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의 눈물』(작사 문일석, 작곡 손목인)은 1935년 발표된
「이난영」의 대표 곡이자 일제(日帝)강점기 최고의 히트곡입니다.
'목포'를 대표하는 노래로 1969년 '유달산' 중턱에 우리나라 대중
가요로는 최초로 노래 비가 세워졌습니다.
1935년 초, '조선일보사'에서 "전국 6대 도시 향토찬가 현상모집"을
실시했고, 1등 당선된 '문일석'의 "목포의 사랑"은 『목포의 눈물』로
제목이 바뀌고 작곡가 '손목인 선생'이 곡을 붙여 9월 신보(新譜)로
발매되었습니다.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목포의 눈물』은 이듬해인
1936년에 일본 에서도 음반이 발매되었고, 애상(哀傷)적인 멜로디는
일본인에게도 적지 않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목포 출신 '문일석(본명 윤재희)'의 애향가(愛鄕歌)는 1등에 뽑힐 만큼
시적(詩的)이고 서정적이면서도 슬픔이 어린 아름다운 가사로 당시
나라를 빼앗긴 겨레의 설움과 맞아 떨어지면서 깊은 울림을 주었고,
「이난영」의 비음(鼻音)이 섞인 단아하면서도 애절한 창법은 '손목인'의
서정적이고 애상(哀傷)에 찬 선율이 얹혀 발표와 함께 큰 인기를 얻게
되고 해방 이후까지도 가장 사랑 받는 노래가 됩니다.
「이난영」은 1935년에 일제(日帝) 강점기 최고의 인기 곡이자 한국
가요사의 불후의 명곡으로도 불리는 『목포의 눈물』을 발표하면서,
'가왕(歌王)'이라 불릴 만큼 높은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비음(鼻音)이 섞인 경쾌한 창법이 특징이며, 트로트와 신 민요를 비롯
하여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에 모두 능했습니다.
1936년에는 '오카 란코(岡蘭子)'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음반을 발표
하였고, 1937년에 「이난영」은 천재적 음악 인이었던 '김해송'과의
결혼 이후 남편이 작곡한 노래를 부르면서 전성기를 보냈습니다.
「이난영」의 오빠 '이봉룡'도 '김해송'의 지도를 받아 유명한 작곡가가
되었습니다.
태평양 전쟁 종전 이후에는 무대 활동에 주력하면서 '김해송'이 이끄는
'KPK 악극단'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이 발발
하면서 '김해송'이 실종되어 혼자 자녀들을 키우면서 어려운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1958년 동료 가수 '남인수'가 이혼한 뒤로는 사실혼
(事實婚) 관계로 지내다가 1962년 '남인수'가 사망하여 혼자가 되었죠.
1963년에는 미국에 건너가 딸들이 결성한 그룹 '김 시스터즈'와 함께
공연을 하였고, 그녀는 1965년 삼일절 기념 공연을 마지막으로 서울
중구 회현동에서 49세의 나이로 별세했습니다.
------------------------------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 깊이 숨어드는 때
부두의 새악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삼백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
님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님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상처가 새로워진다
못 오는 님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는 절개 목포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