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나들이를 다녔던 선산의 도리사
나는 30대 후반에서 50대에 이르기까지 15년 여를 구미에서 살았다. 금오산은 구미시와 맞붙어 있을 만큼 가까워서 아침 산책에도 다녀왔다. 그러나 선산 도리사는 낙동강 너머에 있어서 조금 멀었다. 아직 어렸던 내 아이들을 데리고, 아니 집사람도 함께 우리 가족이 자주 나들이 갔던 곳이라 꽤 친숙하다. 도리사에 가면 아직은 어린 내 아이들 모습이 어른거린다. 지금은 내 손자. 손녀도 머릿속의 내 아이보다 나이가 많은데.
도리사는 신라에 불교가 들어올 때에 창건한 사찰이라서 신라 최초의 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공부한 불교 미술사에서 보면 고려 절에 더 가깝다.
산 아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절까지 오르려면 꽤나 힘들었다. 그때는 젊은 날이라서 오르막 산길을 겁내기보다는 소풍 가는 기분으로 올랐다. 그 후로 대구에 나와서 살면서 문화유적 답사모임에 참여하여 여러 차례 방문하였다. 금년 들어 체력이 예 같지 않음을 느끼고, 집사람더러 절집 답사를 제안했더니 좋다고 했다. 108사 답사는 이렇게 시작하였다. 그리고 첫 절을 도리사로 정했다.
나무들도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느라. 가지 끝에 물기가 올라 봉긋하고, 노란 개나리는 벌써 얼굴을 내민 곳도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하늘은 구름이 덮여 우중충하고, 공기는 습기를 머금어 축축하다. 예처럼 산 아래에 주차장이 있었지만 요즘 절은 거의가 절의 바로 턱 밑에 주차장을 마련해두어서 그곳까지 차를 운전해 갔다. 고마운 일이다.
절집을 찾아 다니기를 수 십 년을 하였다. 스님의 생각과, 신앙처로 찾아오는 아래 마을 사람들과, 그리고 답사를 다니는 사람들의 절에 대한 생각들이 다름을 느낀다. 그냥 다른 정도가 아니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도 인정해주자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더군다나 나는 절집을 토속신앙터라는 믿음이 있어서, 토속신앙지로 바라보기를 좋아한다.
전설 상으로는 신라 최초의 절이다. 불교가 고구려를 거쳐서 신라로 들어온다. 신라가 공인하기 전에 고구려 스님이 들어와서 민간에 많이 포교하였으리라. 고구려와 가까운 선상 땅에 경주보다 불교가 일찍 들어와서 민간신앙으로 퍼져 있었으리고 본다. 이곳에서 멀지 않는 선산 땅에 고구려 스님 아도가 숨어서 포교를 했다는 모례의 집이 있다. 그 아도가 이 절을 창건했다는 것은 전설로서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경주에서는 신라 최초의 절이라는 흥륜사도 아도승이 창건했다고 전해온다. 어쨌거나 아도는 경주에 자리 잡지 못하고, 선산으로 돌아왔다고 하니, 어떤 형식인지는 모르지만 이곳에 기도하는 불교 도량은 있었을 것이다.
어느 절이든지 요즘에 방문하면 느끼는 것이다 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이 절도 엄청난 중창을 하여 절의 모습이 내 기억과는 많이 바뀌어져 있다. 옛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라면 주불전인 극락전이고, 극락전 앞의 화엄석탑이다. 문외한의 사람들이 보면 탑인지를 알아보기 어렵다. 이형탑으로 분류하는 탑이다. 고려시대 양식이라고 하여, 이 절이 고려 때 창건한 절이라는 근거를 제공해준다. 이 탑은 보물 제 470호이다. 대부분의 참배객들은 이 탑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모양이 이상하니 탑인 줄을 모른다. 그러나 요즘에는 이 탑 앞에서 두 손을 모우고 기원하는 사람을 자주 만난다.
나는 극락전 절마당에서 산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절 아래에는 숲으로 뒤덮인 골짜기가 굽이굽이 돌아간다. 산속 깊숙한 곳의 절은 대부분이 그렇다. 내 앞에는 장엄한 나의 정원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자연은 주인이 없지만, 느끼는 자의 소유가 된다. 더 장관은 절 의 옆으로 뻗어내리는 능선에 오르면, 낙동강이 구비치면서 해평-고아들을 품어 안고 있어 장관이 펼쳐진다. 나는 도리사에 오면 일부러 숲을 뚫고 능선을 오르곤 했다. 지금은 길을 만들어 두었고, 전망대도 만들어 두었다. 한없이 넓은 해평들과 낙동강 너머의 고아들, 여기서 농사를 짓고 살던 사람들이 찾아와서 삶의 아픔을 하소했던 절이 도리사 이다. 그 너머로는 아득히 금오산 아래 마을도 보인다.
절 아래의 펼쳐진 자연은 바라보는 이의 소유물이란다. 그러나 주인이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마음을 부자로도, 가난하게도 한다 하니, 이왕이면 부자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 절의 금동사리함은 국보 208호인, 금동6각 사리함이다 본래는 석적사라는 절의 옛 탑에 있었는데, 도리사로 옮겼다고, 도둑들이 도굴하면서 석재들을 여기저기에 흐트려 놓았다. 어지러진 것들을 수습하다가 석가의 진신사리 한 과를 발견햇다. 금동육각사리함은 직지사의 성보박물관에 수장하고 있다.
주위에는 절을 장식한 돌 조각들이 많다. 화강암의 보얀 살색이 윤기마저 흐르고 있어. 맑고 싱그럽지만, 옛절의 맛을 잃어버리게 하여 안타깝다. 극락전 뒤편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 있다. 적멸보궁이다. 우리나라 사찰의 8대 적멸보궁의 하나라고 하였다. 요즘은 찾아가는 절집마다 적멸보궁을 꾸며 두어서, 석가의 진신사리라는 신비감이 많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절은 내가 예전에 찾아올 때도 적멸보궁이 있었으모로 신뢰가 간다. 법당을 돌아서 걸어갈 수 있도록 경사진 길을 닦아 놓았다. 이제는 계단보다는 조금 더 걸어도 이런 길이 좋다. 계단을 오르내리려니 다리가 후들거렸다. 지금 다녀가면 언제 다시 올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랑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요즘은 자꾸 이런 생각이 든다.
여기에 절을 지었다는 아도 화상의 자료를 찾아보면 들쑥날쑥이라서 소개하기가 무척 힘이 든다. 그냥 전설적인 스님으로만 기억하면 되리라 싶다.
집사람은 여뉘 절에서나 늘 그랬듯이 법당으로 들어갔다. 나는 절 마당에도 돌아다니고, 절의 뒤편의 적멸보궁으로도 오르고, 멀리 산 아래를 바라보면서 모처럼 마음에 낀 떼를 씻어 보았다. 구름이 잔뜩 낀 날씨는 쌀쌀하다. 음달이 진 곳은 아직도 녹지 않는 잔설로 눈부신 하얀색이 보석같다. 산의 높은 곳이라 잔설이 아름답고, 옛 한시에나 나옴직한 말 그대로 초봄이다.
나는 절집 답사에서 우리의 토속 신앙의 흔적을 찾으려 기웃거린다. 그러나 이 절에서는 그런 흔적을 찾아보지 못했다. 틀림없이 있으리라 믿는다.
차를 운전하여 가파른 산길을 조심조심 내려와서, 골짜기를 벗어나면 상주서 대구로 가는 국도가 나온다. 대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