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90:1-2 주여 주는 대대에 : 칼빈
먼저 모세는 신자들이 모든 인류가 굴복하고 있는 공동 법칙의 절차를 준수함에 있어서 특별히 신자들이 자신들의 고통을 생각함에 있어서 품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슬픔과 두려움을 달랠 만한 위로를 제공해 주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한 형벌 뿐 아니라 인생살이의 덧없다는 사실과 비참함에 대해서도 말하려고 하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허락해 주신 특별한 은혜에 대한 말로 이 시를 시작합니다.
다음에 모세는 사람들이 세상에 마음을 둘 때, 특히 하나님이 인생들을 죄 있는 죄인들로 그의 심판대에 모으실 때 인생들의 형편이 얼마나 처참한가를 간략히 말합니다.
그 다음에 모세는 아브라함의 자손들도 잠시동안이나마 하나님의 준엄하심을 너무도 체험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그들을 택해 주신 그 값없는 은총을 신뢰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슬픔으로 극도로 여위어졌다는 사실을 탄식합니다.
끝으로 모세는 하나님께 과거에 행하셨던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방법으로 그들을 대해 주시사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정상한 과정을 끝까지 계속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1. 이 시편의 표제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기도” 입니다.
이 시가 모세에 의해 기록됐는지 대대로 전해 오던 모세가 기록한 기도 형식을 선지자 중에 어떤 사람이 백성들이 노래로 사용할 수 있게 편성했는지는 불확실 합니다.
그러나 표제에 모세의 것으로 밝힌 데는 근거가 있고 타당성이 있습니다.
이 시가 모세 때부터 사용되었기에 우리는 모세가 이 시의 저자라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모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은 그의 후손들에 의해서 이 시가 노래로 불려졌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왜 이러한 근거 없는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모세에게 부여된 “하나님의 사람” 이란 칭호는 그들의 주장을 논박하고 있습니다.
영광스런 칭호가 특별히 모세에게 적용되어 그의 교훈에 보다 큰 권위를 더해줍니다. 혹 추측이 가능하다면 모세는 그의 죽음이 가까워 오자 거의 번민으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백성들의 슬픔을 지연시켜 누적된 환난에 짓눌려 있는 자들의 마음에 위로를 주기 위해 이 기도를 기록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그들을 애굽에서부터 구원하신 일에서 밝히 비취어짐으로써 전에 그들이 겪고 있던 슬픔을 없애 버리고 그들이 기쁨으로 가득차게 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곧장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40년도 체 지나기 전에 광야에서 계속 권태감에 젖어 있었던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시편 90 편
그러므로 모세가 그 당시에 하나님께 그의 백성들을 괴롭게 하신 때에 맞춰 그들에게 자비와 용서를 베풀어 주시기를 간구한 것은 매우 시기에 적합한 것이었습니다.
2. 본문 1절은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입니다.
모세는 아브라함의 후손을 인류의 다른 백성들과 특별히 구별시키면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자녀로 불러 주신 선택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모세가 서두에서 말하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옛날 거룩한 족장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은혜를 이제 다시금 새롭게 하여 그들의 후손들에게 계속해서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모세가 회막을 암시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회막에서 하나님의 엄위하심이 나타나는 것이 백성들 가운데 거하셨던 경우 못지않게 현저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이 견해는 전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모세는 가나안 땅에 살았던 조상들의 모든 시대를 말하고 있습니다.
40년 동안에는 성소가 없었기에 여기서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라고 말한 오랜 기간은 전혀 성소를 가리킨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해 내셨을 때부터 그들에게 나타내셨던 것을 말하지 않고 그들의 조상들이 모든 세대에 걸쳐 체험했던 것, 심지어는 태초부터 체험했던 하나님에 대해 말합니다.
그들이 항상 순례자들이었고 방랑자였다는 말이 이제 선포된 셈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형편이 이 땅에서 편안하지 못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더 방황하는 생활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갈 때부터 가나안 땅에서 방황하는 생활을 했었습니다.
애굽에서는 매일매일 계속되는 고통의 생활만을 했었습니다.
그러기에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그늘 밑에서 자기들을 위한 거처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 이유는 거처가 없이는 세상의 거민들로 여겨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며, 또한 그들은 어느 곳에서고 계속 나그네였기 때문이고, 그 후로도 많은 우여곡절과 굴곡 있는 생활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들이 방황할 때에 지켜 주신 그 은혜, 그들이 야만스럽고 잔인한 민족들 가운데서 살고 있을 때 하나님의 손으로 그들의 방패가 되어 주사 그들이 해를 당하게 되었을 때 지켜 주신 은혜, 이러한 은혜가 모세에 의해 매우 정확한 말로 찬양됩니다.
모세는 거처를 얻기 위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계속 방황하는 이 불쌍한 망명자들의 안식처 또는 거처로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시편 90 편
이 은혜를 모세는 그 은혜가 베풀어졌던 시간의 길이에 비추어 찬송합니다.
하나님께서는 4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끊임없이 그들을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사 그들이 자기 보호의 날개 아래 거하도록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3. 본문 2절은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입니다.
모세는 어떤 고귀하고 은밀한 신비를 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신비를 약하게, 말하자면 어린 아이처럼 말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이 생기기 전에 계시다는 사실을 누가 모르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알기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존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은 백 명 중에 한 명이나 찾아볼 수 있을까 말까 하는 정도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피조물들, 즉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듯이 계속해서 변하고 따라서 하늘 아래에는 아무것도 정함이 없는 피조물들과 대조되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활보다 더 변화무상한 것은 없어서 인간들은 자기들의 유동적인 상태로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판단을 내릴 수 없기에 하나님은 여기서 안정되고 정돈된 편안의 상태에 계신 것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말한 영원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한 것이요, 또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변화를 세상에 주십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자신은 변치 않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뿐 아니라 성도들에 대해서도 변치 않으십니다.
성도들은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변치 않으시고 태초부터 그의 능력과 진리와 의와 인자하심에서 한결같으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변함없이 한결같으심은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는 이에 대한 증거가 될 만한 눈이 아직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창조된 이후에는 이것을 추측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물은 동요를 일으키고 항상 변화무상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품은 한결같이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이 구절은 하나님과 인간들의 어리석은 실수로 말미암아 점차로 이 세상에 무수히 기어들어오고 있는 모든 거짓된 이방신들을 비교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말은 우리들의 판단으로 하나님을 측량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땅을 초월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는 하늘 그 자체까지도 넘어서야 합니다.
시편 90 편
시90:3-8 주께서 사람을
이 시편 기록자 모세는 인생이 사망하게 되는 것도 하나님이 그렇게 되게 하시는 것이고 그것이 자연적 성격이 아닌 것을 밝혀 줍니다.
사망은 인간의 자연적 성격이 아닙니다.
사망은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티끌로 돌아가도록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3절).
사망은 인간의 자연적 성격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사망하도록 벌을 주신 결과라는 사실이 명백합니다.
5절에도 인생들을 “홍수처럼 쓸어 가시는” 이가 주님이신 사실을 보여줍니다.
또 사망은 주께서 인생의 죄악에 대해 진노하신 결과로 묘사되었습니다(7-9).
죽음이 인생의 자연적(自然的) 성격이면 구원받을 길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죽음이 인생의 자연적 성격이면 죽음이 인생의 본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죽음은 하나의 사고(事故)요 본연(本然)이 아니니만큼 그에게는 영생을 얻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고로 초래된 사망을 고치실 것이고, 고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 사역은 바로 인간의 사망을 없애는 일입니다(히2:14-16).
1. 본문 3-4절은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 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같을 뿐임이니이다”입니다
1) 모세는 인간의 생명이 얼마나 연약하고 덧없는가를 말하며 그 비참을 탄식합니다.
모세의 이 말은 하나님과 다툼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다른 곳에서 보면(시103:14) 하나님은 유한한 인생의 체질을 아시고 그들이 티끌과 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하사 그들을 불쌍히 여기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자신을 보다 더 낮추어 말함으로써 보다 빨리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우리 생활의 여정을 반지 또는 원(圓) 에다 비유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땅 위에 두시고 좁은 주위 안에서 맴돌게 함으로써 우리가 최후 지점에 도달할 때에는 순간적으로 우리를 자기에게로 돌이키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죽음에 내어 주시고 그 다음에 그들을 부활 때에 회복시키시는 것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을 매우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요, 문맥과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우리의 인생에 대한 간단한 정의를 내릴 수 있습니다.
시편 90 편
우리 인생은 우리가 재빨리 원을 도는 짧은 회전으로 그 최후 지점은 지상 여정의 종점이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결과는 하나님이 그의 종들을 특별히 자기 백성으로 택하심으로써 그들을 대하시는 은혜스러운 방법에 보다 밝은 빛을 주는 것입니다.
이는 결국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자기의 영원하신 기업에 모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대조적인 방법으로 “주의 목전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4절)라고 말한 것은 매우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사람이 자기의 갈 길을 다 가면 곧 세상에서 떠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세상 위의 것에 우리의 눈을 향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생각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마치 2천년 동안이라도 살 것처럼 현실 생활에만 집착해서 생활하는 자들의 이 큰 어리석음은 어디에서부터 온 것인가?
자기들의 생각을 보이는 것 이상으로 높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모든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때 자신들은 오래 살 것으로 믿습니다.
요컨대 인생들은 30년 또는 그보다도 더 짧은 세월을 마치 영원이나 되는 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하면서 자기들의 생각이 이 세상의 것들로 가득 차 있을 동안에는 자신의 생명이 안개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가 우리를 깨우쳐 우리 마음을 영원한 하나님께로 향하게 하는 이유로써 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우리 생애가 얼마나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지를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 대한 생각이 우리가 땅에서 오래도록 계속하리라는 이 어리석은 망상을 삼켜 버리게 될 때까지는 우리가 오래 살 것이라고 하는 생각을 마치 깊은 잠에 빠져 모든 감각이 마비되어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2) 이와 같이 사람들이 소경이 되어 있으므로 모세는 이들이 보는 앞에 하나님을 그들의 심판자로 내세웁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오 주여! 만일 인생들이 이러한 세상의 변화무상한 것을 바라봄으로써 마땅히 영원한 것을 생각한다면 그들이 이 현실적인 생명에 그토록 집착하지는 않을 것이니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들은 무엇이 참된 생명인지를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눈을 하늘에서부터 의도적으로 돌려 버린 이 사실은 그들이 왜 그토록 어리석은 자가 되어 하루를 백년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부를 때 강조적인 것으로 하나님께서 심히 무사려(無思慮)한 우리를 참고 바라보시기에 지치신 때 모세가 하나님께 말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편 90 편
또한 자신들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자, 즉 항상 그들 앞에 일어나고 있는 경험을 통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도 깨닫지를 못하는 귀머거리들에게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헛수고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사도 베드로에 의해서 약간 다른 의미로 인용되었습니다(벧후3:8).
베드로가 모세의 증거를 자신이 취급하고 있는 주제에 대한 설명으로 적용하기에 그 의미를 왜곡시킨 것은 아닙니다.
모세의 의도는 사람들의 마음이 헛된 생각을 버리고 하늘을 향해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베드로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리스도께서 인생들의 소원대로 그의 재림을 서두르지 않자 많은 사람들은 오랜 권태에 지쳐 부활 소망을 저버립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이러한 잘못된 성급함을 매우 적절한 처방으로 고쳐줍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너무 오래도록 지연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들에 대한 인생들의 믿음은 점점 약해지고 넘어져 가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일은 그들이 땅의 것에 집착하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무슨 이유가 있겠습니까?
베드로는 사람들의 죄악을 바로잡기 위해 모세의 이 말씀을 적절하게 사용합니다.
불신자들이 자기들의 쾌락에 도취되어 있는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지나치게 세상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늘 나라의 영원한 것에 대한 기쁨을 맛보지 못합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것도 여기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교훈에 대한 올바른 사용법을 배우도록 합시다.
우리가 우리의 생명에 대한 극심한 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만족케 해줄 아무것도 찾지 못하고 계속 괴로워하는 것은 우리가 어리석게도 이 세상에서 영원토록 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우리의 마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 못하게 하는 극도의 초조함과 성급함은 그 마음이 땅에 집착해 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생각을 따라 판단하지 말고 하나님의 심판하심에 의지합시다. 또 우리는 이 땅의 생활은 헛되다고 하신 말씀에 의지해서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하나님의 하늘 보좌에까지 승화시킵시다.
모세는 단순히 천년을 하루에 비교하지 않고 지나가 버린 ‘어제’ 에 비교합니다.
우리의 눈앞에 있는 것은 무엇이든 우리의 마음을 붙드나 과거에 대한 회상에는 우리가 덜 영향 받기 때문입니다. “경점”이라는 말에 대해서 옛날 사람들은 밤을 각기 세 시간으로 된 네 경점으로 구분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오랜 시간으로 보이는 것이 하나님의 눈에는 얼마나 하찮게 여겨지는가를 보다 강력하게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눈에는 천년이 사람들은 깨어있는지 자고 있는지 거의 알 수도 없는 밤의 세 시간에 불과한 것이라는 비유를 말한 것입니다.
시편 90 편
2. 본문 5-6절은 “(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저희는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벤 바 되어 마르나이다” 입니다.
모세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단지 순간으로 끝나 버리는 공전(空轉) 만 거듭하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합니다.
우리는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라는 표현이 보통 이상의 비참한 재난을 가리킨다고 제한하여 보지 않고 단순히 죽음이 홍수에 비교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세상에 잠깐 머물다가 곧 무덤에 들어가 땅 속에 묻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공통으로 임하는 사망을 “홍수” 로 적절하게 부릅니다.
우리가 생명의 호흡을 내쉬고 있는 도중에도 주님께서는 마치 난파선에 있는 자들이 바다 속에 빠져 들어가듯 우리에게 죽음으로 엄몰해 오십니다.
따라서 죽음은 보이지 않는 홍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또 모세는 확증하기를 자기 자신들이 아첨을 하는 자들은 이 땅에서는 놀라운 힘을 가진 것이 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단지 잠자는 자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풀”의 비유는 같은 뜻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아침에는 풀처럼 일어나 푸르러지지만 잠시만 지나면 잘리고 말라죽습니다.
6절의 동사들은 단수로 되어 있으므로 “풀”이란 단어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동사들이 각 사람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도 타당합니다.
“풀”과 “모든 사람” 중 어떤 것이 주격동사를 취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우리는 이 문제에 많은 수고를 기울이고 싶지 않습니다.
이 교훈은 계속적인 묵상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있을 때는 우리의 인생보다 더 허무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면서도 혼자 있을 때는 허황된 충동을 받아 땅에서 영원히 살 생각을 그려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기가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명심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억제하여 자신의 관심과 자신의 취향을 땅에 속한 것에 무한히 심취시키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목표를 향해 재빨리 전진하는 법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관심에 억제를 가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자극을 받아 한 생명 대신 쉽게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것에 불과한 천개의 생명에 대한 꿈을 꾸게 됩니다.
3. 본문 7절은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서 심사숙고를 거친 다음에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선하고 진지한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경험을 통해 스스로 제재를 받고 자기들의 길이 얼마나 빨리 끝나게 될는지 깨닫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시편 90 편
모세가 인간 생명의 짧음과 하나님의 분노를 연결시키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인생들은 본래 일시적이어서 그림자와도 같은데 이러한 짧은 생에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분노의 손길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진노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우리의 연약한 성품으로 견디기 어려우며 다만 우리가 어떤 인내의 힘을 공급받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4. 본문 8절은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입니다.
모세는 이 탄식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비방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분노는 아무리 무서운 것이었을지라도 백성들이 자기의 죄악으로 격분하게 했기에 임한 것으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손에 채찍을 맞을 때 순전한 겸손에 이르지를 못하고 점점 더 강퍅해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 주는 참된 길, 즉 우리의 교만을 굴복케 해주는 것은 하나님이 의로우신 재판장이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따라서 모세는 사람은 본질상 연기처럼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간략하게 언급한 후에 여기에서부터 하나님께서 자기 분노의 대상이 되는 자들을 죽여 없어지게 한다 하여 놀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추론해 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진노의 표적을 보여주시는 것으로 표현되는 표현 방법, 곧 ‘주께서 사람의 죄악을 자기의 눈앞에 놓으신다’는 말을 주시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가 체험한 형벌이 중지되는 것은 모두 우리를 속량하사 우리의 죄악을 도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돌려야 할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은밀한 죄”라고 번역한 עלומים (알루밈)이란 단어를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젊음”이라고 번역하고 마치 모세가 자신의 젊었을 때에 범했던 과오들을 기억하여 말한 것처럼 해석합니다.
그러나 이 해석은 지나친 억지요, 문맥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해석은 “은밀한 죄”와 “주의 얼굴의 빛”에 대한 대조를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대조를 통해 하나님이 심판의 빛을 인생들에게 비춰 주시지 않으면 사람들은 어둠 속에 자신을 숨기고 많은 속임수로 자신을 감싸게 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하나님을 피하고자 하는 자기들의 핑계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그들이 위선으로 감추었던 죄악들을 그들 앞에 내놓으실 때에는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짓눌려 진실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낮추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시편 90 편
시90:9-10 우리의 모든 날이
이 구절들은 인생이 무상하게 된 원인을 보여줍니다.
인간 무상의 원인은 범죄입니다. 인간이 범죄치 않았더면 영생할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범죄하였으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처해 단명(短命)하게 됐습니다.
또 사람이 전 생애를 비애(悲哀)로 지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단명과 비애를 치료하는 길은 오직 회개하고 속죄를 받는 길 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1. 본문 9절은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노를 발하시면 그 즉시로 인간의 생명의 길은 곧 끝장을 보게 된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께서 죄를 벌하시는 모든 경우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진노의 맹렬함에 대해서 말했던 것을 보다 크게 확대시키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나타내신 이 두려움이 단지 잠시 동안만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지속될 것으로 말합니다.
모세는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분노를 거두시거나 완화시키시지 않으므로 계속되는 환난으로 말미암아 거의 소멸될 정도에 이르렀다고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그토록 끊임없이 임하면 그들의 평생이 ‘하나님의 이야기’(칼빈 : 일식간 - 한글) 처럼 지나간다고 말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2. 본문 10절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두렵게 하시는 그의 진노를 공개적으로 나타내시지 않는다 해도 인생의 상태는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는 일반 교훈으로 되돌아갑니다.
‘우리의 년 수(年數)는 무엇인가? 진실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년 수의 길이는 70정도이고 건강하고 힘 있는 자라야 겨우 80 이라’ 고 모세는 말합니다.
모세가 “우리의 년 수” 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세분화되면 숫자가 우리를 기만해 생명이 긴 것처럼 아첨해 오기 때문입니다.
이런 헛된 망상을 없애기 위해 모세는 사람들이 수천 년이라고 생각하는 기간이 단 몇 날에 불과하다고 말함과 동시에 이 오랜 시간도 곧 허무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시편 90 편
그러므로 사람들은 일년이 365일이라고 생각하여 자기들의 연수가 만족스러운 것으로 알고 있으나 70년이라는 말도 잠간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도록 합시다.
인생들이 날수 계산을 늘여 잡는 것은 단지 궁극적으로 허락된 범위 안에 불과합니다.
80세에 도달한 자는 무덤을 재촉하는 자입니다.
모세 자신은 이보다 더 오래 살았습니다(신34:7).
그러므로 당시에 모세는 다른 사람들도 그처럼 오래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기서 일반적인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많아 노쇠해진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80세까지 살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에 모세는 건강한 자라야만이 이 나이에 이룰 수 있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모세는 사람들이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는 ‘건강’ 또는 ‘남보다 낫다고 자랑’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노쇠하거나 늙지 않은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도 많은 근심이 들어 있어 이 유한한 생명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 근심, 피곤, 슬픔, 공포, 쓰라림, 불편, 고민 등에서 피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현 상태에 있는 우리 실존의 전 과정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무덤에 이를 때까지 우리의 연약함을 통하여 우리의 생명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를 살펴본 자들은 그 모든 부분에서 수고와 슬픔을 분명히 발견하게 됩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히브리어 עמל (아말)과 און (아벤)은 수동태형으로 ‘불편한 것들’과 ‘환난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인간의 생명이 수고로 가득 차 있는 것과 많은 슬픔에 쌓여 있는 것을 의미하여 인생들이 가장 자만심을 갖고 있을 경우에도 그와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라는 말씀의 의도는 이 구절의 내용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해서 그 복이 중단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의미하는 것은 사람은 자신이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장차 다가올 때를 바라보지 않을 수 없기에 자신의 탁월함을 자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러나 인생들은 눈을 뜨자마자 곧 순식간에 사망으로 이끌려 나아가 자신의 탁월함이 순간적으로 사라져 버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시편 90 편
시90:11-13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로 많이 죽은 것을 경험한 자입니다.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가신다”(5절), “풀을 ........저녁에 벤바 되어 마른다”(6절).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된다”는 말씀들이 단시일에 수다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사망한 사실을 연상시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죄 때문에 사망의 형벌을 당한 사실을 실물(實物) 교훈으로 여러 차례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이 같은 영적 교훈을 받도록 한 신앙 훈련의 학교였습니다.
무지한 인생들은 이와 같은 영적 훈련을 받으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 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라고 탄식하였습니다(11절).
1. 본문 11절은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를 두려워하여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특별한 환난에 대해 말합니다.
이는 조금 전까지 인류의 공통적인 인생 무상과 비참에 대해 하소연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주의 진노의 능력이 측량할 수 없이 위대한 것으로 선포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드시지 않기만 하면 마치 더 이상 자기 주인의 눈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도망한 노예처럼 제멋대로 날뛰어 방종에 빠집니다.
또 인간들의 반항하는 기질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극을 받지 않고서는 순종하는 자리에로 낮아질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실 때나 하나님이 자신의 불쾌하심을 나타내지 않으실 때는 인간들이 교만에 가득차서 분별없이 성급하게 죄악으로 달음질친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깨닫게 될 때는 자기들의 교만을 버리고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겸손한 자리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다음에 나오는 “누가 주를 두려워해야 할대로 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라는 말씀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될 수록 더 신중하고 엄격하게 하나님의 진노를 대하게 되는 사실을 가리킨다고 해석합니다.
그 이유는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기”(벧전4:17) 때문입니다.
시편 90 편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자들에게 이 세상의 좋은 것들로 배부르게 해주시는 동안에도 택한 백성들에게는 계속되는 근심에 시달리게 하십니다.
이를테면 “주께서는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히12: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버림받은 자들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을 더 모질게 다루고 계신다는 교훈은 참되고 유일한 교훈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거룩한 경외심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올바르고도 깊은 느낌을 갖게 해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버림받은 자들이 심한 형벌을 받고 있으면서도 복종하기는커녕 하나님을 대적하여 손길질 또는 발길질을 하거나 격분하거나 모든 환난에 대해 마음이 강퍅해진 사람처럼 어리석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근심에 가득 차 큰 소리로 부르짖을지라도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그들의 교만이나 맹렬함을 경감시켜 줄 만큼 그들의 마음 속에까지 침투할 수 없습니다.
경건한 신자들의 마음만이 하나님의 진노에 자극을 받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우레 소리를 기다리되 악한 자들이 그들의 목을 굳게 하여 쇠같이 함같이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의 새끼 손가락만 움직여도 그 순간마다 두려워합니다.
바로 이 사실을 선지자 모세가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의 진노의 무서움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흔든다 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이에 개의치 않고 옛 거인들처럼 하나님을 비웃습니다.
또 야만적인 오만에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이 번개를 발하실 때 하나님을 멸시합니다.
그러나 모세가 마땅히 참된 신자들에게 속한 교훈을 다루기에 모세가 확언하는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진노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가져서 신속하게 하나님의 권위에 조용히 자신을 굴복시킨다고 말합니다.
악인들에게는 그들의 양심이 괴롭히는 자가 되어 안식을 누리지 못하도록 괴롭히고 있기는 하지만 이 은밀한 공포심은 자신을 겸손하게 만들어 주는 교훈과는 거리가 멀기 에 오히려 심술을 더 고집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소란을 일으키도록 그들의 양심이 그들 자신을 자극시킵니다.
성도들만이 하나님의 진노에 민감하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깨닫고 참된 겸손으로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악인들은 깨달을 수 없는 지혜입니다.
악인들은 자신을 부풀게 해준 교만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리에 있지 않기에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느낌을 갖지 못합니다.
시편 90 편
2. 본문 12절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날의 수’ 라고 번역하는데 의미는 똑 같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여기서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 인생들에게 비춰 주지 않으시면 인간의 이해력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이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날 수를 알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는 것이 모순처럼 보입니다.
가장 건강한 자라도 80세를 넘는 경우가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적은 날 수를 계산함에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아이들도 숫자를 배우자마자 곧 더듬거리며 세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손가락으로 백을 세는 데 산수를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수치스럽고 챙피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생명의 짧은 수한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들의 우매입니다.
수학에 가장 재치 있고 백만의 백만이라는 숫자라도 손쉽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셈하는 자라 할지라도 자기 생명의 80년을 결단코 헤아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자기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은 헤아릴 수 있고 달이 지구에서 얼마나 떨어져 있으며 또 우주 공간에 있는 다른 위성과는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고 있으면서도 요컨대 하늘과 땅 사이에 모든 넓이는 측량할 수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에 속한 70은 헤아리지 못한다는 것은 실로 기괴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사람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께 그 능력을 간구한 것은 정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하반절도 특별히 주의해 살필 필요 있습니다.
모세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인간의 생명이 짧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라야 진정한 지혜를 우리 마음속에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목적도 계획도 없이 소요를 일으키는 것보다 미쳤다는 더 큰 증거가 있겠습니까?
참 신자들만이 자신들은 지음을 받았기에 일시적 상태와 복된 영원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기들의 생명의 목표가 무엇이 되어야 할는지를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생의 종말, 곧 죽음 자체를 깨닫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존재하는 위대한 목적으로 생각을 돌림으로서 하늘의 부르심의 상을 바라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안정된 마음에서 자신의 생애를 구제할 수 없습니다.
시편 90 편
3. 본문 13절은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입니다.
모세는 탄식하는 어투로 말을 한 후 오래도록 자기 백성들에게 근엄하신 형벌을 거두시지 않으셨던 하나님께 조만간 그들을 너그럽게 대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날마다 그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맛을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어느 정도 맛볼 수 있게 해주시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약속된 땅에서의 추방은 그 백성들에게 매우 쓰라린 환난이었습니다.
이 추방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약속해 주신 복된 기업에 그 백성들이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훈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백성들은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쏟아 놓으신 무서운 진노에 대해 자주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또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 보지 못하리라”
“너희 시체는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요”(민14:23, 32) 가 그런 말씀입니다.
모세는 그들이 애굽에서 겪었던 쓰라린 노예 상태와 광야에서는 방황하던 것을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언제까지니이까” 라는 말씀은 분명히 그들이 오래도록 겪고 있던 고통을 탄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은총의 표적을 거두어 가실 때를 가리켜 우리에게 등을 돌리신다 또는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신다”라는 말로 말씀하신 것처럼 그가 돌이키신다는 말씀은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고 우리는 이해합니다.
“긍휼히 여기소서” 로 번역한 히브리어 נחם (나함)은 ‘후회하다’ 라는 의미를 가지기에 ‘주께서는 주의 종들에 대해 가지신 생각을 후회하소서’ 로 해석해도 좋습니다.
성경 말씀의 흔하고 잘 알려진 문체에 의하면 하나님이 후회하신다는 말은 사람들의 슬픔을 거두실 때, 새로운 기쁨의 근원을 주실 때 그가 변하신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시인의 마음에 가까운 번역은 ‘주께서 친히 주의 종들을 위로하소서’ 입니다.
하나님께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어 자기 자녀들 가운데서 아버지로서 나타나시는 것 이상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긍휼히 여기소서, 자비를 베푸소서 라는 번역이 의미를 분명하게 해 줍니다.
시편 90 편
시90:14-17 아침에 주의 인자로
모세는 여기서 하나님의 긍휼만이 인간의 참된 소망인 사실을 밝히 말씀합니다.
인간은 조상때부터 범죄했기에 구원의 길이 하나님의 긍휼과 인자에 있습니다(13, 14)
진정한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자기를 믿지 않고 하나님의 자비만 바라보는 자입니다.
모세는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기쁨의 시기(時期)를 가질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의 경영하는 일을 성취하시고 확립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14-17절은 “(14) 아침에 주의 인자로 우리를 만족케 하사 우리 평생에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 우리를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의 화를 당한 연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16) 주의 행사를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저희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 케 하소서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버리실 때 하나님 자신의 성품과는 다른 특성들을 보이십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거룩히 약속하신 보호해 주심에 대한 복을 ‘하나님의 놀라우신 행사’ 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행사가 자기 백성들의 불신앙과 배은망덕함과 오만함, 겉잡을 수 없는 욕망, 악한 요구 등에 내리셨던 모든 경우의 형벌 가운데서도 명백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특별히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다른 모든 증거들보다 백성들의 복을 지켜 주심으로 자신의 뜻이 근본적으로 알려지기를 바라고 계시는 하나님의 보살펴 주심에 대해 말씀합니다.
바울이 로마서9장 23절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가리켜 특별히 “영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실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자비로우신 사실을 보여주신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기에 하나님의 영광은 주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막 구원하시기 시작하던 때를 가리킵니다.
이 때는 그들이 가나안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시편 90 편
따라서 그 백성들이 광야를 벗어나 멀리 나아가지만 않았던들 그 구원의 광채는 흐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모세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하나님의 사역을 생각해 보고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끝까지 그의 은혜를 계속 베풀어 주시지 않는다면 그 약속이 불완전하고 미완성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사실이 하반절에서 더 분명하게 언급되었습니다.
모세는 이 말씀 속에서 자기 당대의 복만을 간구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모세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세대의 복까지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기도 행위는 본래 하나님이 내려주신 그 언약의 형태와 일치합니다.
모세는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 라는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간구합니다.
이와 같은 모세의 실예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때 우리의 후손에게까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의 교회가 지상에 지속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 시에서 우리가 관심을 집중해야 할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기도 가운데서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가 교회의 복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것과 우리들 자신의 형통함과 동시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우리 후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할 것을 말해 줍니다.
“영광” , “아름다움”(칼빈 : 은총 - 한글)이라는 말씀도 특별한 주의를 요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경우에 그 사람은 그 누구와 그 무엇에도 비길 데가 없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 자신의 은사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득이 없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치 우리가 선을 행할 때에 자신의 아름다움이 분명하게 나타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품의 영광스러움과 아름다움을 나타내서 참으로 우리 모두를 부요하게 해주십니다.
다음에 “우리 손의 행사를 우리에게 견고케 하소서”라는 말씀 속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그의 영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도해 주시며 다스려 주시지 않을 때에는 우리가 성공하게 되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의 모험이나 노력들이 왜 해로운가, 또 그들이 하나님을 따르지 않고 모든 질서를 파괴하며 모든 것들을 혼란시키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עלינו(알레누: 우리에게) 라는 말은 공연히 한 말이 아닙니다.
시편 90 편
그 이유는 비록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악한 자들이 자신과 자기 백성들을 대적해서 음모하고 또 실행하는 것들을 종국에 가서는 모두 선으로 바꾸시겠지만 하나님께서 확고하게 역사하고 계시는 교회는 이 점에서 하나의 특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우리에게 이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의 행사를 버림받은 자들에게는 예외로 취급하십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통해서 내적으로 주관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우리 손의 사역의 질서 또는 방향을 적절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의 반복은 계속 하나님 은혜 가운데 보호를 받을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길을 걸어가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전 과정을 걸어 갈 수 있도록 완성시켜 주셔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확립하다’ 또는 ‘세우다’ 라고 번역합니다.
이 의미는 받아들여질 수 있는 번역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다 문맥과 어울리는 번역으로 따를 번역은 하나님께 그의 백성의 모든 행위와 행사가 다 순조롭게 되어 가도록 해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