 데 있는 것 같다. 한국의 건물은 외관의 표현만으로도 건물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전의 한국의 성은 성벽만이 존재하고 내부에 특별한 시설이 없었다. 화성은 이러한 과거의 성의 문제점을 해결하고 당시의 발달한 화포활용을 적극적으로 적용한 최첨단의 성이다. 따라서 이전의 성과는 개념을 달리하기 때문에 그에 적절한 도면을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정조가 지시를 하여 주변의 도면을 작성하고 도면을 검토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며, 화성성역의궤가 계획에 사용하였던 도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을 것이므로(상기서 153에서 155쪽참조), 화성축성계획시 도면은 화성성역의궤에 게재되어있는 수준의 도면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림7)서북공심돈도면
도면 표현기법에서 보이는 우리의 건축관
건축에 관련된 도면을 보면 우리의 건축관에 대한 일부를 읽어 볼 수 있다. 우리의 도면에 보이는 몇 가지 특징과 의미를 생각하여 본다. 첫 번째로 평면도에 있어 ‘척’도의 개념과 ‘향’의 개념이 없다. 우선 ‘향’의 표기에 대하여 언급해보기로 하자. 우리 건축에서 ‘향’은 매우 중요하다. ‘향’은 집터를 잡는데 최우선으로 고려대상이다. 그러나 이것을 도면에 표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현재도 건물의 방향을 인식하기 위해 배치도에 표기된 ‘향’외에는 도면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향’은 의궤의 설명부분에 별도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도면상의 따로 표기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음으로 척도의 개념이 없는 것은 ‘공간창조를 위한 의미 전달의 매개로서 역할이 고려되지 않았기 때문(조선시대 영건의궤 건축도 연구/박익수/108쪽)’이기도 하지만 ‘칸’의 개념에서 이미 기본척도가 어느 정도 확정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것은 ‘의궤에 있는 그림의 설명에서 별도로 건물의 규모에 대한 척수를 제시하고 있다(상기서 118쪽 참조)’는 것으로 보아 크기에 대한 개념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낮았을 것이다. 따라서 칸의 개념에서 규모를 충분히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건물에 대한 척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로 의궤에 나타난 입면이 표현되는 도면의 특징은 건물표현이 높이가 강조되고 평면적 크기가 축소되어 표현된다는 것이다.(그림 2참조) 배치평면도의 경우 사실에 가까운 형태로 그려지지만, 입면만 그려지는 경우는 대부분 높이가 강조되었다. 그리고 높이는 강조되나 형태의 특징은 그대로 보여준다. 건물의 칸수나 부속시설(총안구의 개수, 돌을 쌓은 단수 등)은 정확히 표현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의궤가 행사를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라고 추정하여 본다. 건물 내부에서 일어나는 행사를 표현하는 의궤를 보면 대부분 건물내부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건물을 높게 그린다. 이러한 표현 방법이 건축용 의궤에서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 번째로 보는 사람을 중심으로 도면을 그렸다는 점이다. 이러한 표현의 원칙은 평면과 입면의 표현에서 고루 나타난다. 건물을 형태를 표현하는 입면에서 보는 사람을 중심으로 한눈에 건물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한 도면에 고원법, 심원법, 평원법 및 역투시도법 등을 같은 화면에 사용하여 건물의 모습이 쉽게 이해되도록 하였다.(그림 2, 그림 8) 이러한 시도는 배치도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배치도에서도 입면과 같이 그림으로서 배치와 건물의 형태를 동시에 알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입면전개식배치도는 실제 건물의 분위기를 훨씬 효율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조선시대 건축배치도의 도법과 사상에 관한 연구/5-1절)
(그림 8) 경운궁중건도감의궤 중 영복당도
그리고 시점에 있어서도 한 곳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시점을 고려하였다. 이것은 우리의 건축이 마당을 중심으로 한 다핵의 건물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식한 표현 방법이다. 배치도법의 발전과정을 보면 초기에는 전면에서 보는 모습만 그리는 1방향입면전개식배치도(15-16세기)에서 3방향입면전개식(17-18세기)으로 그리고 다핵 3방향입면전개식(19세기 이후)으로 변화되어갔다. 이것을 김왕직은 불교사상에서 성리학적 사상으로의 변화라고 주장하고 있다.(상기서/5-1절 참조) 그러나 본인은 건축에 대한 이해와 보는 사람의 시점에서 도면을 이해하여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림 9) 탁지부 전도
앞서 언급하였듯이 우리의 건축은 마당을 중심으로 다핵의 구성이다. 각 핵의 중심은 마당이며 마당에서 보는 모습이 건물을 이해하는 중요한 핵심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다핵 3방향입면전개식 도면은 앞서 작성도 3방향입면전개식 도면보다 우리 건축의 특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탁지부 도면(그림 9참조)에서 보면 중앙청사 우측상단에 있는 건물이 우측 마당에서 바라보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이것은 그 건물이 우측마당에 속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공간 내에서의 위계의 표현은 3방향입면전개식 도면에서는 전혀 표현될 수 없는 것으로 보다 진일보한 도면표현 방식이며 철저하게 생활하는 사람 위주로 표현된 도면이다.
결론으로 과거 우리나라의 도면은 당시 건축환경 때문에 표현이 지금의 관점에서 미흡한 점은 있으나 과거 우리 도면의 표현은 최소의 도면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으려는 효율성추구 정신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또한 도면 작성은 초기에는 단일 시점을 원칙으로 작성되었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우리 건축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다핵공간의 도면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도면을 작성할 때는 그 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관점에서 작성되었던 것이다.
참고서적
한국건축사/대한건축학회/기문당
조선시대 궁중기록화 연구/박정혜/일지사
중국고전건축의 원리/李允鉌지음/이상해 외 3인 옮김/시공사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오주석/솔
오주석의 한국의 미 특강/오주석/솔
수원성/김동욱/대원사
수원의 화성/신영훈/조선일보사
朝鮮時代營建儀軌의 建築圖 硏究/박익수/전남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
조선시대 건축 배치도의 도법과 사상에 관한 연구/김왕직, 김홍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