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23 /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30:18-19)
헬라어로 사랑이란 단어는 4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육신적인 에로스의 사랑입니다. 이는 대상과 환경에 따라 기복이 심한 사랑입니다. 둘째는 우정이라 불리는 필리아의 사랑입니다. 아름답지만 상황에 따라 변질되고 식을 수 있습니다. 셋째는 혈통에 의한 스톨게의 사랑입니다. 질기고 숭고하지만, 사랑의 범위가 제한적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는 인간적인 차원에서의 사랑이고 마지막 네 번째 사랑은 신적인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조건 없이, 변치 않고 행해지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이외에도 세상에는 사랑 같지만 사랑 아닌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기분으로 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기분에 좌우되다 보니 에로스의 사랑에도 결별과 이혼이 있게 되고, 필리아의 사랑에도 배신과 배반이 있게 되며 심지어 혈통으로 이어지는 스톨게의 사랑에서조차도 천륜을 저버리는 일들이 있게 됩니다.
이렇듯 기분에 좌우되는 사랑은 믿음 안에서도 자주 발견되는데, 이런 ‘기분파 성도’들의 특징은 매사에 교회나 주변 성도들, 심지어는 하나님조차도 자기 기분을 맞춰 줘야만 좋아라 합니다. 그렇다 보니 믿음 생활을 하면서도 요구하는 건 많은데 배려나 섬김은 거의 없습니다.
예전에 소위 성공했다는 선배 목사 한 분이 후배 목사들에게 목회 성공의 비결을 말하면서 ‘예배는 짧게, 심방은 없게’라고 하는 걸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봤습니다. 그 선배는 왜 그런 조언을 목회의 성공 요인으로 꼽은 건지를.
그 결과 현대 교인들이 그런 걸 원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니다. 교인들이 원하고 그런 교인들의 기분을 맞춰 주어야 목회가 성공한다는 논리다 보니 그런 주장에 도무지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예배는 성도들이 하나님께 나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고, 심방은 하나님이 성도들을 찾아가 성도들을 축복하시는 것인데, 성공한 목회를 위해서라면 그런 것 역시도 사람들 기분에 맞춰서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사전에 보면 ‘기분’은 ‘유쾌나 불쾌 등의 감정을 느끼는 상태’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분은 다분히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결국 각자의 감정이 각자의 행동을 결정짓다 보니 예전에는 이성의 통제로 절제되고 억제되던 것들이 언제부턴가 기분과 감정만을 앞세워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고부터는 전엔 듣도 보도 못한 묻지 마 폭행이라든지, 동성애 커밍아웃이라든가, 소시오패스니, 사이코패스라고 하는 것 등등이 세상을 휘젓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유를 따져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세상이 온통 각자의 기분에 따라서만 살려는 세태가 되었는지를. 어째서 사람들에게서 이성의 통제가 사라지게 되었는지를.
이에 대한 답이 성경에 있습니다. 사사기 17:6절과 21:25절을 보면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사사기를 이해하는 사이클은 항상 이스라엘의 범죄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이유가 사람마다 각자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살다 보니 그 결과로 사회가 타락했고 사람들에게 고난이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럼, 당시 사람들은 왜 각자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았던 걸까요?
성경은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에 왕이 있었다면 범죄와 타락을 막을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왕이 없었다.’라고 하는 말은 문자적으로 세상 임금이나 지도자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그들의 왕 되신 하나님을 더 이상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다 보니 매사에 자기들 기분 내키는 대로 살았고 그 결과는 범죄와 타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는 징계와 심판이 뒤따르는 사사기의 사이클 대롭니다.
원인이 있었기에 결과가 있던 겁니다. 즉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겠다고 하다 보니 당연히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도 없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이런 불신앙적인 모습이 당대로만 끝난 게 아니라 오늘 본문에서도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 남 유다 주변에는 기존의 애굽을 위협하는 앗수르나 바벨론 등의 열강이 등장하고 있었는데 이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유다는 기존 강대국인 애굽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외교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애굽이 아무 이득 없이 도울 리 만무했고 앗수르나 바벨론으로서는 자기들에게 대항하는 유다를 곱게 놔둘 리도 없었습니다. 결국 당시 남 유다의 형편은 어느 열강에 의해서든 나라가 환난에 빠질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데자뷔처럼 똑같습니다. 과거 사사 시대 때는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가 열국의 침략으로 인한 고통을 당했다면,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애굽만 믿고 있다가 신흥 강대국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이치로 오늘날도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나 민족, 사람들의 결국은 어떨까요?
여기서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를 보자면, 비유에서는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 타국으로 떠났다가 가진 돈을 다 탕진하고 흉년까지 만나 큰 고난에 빠지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묻고 넘어가야 할 것이, 아버지를 떠난 탕자가 고난을 당하게 된 것이 탕자가 아버지를 떠나서입니까? 아니면 떠난 탕자에 대한 아버지의 징계와 심판 때문입니까?
징계나 심판 등의 용어를 놓고 많은 분들이 오해하시는데,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서의 하나님은 절대로 ‘벌주시는 분’이 아니라, ‘복 주시는 분’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결과론적인 설명을 하려다 보니 징계나 심판 등의 표현이 쓰였지만, 엄밀하게 보자면 사사기에서 이스라엘이 범죄 후에 전쟁과 환난에 휘말리게 된 것은 하나님이 내리신 심판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겠다던 이스라엘의 자업자득인 것이며, 본문에서 유다가 열강들 틈바구니에서 고난과 괴롬을 당하게 될 것 역시도 하나님의 징계가 아니라 하나님 없이 행동한 자승자박일 뿐입니다.
화초를 의인화해서 설명하자면 한 겨울에 온실 속이 싫다고 온실 밖으로 나간 화초의 결국이 어떨 것인지는 안 봐도 뻔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하나님 없이 사는 인생의 결과를 안 봐도 아셨기에 미리 경고도 하셨습니다. 본 장의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화 있을진저’라고 하는 말씀은 하나님이 화가 나셨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살겠다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들 그러다가 큰일 난다.’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애정 어린 경고인 것입니다.
실제로 2절 이후를 보면 17절까지에서 장차 있게 될 큰일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말씀들을 주시다가 오늘 본문인 18절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18절을 보면 시작하는 첫 단어가 무엇인가요?
“그러나”입니다.
그렇다면 18절이 ‘그러나’로 시작되는 이유는 뭘까요?
앞의 1절에서 ‘너희들 그렇게 기분대로만 결정하고 행동하다가는 큰일 난다.’고 경고하신 하나님은 ‘그러나’라고 하시면서 장차 있을 큰일을 피할 방법이 무엇인지도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래서 18절의 ‘그러나’는 뒤에 이어지는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와 “일어나시리니”라는 말씀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왜 기다리신다는 겁니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이십니다.
왜 일어나신다는 겁니까?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언제까지 기다리시고, 어느 때 일어나실까요?
19절 중반 이후를 보면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미 임했거나 장차 임할 화를 피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부를 때 은혜로 응답하시겠다는 것이며,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할 때 긍휼히 여겨 응답하시겠다는 겁니다.
이런 이유에서 18절 말씀이 ‘그러나’로 시작하는 것이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겠다면 큰일을 당할 수가 있을지라도 ‘그러나’ 그럴 때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서면 은혜가 있고 긍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 15:20절에서는 탕자가 돌아왔을 때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라고 했습니다.
탕자가 세상이 좋다고 하나님의 품을 떠났어도 하나님은 계속 기다리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탕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면 그가 한 걸음 내디뎠을 때 하나님은 열 걸음 달려오신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이 사랑을 믿으신다면 이후로는 이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정면만을 향하신다.’
설사 내가 하나님을 등질 때라도 하나님은 절대 나에게 등을 보이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돌아선 나의 등 뒤에서조차 하나님은 계속 나를 보고 계시기에 이제라도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이 보실 수 있게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정면으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몽유병에 시달리던 수잔 앤더슨이란 분은 어느 날인가 밤새 몽유병으로 돌아다니다가 새벽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가 벼랑 끝 절벽에 서 있더랍니다. 그런데 더 놀랐던 건 그런 자기의 등 뒤에서 아버지가 온 힘을 다해 딸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더라는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아버지는 딸이 몽유병으로 돌아다니다 사고라도 날까 봐 딸이 집을 나설 때면 아버지도 따라나서 밤새 딸의 뒤만 쫓아다녔던 겁니다.
누구라도 살다 보면 넘어지기도 하고, 속상한 눈물이 나기도 하겠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은 정면으로 나를 지켜보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수잔 앤더슨이 혼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뒤에서 쫓아오며 지켜 주고 있던 것처럼 세상살이가 나 혼자인 것 같아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의 등 뒤에 계십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서 돌아서는 것은 언제나 나였지 한 번도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따라서 돌아와야 할 것도 하나님이 아니라 언제나 나란 사실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다시 누가복음 15:17절 말씀을 보면, 인생이 완전히 나락까지 떨어진 형편에서 탕자가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라고 탄식합니다.
이 대목을 놓고 주경가들은 탕자가 했던 탄식을 탕자의 회개라고 해석합니다. 왠고하니 ‘하나님의 은혜가 소중한 줄 깨닫고 돌이키는 것’이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은혜가 소중한 줄 알고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이기에 성경이 말하는 회개는 뉘우침이나 후회, 반성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기다리시는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가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는 하나님께 ‘하나님 잘못했습니다.’라든가 ‘하나님 이런저런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하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멀어졌던 기도의 자리로 다시 나아가는 것, 멀어진 말씀 읽는 자리로 돌아오는 것, 뜸했던 예배의 자리, 드문드문했던 순종과 섬김의 자리로 다시 돌이키는 것.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라면 이제부터는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는 ‘행동하는 회개’를 하기에 힘쓰시기를 권면을 드립니다.
사람의 삶이란 사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다 단점이 있고 장점이 있고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고 그런 믿음의 깨달음만이 사람을 대단하게 만듭니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는 자리는 대개 문제가 있는 곳이고, 우리가 실패한 곳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그런 곳에서만 하나님을 찾으니까요. 반면에 문제가 없고 실패가 없다면 솔직히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찾지 않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이 문제 속에 갇혀 있고, 닥쳐온 어려움을 헤쳐 나갈 길이 막막할 때면 그때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기회’입니다.
아시다시피 다니엘은 사자 굴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에서 죽고 싶은 순간에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나 인생 최악의 순간 앞에 섰다고 하면 거기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되는 겁니다.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고난의 자리’에 계시지 않고 ‘고난을 해결하는 자리’에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닥쳐온 고난을 해결하려고 하면 고난만 붙들고 끙끙대고 걱정하고 끌탕 한다고 해결되지 않습니다. 빨리 행동해야 합니다. 얼른 그 고난을 붙들고 하나님 계신 곳으로 가야 합니다. 거기가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고 내 고난이 해결되는 곳이기 때문인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서기 위해 그래서 하나님께 다시 은혜받기 위해 이제 여러분이라면 본문 19절에서 “그가 네 부르짖는 소리로 말미암아 네게 은혜를 베푸시되 그가 들으실 때에 네게 응답하시리라.”고 했던, 이사야가 전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믿어 새 위로와 새 힘을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닌 말로 가만 놔둬도 잘 살 것 같으면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겠습니까?
가만 놔둬도 잘 믿을 것 같으면 예수님이 왜 성령님을 우리에게 있게 하셨을까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잘 살 것이기에, 성령님을 사모하고 성령 충만해야 믿음으로 살 것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고 또한 우리가 그 기회를 잡기까지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전에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는 모두 자기들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다가 큰일을 자초했지만, 이제 우리는 문장을 ‘소견’ 대신에 ‘말씀’으로, ‘옳은 대로’ 대신에 ‘믿은 대로’라고 바꿔서 무엇을 하든지 이후로는 ‘말씀을 믿은 대로’ 행하셔서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기 전에 다시 탕자의 비유로 돌아가서 한번 가정해 보자면, 만약 탕자가 최악의 상황을 겪으면서도 아버지 생각이 일절 나지 않았거나 혹 생각났더라도 자기가 아버지에게 한 짓이 있기에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요?
탕자의 이야기는 ‘그렇게 살다가 죽었더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탕자는 아버지가 생각났고, 생각만 한 게 아니라 아버지께로 돌아갈 것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결국 최악의 순간에 아버지를 생각한 것이 탕자를 살렸고,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행동이 탕자에게 복이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믿으신다면 저나 여러분도 최악의 순간에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살길이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복 받는 길이라는 것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예전에 ‘생각이 믿음이다. 그러니 생각이 믿음 되게 하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이에 더하여 ‘행함이 믿음이다. 그러니 행동이 믿음 되게 하자’는 권면을 드립니다.
당장 보이지 않는다 해도 복과 은혜가 있을 것을 알고도 꾸물거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이 친구에게 전도하는데 10년 동안을 ‘그래 생각해 볼게’라고만 하기에 어느 날인가는 그분이 친구에게 말하기를 ‘생각을 그리도 좋아하니 너는 지옥 가서도 생각만 하겠다.’라고 했답니다.
믿음으로 행함에 있어서 절대로 늦었다 하는 때는 없습니다. 행하지 않기에 원하는 모든 게 늦어질 뿐입니다.
살다 보면 일부러는 아니더라도 급한 마음에 서둘러 하다 보니 혹 하나님 없이 해버릴 때가 종종 있게 됩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나를 기다리시고 일어나셔서 내게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하나님은 나를 받아 주신다.’는 믿음만은 절대 놓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라면 이제부터는 세상에서 내가 의지하고 내가 도움을 구할 대상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사람도 아닌 오직 하나님뿐인 것을 깨달아 아무리 멀어졌더라도 그때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다시금 은혜받고 긍휼히 여김을 받고 응답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