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마당] 이별 없는 이별.....염승찬
일층 주차장으로 들어가 건물 앞 현관을 통하지 않고 뒤쪽 지하실로 직접 내려가는 계단은 지붕 없이 노출되어 있어 비가 올 때 마다 불편했다. 선교회장님이 지붕을 달아내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공사업자를 부르자 하여 나는 서슴지 않고 내가 직접 할 수 있다 말씀 드리고 철물점에서 필요한 목재와 콘크리트못등 재료를 구입하여 지붕 설치 작업을 시작하였다.
여섯 자 길이 사각기둥 일곱 개를 재단하여 목재에 각각 세자길이로 절단할 표시를 하고 지하실로 내려가는 건물 바깥 계단 지붕 석가래로 쓸만하게 자르기 톱질을 하다가 잠시 숨 돌리고 골조기둥만 세워 사방이 터진 주차장 바닥에 앉아 쉬며 바라보니 오른쪽 골목 저 멀리서 할머니 세분이 걸어 오고 있었다.
머리 숙이고 주춤 주춤 걸어오는 할머니는 연세가 아주 많아 보이며 허리가 구부러지셨고 양 옆을 따라 걷는 두 분 할머니도 환갑은 이미 지나신듯 비슷한 연배로 머리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 하였다. 단정하게 쪽 딴 머리에 낡은 은빛 비녀를 꼽은 고부랑 할머니 바른편으로 서서 부축하며 걷는 할머니가 고부랑 할머니의 며느리인듯 하고, 그 왼편으로 조용히 따라 걷는 할머니는 고부랑 할머니의 딸인듯 했다
작업하던 주차장 골목에서 돌아나오면 모퉁이 코너를 차지한 철물점과 버스길 쪽으로 진열장에 붉은 등이 켜진 정육점, 비치파라솔을 펴고 그 아래 각종 과일을 알록달록한 플라스틱 바구니에 담아 내어놓은 청과상, 입구에 둥그런 훌라후프가 걸린 문방구 등 작은 상점들이 큰길까지 마주보며 늘어서 있었다.
철물점을 돌아 버스 길로 나가기 바로 전, 내가 쉬고 있던 주차장 앞 골목 안에서 딸인듯한 할머니는 고부랑 할머니에 걸음을 잠시 쉬게 하고는 허리를 세워 본인 손에 꼭 접어 쥐고 있던 것을 고부랑 할머니 오래된 손에 쥐어준다.
뭔지 모르고 넘겨받은 고부랑 할머니는 네모나게 꼭꼭 접힌 것을 펴 보고는 그것이 푸르스름한 색의 만원자리 지폐인 것을 확인하자 휙 하니 땅바닥에 던져 버리며 "낸 필요 없다 애기하고 고기나 끊어다 먹어라” 소리를 지르고는 가던 길로 다시 간다.
놀란 며느리 할머니는 땅바닥에 내 팽겨쳐진 지폐를 바로 주어 들고 딸 할머니에게 건네주려 한다. 딸 할머니는 받지 않으려 손 사례를 치며 "언니 엄마하고 가면서 점심 드시고 여비 쓰세요” 하는데 네댓 발 가던 고부랑 할머니가 뒤돌아 서더니만 냅다 다시 소리를 지른다. "그 돈 갸 주고 빨리 온나" 고부랑 할머니에 불호령에 딸 할머니는 며느리 할머니가 주어 들고 건네주는 지폐를 체념하고 받아 든다.
“내 너 봤으니 이제 됐다. 내 죽었다 해도 오지 말아라. 연락 안 할거다” 야멸차게 말한 고부랑 할머니는 되돌아 보지 않고 왼손은 꼬부라진 허리춤에 올리고 오른손은 좌우로 휘휘 저으며 다부지게 큰길을 향하여 걸음을 재촉한다. 허망함에 철물점 모퉁이 담벽에 한쪽 손을 대고 기대선 딸 할머니에 어깨가 들썩인다.
길 모퉁이 돌아가는 모서리에 선 며느리 할머니는 큰길로 무작정 나서는 고부랑 할머니를 보랴, 철물점 벽에 기대 서러워하는 시누이 할머니를 보랴, 두 할머니를 번갈아 처다보며 같이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찰라 이어지던 순간 정적 후 작은 목소리로 "애기씨 나 가요" 하더니만 부리나케 고부랑 할머니를 따라간다.
삼십육년도 더 된 오래 전 기억이지만 그 당시 할머니들에 이별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나는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였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른 계획을 세우기 전 인생에 있어 한 순간쯤은 나 아닌 타인을 위하여 살아보자 작정하고, 염 장로님의 소개로 당시 잠실 석촌호수 근처에 있던 ‘연합세계선교회'라는 단체에서 자원봉사하고 있을 때였고 나는 그 단체에서 16개월동안 봉사했다.
내가 일 하던 선교회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전문 봉사단체였다. 그날은 지하실 인쇄공장으로 내려가는 외부 계단에 지붕이 없어 비가오면 지하실 바닥으로 물이 차 들어오고 불편하기에 내려가는 계단에 지붕을 만들던 중 이였다.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눈썰미도 있고 손재주도 좋아 목공 일에는 소질이 있어 그런대로 계단에 지붕을 달아낼 수 있었으며 나는 재료 준비 작업 중 잠시 쉬는 틈이었다.
선교회는 4층 건물이였고 일층에 반은 주차장, 반은 시각장애인을 위하여 자원봉사자들이 각종 서적을 녹음 봉사하는 녹음실이 있고, 지하에는 시각장애인용 점자 서적을 만들어내는 인쇄공장, 이층과 삼층은 작은 예배실과 중복 장애인들을 위한 재능 봉사자들에 지원사무실이 있었다.
사층은 미국에서 파견된 회장 선교사님 부부 숙소와 당시 점자영어 성경을 제작하기 위하여 점자 타자기로 치면 성경을 한번에 한 권밖에는 만들지 못하지만, 성경을 컴퓨터에 입력하여 출력하면 여러 권의 점자 영어성경을 다양하게 만들 수 있었기에 이를 위하여 미국에서 자원봉사 온 스물한 살 난 리치 라는 컴퓨터 프로그래머 청년과 엘렌 할머니가 거주하는 공간이였다.
엘렌 할머니는 젊은 시절 한국으로 봉사 활동을 와서 평생 독신으로 지내셨으며 그때는 연합세계선교회에서 자원봉사로 시각장애인들에게 영어교습도 하고 컴퓨터에 영어 성경을 입력하고 있었다. 내가 일할 즈음 엘렌 할머니는 신약성경 29권에 입력을 마치고 구약성경도 잠언과 시편을 먼저 끝내고 순서대로 출애굽기를 입력하는 중 이였다.
주차장 바닥에 앉자 쉬다가 할머니들이 실갱이 벌리는 장면을 보고 나는 자연히 몸을 일으켜 세워 골목으로 나와 할머니들이 모퉁이를 돌아가기까지 생생한 이별장면을 목격하니 나름대로 앞뒤 이야기가 연결되었다.
인고에 세월이 거반 다 갔음을 짐작한 연로하신 엄마는 오랫동안 보지 못한 시집간 딸이 보고 싶고 살아 생전에 작별 인사라도 해야겠기에 딸네 사는 집을 찾아오게 된 것이고, 당시는 전화연락 상황이 변변치 못하였기에 기별도 못하고 사돈댁 남자들이 조반을 먹고 출근 하느라 집을 비운 이후 조용한 시간을 맞춰 딸의 집을 방문하였다.
졸지에 친정엄마를 맞이한 딸은 살갑고 반가운 정담을 풀어 놓다가 엄마에게 따뜻한 국에 점심밥이라도 해서 챙겨 먹이고 싶어 본인 며느리와 같이 식사 준비를 하려 했지만, 딸과 손자 며느리에게 불편을 끼치는 것이 미안하고 내키지 않았던 노 할머니는 반나절도 못되게 앉아 있다가 점심 전에 일어서며 집으로 가겠다고 딸의 집을 나선 것이다.
막무가내로 그냥 가겠다는 야속한 엄마를 배웅하듯 따라나선 딸은 버스정류장 앞 중국집에 모시고 가서 간짜장이라도 사드리고 싶었을 텐데 밖에서 자장면 먹자는 것도 일없다고, 안 먹겠다 티격태격 하며 버스정류장으로 걸어 나오던 할머니들은 찻길로 나서는 골목 어귀쯤에 다다르자 딸은 넉넉지 않은 살림을 아끼고 아껴 모아둔 비상금을 손에 쥐고 오다가 만원짜리 두 장을 엄마 손에 쥐어 줬건만...
모질게 팽개치는 엄마를 보며 너무나도 속이 상하였던 것이다. 늙은 엄마 역시, 어렵사리 살림하며 며느리에 자손까지 본 딸이 안쓰러워 난 괜찮으니 네가 쓰라고 막무가내로 거절하는 심정, 딸 못지 않았을 터이다. 이쯤까지 순식간에 상황을 짐작하고 보니 많이 슬펐다.
모퉁이를 돌아선 친정엄마와 올케를 차마 더 이상 따라가며 배웅하지 못하고 철물점 담벼락에 기대선 할머니를 향하여 세 할머니들이 걸어오던 길에서 젊은 새댁이 하얀 광목 기저귀 천으로 어린아이를 들처 메고 종종 걸음으로 다가 와서 "어머니 시골 할머니들 가셨어요?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하며 눈물 머금은 눈으로 눈물 닦아내던 할머니를 잡아 끈다.
새댁이 업은 아이는 많지 않은 가는 머리카락을 정수리 쪽으로 모아 올려 야자수 마냥 곧추 세우고는 작고 예쁜 빨강리본을 매준 것을 봐서는 씩씩하게 생긴 모습과는 달리 딸아이인듯 했다. 별로 보채지 않고 엄마 등짝에 매달린 작은 아이가 흔들어 대는 별처럼 예쁜 고사리 손에는 천 원짜리 한장이 들려져 있었다. 고부랑 할머니 고쟁이 춤에서 나왔을 듯한 불그스럼한 천 원짜리는 천만금 보다 소중한 증조 외할머니 사랑이었다.
며느리 손에 이끌려 가는 할머니를 보며 나는 철물점 모퉁이를 돌아 큰길로 나섰다. 새댁과 같이 집으로 간 할머니를 혹시라도 골목 안에서 보게 된다면 노 할머니는 버스타고 잘 가시더란 이야길 왠지 모르게 전해주고 싶었다.
선교회 건물로 들어서는 버스 길을 건너 내려가면 잠실 소방서가 있었고, 길 건너가기 전 일층은 중국집과 제과점, 양장점, 이층은 피아노 교습소, 삼 사층은 세무경리 주산 학원이던 건물 앞이 버스 정류장이였다. 정류장 앞에는 인도 한 켠을 차지하고 막도장도 새겨주는 구두수선 상자가 있었다.
천천히 가본 그곳에 두 할머니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벌써 버스를 타고 가셨나 하며 되돌아오는데, 선교회 쪽으로 들어오는 길 입구를 지나쳐 시내 버스 정류장 하고 약 삼십여 미터 떨어져있던 시외버스 정류장에 두 할머니가 보인다. 잠실에서 성남이나 경기도 광주, 이천, 여주 쪽으로 가는 시외버스가 정차하는 곳이다.
간이 지붕과 노선표가 그려져 있던 서울 시내버스 정류장과는 달리, 시외버스 정류장은 달랑 쇠기둥 머리에 동그란 철판을 붙이고 노란 바탕색에 시외버스 정류장이란 검정 글씨가 볼품 없이 써있다.
고부랑 할머니는 걸어오느라 딸하고 실랑이 벌리느라 힘이 소진됐는지 차도 바닥과 층지게 약간 턱이 있는 인도바닥에 앉자 아스팔트 바닥으로 한쪽 다리는 내려놓고 한쪽 다리는 인도 턱에 세워 무릎에 팔꿈치를 받치고는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물끄러미 지나다니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며느리 할머니도 손아귀에 들어오는 시외버스 표지판 쇠기둥을 잡고 서서 깊은 숨 삼키며 노 할머니를 살펴보고 있다. 나는 조금 떨어져 잠시 머물다 시외버스가 어제 올지 몰라 선교회 주차장으로 돌아와 목멘 점심을 먹고는 지붕 공사를 시작했다.
아주 오래 전 빈항하던 시절에 우리들의 할머니와 엄마는 서로에게 짐되기 싫어, 그토록 그리워했던 사람과의 헤어짐이 그처럼 냉정하고 매몰찼다. 사랑하기에 사랑했기에 정을 떼버리던 고단했던 지난 시절. 집 떠난 누이들이 돌아올 곳 없던 이별 없는 서러운 이별 이야기.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 이별은 늘 존재하고 만나고 헤어짐은 삶에 일상이 되어 있다. 살만한 세상이 되었어도 이별이 아프고 슬픈 것은 상대를 버리거나 버림 받아서가 아니라 스스로 내 안의 나와 비겁하게 타협했기 때문이다.
딸아이를 나아 키우게 되며 각인된 4대(代) 모녀에 이별을 상기하고 결심을 했다. 아빠가 살아 있는 동안 네가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도록 네 방은 절대로 없애지 않으마 약속했다. 아빠가 죽어도 네 오빠가 네 방을 그대로 지키게 할 것이다. 아빠 대신 오빠에게 돌아 갈 곳을 청하였지만 돌아가지 못한 슬픈 사연을 듣고 한번 더 다짐 했다.
사랑하기에 이별해야 하는 연인들에 슬픔에서 사랑이 식었어도 이별하지 못하는 악연들에 고통에서 이즘 들어 사람과 사람 관계란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이해 타산이기에, 자신과 거래한 합리화된 이별은 이별 없는 이별로 우리 안에 이미 기생 하고 있다. 2019년 올 한해 또 나는 얼마나 많은 자기 기만으로 내 안에 만남과 헤어짐을 계량하며 고민할까? 새해 벽두부터 점점 메말라가는 사람관계가 두려워지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