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 찬모 / 최미숙
작년 8월 인천 송도에 터를 잡은 큰아들이 다시 서울로 집을 옮긴다고 한다. 출 퇴근하는 데만 네다섯 시간이 걸리고, 회사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에 집을 나서도 날마다 길이 막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했다. 새집에서 1년이라도 지내다 나온다 하더니 며느리 복직하는 날이 가까워 오고 아이 어린이집 문제도 있고 해 결단을 내린 모양이다. 회사 가까운 곳으로 집을 계약했고, 5월 17일로 이삿날을 잡았다며 날더러 올 수 있냐고 묻는다. 그렇지 않아도 손자도 보고 싶고 서울이나 한번 다녀와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마침 농장에서 뽑은 열무로 담근 김치랑 아욱과 상추도 따서 챙겼다.
이삿날 아침 도울 일이 없냐고 물으니 요즘 포장 이사는 짐싸는 데서부터 정리하는 것부터 다 알아서 해 준다며 집주인은 귀중품만 챙기고 손 하나 대지 않아도 된단다. 아니나 다를까 이른 시간 업체 직원 남녀 여섯 명이 들이닥치더니 각기 맡은 분야로 나뉘어 손발을 착착 맞추더니 두 시간 만에 일을 끝내고 서울로 출발한다고 했다. 짐쌀 일이 심란했는데 아들과 며느리가 집에 들어가 마지막으로 확인하는 사이 차에서 손자와 놀았다.
점심 먹고 서울 집으로 가니 정리가 거의 끝나 간다. 집도 깨끗하고 앞이 훤히 트여 우선 시원했다. 과거에는 아무리 포장 이사를 해도 내가 하나하나 다시 손봤는데 요즘은 그때와는 수준이 달랐다. 부엌 살림과 옷장 정돈해 놓은 것을 보니 혀를 내두를 정도다. 물건이 기존에 있던 자리에 그대로 들어가 있었다. 심지어는 양말과 머리핀 하나까지 원래대로 가지런하게 두었다. 마지막으로 커튼 달고 청소까지 깨끗하게 해준다. 돈이 좋기는 했다. 비싸게 받았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감탄스러울 정도여서 고맙다고 했다.
이사 업체 직원이 가고 나니 저녁 밥 먹을 시간이다.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양배추와 배추김치뿐 아무 것도 없다. 냉동실도 텅 비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양배추로 채 썰어 달걀 전을 부치고 순천서 가져온 아욱으로 된장국 끓여 열무 김치에 밥을 먹었다. 광명역까지 마중 나온 아들이 힘든데 김치까지 들고 왔다고 타박하더니 며느리와 맛있게도 먹는다. 그것이라도 가져오길 참 잘했다. 금요일 저녁에 동화 창작 수업 듣느라 나가지는 못하고 끝나고 늦은 시간 집에서 셋이 간단하게 막걸리와 맥주로 집들이 축하 파티를 했다. 아들은 우선 회사가 가까워서 좋은 모양이다. 걸어서 다닌다고 했다. 오가는 길이 너무 멀어 마음이 쓰였는데 그래도 다행이었다. 먼길 출퇴근하면서 부모 노릇까지 하느라 고생했다며 격려해 줬다. 아들 며느리 먹을 반찬이라도 해야 할 모양이다.
다음 날 오후, 롯데 마트에 들러 장을 보고 부근에 있는 경동시장으로 향했다. 과일이 싸서 참외와 망고를 샀다. 햇볕은 뜨거운데 뭔 놈의 사람이 그렇게 많은지 사람에 치였다. 겨우 5000보 걸었는데 지친다. 기가 빠진다는 말을 실감했다. 더운 날씨에 어린 손자가 고생이다. 집으로 와 쉬었다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저녁 먹으러 나갔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 걸을 만했다. 거리에 불빛이 화려하고 휘황찬란하다. 손자가 옹알이하는데 대꾸하느라 가로막에 부딪힐 뻔했다. 아이 하나가 집 안 분위기를 좌지우지한다는 말이 맞다. 이름을 부르면 알아듣는지 빙긋이 웃는 손자가 하도 기특해 덩달아 기분 좋았다.
아침에 일어나 전날 사 놓은 재료로 반찬을 했다. 조금이라도 남겨 두면 손대지 않고 버릴 것 같아 상추 남은 것으로 겉절이도 하고, 아욱은 된장국 끓이라며 깨끗하게 씻고 잘라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 간난아이 보느라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아들 내외가 우선 먹을 수 있게 멸치볶음, 호박나물, 콩나물무침, 무생채를 해 반찬통에 담았다. 저녁에는 야채를 듬뿍 넣은 잔치 국수를 했다. 딸까지 와서 맛있게 먹는 걸 보니 뿌듯하고 행복하다.
4박 5일 동안 아들 며느리 손자와 함께 지냈다. 내일(월요일)아침에 내려갈 참이다. 손자를 보면 예뻐서 한없이 있고 싶지만 더 길어지면 내내 부엌에서 찬모 노릇만 할 것 같아 안 되겠다. 지지든 볶든 지들끼리 알아서 살도록 해야하는데 자꾸 해 줘야 할 것만 보인다. 그래도 아들이 사는 집인데 전혀 안 올 수는 없고 앞으로는 하루나 이틀만 있다 가려고 한다. 며느리가 불편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