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 나주나씨(羅州羅氏) 현감 나사침(羅士忱)의 큰 아들로 자는 극지이다.
그의 형제(兄弟) 6인이 모두 인걸(人傑)로 당세에서 육룡(六龍)이라 불렀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기상이 늠름하였으며 학문에도 뛰어났다.
후일 곤재 정개청의 제자로 수학하였으며 29세(1579년 선조 12)에 식년시 진사(進士) 2등 9위로 합격하였으며 승훈랑(承訓郞)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마지막 벼슬이었으며,
정자를 짓고 시를 쓰며 유유자적하며 일생을 야인으로 지냈다.
달은 천재(天宰)의 눈같고/산은 공자의 사랑같네.
일엽편주(一葉片舟)에 이 몸 실어 강물을 건너니/나도 또한 무릉도원에 사람같네
어느날 능허정(凌虛亭)에서 다시 백구를 만나고 읊기를
객(客)이 오는 대강(大江) 어구에 /달이 가득 가을 하늘이 맑구나.
다만 백구(白鷗)의 얼굴을 볼뿐/ 패옥(佩玉) 소리 들리지 아니하고,
客來大江口 月滿秋天淸 但見白鷗面 不聞環佩聲
구름이 나니 산이 움직이는듯/ 물결을 박차니 돌이 가벼운 것 같구나,
그대 아니면 내 누구를 벗하리, 한가한 이야기 낱낱의 정(情)을
雲飛山欲動 浪蹴石如輕 非子吾誰여 閑談ㅇ箇情
그가 야인으로 지내게 된 결정적인 사건에 휘말린다. 그의 나이 39세 때 1589년 10월,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의 계기로 일어난 기축옥사에서 위관 정철이 그의 스승 곤재 정개청과의 사감을 앙갚음하면서 일가가 화를 당한다. 2월, 전라도 유생(儒生) 정암수(丁巖壽) 등이 올린 상소로 곤재 정개청의 제자로 정여립 일당과 가깝다는 이유로 결탁하였다는 무고(誣告)를 당해 기축옥사(1589)에 연루되어 함경도 종성으로 나덕명(羅德明) 나덕준(羅德峻) 나덕윤(羅德潤) 나덕현(羅德顯) 형제와 함께 육부자(六父子)가 모두 잡혀 북변(北邊)으로 귀양가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 심정을 나타내고 있을까? 그가 술에 취해 허망한 자신의 처지를 읊은 곡절이 애처럽게 다가온다.
흰 솔개, 백발을 보이며/스스로 환영(還影)가운데, 그 무엇이라 이르네
날아왔다가, 날아갈 수 없으니 나도 또한 세태의 인정 쓸쓸해짐을 느끼네白o見白髮自謂影中가飛來不飛去我赤世情속
42세(1592) 때 임진왜란을 유배지에서 격는데 왜장 가등청청군이 회령에 육박하자 덕명(德明)은 북평사(北平事) 정분부(鄭文孚)와 같이 유배지에 있던 한백겸(韓百謙)과 의병(義兵)을 일으켜 함경도 변방으로 피난 간 두 왕자 임해군, 순화군 수행신하들을 관노 국경인 등이 작란하여 포로로 적에게 넘기니 이를 적지에서 구출해는 왜군을 여러번 격퇴시키는 등 공을 세운다. 이때 변방의 모습을 이렇게 읊는다.
장사(壯士) 사지(死地)에 살아나/큰 배에 태(兌)의 창을 실었도다.
싸워서 진(晋)의 조적(충신)이 되어/함께 넓은 세상서 웅거하리라.
칼을 짚고 서 있는데 암고래 수고래 우는 듯 하니/잔을 들어 초목(草木)에 뿌려주네.
용(龍)은 잠들고 전승(戰勝)의 소식 전하고자 하니/호탕한 용기 넓은 바다의 파도를 거느리는 듯.
유배자라는 죄인에 몸으로 변방에서의 난리를 막으며 싸우는 그의 생활이 녹녹하지 않했을 것이다.
부모형제 생각에 동생에게 편지를 쓴다.
변방에 구름 앞을 가리고 기러기는 무정한데/어지 외로운 곳에 있으며 부모 형제를 생각하는가?
타들어가는 촛불에 밤은 깊어지고 서리 맞은 나뭇잎 우수수 떨어지는데/꿈에라도 고향 연못가의 풀 파랗게 돋아날 수 있으면.
44세((1594 선조 26)에 풀려나서 임진왜란이 평정되고 난 다음 높은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지만 붕당이 치열한 혼탁한 중앙정치의 환멸을 느끼고 나주로 귀향한다.
시경(詩經),서경(書經) 타 없어지고 보검(寶刀)도 부러지니/만리행장(萬里行裝)이 그 몇이나 남았는가?
다만 봄바람과 함께 하여 천리(天里)를 가다가/ 드디어 붉은 꽃 , 푸른 버들을 보니 옛 고향에라도 온 것 같네
46세(1596)에는 아버지 금호 부친 나사침이 돌아가셔 무안 주룡 망모산 기슭에 안장하고 시묘살이를 하면서 긴 시를 읊는다 그 일부에서
묘문에 가을이 깊어 학의 울음소리 구슬프고/겨울이 가까와 남방도 추워지니 원숭이 소리 처량하네.
만물의 성질은 스스로 오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어/다시 봄의 숲에서 우는 두견새를 생각하네.
스승 정개청이 죄 없이 유배지로 끌려가 죽음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신원(伸寃)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같은 해 병신봉사(丙申封事)라는 상소를 올려 정철의 죄상을 알리고 민심결집을 위해 부역을 고르게 메기고 각 군영의 둔전을 정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의 스승에게 받치는 시였을까? 이렇게 읊는다.
참대는 이제 소무(蘇武 충신)의 절개요/ 큰 소나무는 백이(伯夷)의 지조로다.
고요히 우둑 솟아 항상 자지를 이기고 살아가니/어떻게 수용해 그 행적을 본받을까?
苦竹令蘇武長松古伯夷幽軒多勝己何用費追隨
첫댓글 호남누정 기초목록에는 애? 소포사나 적벽정이 누락 되었을까? 화순군에 적벽정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