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font size="2"><b><u>1. 독일의 최후 인적자원 - 제12군</u></b></font></p>
<p><font size="2">1945년 3월 28일 아르헨티나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구데리안은 드디어 경질됩니다. 이날 독일은 국가근로봉사대 (Reichsarbeitdienst - RAD)의 인원으로 3개사단을, 육군의 훈련학교들에 17세의 징집병들을 더하여 3개사단을 편성하기로 합니다.
이들은 독일이 쥐어짜낼 수 있는 마지막 인적자원이었고, 전차는 잡다한 것들이 섞인
50대 정도로 모두 신편성의 장갑사단에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font></p>
<p><font size="2">이들은 신편의 제12군의 부대가 될 것이었고, 제12군의 사령관은 참모장교 출신인 벵크대장이 맡게되었습니다.</font>
<ul type="disc">
<li><font size="2">제12군 (1945년 4월 6일 사령관 부임. 사령부 데사우-로슬라우 공병학교)</font>
<p><font size="2">사령관 발터 벵크 장갑병대장 (OB Gen.d.Pz.Tr. Walther Wenck)</font></p>
<p><font size="2">작전참모 참모중령 훔볼트 남작 (Ia Oberstleutnant i.G. Freiherr von
Humboldt)</font></p>
</ul>
<p><font size="2">제12군에게 부여된 임무는 루르에서 포위된 모델의 B군집단을 구출하고 - 사실 하르츠 산지에서 루흐트 장군의 제11군까지 붕괴했으므로 거의 불가능하지만 - 네덜란드에서 북부독일에 이르는 H군집단 (북서방면군)과 바이에른으로 곧 밀려날 케셀링 원수의 남방면군 (G군집단) 사이의 공백을 메꾸는 것이었습니다.</font></p>
<p><font size="2">아무튼 신편성될 이들 부대의 이름은 그래도 거창했고, 앞의 두 사단은 즉시 투입이
<p><font size="2">등이었지만, 그 인원과 장비는 썩 좋은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font></p>
<p><font size="2">위의 보병사단 "얀"의 경우, 인원은 RAD요원들로 채워져 충분했지만, 장비가 태부족이어서 4월13일의 시점에서도 아래와 같았고, 따라서 서부전선의 전투에 동원되지 못하고, 편성을 계속하다가 코니예프의 선봉을 막기위해 동부전서에 투입됩니다. 그리고는 포츠담 부근에서 포위됩니다.</font></p>
<p><font size="2">보병사단 "얀"의 인원, 1945년 4월 13일</font>
<p><font size="2">위에서 보듯이, 신형무기인 돌격포와 판쩌파우스트는 충분한 것에 반해, 소총, 기관단총, 화포와 같은 기본장비가 부족한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기에 더해 트럭 정수가 107대 뿐이므로 마차라도 많아야하는데, 50%이상 부족한 것은 보급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전쟁말기 독일 보병사단답게 장비에 자전거, 말 등이 포함되어있습니다.</font></p>
<p><font size="2">[위의 표에 대전차포가 중복된 것, 중박격포가 없는 것은 원문 내용대로입니다.]</font></p>
<p><font size="2">장갑병대장 폰 에델스하임 남작이 지휘하는 제48장갑군단 사령부는 붕괴된 서부전선을 메꾸기 위해 급히 중앙군집단에서 서부전선으로 이동합니다. 4월 11일 에델스하임
장군은 제12군에 착임보고를 하고, 집결중인 제12군의 남익을 공고히하는 임무를 부여받습니다.</font></p>
<p><font size="2">제48장갑군단은 전황분석에서 미군이 베를린으로 진격중이라고 판단하고, 라이프치히와 할레의 방어에 나섭니다. 하지만, 이 군단에 주어진 병력은 훈련된 사단들이 아니라, 폰 폰세 (von Poncet)대령과 라트케 장군이 각각 방위사령관인 두 도시의 병력
- 라이프치히에 보병 8개대대, 할레에 보병 7개대대와 통신학교생도 1개연대. 각각은
고사포중대들의 지원을 받음. - 과 그 지역의 고사포 1개사단이 전부였습니다. 이름은
장갑군단이지만 전차가 없고, 정규의 사단도 없는 병력입니다.</font></p>
<p><font size="2">4월 13일부터 시작된 미제1군의 공세로, 두 도시 모두 17일에는 미군의 손에 들어갑니다. 할레는 그래도 1개사단의 공격을 받아 라트케 중장 이하 600명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라이프치히의 경우에는 2-3개 사단의 포위 끝에 위수사령관도 항복하고, 시장은 권총으로 자결했습니다. 라이프치히에는 1813년 나폴레옹을 상대로 한 전투를 기념하는 전승비가 있었는데, 이 부근이 최후의 전장이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이날 밤,
프랑스 민간인 포로들이 해방되어 삼색기를 들고 거리를 누빕니다.</font></p>
<p><font size="2">이제 독일군은 두 도시의 동쪽, 엘베강의 지류인 물데강으로 물러섭니다.</font></p>
<p> </p>
<p><font size="2"><b><u>3. 엘베강 교두보 전투 - 리거 대위, 뮐러 소령</u></b></font></p>
<p><font size="2">4월11일에는 미군 제5, 제3, 제2 기갑사단이 마그데부르크 남북의 엘베강으로 도달합니다. 제5기갑사단의 경우는 탕어뮌데 (Tangermünde)의 교량이 일찌감치 폭파되어
<p><font size="2">[이 교두보는 제39장갑군단의 반격과 공조하기 위해 유지됩니다. 주병력은 소령 페르스트 박사의 제3군관구 돌격포교도여단입니다. - Sturmgeschütz-Lehrbrigade III ;
독일이 로마자로 부대를 표시하는 것은 군단, 대대 이외에 군관구입니다.]</font></p>
<p><font size="2">하지만 제2기갑사단과 제83사단은 각각 쉐네벡과 그 남쪽 바르뷔(Barby)에 교두보를
만들고,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벵크의 제12군은 집결이 거의 완료된 "샤른호르스트"와
"후텐" 두 사단에 반격을 명령합니다. 마그데부르크 수비대 (사령관 레게너 장군)는 이미 남북으로 포위당한 꼴이고, 병력도 부족하므로 방어에만 전념해야했습니다. ["후텐"사단의 한 연대장인 말로프 소령 (Malow)은 바르뷔 지역 전투에서 전사합니다.]</font></p>
<p><font size="2">쉐네벡을 향한 반격은 제2"샤른호르스트"척탄병연대 제1대대 (I./Gre.Rgt.2
"Scharnhorst") 가 맡았고, 대대장은 동부전선에서 전투한 29세의 칼 리거 (Karl
Rieger)대위였습니다. 리거의 대대는 이 반격에서 미군포로 220명과 많은 량의 노획물을 챙기고, 교량도 판쩌파우스트와 폭약으로 폭파시켜, 미 제2기갑사단의 교두보를
완전히 제거했습니다.</font></p>
<p><font size="2">아이젠하워는, >> ... 아군의 도하는 맹렬한 반격을 받았다. 아군 제2기갑사단의 교두보는 4월14일 포기했지만, 남쪽의 제83사단이 확보한 도하점은 유지하였다.<< 라고
썼고, 리거대위는 이 훈공으로 4월28일 기사십자장을 받습니다.</font></p>
<p><font size="2">서훈서류의 내용은</font></p>
<p><font size="2">>> 보병사단 "샤른호르스트". 개인적행동으로 금후의 작전에 위험한 적교두보의 확대를 저지하였다.</font></p>
<p><font size="2">>> 쉐네벡 교두보의 파괴는 한 대대의 커다란 장거였다. 육군인사부장제출. 추천.</font></p>
<p><font size="2">>> 아돌프 히틀러 (서명) <<</font></p>
<p><font size="2">이틀 후 자살하는 히틀러의 서명입니다.</font></p>
<p> </p>
<p><font size="2">한편, 바르뷔에서 체릅스트 (Zerbst)로 진격하는 미군을 막기 위해 제12군은 '돌격포학교 부르크'를 중심으로 '부르크'전투단 (Kampfgruppe Burg)을 급편합니다. 이 지휘는 뮐러 소령이 맡았는데, 엘베로 행군도중 낙오,패잔병들을 긁어모아 며칠 후에는
사단급의 부대가 되어버립니다.</font></p>
<p><font size="2">제83사단의 진격이 어느정도 둔화되었을 때, 뮐러소령은 중령으로 진급하였는데, 벵크는 대령으로의 진급을 다시 추천했습니다. 이 사람의 전투단은 곧 "페르디난트 폰
쉴"사단으로 개칭되었는데, 이 사단의 중핵은 여전히 돌격포여단"쉴"이었습니다. (여단장 네벨 소령)</font></p>
<p><font size="2">이제 서방연합군은 마그데부르크의 엘베강 서쪽 지역도 점령한 후, 베를린으로의 진격을 포기했고 - 얄타조약의 준수-, 엘베강의 독일군도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되었으므로, 미군과 독일군 간의 교전은 열이 식기 시작합니다.</font></p>
<p><font size="2">4월16일에는 이 지역의 전투를 총괄 지휘하기 위해 쾰러장군이 급조의 사령부를 만드는데, 4월21일에는 동부전선의 제20군단사령부가 이동하여 '쾰러군단'은 제20군단이
<p><font size="2">참모장 부틀러 참모중령 (ObstLt. i.G. P. Butler)</font></p>
<p> </p>
</ul>
<p><font size="2"><b><u>4. 제39장갑군단 - 적 측면으로의 반격 실패</u></b></font></p>
<p><font size="2">쿠르스크에서 판터로 장비한 연대 (라우헤르트 대령)과 '대독일'전차연대 (슈트라흐비츠 백작)의 상급사령부였던 제10장갑여단장을 지냈던 데커 (Decker) 장군의 제39장갑군단은, 제12군 가운데 가장 훈련이 잘된 "쉴라게터"와 "클라우제비츠" 두 사단으로 이루어져있었습니다.</font></p>
<p><font size="2">이 군단은 4월16일, 마그데부르크 북서쪽 100여km 떨어진 곳의 윌첸(Uelzen)에서 집결, 하르츠 산지로의 반격을 개시합니다. 이것은 마그데부르크를 향한 미제9군의 후방을 강타한다는 제법 훌륭한 발상에서 출발하였습니다.</font></p>
<p><font size="2">반격은 제법 순조로와 후방지역을 유린하는데 성공하지만, 아우토반의 북쪽 팔러슬레벤 (Fallersleben) 지역으로 급히 이동한 몽고메리의 제21집단군 소속의 영국군의 반격을 받고, 포위됩니다. (아르덴느에서도 미군이 급할 때는 몽고메리가 멋을 부리며
도와주더니...) 데커장군은 이곳에서 자결하고, 제14장갑사단장이었고, 잠시 제3SS장갑군단을 지휘하기도했던 운라인 장군은 "클라우제비츠"사단의 대부분과 항복합니다.</font></p>
<p><font size="2">결국 적의 진격을 느리게만들기는 했지만, 제39장갑군단은 거의 와해되고, 잔여병력은 제12군, 제3장갑군으로 이동해옵니다.</font></p>
<p><font size="2">제39장갑군단 자체는 아른트 (Arndt)장군 휘하에 다시 사령부가 구성되어 북서방면군에 속했다가 다시 제12군 소속이 되지만, 이전과 같은 전투부대를 지휘할 기회는 더
<p><font size="2">벵크는 베를린으로의 진격은 무의미하다고보고, 할베에서 포위된 제9군과, 그들과 함께하는 민간인의 구출을 위해, 제20군단 휘하에 북쪽으로 "쉴", 그리고 "후텐"이 포츠담을 바라보는 북동쪽 방어를, "샤른호르스트"가 벨리츠 (Beelitz)로, 그 남쪽을 "쾨르너"사단이 맡아 소련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 돌입합니다.</font></p>
<p><font size="2">"쉴"사단의 사단장 - 이제는 대령이 된 - 뮐러대령은 4월 29일 포츠담 지역에 포위되었던 Reymann장군과 합류하고, "후텐"사단은 4월 30일 포츠담에 포위 상태이던
"얀"사단 병력들의 탈출을 돕고, 할베 포위진에서 탈출한 제9군의 병력과 민간인들은
"샤른호르스트"사단의 진지로 5월1일과 2일 사이 합류합니다.</font></p>
<p><font size="2">끝.</font></p>
<p> </p>
<p><font size="2">출처:</font></p>
<p><font size="2">W. Paul, 최종전 (Der Endkampf um Deutschland 1945), 일역판 (1979).</font></p>
<p><font size="2">W. Tieke, Das Ende zwischen Oder und Elbe - Der Kampf um Berlin 1945, 4판(1995).</font></p>
<p><font size="2">R. Lakowski, K. Stich, Der Kessel von Halbe - Das letzte Drama 1945 (1998).</font></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