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기 힘든 국립공원, 변산반도
수도권에 사는 지금 가장 찾기 어려운 국립공원은 남쪽 끝에 있는 한려해상 국립공원과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이다. 두 국립공원에 가려면 배를 탈 수 있는 통영・거제・목포・완도에 먼저 가야하며, 거기서도 한 시간 이상 여객선을 타야 두 국립공원의 절경을 맛볼 수 있다.
상록해수욕장의 아름다운 풍경
하지만 고향인 창원에 살 때 가장 가기 어려웠던 국립공원은 변산반도 국립공원이었다. 전국 각지에 직행버스가 있는 서울과 달리 창원에서 변산반도로 가려면 전주를 거쳐 부안으로 가야만 했다. 전주까지 가는 버스가 그렇게 많지도 않기 때문에 부안까지 가는 건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다. 당시 나에게 변산반도 여행은 제주도 여행만큼 큰 마음을 먹어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이었다.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간절함은 더 커졌기 때문에 휴가를 얻으면 곧바로 변산반도로 향하기로 결심했다.
전주, 정읍, 부안으로 갈 수 있는 격포터미널
수도권으로 이주한 지금, 굳이 애써서 변산반도로 갈 필요는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남쪽에 거주할 때 오히려 다도해 해상 국립공원에 좀 더 많이 갔으면 어땠을까하는 후회가 남는다. 하지만 변산반도가 다도해만큼 아름답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변산반도는 아직도 내 뇌리에 강렬히 남아있는 멋진 곳으로, 지금도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특히 내가 변산반도 여행을 떠날 당시 첫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기 때문에 일몰로 유명한 격포 해수욕장이나 변산 해수욕장의 진면목은 만나지도 못 했다. 변산반도로 여행을 떠날 그 날을 떠올리며 잊었던 기억을 끄집어내고자 한다.
국립공원 이야기 22 - 변산반도 국립공원
변산반도는 비교적 늦은 1988년 6월 11일에 19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부안군을 변산반도라고 생각하면 될 정도로 부안군 면적의 40% 이상을 변산반도 국립공원이 차지하고 있다. 변산반도가 낙후된 전라북도에서도 오지라고 생각되는 곳이라 찾는 사람의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으며, 그만큼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는 국립공원이라고 할 수 있다.
변산반도 국립공원
변산반도라는 이름은 반도 중심부에 있는 변산 (邊山, 510m)에서 비롯되었다. 변산반도 국립공원은 변산반도 안쪽에 있는 산악 지대인 내변산 (內邊山)과 바깥쪽 해안가인 외변산(外邊山)으로 나뉜다. 변산의 최고봉은 의상봉이며, 그다지 높지 않은 산이지만 기암으로 이루어진 봉우리와 절벽, 22.5m 높이의 직소폭포 등을 만날 수 있다. 의상봉・쌍선봉・옥녀봉・관음봉으로 이루어진 변산반도를 한 바퀴 돌려면 하루를 꼬박 등산에 써야 될 정도로 변산반도의 규모는 크다.
내소사
변산반도보다 더 유명한 곳은 바로 내소사 (來蘇寺)다. 백제 무왕 34년 (633)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내소사는 아름다운 전나무 길로 명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6・25 전쟁 때 타버려 다시 지었지만 다행히 대웅보전은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키고 있다. 30m 높이의 전나무 길은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뽑힐 정도로 아름답다. 숲길의 끝에 다다르면 대웅보전을 만날 수 있으며, 대웅보전에 가까이 다가서면 앞쪽 문에 달린 꽃무늬 조각의 창살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직소폭포
변산반도는 낮은 높이에도 불구하고 2km 길이에 달하는 계곡인 봉래구곡을 갖추고 있다. 내변산의 아름다운 절경을 따라 흐르는 물줄기는 직소폭포에서 화려한 정점을 찍는다. 제1곡인 대소부터 제9곡인 암지까지 아홉 곡의 명승이 펼쳐져 있으며, 계곡 옆에 우뚝 서 있는 기암괴석을 보면 주왕산 못지 않은 아름다움이 변산에 숨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신이 빚어낸 아름다운 기암괴석, 채석강
변산반도를 가기 위해선 반드시 전주를 거쳐야만 했다. 금요일 늦은 밤에 겨우 전주에 도착하고 하룻밤을 쉬어간 뒤 격포로 곧장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부안을 안 거치고 격포로 가는 직행버스가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하지만 햇살이 쨍쨍한 여름날의 변산반도를 만끽할 거라는 내 기대와는 다르게 버스에 올라 바깥을 바라보니 세찬 빗줄기가 바닥을 힘껏 때리고 있었다. 변산반도 해안가에 다다랐을 때 조용한 바닷가에 앉아 파도소리를 들으며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고자 하는 계획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격포 해수욕장에 발을 내딛자 마치 재난을 마주한 것처럼 무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바다는 비바람으로 인해 서해의 흙이 들고 일어나 회색으로 얼룩졌으며, 바위를 때리는 빗소리는 집에 있을 때 가끔씩 바깥에서 들리는 공사 소음을 연상시켰다.
썰물 때라 갈 수 있는 채석강
격포 해수욕장의 풍경을 보며 한숨을 쉬고 있을 무렵 친구가 도착했다. 친구도 날씨에 대해 불평을 했지만, 그도 통영에서 온 터라 변산반도가 평소에 오기 힘든 곳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가까운 곳이라면 그냥 숙소에서 빗소리를 들으며 쉬는 것도 좋았을 테지만 그러기엔 여기까지 오는데 사용한 시간이 너무나 아까웠다. 원래는 격포 해수욕장에서 변산 해수욕장까지 따라 변산마실길을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채석강과 격포 해수욕장을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채석강으로 갈 수 있는 바위도 특이한 모양이다
채석강은 썰물 때 드러나는 변산반도 서쪽 끝 격포항과 그 오른쪽 닭이봉 (200m) 일대의 층암절벽과 바다를 총칭하는 이름이다. 격포 해수욕장을 기준으로 왼쪽에 있으며, 썰물이 되면 바위를 따라 걸으며 오랜 세월을 거쳐 형성된 퇴적암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다. 바닷물의 침식에 의해 계속해서 깎여온 채석강은 수만권의 책을 가지런히 올려놓은 듯한 형상이다. 해가 지는 노을에 채석강의 해식동굴 안에 들어가서 바라보는 낙조는 변산반도 국립공원의 상징이라 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한다.
채석강의 퇴적암층
다행히 우리가 격포 해수욕장에 도착했을 당시 썰물로 인해 바위가 드러나 채석강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비가 와서 날씨는 좋지 않았지만 물때를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채석강을 볼 수 있었던 건 행운이었다. 채석강은 그 명성답게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제주도에 가서 용머리 해안을 보며 대한민국의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달은 이라면 변산반도 채석강에서 그 감동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수만년 이상의 시간동안 자연이 만들어낸 채석강의 절경은 먼 곳까지 온 우리의 고생에 대한 보답이었다.
격포 해수욕장
채석강을 끼고 있는 격포 해수욕장도 물론 아름다웠지만 흐린 날씨와 질퍽질퍽한 모래 탓인지 오래 있기가 부담스러웠다. 날씨가 좋았다면 해변에 누워 따뜻한 햇살을 만끽하며 시간을 보냈을 터라 아쉬움이 가득했다. 격포 해수욕장을 뒤로 하고 변산마실길을 따라 걷기로 했으나 이 또한 궂은 날씨로 인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백합죽
바지락 회무침
더 이상 걷는 걸 포기하고 격포항에 오면 꼭 먹어야 할 음식인 바지락을 먹기로 했다. 격포항은 청정해역에서 자란 바지락으로 유명한 곳이다. 변산반도 연안에서 채취되는 바지락은 육질이 좋아 그 명성이 전국에 알려져 있다. 바지락 뿐만 아니라 백합도 유명해 백합죽을 먹어보는 것도 추천한다. 우리는 이왕 격포까지 온 거 바지락과 백합을 배터지게 먹어보자는 결의로 바지락회무침과 백합죽을 시켰다. 하지만 초장 맛이 강한 바지락회무침과 서해안 곳곳에서 먹을 수 있는 백합죽에서 특별한 감동을 느끼긴 힘들다. 그저 육질이 뛰어난 변산반도의 바지락을 먹어볼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상록 해수욕장
날씨와 사투를 벌인 뒤 변산반도 남쪽 상록 해수욕장에 위치한 숙소로 이동했다. 숙소에서 바비큐를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바다를 바라보며 마트에서 사 온 각종 고기류와 해산물을 구웠다. 애꿎은 하늘은 첫 날 저녁이 되어서야 파란 모습을 드러낸다. 노을을 볼 줄 알았다면 격포 해변에서 좀 더 오랜 시간을 보낼 거라는 후회가 있지만, 어차피 밀물 때라 동굴에 들어가지 못 할 거라는 사실로 위안을 삼는다. 다음 날 아침 상록 해수욕장 뒤편의 언덕 너머로 떠오르는 해는 둘째날 일정을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 보낼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변산반도 여정의 둘째 날은 외변산이 아닌 내변산으로
내변산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풍경
변산반도 여행 첫날은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내변산을 탐방했다. 원래 계획했던 일정의 반의 반도 못 마쳤지만 그 아쉬움은 나중에 달래기로 하고 둘째 날에는 위도와 내변산에 가기로 했다. 국립공원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격포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는 위도 또한 아름답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오전은 위도에서 보내기로 했다. 내소사와 직소폭포만 본다면 오후 일정만으로 충분할 거라 생각했기에 나머지 반나절 동안 내변산 탐방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변산반도를 마치 외국처럼 먼 곳이라 생각해 짧은 일정동안 많은 장소를 둘러보기로 한 것만 같다. 한 곳을 보더라도 제대로 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지금 당시 여행에서 아쉬운 곳을 꼽자면 욕심을 너무 부렸다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