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종식문화관광해설사의 숨겨진 문화재를 찾아서(69회)
낙동강, 소금 운반길 솔트로드(Salt Road)
소금 싣고 ‘오르락’ 곡물 싣고 ‘내리락’
해안-내륙을 잇는 문물소통(文物疏通) 길
소금의 역사
소금(salt)은 염화나트륨(NaCl)을 주성분으로 하는 짠맛의 물질이다. 식염(食鹽, table salt)이라고도 한다.
소금은 체액에 존재하며, 삼투압 유지에 중요한 구실을 하므로 사람이나 짐승에게 중요하다.
바닷물의 약 3%가 염분으로 이루어져 있어 바닷물에서 구할 수 있다. 이는 천연적인 방법이지만, 인공으로도 생산할 수 있다.
소금은 소(牛)나 금(金)처럼 귀한 물건 또는 작은 금(小金)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자인 염(鹽)이라는 단어는 소금에 대한 국가의 재배를 뜻한다.
인류는 소금의 원천이 되는 장소나, 소금을 교역할 수 있는 장소 주위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역사를 통틀어 소금의 이용이 문명의 주축이 되었다.
보수(報酬, 월급)의 영어 salary(샐러리)는 소금을 가리키는 라틴어 Sal에서 비롯되었다.
이것은 옛 로마 군단들이 가끔 소금으로 보수를 받았기 때문으로, 금의 무게와 가치가 거의 같았다.
우리나라는 고구려시대 소금을 해안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는 왕실에서 독점 판매하는 전매제(專賣制)를 운영했다.
조선시대는 소금을 생산하는 어민들에게 일정한 세금을 징수하고 자유로운 유통과 처분의 권한을 부여하는 사염제과 국가에서 직접 소금을 굽는 관염제를 병행하였다.
소금은 조선시대에는 배를 통해 강변 나루터로 운송하였다.
나루터에서 육로를 통해 보부상을 거쳐 소금장수들에 의해 깊은 산중오지까지 곳곳에 보급되었다.
낙동강, 나라의 간선 수운
낙동강은 영남의 젖줄을 넘어 유사 이래 한반도의 간선 수운으로 겨레의 대동맥이었다. 이 뱃길은 조정에 바치는 조세미(租稅米), 강 하구 명지(鳴旨)와 녹산(菉山)의 소금, 멸치와 새우젓 그리고 각종 해산물들이 상류로 유통되었다.
또한 하류로 내륙지방의 산물인 곡물, 면화, 광석, 목기(木器) 등이 유통되었다.
낙동강 소금길 솔트로드(Salt Road)
강은 교통과 물류(물산교류) 길이다.
수많은 물산 중에 소금이 가장 중요했다.
낙동강은 해안의 소금이 내륙으로 이동하던 소금길이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는 속담이 있다.
살림집 부뚜막에는 소금이 있어야 한다. 소금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적한 산간마을이라도 소금이 전달되었다는 말이다. 고대 문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소금의 운반 경로(Salt Road)」를 추적하여 고대 인류의 이동과 교류를 규명하기도 한다.
낙동강은 영남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소금길이었다. 아득한 고대부터 대한제국 경부선 철도가 개통되기 전까지 소금은 대부분 낙동강 물길을 통해 공급됐다.
낙동강 하구 명지, 녹산의 바닷가에 있던 염좌(鹽座, 소금가마)에서 생산된 소금과 해산물(젓갈, 생선등)이 부산 구포 남창(南倉)나루터 물류창고로 들어왔다.
여러 배에 나누어 실고 강 상류로 거슬러 오르면서, 삼랑진의 뒷기미 나루터를 거쳐 수산, 남지, 박진, 더 위로는 밤마리(栗旨), 현풍(玄風) 등지로, 또 상주 낙동나루와 안동까지 소금과 해산물을 팔았다. 그리고 현지에서 나락, 보리, 콩, 팥, 기장, 조 등의 농산물과 바꾸어 싣고 내려왔다.
소금 배와 각종 어물을 실은 배들은 강가 장날에 맞추어 나루터 부근에 정박한다.
소금과 어산물을 팔고 내륙의 나락, 보리, 콩은 곡물과 면화, 광석, 목기, 죽기, 옹기, 한지 등을 사서 하류로 내려오며 판다.
나루터 장날의 풍경은 수많은 장꾼, 각처에서 온 보부상, 뱃사공 등이 어울리고 여각, 주막 등이 성황을 이룬다.
소금 배는 소금만 싣는 게 아니다. 사람도 타고 새 문물과 새 소식도 사람과 함께 이웃 고을로 전해진다.
강변 나루터는 세상물정을 잘 아는 요즘의 역세권 같은 곳이다.
낙동강의 고딧줄꾼, 강배 끄는 사람들
강의 운하(運河) 기능은 물이 불어나는 여름 장마철부터 늦가을까지 주로 운행이 되었다. 비가 내리지 않는 갈수기(渴水期)에는 강바닥이 드러나 배가 운행할 수 없었다.
갈수기는 물이 얕거나 화물을 과적했을 경우 배가 모래톱에 얹혀 오도 가도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좌초된 배를 옮겨주는 전문일꾼, 바로 고딧줄꾼이다.
고딧줄은 삼(麻)으로 엮어 만든 굵은 밧줄을 말한다.
또 배가 강 상류로 거슬러 오를 때 물살이 세거나 한 곳에서도 줄꾼들이 필요했다.
이들은 건장한 장정들로 양쪽 강둑에서 좌초된 배를 모래톱에서 끌어내는 인부들이다. 그들이 부르던 노래가 전해온다.
우두머리격인 도사공(都沙工)이 선창을 하고 고딧줄꾼들이 후렴을 반복했다고 한다.
고딧줄꾼들의 강배 끄는 소리,
가자가자 어서 가자, 어기여차 어기야(후렴)/ 남지들을 찾아간다(후렴)/ 언제 갈꼬 저 남지를/ 남지들을 들어서면/ 우리들 목적지/ 콩 팔러 어서가자/ 북풍한설 찬바람에/ 언제 갈꼬 저 남지를/ 발은 얼어빠지는 듯/ 저 사공아 닻을 잡고/ 동풍 오기 기다리자/ 어기여차 어기야...
일제 강점기 고딧줄꾼들이 경남 창녕군 남지를 향해 콩을 싣고자 거슬러 올라가면서 불렀었다. 남지는 인근에서 생산된 콩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일리야 레핀의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이 그림은 제정 러시아 말기에 사실주의 그림을 많이 남긴 일리아 레핀의 볼가 강의 배 끄는 인부들이다.
그가 볼가 강을 따라 여행하면서 내륙 운송을 하는 배들은 강을 따라 하류로 갈 때는 물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가면 되지만,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때는 많은 동력이 필요하다.
특히 물살이 세거나 한 곳에서는 예전에는 육지에서 줄을 메고 배를 끄는 일들이 있었다. 중국 장강(長江) 삼협 박물관에 가면 배를 끄는 사람들에 대한 전시물이 있다.
인류의 역사와 함께 수천년을 이어온 뱃길은 철길 개통과 함께 전기를 맞는다. 1905년 1월 경부선 개통, 그해 11월 마산선 개통과 함께 낙동강 수운의 쇠퇴 일로를 걷게 된다.
순교하기 10여 년 전에 입교해 신앙생활을 해온 신석복은
병인박해 때 창원 진해구의 웅천장(4ㆍ9일)에 장사를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오 야고보 등과 함께 대구에서 온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대구 포졸들은 이에 앞서 그가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명례에 있던 그의 집에 들이닥쳐 재산을 탈취하고,
여러 날 수소문 끝에 그가 돌아오던 김해 가산 길목,
지금의 경남 김해시 한림면 한림로 일대에서 기다리다가
그를 체포해 밀양 관아로 압송했다.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르는 동안 신석복은
포졸들에게 무수한 형벌을 당해야 했고,
끌려가는 중에도 자주 능욕을 당해야 했다.
이 사실을 안 그의 동생들은 이를 막고자
포졸들에게 돈을 주려 했으나 복자는
“포졸들에게 한 푼도 주지 말라”고 당부하곤 했다.
대구에 도착해서도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으면서
유혈이 낭자해지고 뼈가 부러지는 고통을 당했지만,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대구 관장은 “저를 놓아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하겠다.”는
그의 말에 화가 나 혹독한 형벌을 가한 뒤 교수형을 집행했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낙동강경제교류관입니다. 영남대로 구간 1000리 길의 여정이라고 합니다. 영남대로는 과거보러 가던 선비와 괴나리봇짐을 멘 보부상, 세곡과 궁중 진상품등 영남의 살미과 산물이 새재기릉 통해서 충주의 남한강 뱃길 – 서울 한강 나루터에 닿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영남에 사람과 물류가 이동하는 중심에는 바로 낙동강이 있었습니다. 영남사람들에게 낙동강은 삶이 있고 애환이 있고 희노애락이 있는 곳이고, 경제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현재 낙동강의 모습을 보면서 과거에 낙동강에 모습을 낙동강역사이야기관을 통해서 보게 되었습니다. 영남에서 낙동강이 흘러온 시간이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 그리고 낙동강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낙동강과 함께 살았는지도 알수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낙동강과 함께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도 낙동강역사이야기관을 통해서 조금은 알수가 있었습니다. 낙동강은 생명을 품은 곳입니다. 생명을 품은 낙동강이 잘 보존되고 지켜지고 생명들이 살아가는 좋은 환경을 유지하는 것은 무엇보다 현재에 낙동강과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낙동강을 찾아오신 분들이 상중에 낙동강역사이야기관을 방문하셔서 낙동강이야기를 만나보시는 것은 어떠신가요? 낙동강에 매력중에 한 곳으로 이곳을 여러분에게 추전해 드립니다. 지금까지 낙동강역사이야기관에서 유기자가 였습니다.
이제 낙동강생활문화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낙동강 700리, 모든 생명을 따뜻하게 끌어안습니다. 즉 낙동강 700리는 생명을 품는 곳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낙동강 700리는 상주에서 발원해서 부산다대포에 이르는 길이라고 합니다.낙동강에는 어류와 수상식물 그리고 다양한 조류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연에서 뱃놀이하다는 낙동강 뱃놀이의 전통에 대해서 알수가 있었습니다. 낙동강은 배가 다니는 물길이기도 합니다. 물길을 따라서 뱃놀이도 하고 물길을 따라서 사람이 이동하는 교통길이기도 했습니다. 낙동강이 가진 매력중에 하나를 더 알수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낙동강은 물길을 따라서 사람이 오고가는 물길이고 교통로 였습니다.
[출처] 낙동강 역사이야기관|작성자 낙동강유역환경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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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소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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