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면 상현리에는 조선 중기 이 나라를 중국의 요․순시대와 같은 이상 국가로 만들려고 애쓰다 사약을 받은 조광조의 묘와 사당이 있다. 구 관료를 몰아 내고 신진 사류를 대거 등용하여, 도학을 실천할 기틀을 마련하고, 유교를 정치와 백성을 교화시키는 근본으로 삼아 왕도 정치를 구현코자 하였으나, 기득 계층의 반발로 무산되고 본인은 38세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급제 후 2년만에 대사헌?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본관이 한양(漢陽)이고, 한양에서 태어났다. 개국 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로, 자는 효직(孝直), 호는 정암(靜庵)이다. 자(字)에서 알 수 있듯이 정암은 부모를 공경함에 있어서 남달랐다. 어머니 상(喪)을 당하자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조석으로 공양하며 항상 묘를 대하여 앉았고 한가할 때에는 묘 주위를 돌아보는 것을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 3년간 여묘(廬墓)를 살고도 애절한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묘 옆에다 두어 간 초가집을 짓고 영구히 사모하는 장소로 삼았으며, 또한 그 옆 시냇물을 끌어다가 못을 만들고 섬돌을 구축하였다. 연(蓮)과 잣나무를 심고 항상 그 곳에 와 소일하며 효도와 아름다운 경치를 함께 즐겼다. 천품이 고매하고 어려서부터 큰 뜻을 품은 정암은 17세가 되던 해 부친이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부임하자 부친을 따라 갔다. 그 때 마침 희천(熙川)에는 연산군 때 무오사화로 죄를 짓고 유배 중이던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이 있었다.
한훤당 밑에서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공부한 정암은, 그 오묘한 진리를 체득하고 이를 경전 연구에 응용하여 성리학 연구에 힘써 어린 나이에도 김종직의 학통을 이은 사람파(士林派)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정암이 공부할 때 몸과 마음 가짐에 대한 세상의 평이 많았다. “난(鸞)새가 앉아 있는 듯, 봉황새가 버티어 선 듯, 옥처럼 윤택하며, 금(金)처럼 정간하며, 아름다운 난초가 향기를 뿌리는 듯, 밝은 달이 빛 을 내는 듯하였다.” “일찌기 천마산․용문산에 들어가 글을 읽고 익히는 여가에 바로 앉아 해가 다 하도록 마음을 가라앉히고 경건히 수양하니 사람들이 미치지 못 하였다.”“선생은 앉으면 반드시 단정히 꿇어 앉고, 손은 반드시 팔꿈치를 맞잡았 으므로 입은 옷은 언제나 팔꿈치와 무릎 부분이 먼저 떨어졌다.”“매일 닭이 울면 세수하고 머리 빗고 우러러 생각하여 반드시 몸소 체득하였는데, 한 번도 깨우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적이 없었다.”“천마산에 있을 때 바로 앉아 있는 모양이 마치 찰흙으로 빚은 인형같 았고, 괴로움을 참고 음식을 가려 먹기가 중들과 같았다.”
어느날 한훤당이 모친에게 보낼 꿩을 고양이가 물고 가자 지키던 자를 꾸짖었다. 그러자 정암이 앞으로 나가 말하기를,“봉양하는 정성은 비록 간절하오나, 군자는 말과 기색을 잘 살펴서 하여야 함인데, 소자(小子)는 적이 의혹되옵기에 말씀드렸읍니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한훤당은 정암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나도 바로 뉘우쳤는데 네 말이 또한 이와 같으니 부끄럽다. 네가 내 스승이지 내가 네 스승이 될 수 없다.” 라고 하였다. 이처럼 스스로 깨우치고 공부에 열중하자 친구들이 그를 ‘광인(狂人)’․‘화태(禍胎)’라 하여 교제를 끊었으나, 정암은 전혀 개의치 않고 학업에만 전념하였다.
20대에 접어든 정암은 이미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어 덕망이 세상에 알려졌다. 1510년 이조 판서 안당(安瑭)은 정암을 추천하며 아뢰기를,“조광조는 경서에 밝고 행동이 의로우니 마땅히 발탁하여 쓰되, 만약 자격에 구애된다면 예(例)로 참봉(參奉)에 조용(調用)할 것이온 바, 그러면 사림(士林)을 권장함에 부족하니 청컨데 6품의 관직을 제수하옵서.” 하니 임금은 조지서(造紙暑)의 관원인 사지(司紙)에 임명하였다. 과거를 보지 않고 단번에 6품 벼슬을 얻은 것을 두고 세상에서는 조롱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어 풍자하기를, 일부의 소학을 부지런히 읽어라(一部小學須勤讀) 사지의 공명이 저절로 온다(司紙功名自然來) 이런 세상의 비난에 정암은 심히 불쾌감을 나타내어 말하기를, “나는 영달을 마음에 두고 있지 않는데 이런 뜻 밖의 일이 있다. 지금은 옛 시대와 다르니 과거하여 세상에 도를 행할 계제를 삼아야 할 것 이요, 실상이 없는 헛된 명예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은 마음으로 부끄러워 한다.” 라고 하였다.
벼슬길에 오른 정암은 본격적으로 마음에 먹은 이상을 펼쳤다. 사마시에 장원으로 급제(1510, 중종 5)하고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공부하였고, 5년 뒤에는 앞서 밝힌 대로 안당의 추천으로 사지(司紙)가 되고, 그 해 증광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예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중종의 두터운 신임을 얻은 정암은 1517년 정랑이 되었고, 그 해 11월 대사헌에 올랐다. 급제 후 2년만에 종2품인 사헌부 우두머리 대사헌에 진급한 일면에는 임금의 절대적인 신임도 있었지만, 정암이 펼치는 개혁 정치가 당시의 시대 조류에 맞았기 때문이었다. 1517년 벼슬이 교리가 되어 춘추관 기주관을 겸임하자, 정암은 향촌의 상호 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을 8도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일찍이 임금께 아뢰기를, “소신은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그 힘이 실용하지 못하겠사오니, 바라건데 궁벽한 고을이라도 허락해 주신다면 백성을 다스리는 틈을 타서 학술에 힘을 쓰게 되면, 백성을 다스리는 일과 학문하는 일 둘 다 온전할 것 입니다.” 라 하여 외관에 나가 마음에 있는 이상 국가를 몸소 다스리고 싶어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은 적이 있다.
혁신주의자 정암(靜庵)
정암이 1518년 부제학이 되었을 때 정암은 미신을 타파하고자 먼저 궁중에 있던 소격서(昭格暑)를 폐지할 것을 주장하여 많은 반대에도 무릅쓰고 관철시켰다. 소격서는 하늘과 땅과 별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을 관장하는 궁중의 관청으로, 중종 13년 대간(臺諫)에서 소격서를 혁파할 것을 주장하고, 홍문관도 역시 아뢰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그러자 정암은 홀연히 앞으로 나서서,“오늘 윤허를 얻지 못하면 가히 물러나지 못하옵니다.” 하며 새벽녘이 될 때까지 아뢰니, 임금은 부득이 윤허하였다. 그 때 승지는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었고, 모두 괴로워하는 빛이었다 한다. 대쪽같이 곧은 성품으로 혁신적인 자기의 주장을 임금께 아뢰되 임금이 허락하지 않으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 뵈었고, 어느 때는 잠도 자지 않고 간청한 일화가 수 없이 전한다.
「담적보」에는,“공은 입시(入侍)할 때마다 의리(義理)를 인용, 비유하여 끊임 없이 말 을 함으로 다른 사람이 미처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혹한의 겨울이나 무더운 여름에도 정오까지 끝내지 않았으며, 공이 청하는 말은 허락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한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매우 싫어하는 빛이 있었다.” 라 쓰여 있을 정도다. “임금과 대할 때는 반드시 마음을 정제하고 생각을 숙연히 하여 신명(神明)을 대한 것 같이 하였고, 아는 것은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하는 말은 충직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518년 11월 대사헌에 승진되자, 정암은 훈구 세력을 타도하고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이상 국가를 건설하코자 자기를 도와 줄 인재를 구하기 위해 천거에 의하여 벼슬을 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하였다. 이 때 이 제도 시행을 주장하면서,“유학의 영수가 되고 중종(中宗)의 신임이 두터우니 하늘이 주신 기회다. 내가 요순의 정치를 보이리라.”하고 초야에 묻힌 현사(賢士)를 널리 조정에 모았다. 이 때 등용된 신진사류로 김식(金湜)․안처겸(安處謙)․박훈(朴薰) 등이 있고, 이들 소장 학자들은 등용과 함께 요직에 앉아 사림을 본격적으로 조정에 진출시키는 계기로 삼았다.
현량과를 통하여 뜻이 맞는 신진 학자를 대거 등용시킨 정암은 본격적으로 훈구 세력을 몰아내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는 중종반정으로 학문도 없는 관료가 공신이 되어 요직에 득세하였는데, 젊은 그로서는 더 이상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정암은 먼저 공신이 너무 많음을 비판하고,“이들은 권좌에 올라 모든 국정을 다스리는데 이(利)를 먼저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바로잡지 않으면 국가 유지가 곤란하다.” 라며 그들을 신랄하게 비난하였고, 그 실천 방안으로 반정공신 2․3등 중 공이 적은 공신은 강등 삭제하고, 4등 50여 명은 모두 공 없이 녹을 먹으므로 공을 삭제해야 한다는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미 귀족 계급으로 자리 잡은 반정 공신의 반발이 심하고 또한 기성 귀족을 소인배로 몰아부치는 과격한 주장을 중종도 달가워하지 않아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자 정암은,“선비의 기풍이 바르지 못하고 별 공이 없이 공신이 된자는 마땅히 도태하여 이욕의 근원을 막아야한다.”하며 대간들을 인솔하여 대문 밖에서 엎드려 청하였다. 그러나 왕이 허락치 않자 여러 달을 두고 강력히 논쟁을 하였고, 급기야는 사간원․사헌부의 관원이 모두 사직하겠다고 하자, 왕은 마침내 2․3등 공신 일부와 4등 공신 전부를 삭제하여 전체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의 훈작을 삭탈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임금의 마음을 거슬렸고, 또한 훈작을 잃은 대신들이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급진적인 개혁과 사정은 급기야 본인에게 해를 초래하여 명을 재촉하였다.
과격하고 곧은 성품으로 타협을 몰랐던 정암은 여러 일화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어느 은군자는 정암을 보고 말하기를,“공의 재주는 능히 일세를 건질 수 있으나 임금을 만난 후에나 할 수 있읍니다. 지금의 임금이 이름을 취하여 공을 쓰고 있으나 실은 공을 모릅니다. 만일 소인이 이간을 붙이면 공은 면키 어려울 것 입니다.”하였고, 예조 판서 남곤(南袞)이 공신의 훈작을 삭탈하자는 논의를 피하여 배릉 헌관을 자청하자, "판서의 자리에 있는 자가 능헌관이 되었으니, 이 사람은 반드시 일을 피하기 위함이다. 신하된 자로 몸을 아낀다면 다른 것은 더 이상 볼 것 없다.”라고 본인이 있는 데서 직언을 하여 부끄러움을 주었다. 이윽고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 훈구 세력은 앞서 있었던 소격서 사건으로 마음이 상한 후궁을 움직여 왕에게 신진 사류를 무고토록하고, 또한 대궐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走肖자를 합하면 趙자가 되니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라는 글자를 써서 벌레가 먹게 한 후 궁녀로 하여금 왕에게 바쳐 정암이 모반을 계획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들은 또한 대신이 출입하는 광화문을 제쳐 놓고 신무문(神武門)을 통하여 밤을 틈타 몰래 왕을 만났고, 정암 일파가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케 하고 있다고 탄핵하였다. 평소부터 정암 일파의 과격한 언행과 도학 정치에 염증을 느낀 중종은 그 탄핵을 받아 들여 조광조․김정․김구․김식․윤자임 등을 구속하였다. 사사(賜死)의 명을 받은 정암은 영의정 정광필의 간곡한 비호로 능성(綾城)에 유배되었다.
사약(賜藥)을 받은 정암
귀양지에 위리안치되자 정암은 담장을 치고 북쪽을 바라 보고 임금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정암에게 원한을 품은 훈구파가 세 정승에 오르자 이들에 의하여 12월에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의금부 도사가 왕의 교지를 받들고 유배지에 이르자, 정암은 조금도 안색이 변하지 않고 조용히 죽음에 임하되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목욕과 의관을 정제하고 뜰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임금의 옥체 안녕을 묻고 절하였다. 그런 뒤에,“임금을 사랑함이 아버지 사랑하는 것과 같고, 나라를 근심함은 내 집을 근심함과 같았다.” 라 하였고, 이어 말하기를, “하늘에 있는 붉은 해가 나의 붉은 마음을 비추리라.” 하고 이윽고 사약을 마시고 이불을 쓰고 있었으나 죽지 않아 목졸라 죽였다고 「해동야언」에 전한다.
일설에는 사약을 마시지 않고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고 하며, 그 날 흰 무지개가 해를 둘렀는데, 동서로 두 겹 남북으로 한 겹이었고, 남북에 둘러진 무지개 밖에 각각 두 줄기의 무지개가 있어 큰 띠를 늘어뜨린 것 같이 하늘에 뻗쳐 있었다고 「기미록」에 전한다. 이듬해 용인 선영에 장사지내니 후손으로는 5살 난 정(定)과 2살 난 용(容)이 있었으나, 정은 일찍 죽고 용은 벼슬하여 문천군수(文川郡守)에 이르렀으나, 후손이 없어 종질인 순남(舜男)으로 뒤를 이었다. 선조 2년 태학생(太學生) 홍인헌(洪仁憲)이 상소하여 공자의 묘(廟)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고, 또 이준경(李浚慶)이 계청하니, 영의정에 추증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후세에 정암의 불행을 보고, “첫째는 급제하여 너무 빠르게 벼슬에 진급한 것이요. 둘째는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요. 셋째는 귀양간 땅에서 최후를 마친 점이다.”라고 하였듯이, 이상 국가를 건설하고자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다가 반대파에 의하여 38세의 젊은 나이로 정암은 그렇게 갔다.
심곡서원(深谷書院)과 정암의 유택
정암의 묘와 사당에 이르는 길은 수지면에서 가는 방법과 신갈․안산 고속도로의 동수원 인터체인지를 나와 광주 방면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 길 가 낮은 산 모퉁이에 상현리라 쓰인 버스 정거장이 있는 앞 마을에 기와로 지은 사당이 있고, 정암의 묘는 버스 정거장 뒷쪽 야산에 있다. 시멘트 길을 따라 100미터를 가면 검은 돌가루를 뿌린 주차장이 있고, 앞에는 ‘深谷書院’이란 편액이 걸린 삼문이 태극 무늬에 붉은 칠을 하고 있다. 조선 효종 원년(1650)에 창건하여 사액(賜額)된 이 서원은 정암의 영정과 신위를 봉안하고, 이 지방의 양반 자제를 가르치기 위하여 세워졌다. 관리인댁 옆으로 난 문을 통하여 안으로 들어가면 앞에 장서각(藏書閣)이 있다. 정면 4간에 맞배지붕을 한 이 서고는 철문이 굳게 닫혀 있고, 관리하는 할아버지는 3년 전에 그 곳에 보관하였던 책을 모두 도둑이 훔쳐 갔다고 분개한다. 왼쪽에 있는 사당(祠堂) 처마 밑에는 ‘深谷書院’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庚寅七月二十七日賜額’이라는 문구가 편액 옆에 있어 이 편액이 왕으로부터 내려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당 안에는 정암의 영정이 신위 뒷쪽에 모셔져 있는데, 젊은 선비의 모습이다. 검은 관모(冠帽)에 흰색 두루마기를 입었고, 정면이 아닌 오른쪽을 응시하는 선생의 영정은 턱 수염과 함께 귀밑머리가 턱 아래까지 드리웠다. 꼭 다문 입술에는 집념이, 치켜 들린 눈썹에는 고집이, 그리고 날카로운 눈 빛에는 야망이 번뜩이는 정암의 영정은 그림 솜씨도 수준급이라 생각되었다.
사당 앞 강당(講堂) 마루에는 글 읽는 선비의 모습이 아닌 빨간 고추가 널려 있고, 고추를 매만지는 할머니의 손길은 거칠기만 하다. 황량한 마루에 비하여 천장에는 여러 개의 중수기와 상량문․편액들이 즐비한데, 편액에는 강당(講堂. 上之九年孟冬)․산앙재(山仰齋)․일소당(日昭堂)이 있고, 몇 개의 중수기와 함께 행수시(杏樹詩) 현판이 있다. 특별히 숙종대왕이 내린 어지(御旨)가 검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쓰여 있으나 식별이 곤란하다. 정암이 귀양살이를 할 때 인생의 회한을 읊은 시가 전한다.
누가 가여워하리 화살 맞은 새와 같은 인생을 (誰憐身似傷弓鳥) 새옹지마(塞翁之馬) 같은 인생사 우습기도 하다. (自笑心同失馬翁) 원숭이와 학은 돌아 오지 않는 나를 나무라리라 (猿鶴定嗔吾不返) 그러나 어찌 알리 엎어 놓은 사발 속에서 나오기 (豈知難出覆盆中) 어려움을
사당을 나와 산 모퉁이를 돌면 바로 묘를 안내하는 간판이 있고, 그 입구에 신도비가 있다. 장방형 비좌 위에 비신만 있는 신도비는 오랜 풍우에 글자를 알아 보기는 어려우나, 비좌에는 국화문(菊花文)이 조각되어 있고, 비의 앞면 상단에는 ‘文正公靜庵趙先生神道碑銘’라고 쓴 전자(篆字)가 횡서되어 있다. 선조 18년(1585)에 건립된 이 비는 높이가 244cm, 폭 93cm, 두께 34cm로 노수신이 글을 짓고, 이산해가 글씨를 썼으며, 김응남이 두전(頭篆)을 썼다.
가파르지만 잔디가 잘 가꾸어진 산등성이에서 오른쪽에 있는 묘가 정암의 묘이다. 문인석이 없이 망주석만이 비스듬이 서 있는 묘는 호석이나 곡장도 없이 조촐한데, 묘 앞을 가로 막은 높은 숲이 전망을 가려 답답하다. 향로석과 상석 위에 있는 묘비는 정암과 부인 이씨를 합장한 묘임을 알려 준다. ‘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 兼同知經筵成均館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 兼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文正公靜庵趙先生之墓. 貞夫人贈貞敬夫人李氏祔’ 호석도 없는 봉분 앞에 묘비마저 없었다면 어느 평범한 선비의 묘로 착각할 정도로 소박하다. 상석과 향로석에는 향을 피운 지 오래 되었는지 잡초가 덮여 있고, 이름 모를 산새만이 울어주는 이 곳에 정암은 그 젊은 혈기를 묻고 아무 말 없으니, 인생의 덧없음은 어디서 위로 받을 것인가.
정암과 신진 사류가 시도한 개혁이 실패한 까닭을 이이(李珥)는 「석담일기(石潭日記)」에서 다음과 같이 갈파하였다.“옛 사람들은 반드시 학문이 이루어진 뒤에나 이론을 실천하였는데, 이론을 실천하는 요점은 왕의 그릇된 정책을 시정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나라를 다스릴 재주를 타고 났으면서도,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 전에 정치 일선에 나가, 위로는 왕의 잘못을 시정하 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도학을 실천하고자 왕에게 왕도의 철학을 이행하도록 간청하기는 하였으나, 그를 비방하는 입이 너무 많아 비방의 입이 한 번 열리자 결국 몸이 죽고 나라를 어지럽게 하였으니,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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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머니에 대한 효심 사약을 받으면서 원망하는 기색이없고 임금에대한 안녕을 묻고 절하였다는
한 구절은 감동적이며 요즘 현대 사회에서는 생각조차 할수없는 현실인가 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