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천강씨(信川康氏)
본관(本貫): 신천(信川)
득성조(得姓祖): 강후(康侯)
시조(始祖): 강호경(康虎景)
유래(由來):
신천(信川)은 황해도(黃海道)에 있으며, 고려(高麗) 초(初)에는 신주(信州)로 불렸고 1413년(태종 13)에 지금의 신천(信川)으로 개칭되었다.
강씨(康氏)의 득성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무왕(周武王)의 동생인 강숙(康叔)의 둘째아들 강후(康侯)가 기자(箕子)를 따라 우리나라에 와서 8조(條)를 제정하고 윤리를 교화한 공으로 관정대훈공신(關鼎大勳功臣)이 되고 , 아버지 강숙(康叔)의 <康>자로 사성(賜姓)을 받았다.
그래서 강씨(康氏)는 그를 득성조(得姓祖)로 하고, 신라 말엽에 성골장군(聖骨將軍)으로 일컬어지던 강호경(康虎景)을 시조로 내세우고 있다.
시조 강호경(康虎景)은 강후(康侯)의 67대손으로 진원 경양리(晉原景陽里)에서 출생하였는데, 낳은 지 6개월 만에 장사괴(張士魁)의 난을 만나 부모가 피난하면서 창황 중에 후원 수풀 속에 버리고 갔는데 난이 평정된 후 돌아와 보니 백호(白虎) 한 쌍이 어린애를 안고 젖을 먹여 보호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의 이름인 경양리의 <景>자와 백호의 <虎>자를 따서 이름을 호경(虎景)이라 하였다고 하며, 이분이 고려 태조 왕건의 외6대조라고 한다.
그러나 강씨(康氏)의 실질적인 시조(始祖)는 호경(虎景)의 14세손으로 고려(高麗) 고종(高宗) 때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오르고 신성부원군에 봉해진 충렬공(忠烈公) 강지연(康之淵)이다.
강씨(康氏)의 본관(本貫)은 신천(信川), 곡산(谷山), 재령(載寧)을 비롯하여 충원(忠原), 진주(晋州) 등 10여 본이 있는 것으로 전하나 현존(現存)하는 강씨(康氏)는 신천(信川)과 곡산(谷山), 재령(載寧) 3본(本)이 대종(大宗)을 이룬다.
신천(信川) 강씨(康氏)의 중시조(中始朝) 지연(之淵)은 고려 명종(明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군의 개경(開京) 침략으로 이듬해 강화도(江華島)로 천도 할 때 왕(王)을 호종하여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라 신성(信城 : 신천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신천(信川)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지연(之淵)의 6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을 파조로 하는곡산파(谷山派)와 13세손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 득룡(得龍)을 파조로 하는 재령파(載寧派)로 크게 갈리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서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낸 영암공(瀛巖公) 영(永)을 제주 강씨(濟州康氏)의 입도시조(入島始祖)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
강윤성(康允成)
중시조(中始朝) 지연(之淵)의 6세손인 윤성(允成)은 고려 충혜왕(忠惠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이부시랑(吏部侍郞)등을 거쳐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에 올랐으며, 그의 딸이 이성계(李成桂)의 비(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가 되어 상산(象山)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짐으로 후손들이 곡산(谷山)으로 관향(貫鄕)을 삼았다.
강득룡(康得龍)
재령파(재載寧派)의 파조(派朝)인 안정공(安靖公) 득룡(得龍)은 중시조 지연(之淵)의 8세손으로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내다가 1392년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관악산(冠岳山) 의상대(義湘臺)에 올라가 송경(松京:개성)을 향해 통곡하니 이때부터 이곳은 연주대(戀主臺)라 불렀고, 태조(太祖)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그를 안릉(安陵) 부원군(府院君)에 봉하고 안정공(安靖公)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下賜)했다.
강영(康永)
제주 입도시조(入島始祖)인 영암공(瀛巖公) 영(永)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사촌 오라버니로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냈으며,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피신하여 제주(濟州)에서 일생을 마침으로 제주 강씨(濟州康氏)의 입도시조(入島始祖)가 되었다.
강조(康兆)
고려의 무신(武臣)으로서 도통사(都統使)를 지냈다.
강증(康拯)
음보(蔭補)로 벼슬에 등용되어 예종(睿宗)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강령강씨(康翎康氏)로 분적(分籍)하였다.
강순(康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증손(曾孫)으로서, 1453년(단종 1) 회령부사(會寧府使)를 거쳐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를 지낸 뒤 1457년(세조 2)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 나라에 다녀왔으며, 1467년(세조 12) 이시애(李施愛)의 난일어나자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홍원(洪原), 북청(北靑), 만령(蔓嶺) 등지에서 공(功)을 세워 난이 평정되자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으로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에 봉해졌다.
康純(강순)의 말씀 선생의 전설
관례를 깨고 가족 대동 임지부임.
조선 단종 때 의주목사를 지내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편정하는데 공을 세운 공은, 신숙주(申叔舟)가 야인을 정벌하는데도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세조의 큰 신임을 받아 가족을 대동하고 임지에 부임 할 수 있는 특권을 받기도 하였다.그 당시의 관례로는 임지에는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하도록 되어있었다.
시천강씨 상계세계도
항렬표(行列表)
46 善, 佑, 鐘
47 洙, 求, 泳
48 樂, 根, 相
49 烈, 勳, 夏
50 載, 起, 致
51 兌, 鉉, 鎬
52 , 淳, 浩
53 秀, 元, 模
54 熙, 昌, 憲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강씨(康氏)는 남한(南韓)에 총 16,763가구, 69,77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 보는 곳으로 한다.
[출처] 신천강씨(信川康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