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의 문제는 모든 살아있은 존재들의 현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고 있는것이며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남으로 향하는 것이므로 태어남이 즐거울 수 있는것은[ 생일 축하합니다] 태어남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보는것이 진정한 태어남 축하이며 만약 태어남에 대하여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다면 태어남은 죽음이라는 결론으로 가는 시작이니 두려움이다. 두려움과 공포를 쾌락이나 아는 것이 없음으로 대강대강 막으며 하루하루 지내는것은 어찌 보면 하루살이 인생과 다름이 없다. 죽음에 대한 분명한 알고 봄이 태어남에 대한 알고 봄처럼 중요한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삶과 죽음에 대한 자재를 진정한 해탈로 보고 있는것도 정확한 답이 될 수 있다. 삶의 여정에서 늙음과 병듬은 과정이기 때문에 늙지 않을 수 없고 병들지 않을 수는 없으니 늙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지나가고 병듬을 어쩔게 받아들이며 지나가는냐도 삶에서 중요한 것이니 번거롭고 괴로움을 만들지 않으려면 마치 통과의례처럼 늙음과 병듬의 현상을 바로보고 아는 연습이 필요한듯하다.
삶과 죽음을 모두 안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모두 보기에 삶과 죽음이 어떤 주체적이고 주관적인 현상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행위에 의해서 전개되는 영화같은 것이므로 진정으로 보고 안다면 한 편의 영화보듯이 자기자신의 삶과 죽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그것을 드라마틱히게 구성한다면 4부작으로 태어남 늙음 병듬 죽음의 과정의 드라마 시리즈이며 8부작으로는 사랑하는 사람 못 만나고,미워하는 사람은 외나무 다리에서 만나며,원하는것은 원하는 대로 구해지지 않고 몸과 마음으로 가지고 태어난 행위의 작용자체가 드라마이다. 만약 자기자신의 행위의 몸과 마음이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면 어찌 그 속에 빠져서 정신없이 살겠는가? 그러므로 백퍼를 보고 알면 해탈자가 되는 것이며 삶과 죽음이 더이상 괴롭거나 슬프거나 두렵지 않을 수 있는것이나 알고 보는 퍼센트가 적으면 적을 수록 사람으로 태어나지만 사람이 아닌 거의 동물 수준의 삶을 살기도 하기 때문에 바르게 알고 바르게 보는것은 중요하다. 그런 사람은 집착이 없으며 걸림이 없고 치우침이 없으며 바른길로 잘 가신분이니 감이 없는 감이며 옴이 없는 옴이므로 가고 옴이 없는 자유자재의 해탈인이다. 그런 사람이 바라문이며 존자님고 그런분은 바로 사문이며 진정한 유행자이며 그런 분이 아라한이며 성자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