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팬을 찾는 분열된 웬디의 자화상
― 시지프스의 구심점(占)에서 피터팬의 원심력(力)으로의 과도기적인 현기증 ―
장 한 섬
튜니스님의 소설 《피터팬》은 어지러운 작품이다. 일정한 궤도도 없이 확장일로의 가지치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마치 뿌리 없이 가지만 자라는 덩굴 같다.
“나는 달렸지만 내 발은 천천히 앞을 향해 걸었다. 자꾸 뒤로 달아나는 저 입구를 향해 나는 몇 번이나 느린 한걸음을 다시 떼었고 마침내, 그 안으로 한 발을 넣었다. 주위는 젖은 풀 냄새가 짙게 피어나는 숲이었다. 나무들은 기를 쓰고 저마다 팔을 내뻗었고 햇빛은 들어올 자리 없이 빽빽한 나뭇잎들이 하늘을 이루었지만 어둡지 않았다. 사방은 초록색으로 빛이 났다. 나는 조금 더 걸어갔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산소로 인해 폐는 청량감으로 터질 지경이었다. 간간이 나뭇가지에 풀을 엮어 매놓은 그네가 보였고 버섯처럼 생긴 미끄럼틀은 빙글, 돌아가고 있었다. 숲은 계속 이어졌다. 이 숲은,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위의 문장을 읽어보면 성장기의 흥분과 설렘 그리고 희망이 뒤섞여 있다. 그러면서도 불안과 우울은 동반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핵심에 접근하면 사태는 돌변한다.
“한참을 더 걷자 호수가 나타났다. 호숫가를 둘러 싼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덩굴들을 헤치자 날카로운 줄기가 내 몸을 할퀴었다. 상처를 문지르며 난 목이라도 축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덩굴을 헤치고 호숫가에 선 나는 잠시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른침을 삼켰다. 티한 점 없이 영롱한 푸른 거울이 내 발끝에서 시작되어 끝없이 뻗어있었다. 아리 말할 수 없이 매혹적인 푸른색이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푸른색을 마셔야한다는 것에 대해 두려운 생각마저 일었다. 나는 감각을 잃은 채 호수를 바라보았다.”
희망찬 전진이 주춤하면서 경직된 자세로 자기방어를 시도하는 도피적 성향으로 뒤바뀐다.
“호수에서 나는 푸른 물의 향이 나를 끌어당기는 듯했다. 나는 뒷걸음질쳐 덩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주치는 것은 두 그림자이다.
“숲이 이어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고, 한쪽길이 구부러지기 시작한 바로 그쯤에 중간키의 두 그림자가 서 있었다.”
이 두 그림자는 바로 현실 속의 미성인인 나와 작품 밖의 창조자인 작가 자신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1.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2gs%26fldid%3D_album%26dataid%3D583%26regdt%3D20050204124840%26disk%3D7%26grpcode%3Dwrite%26dncnt%3DN%26.jpg)
소설 《피터팬》은 동화 속 피터팬이 아니라 피터팬을 통한 현실세계에서 웬디의 성향과 비슷한 여성의 정체성 찾기를 위한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피터팬에 대한 형상 및 재해석 또는 패러디나 은유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피터팬―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성인 남성보다 미성인 소년이 한결 다루기 쉽고 안전하다―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바람이 엿보인다. 우리는 타자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부여함으로써 상대적으로 자아의 성장과 힘의 증대를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본 작품은 날아다니는 피터팬을 통해서 <잠자는 숲 속의 미녀>에 대한 은폐와 자기방어 그리고 자기성장에 따른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심리가 깔려있다.
전편 《원더랜드의 시지프스》에 등장하는 토끼가 피터팬으로 바뀌었으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현실세계에서 백일몽을 꿈꾸는 웬디로 자리이동을 했을 뿐이다.
외연의 확장은 크게 이루어졌으나 내포의 확충은 성장에 따른 심한 균열을 보여준다. 전작에서는 등장인물의 정체성이 명확한 이름으로 활동하며 소통하는 반면, 본 작품에서는 모호한 인물들이 제자리 서 있는 느낌이다. 더욱이 ‘그녀’라는 상대적 주체가 주인공에 의한 ‘그녀C, D, S, J, A’라는 파편화된 객체들로 단절된 상태로 고립되어 있다. 그 때문에 작품을 읽으면서(원고분량은 두 배나 늘었음에도 불구하고) 발을 꽉 죄이는 신발을 신고 걸어가는 불편함이 느껴진다.
전작은 삶의 실존에 관한 진지함으로 보편성에 관한 어려운 문제를 신화적 모티브를 동화적 상상력으로 매우 빼어나게 그려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삶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의 정체성에 관한 개별성을 동화적 모티브를 현실적으로 펼쳐 보이려 했으나 피부의 확장만 있고 뼈대의 성장은 그에 미치지 못하였다.
《원더랜드의 시지프스》 측면도가 무거운 삼각형(▲)이었다면, 《피터팬》의 측면도는 가벼운 역삼각형(▽)이다. 그 때문에 전작은 안정된 구조인 반면에, 후작은 불안정한 구조로 되어있다. 《시지프스》가 대지의 마찰을 통한 등정으로 하나의 중심(구심점)을 찾아냈다면, 《피터팬》은 대지로부터의 해방(어쩌면 대기로 향한 자유)를 획득하고자 하는 도전과 실험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작가가 자신의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학적 성(gender)에 대한 정체성 확립을 상대적인 이성, 그것도 성인 남성이 아닌 미성인인 소년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소심함과 미숙함을 들어냈다. 개인적으로는 《피터팬》이 아니라 《빨간머리 앤》을 모티브로 그렸어야 한다고 생각되며, 더욱이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현실세계에서 성장을 시도하고자 했다면 동류라 할 수 있는 웬디가 아니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의 주인공 니나 붓슈만과 같은 주인공으로 설정했어야 한다. 이러한 주인공 설정에 대한 미숙함이 결국은 《생의 한가운데》가 아닌 <나의 언저리>를 그려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세상과 독자와의 소통을 위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작가의 자기성장에 따른 자기균열의 증상으로 봐야할 것 같다.
전작에 비해 작품에 대한 열병을 앓은 흔적이 없어 보인다. 그저 머리로만 생각하고 계산한 기교와 기법만이 보일 뿐이다. 작문 숙제라며 우수한 학생이라 할 수 있지만, 작가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찢어버려야 할 작품이다.
전작인 《원더랜드의 시지프스》에서 삶의 균형을 회복하는 복원력을 구축했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추진력을 얻고자 프로펠러의 시동을 일으켰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비록 이번 작품이 핵심을 관통(두 개의 그림자를 통합)하는 추진력은 갖추지 못했지만, 엔진에 들어갈 연료를 스스로 생산해 내는 생산력은 키워준 것 같다.
이제 본 작품을 자신의 작품세계에서 어떻게 거름으로 만들지는 전적으로 작가 자신에게 달린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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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원더랜드의 시지프스》에 등장하는 토끼가 피터팬으로 바뀌었으며,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현실세계에서 백일몽을 꿈꾸는 웬디로 자리이동을 했을 뿐이다. --이부분은 좀처럼 이해가 가지않고, 조금 당혹스럽네요, 나머지는 제가 작품을 쓰면서 느꼈던 모든 미숙함을 잘 말해주신듯 합니다. 속이 시원하네요,
음, 뭐랄까, 제 작품에대해 스스로 불편해하고 못마땅해하는 제 짐을 님께서 나눠주신다는 느낌 이랄까, 왜, 현상을 정확히 진단함이 치유의 첫걸음이지 않습니까? 다만, 저의 부족함으로 아직 비평을 이해하는데도 조금 미숙할까 걱정입니다. 아무튼, 감사합니다.^^
<작가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스스로 찢어버려야 할 작품이다.>특히 이말씀은 제게 새로운 시작의 길이 되지 않을까싶네요, 더 열심히 쓰겠습니다.^^
토끼는 피터팬으로, 엘리스는 웬디로 바뀌었다고 한 것은 두 작품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서 그런가봅니다. 일상의 궤도를 달리던 토끼는 그녀들의 궤적을 쫓는 피터팬으로, 작가의 자아가 투영된 엘리스는 웬디라는 인물로 파편화되었다는 뜻입니다.
작품에 대한 애정은 작가를 따를 수 없지만, 비평의 거리는 작가보다 용이하게 얻을 수 있기에 별개의 작품으로 분리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작품으로 묶어 성향과 변화하는 투영된 작가의 자아에 주목했습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객관적으로 냉정히 바라보기 위해서는 긴 시간이 필요합니다.여하튼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한가지만 더요, 제가 작품속에 웬디라는 이름으 집어넣은것은 그 이름으로서 독자들이 미루어서 <피터팬>을 생각해낼수 있게 의도된것이랍니다. 본문속에서 피터팬-이란 말은 단 한마도 나오지 않습니다.웬디가 이 글에서 하는 역할은 거의 없다고 할수 있죠, 하지만 이글은 읽는 모든분들이 웬디에 상당한 무게를
두시니, 영문을 모르겠어요, 대체 난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하는건지.ㅜ.ㅜ
비평에도 썼듯이 이 작품은 피터팬에 대한 재해석 및 풍자가 아니라 피터팬을 앞세운 작가 자신의 성장기의 증후인 자기균열이 보입니다.그로인해 웬디 역시 파편화된 그녀들처럼 모호할뿐입니다.독자들이 미루어서 피터팬을 추론할 것이라는 상상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을 이해는커녕 끝까지 읽을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작가조차 자신이 뭘 썼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아직까지는 분석적 개념보다 직관적 상상력이 왕성한 시기라 그럴지 모릅니다.그러나 작가 자신의 자신감과 성장기의 활력은 느껴집니다.좋은 현상입니다.중요한 것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 쓰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자신과 작품에 대한 통찰력을 얻게 됩니다. 그때는 너무나 많은 것이 한꺼번에 밀려와 혼돈과 충격을 줄 수도 있습니다.글쓰기는 언제나 자기모색과 발견, 그리고 질서와 미학을 불어넣는 창조적 행위입니다.그 여정은 퍼즐이 아니라 미로를 통과하는 것이니, 자신이 그 미로 속에 있다는 통찰부터 얻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