潭陽鞠氏(담양국씨)
본관(本貫): 담양(潭陽)
시조(始祖): 국주(鞠周) 국양(鞠樑)
유래(由來):
국씨(鞠氏)는 중국계의 귀화 성씨로 담양(潭陽) 단본이다. 시조 국주(鞠周)는 원래 송(宋)나라 사람으로 1126년(인종 4) 황제 흠종(欽宗)이 금(金)나라로 잡혀가자 남송(南宋)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부인 영산신씨(靈山辛氏)와 함께 고려로 망명하여 감정관(監正官)에 제수되었다. 그 후 고려가 금나라와 수교하게 되자 사신으로 금나라에 가서 두 나라 사이의 현안 문제를 해결하여 국위를 떨쳤기에 그 공으로 추성군(秋成君)에 봉해졌으니, 국(鞠)자는 국(菊)자와 음이 상통하고 가을에 피는 꽃이라 하여 담양의 옛 이름을 딴 것이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담양으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다. 시조 이하 실전된 7위의 묘소를 담양군 금성면 학동리에 초혼설단하여 매년 양력 10월 3일에 향사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와「증보문헌비고」등의 기록에 의하면 국씨(鞠氏)의 본관(本貫)은 담양(潭陽)과 영광(靈光)을 비롯하여 복성(福城:전남 보성지방)·진주(晋州)·대구(大邱)·부령(富寧) 등 6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傳)하나 담양(潭陽)을 제외한 본관(本貫)은 미상(未詳)이다.
국유
양(樑)의 아들 유는 1369년(고려 공민왕 18) 부통사(副統使)로 도통사(도통사) 최 영(崔 瑩)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워 병부 상서(兵部尙書)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의금부의 종 1품 으뜸 벼슬)에 올랐으나, 고려(高麗)가 국운(國運)을 다하자 통한의 비분을 삼키며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죽음으로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아들 3형제를 두어 가문(家門)의 대(代)를 잇게 하였다.
국무(鞠珷)
유의 맏아들 무(珷)는 두 아우 성과 황( )을 데리고 선향(先鄕)인 담양(潭陽)으로 내려가 세계(世系)를 계승하였고,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한편 성은 조선조에서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였으나 후사(後嗣)가 없어 대(代)를 잇지 못했고, 막내인 황( )은 사간원(司諫院)의 헌납(獻納)을 지냈다.
구경례(鞠經禮)
1451년(문종원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한 경례(經禮)는 황( )의 현손(玄孫)으로 사간(司諫)에 올랐으나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을 몰아내고 왕위(王位)를 찬탈한 후에는 어지러운 정국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은거(隱居)하면서 학문(學問)에만 진력한 강직(剛直)한 학자(學者)였다. 세조(世祖)는 여러 번 대사간(大司諫)의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끝까지 불취했고, 그의 아들 6형제 모두가 크게 현달(賢達)하여 이들의 후손(後孫)이 담양 국씨(潭陽鞠氏)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조선중기의 학자(學者)로 명성을 날린 함과 침( )의 형제는 당세의 거유(巨儒) 정경세(鄭經世)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배워 1613년(광해군 5) 생원시(生員試)에 나란히 합격했고, 효성(孝誠)과 우애가 뛰어나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명정(命旌)되었다.
국민(鞠旻)
1663년(현종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민(旻)은 성환 팔방(成歡察訪)을 거쳐 적성 현감(積城縣監)과 감찰(監察)을 지냈다.
국민중(鞠敏中)
계공랑(啓功郞) 원룡(元龍)의 손자(孫子) 민중(敏中)은 조선조(朝鮮朝)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에 올라 부사(府使) 정실(廷實)과 함께 가문(家門)의 전통(傳統)을 후세에 전했다.
세계도
<한민족대성보>에서 인용
[출처] 潭陽鞠氏(담양국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