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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2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3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4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5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6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7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8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9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10편] 전국시대를 평정하고 스스로를 제육천마왕이라 칭하다. 전국 3대 영걸 "오다 노부나가"
[11편] 참고 인내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 전략과 처세술의 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12편] 참고 인내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전략과 처세술의 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13편] 참고 인내하는 자에게 기회가 온다.전략과 처세술의 달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문은 국방tv 토크멘터리전쟁사의 내용을 요약정리한것임을 밝힙니다.
※실제 역사와 다른 각색이 있을수 있습니다
https://youtu.be/I4azCgSeQVc?list=PLXdSlvcMdcutsDFc3msNpq4POgXsX_wNN
브금틀보고세요
히데요시의 후실이자 일본사 3대 악녀중 한명
요도도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남편을 따라 자결하며 생을 마감한 오이치.
그녀의 첫째딸이 바로 요도 도노였다.
오이치는 소문난 미녀였는데, 그런 오이치의 미모를 가장 잘 물려받은게 요도도노이기도 했다.
그래서 요도도노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랑을 듬뿍 받는 첩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이에는 아들이 있었으나 금방 죽고,
둘째 아들이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리이다.
도쿠가와의 후계자와 오이치의 셋째 딸 스겐인 사이에서 나온 센히메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정략결혼한다.
전국시대의 정략결혼은 너무 복잡해서 다루지는 않겠다.
다만 특히 이 세 가문간의 정략결혼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그 자리를 이어받은 요도도노의 아들 히데요리.
도요토미 가문은 건재한듯 해보였다.
하지만 히데요시가 죽은 뒤 임진왜란의 후유증이 일본사회를 덮친다.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임진왜란에 참전한 장수들이
왜 자신들만 가서 고생하고 돌아왔더니 찬밥신세에 사회가 만신창이가 되있냐고 불만이 팽배했다.
(행주산성에서 깨진 인물)
특히 도요토미의 가신이었던 이시다 미쓰나리는 자신도 참전했었다며
임진왜란에 참전했던 장수들을 인정해주지 않고 별거냐는식의 태도였다.
게다가 이시다 미쓰나리는 오우미 출신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집권당시, 통일 후 싸움이 아닌 통치가 필요한 시기가 되자
오우미 출신의 경제관료들을 대거 등용한다.
다만, 당시 관료제가 제대로 정착한 사회가 아니었기에
이시다 미쓰나리의 경우 영주처럼 권력을 행사하고 다녔다.
영주의 권력은 원래는 싸움을 통해서 얻게 된 것인데
기존과는 다른 방식의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 실권을 잡기 시작했던 것.
전쟁터에서 살아온 무사들에게는 불만이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파가 갈리게 된다.
더욱이
히데요시의 첫 부인은 오와리 출신
히데요리의 모친 요도도노는 오우미 출신으로
출신을 근거로 지지세력이 갈리었다.
이 상황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호재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는 에도개간사업의 성공으로
250만석 규모의 거대 영지를 가진 거물급 영주가 되었고
저 두 파벌 사이의 갈등이 폭발할때까지
한번만 더 기다리면 되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히데요리 측에서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를 노린다고 생각하는 인물들이 있었으나 그 대표격 인물인
마에다 토시이에가 병사해버린다.
당시의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나이는
환갑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시다 미쓰나리의 절친 마에다 토시이에가 죽자,
임진왜란 참전장수인 가토 기요마사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눈엣가시인 이시다 미쓰나리를 제거하러 출병한다.
이시다 미쓰나리는 곧바로 도망쳐
도쿠가와의 도움을 조금 받아 시가현 사와야마 성에 은거한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칼 자루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쥔 셈이 되었다.
히데요리의 분파가
두 파벌로 나뉘어 극단의 갈등을 겪고 있을때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드디어 기나긴 인내를 끝낼때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도쿠가와 이에야스 급의 장수는 일본에 더 이상 없었다.
물론 가토를 비롯한 몇몇 유명한 장수들이 있긴했지만,
삼국지로 따지면 유비 조조 손권 급의 장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1599년 9월,
당시 가장 큰 성이었던 오사카 성과 같은 크기의 천수각을 짓고
자신이 이제 천하인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전국시대에서 권력을 알 수 있는 척도 중의 하나는,
정월이 되었을때 자신에게 다이묘들이 인사하러 오는지를 보는 것이다.
많은 다이묘들은 일단 오사카로 가서 정통성이 있는 히데요리에게 먼저 인사를 한 후
바로 빠져나와 도쿠가와 이에야쓰에게 우르르 몰려간다.
요도도노는 이 사실에 굉장히 분노했다.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쓰의 도움을 받아
목숨을 부지한 이시다 미쓰나리
하지만
히데요리 세력을 배후로 둔 이시다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바로 반기를 들어 거병한다.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통성과 명분을 가지고 있었던
관료파 이시다 미쓰나리의 서군 진영은 병력적으로 동군보다 우세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거점지역은 관동지역뿐,
반대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국을 통일했기때문에
이시다 미쓰나리가 거병할 당시 약 10만에 가까운 병력이 모였다.
지휘체계가 바뀌었지만 서군의 병력이
월등히 더 많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전국의 다이묘와 무사들은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속속들이 참전하기 시작했다.
서군의 총대장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의 중신으로 활약했던
모리 테루모토였다.
약 10만의 병력을 모집한 이시다 미쓰나리였지만,
인망이 두텁지 못했기 때문에 총대장으로 모리 테루모토를 세웠다.
리더가 되려면 타인의 공을 추켜세워주고 칭찬해줄줄도 알아야하는데
이시다 미쓰나리는 전형적이 재승박덕한 스타일의 인물로 타인을 치하하지는 못할망정 잘난척을 하는 사람이었고
이시다 미쓰나리는 타인을 무시하면서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란 식의 언행을 하고 다녔다.
서군과 동군으로 크게 대립세력이 생긴 일본에서
유명한 다이묘들은 대부분 동군과 서군 둘 중 한 곳에 붙어 자신의 베팅하기 시작한 것.
서군의 대표적인 인물소개를 간략히 하자면,
대영주로 거듭나게 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친 아들없이 죽은 우에스기 겐신 사후 굳건하게
우에스기의 땅을 지키던 우에스기 가게카츠
(우에스기 집안은 당시에도 인망을 잃지않아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함)
임진왜란 당시 행주산성에서 싸웠던 장군들은 대부분 부상을 당하여
행주산성에서 대패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일본에서는 패전으로 인해 맹비난을 받고 마녀사냥을 당했다.
상대방이 잘 싸워서 졌다고 하지않고
'쟤들이 무능해서 졌다'고 하는게 사람의 심리이기 때문이다.
이 행주산성의 참전 장군들이
서군의 중추세력이자 주요 지휘관들이었다.
반대로, 임진왜란에서 비교적 명성을 날린 장군들은
도쿠가와를 주축으로한 동군편에 붙는다.
이런 실전형 지휘관들은 동군에 포진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서군의 세력을 내부분열시키기 위해
편지도 보내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드러나게 배신한 세력은 없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서군 VS 동군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를 가리는 거대한 싸움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이다.
1600년 7월, 이시다 미쓰나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들의 성을 차례로 함락시킨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은 이에 맞서 8만의 병력을 일으켜
이에 맞서기로 한다.
또 자신의 후계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에게 지원요청을 하여
8만에 약 3만의 지원군을 더해
서군의 10만 군대와 비슷한 병력으로 싸울 예정이었다.
하지만, 도쿠가와 히데타다는
아버지의 지원요청을 받고 엉뚱한 성을 공격해 시간이 지연되어
결국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겼다.
이 히데타다의 3만군은 동군에서는 유력한 군대였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는 큰 타격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쓰는 서군 진영에
편지를 보내 내부분열시켜 적의 전력을 깎아먹는데도 실패했을뿐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동군 세력의 병력 3만이 깎인 상태로
세키가하라 전투에 임하게 된다.
전체적인 상황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여기서 더 치명적인 일은
지형상 서군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여태 전국시대를 하면서 숱하게 언급했지만
일본 전국시대의 싸움은 평야전이 아닌 대부분 산을 낀 협곡전투였기에
전력이 비슷할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쪽이 대부분 승리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한 서군이
병력조차도 더 많았던 것이다.
게다가 도쿠가와의 동군은 유리한 고지를 선점당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포진에서부터 이미 패배했다.
고도 300~500m 정도의 작은 산들에 진격로가 감겨있는 지형
가운데는 분지가 있었다.
동군은 강을따라 좁은 협곡을 지나
넓어지는 지형으로 가야했다.
서군은 넓은 곳에서 좁은 협곡이 시작되는 지점에
핵심주력부대를 쫙 포진시켜
산비탈에 방어진지까지 구축해놓고 기다렸다.
빨강 =동군 파랑 = 서군
뿐만 아니라 항아리 지형의 남쪽면을 휘감는 지형에까지
서군이 자리잡고 있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은 넓은 평지에서
좁은 산비탈을 올라가 협곡을 돌파해야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보자기를 벌리고 있는 곳에
주먹을 들이넣는 꼴이었다.
전국의 쟁쟁한 다이묘들이 대거 참전한 대규모 전투
각 군의 지휘관들은
이들을 어떻게 통솔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것인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병력 수 , 포진과 배치, 지형
모든 것이 불리한 이 전장에서 어떻게 승리를 거두고 역사의 승자가 되었을까 ?
-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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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펨코 제트 (https://www.fmkorea.com/35419903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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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꿀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