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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이야기 스크랩 우리가 알고 있는 명품브랜드의 유래
모닝제이 추천 0 조회 177 08.07.14 11: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원본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감각과 패션의 상징, 구두 - 페라가모, 프라다

필리핀의 이멜다와 <섹스&시티> 캐리의 공통점은? 바로 명품 구두에 집착이라 할 만큼 강한 애정을 보였다는 점이다. 구두만큼 여성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아이템이 또 있을까?
여성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명품 구두는 영화 속에서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영화 속 구두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있는 브랜드가 바로 페라가모.

<로마의 휴일>의 오드리 헵번은 "내 생애, 이 구두 외에는 신지 않겠다" 라고까지 하며 그녀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영화에 페라가모 구두를 신고 등장했다.

<7년만의 외출>의 그 유명한 지하철 통풍구 신에서 마릴린 먼로가 신은 구두도 바로 페라가모.

영화 속 여성들의 발을 아름답게 감싼 페라가모는 <에버 애프터>의 드류 배리모어를 위해 '신데렐라 슈즈'를 제작하기도 했다.

1998년 페라가모 탄생 1백 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함께 지니는 이 신데렐라 슈즈는 18세기 르네상스 스타일의 실크 슬리퍼이다. 은색 레이스와 스와로브스키의 크리스털이 꽃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굽은 유리구두의 느낌을 살리기 위해 아크릴로 제작되었다.

그 외에도 명품 구두는 영화 속 주인공의 캐릭터를 설명하기도 하는데, <러브 어페어>에서 아네트 베닝이 신은 에르메스의 에스파드류(끈으로 묶는 샌들)은 우아하면서도 편안하 영화 속 주인공을 대변하고, <레지던트 이블>에서 밀라 요요비치가 신은 프라다 부츠는 활동적이면서도 섹시한 주인공의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때로는 영화 속에서 사건을 유발하는 결정적 장치로 구두가 등장하기도 한다.

<웨딩 플래너>에서 제니퍼로페즈와 매튜 맥커너히를 만나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구찌의 구두 한짝.

또한 <금발이 너무해>에서 리즈 위더스푼이 변호사로 인정받게 되는 계기가 된 것이 바로 게이 남자와의 수다였는데, 이 수다의 주제가 바로 프라다 구두에 관한 것이었다.

 

<20세기 초, 마리오 프라다에 의해 창립> -프라다

 

프라다의 역사는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청년시절부터 각국을 누빈 마리오 프라다는 밀라노에 최고 품질의 가죽제품 매장을 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고, 이 꿈은 1913년 두 곳에 매장을 오픈하면서 현실화됐다. 프라다는 평생 여행을 계속했는데, 이 여행을 통해 세계 각국의 진귀한 소재들을 이탈리아로 들여와 패션상품에 응용했다.

특히 그 유명한 하트만 트렁크와 포코노 방수천을 이용한 상품이 크게 주목 받았다.

하지만 프라다의 진정한 발전은 마리오 프라다의 손녀 미우치아 프라다와 파트리지오 베르텔리와의 만남에서 출발한다. 미우치아가 패션사업에 출사표를 던지고, 1978년 베르텔리가 'I pellettieri d'Italia S.p.A'를 설립해 미우치아 프라다와 프라다의 브랜드 네임 아래 가죽 컬렉션을 발표하는 독점 계약을 맺으면서 전세계를 대상으로 한 제품 공급 기반이 마련된 것.
그 결과, 90년대 들어서는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감각을 수용한 또 다른 의류 라인을 선보이며 지금까지 세계적인 명성과 사랑을 받고있다.

 

 

 

 

구찌

 

'피렌체의 전통과 뉴욕의 섹시함.'고전의 자존심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도 가장 변화에 민감한 명품 브랜드가 구찌다.캔버스 천(이탈리아 피렌체 지방 특산물)을 이용하고, 창업자 구찌오 구찌의 이니셜인 두 개의 G가 마주 보며 뒤집힌 문양의 핸드백은 80여년 가까이 구찌가 지켜온 전통이다. 반면 미국풍의 섹시한 가죽 샌들, 11㎝가 넘는 스파이크(대못) 힐 등으로 나타난 1990년대의 파격은 '73살 구찌가 23살로 젊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할리우드 영화 배우 브래드 피트의 지적이면서도 남성적인 카리스마는 구찌 애호가로서 그가 즐겨 입는 블랙 점퍼의 이미지와 어울린다는 평가를받고 있다.
새로운 것에 끝없이 도전하는 모험정신, 이것이 없었다면 오늘날 구찌는명품의 반열에서 저만치 멀어졌을 것이다. 20년대 가죽 수공예점으로 등장해 창업자의 네 아들들로 사업이 이어지면서 구찌는 60년대 전성기를 맞는다.

미국 케네디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가 애용해서 그녀의 이름을 딴 '재키 백'은 60~70년대 여성들이 선망하는 브랜드였다. 하지만 80년대 들면서 구찌가의 내분과 매너리즘에 빠진 디자인으로 구찌의 '특별함'은 사라져 갔다.

90년에 구찌는 중대한 모험을 한다. 29살의 뉴욕 출신 디자이너 톰 포드를영입한 것. 그를 통해 뉴욕의 거리와 나이트클럽 등에서 영감을 얻은 섹시함과 실용성으로 구찌의 전통은 승화됐다.TV드라마 '애인'에서 황신혜가 들고 다니던 가죽 핸드백이 바로 구찌의 '뱀부 백'이다. 가죽에 대나무를 접목시킨 독창성은 구두 뒷굽에도 적용되면서 세계 패션계를 열광시켰다.

입생로랑 같은 유명 브랜드를 인수해 남성의류, 시계 등 토털 패션업체로입지를 굳히고 있는 구찌는 총매출의 30%를 일본 등 아시아에서 올리고 있다.

 

구찌-편안함과 단순함의 패션 철학

 

1904년 이탈리아 중부 플로렌스에서 창업자 구찌오 구찌(Guccio Gucci)에 의해 만들어진 구찌는 당시 세련된 세공 기술과 최상의 재질로 승마에 필요한 가죽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귀족 사회에서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상류 계급의 스포츠인 자전거가 실용화됨에 따라 구찌는 핸드백과 같은 일반 가죽 제품으로 그 방향을 바꾸게 된다.
구찌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캔버스 천을 이용하여 만든 백이 인기를 모으면서부터다. 부족한 가죽의 대체품이었지만, 캔버스 소재의 백(창업자 구찌오 구찌의 이니셜인 GG를 프린트하여 판매)은 오늘날까지 가장 인기 있는 아이템이다.
구찌 패션의 새로운 세기를 연 인물은 미국 출신의 디자이너인 톰 포드(Tom Ford)이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광고, 홍보, 매장 디스플레이에 이르기까지 구찌의 총체적인 이미지를 컨트롤하고 있는 톰 포드는 구찌의 오리지널 컨셉에 현대적인 이미지를 접목시키면서 명품의 새로운 조건들을 만들었다.

"모든 화려한 것들을 표현하는 최우선의 요소는 편안함과 단순함이다"라는 톰 포드의 패션 철학은 구찌의 모든 켈렉션에 철저하게 반영되어 통일감 있는 구찌의 이미지를 실현하고 있다. 구찌가 선보이는 제품은 핸드백을 비롯하여 신발, 의류, 시계와 안경 등 각종 소품과 보석, 향수, 홈 컬렉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로 망라되어 있다.
또한 전세계 2백여 개 매장은 대부분 직영으로 운영하며 구찌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다.
뿌리를 잃지 않는 정통성에의 집념, 새로운 것을 더욱 새롭게 하는 유연함, 최고로서의 책임감과 자존심은 세계 패션사에 아름다운 전통을 만들고 있다.

 

<목공소 아들, 세계적 명품 창조하다> -루이비통

 

루이비통은 앙쉐의 한 작은 마을, 대대로 목공소를 운영하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14세 때 무일푼의 처지로 걸어서 파리에 간 그는 그곳에서 견습공으로 귀족들의 여행짐을 꾸려주는 일을 했다. 당시 귀부인들 사이에서는 패티코트 위에 수십미터나 되는 천을 늘어뜨리는 드레스가 유행했다. 때문에 여행을 할 때는 수십 개의 트렁크를 마차에 싣고 다녀야 했다.

루이 비통은 그들의 의상이 구김이 가지 않도록 꾸렸고, 곧 나폴레옹 3세의 부인 유제니 왕후의 총애를 받아 유명해졌다. 1895년엔 마침내 자신의 가게를 열었다. 그때까지의 트렁크는 뚜껑이 반원형이었으나, 루이 비통은 몇 개라도 쌓아 올릴 수 있도록 이를 평평하게 만들어 대단한인기를 모았다. 모조품이 유행하자 이를 방지하도록 그레이 트레아농, 빨간 스트라이프 무늬, 격자무늬 등을 고안해 자신만의 제품을 만들었다.

1896년 루이 비통의 아들 죠르쥬 비통은 그의 아버지 이름의 머릿글자인 LV를 결합시키고, 꽃과 별의 무늬가 만복되는 모노그램 캔바스를 창조했다. 모노그램 캔바스의 발명은 곧 캔바스의 유연성을 이용해 접을 수 있는 가방의 탄생까지 이어졌다. 현재 루이 비통은 여행가방 뿐 아니라 여성들의 시티백, 각종 여행 액세서리, 스카프나 다이어리와 같은 소품도 생산하고 있으며, 1999년 봄품부터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영입하여 새로운 남녀 기성복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샤 넬

 

미국의 희곡작가 조지 버나드 쇼가 '당대에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두명의 여성'으로 퀴리부인과 함께 꼽았던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은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았다. 1883년 프랑스의 소뮈르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고아가 됐고 수녀원에서 자랐다. 18살이 되면서 낮에는 의상실 견습공, 밤에는 클럽 가수로 일했다. 이때 그녀가 불렀던 '코코를 아시나요'라는 노래제목이 영원한 그녀의 별칭이 됐다.

그녀의 카리스마적 미모와 자신감 넘치는 재능은 부유한 남성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이들을 통해 상류사회를 경험하게 됐다. 몸을 꼭 조여매는 코르셋과 의상으로 부자연스런 상류층 여성들과 달리 그녀는 심플한 투피스나 승마바지, 남성용 재킷을 입어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자연스럽게 최고의 디자이너로 자리 잡게 됐다. 2차대전 중 독일군과 사랑에 빠져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줬지만 오히려 그녀의 삶에 신비감을 더해주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아름다움보다 기능이 우선한다'는 그녀의 스타일은 새로운 시대의 본질을 간파한 것이었다. 20세기 여성에게 그녀는 '자유'를 선물한 것이다. 이런 기본정신을 바탕으로 옷 외에도 금색로고가 들어간 누빈 가방, 화려한 모조보석, 마릴린 먼로가 '내가 잘 때 유일하게 입는 것'이라고 말해 더욱 유명해진 향수 CHANEL No.5 등 명작들을 남겼다. 1971년 샤넬이 세상을 떠나면서 CHANEL사는 잠시 빛을 잃었다. 그러나 80년대 초 패션계의 신동 '칼 라거펠트'를 영입해 '패션은 사라져도 스타일은 남는다'는 CHANEL의 모토를 되살리며 화려하게 부활했고 그녀의 스타일은 끊임없이 재해석되며 패션.가방업계를 지배하고 있다.

 

로고하나로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다... - 펜디

 

펜디(FENDI)는 1925년 로마 플레비실토라는 지역에 에도아르도와 아 델 펜디 부부가 가죽제품과 모피를 취급하는 상점을 낸 데서 시작된 다. 파올라, 안나, 프랜샤, 칼라, 앤디 다섯자매에 의해 운영되면서 패션기업 체제를 갖춘다.

소규모 가족회사에서 펜디가 유명 브랜드 반열에 오르게 된 데는 칼 라거펠드라는 걸출한 디자이너와의 환상적 만남을 빼놓을 수 없다. 샤넬의 수석디자이너기도 한 칼 라거펠드는 펜디를 지금의 펜디로 만 드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모피에 오랜 노하우를 갖고 있는 펜디의 특성을 살려 모피에 승 부수를 걸었다. 당시만 해도 무겁고 구식인 모피와는 완전 차별되는 새로운 디자인을 전개했던 것. 그는 모피를 훨씬 가볍고 입기 편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모피에 천 개의 작은 구멍을 냈으며, 작고 길쭉 한 조각으로 아코디언 모양의 주름을 도입했다.

또 파격적인 꽃잎 모양의 밍크 숄은 항상 새로운 것을 찾는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모피코트의 성공은 기성복과 가죽 제품 등 아이템을 늘려 사업을 키 우는 역할을 한다. 일례로 가죽 핸드백의 경우 섞어짜기, 염색, 태닝 등 모피 제작기법을 도입해 큰 인기를 누린다.

모피에 국한되었던 펜디가 토털 패션브랜드로 거듭난 데에는 로고가 한몫 거들었다. 'F'자를 두 개 겹친 로고는 그 자체가 문양처럼 의류 와 가방, 머플러, 시계 등에 다양하게 사용되면서 펜디를 유명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구실을 한다.

지난 85년 펜디는 회사 설립 60주년과 칼 라거펠드와의 합작 20년을 축하하기 위해 펜디 향수를 출시했고 이어 새 브랜드 '펜디시메'와 스포츠상품을 내면서 사세를 넓혀나갔다. 펜디의 다섯자매는 끈끈한 가족애를 과시하며 펜디를 빅브랜드로 만드는 데 전력 투구한다.

다섯자매 중 안나 펜디의 딸인 실비아 벤추리니 펜디가 바케트 빵처 럼 길죽하게 생겼다고 이름 붙여진 '바케트'백으로 펜디 대박행진의 결정타를 날린다. 어깨 밑으로 바짝 매어 들 수 있는 작은 백의 탄생 은 즉각적으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몇 시즌 만에 500종류 의 바케트 백이 소개되면서 없어서는 안될 대표적인 펜디 아이템으로 자리잡았다.

펜디는 지난해 큰 변화를 맞았다. 프랑스 LVMH그룹이 지분 51%를 인 수해 경영권이 넘어갔고, 다섯자매는 디자인과 기획 부문에 참여해 펜디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있다. 국내에선 루이비통을 판매중인 LVMH 코리아가 올 초부터 펜디를 직영체체로 운영한다.

 

까르띠에 (Cartier) - "보석상의 왕, 왕의 보석상"

보석과 시계로 유명한 까르띠에는 15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적인 브랜드로 그 역사는 1847년 아돌프 피카드의 견습생이었던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가 파리의 몽토르고이가 31번지의 보석 작업장의 책임을 맡으면서 시작된다.
1859년 까르띠에는 황제의 사촌이었던 마틸드 공주의 후원으로 사업을 옮기면서 위제니 황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1899년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의 중심이었던 귀 드라빼 13번지로 옮기면서 보석의 명가 '까르띠에' 명성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왕가와 유명인사들에 의해 특별한 지지를 받고 분별력 있는 대중의 사랑을 받는 '왕들의 보석가'인 까르띠에는 현재 전 세계 180개 부티크, 1만 2,000여개 샵을 가진 거대한 전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전했다.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는 여행, 사람들과의 만남, 그리고 독서를 통해 얻은 영감 등에서 상상력의 소재를 찾았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기록하기 위해 펜과 노트를 늘상 지니고 다녔으며 평범함에서 찾아낸 그의 번득이는 아이디어들은 노트와 스케치북에 기록되어 마침내 보석 영역을 예술장르로 승화시켰다.
이러한 노력으로 까르띠에는 일찍이 영국의 에드워드 7세로부터 '보석상중의 왕'이라는 칭송을 받을 정도로 보석상으로서의 명성을 높여 갔다.

까르띠에의 대표 상품은 3색 보석과 탱크 시계, 가죽제품, 펜, 라이터, 안경 등으로 정교하고 다양하고 아름다운 보석과 시계들. 그중 가장 대표적인 명품인 '탱크시계'는 1917년 제2차 세계 대전때 등장한 르노 탱크에서 영감을 얻어 루이 까르띠에가 고안한 디자인이다.
탱크의 무한 궤도를 연상시키는 프레임과 탱크의 사각 몸체를 표현한 시계 케이스, 문자판은 탱크 프랑세즈, 탱크 아메리카, 그리고 사각의 탱크 반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새로운 스타일로 변모해 왔다. 탱크 시계는 지금도 전 세계 유명인사와 애호가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최고의 명품 시계다.

1985년에 출시한 'Cartier'의 인기 손목시계.
기능성이 뛰어난 스포츠 타입으로 크고 둥근 숫자판이 돋보이는 감각적 디자인으로 소매 없는 옷에 어울린다.

 

버버리

 

버버리 브랜드의 창시자인 토마스 버버리(Thomas Burberry)는 1835년 영국 남서부의 셔리주에서 태어났으며 20살 때부터 햄프셔주의 베이싱 스톡에 있는 포목상을 경영하며 농부나 목동들이 즐겨 입던 옷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들을 위하여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개버딘 천을 개발하게 되면서 버버리가 탄생할 수 있었다.

추위와 강풍에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진 개버딘 트렌치코트는 전쟁시 적의 탄환으로부터 몸을 피하는 곳인 참호(Trench)에서부터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영국 군인들의 공식 군복으로 채택되었고 실용적이고 내구적인 품질로 전쟁이 끝난 후에도 군인들이 오래도록 계속해서 그 코트를 입으며 대를 물리는 옷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후 토마스 버버리는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에게까지 그 명성이 알려지면서 국왕을 위한 개버딘 코트를 만들게 되었고 영국 왕실의 지정 상인으로서의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우수한 품질과 뛰어난 실용성을 겸비한 개버딘 소재의 트렌치 코트는 품위를 살려주는 전통적인 디자인으로 유럽의 여러 왕가를 비롯하여 사회 각 방면의 저명 인사들, 헐리우드 배우에게까지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버버리는 전통적인 트렌치코트로 시대의 흐름과 유행이 변화함에 따라 조금씩 스타일의 변화를 꾀하며 점차 성장하고 발전해 나아갔다.

패션 명품 'Burberry'의 창시자인 토마스 버버리(Thomas Burberry)는 원래 포목상으로 당시 농부나 목동들이 즐겨 입었던 스목-프록이라는 옷감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소재 개발과 연구를 거듭하여 '개버딘'이라는 혁신적인 원단을 개발했다.
이 소재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며, 입고 난 후 세탁이 수월하고 비교적 습기의 영향을 덜 받기 때문에, 비가 자주 오고 축축한 영국 기후에 적합한 레인코트에 안성맞춤이었다.
이처럼 우수한 품질과 실용성 덕분에 개버딘 버버리는 영국 국왕 에드워드 7세에 의해 많은 사랑을 받으며 명품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화려하면서도 고전적인 'Burberry'는 가장 영국적인 브랜드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며 눈에 띄는 성장을 보여왔다.
영국여왕으로부터 여섯 번에 걸쳐서 수출상을 수상하는 등 영국의 타의류 회사와는 필적할수 없는 성과를 거두면서 세계적으로 고품질의 전통적인 의류로 명성을 얻고 있다.

국왕이 코마스 버버리의 개버딘 코트를 입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내 버버리를 가져오게" 라고 말한 것이 널리 퍼져, 버버리가 곧 트랜치코트를 지칭하는 패션용어가 되어 버렸다.

많은 스포츠 광들과 탐험가들에 의해 사랑을 받으며 남극 탐험가 아문젠과 최초의 대서양 횡단자 알콕경과 같은 모험가들의 역사적인 현장에 함께 하며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Burberry' 남성의류 컬렉션은 클래식한 버버리에 스포티하지만 세련된 느낌의 새로운 라인을 더한다. fabric은 부드럽고 유연하며 풍부하다. 가죽제품과 shearling이 선보이며, 은은하고 연한 체크가 돋보이는 washed fabric과 overdyed fabric,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새로운 스트레치이 주요 소재로 등장했다.
또한 Prorsum collection에서 영향을 받은 지퍼와 포켓의 디테일링은 클래식한 'Burberry'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는다.

 

에트로

 

전통적인 프린트와 모티브를 살리면서도,현대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에트로는 1968년 Mr.짐모 에트로에 의해 자신의 이름을 고유 브랜드로 사용하며 고품질, 심미스러움을 바탕으로 회사내의 모든 생산라인의 모티브를 제공하면서 TOTAL LOOK을 창출하였다.
1968년 ETRO s.p.a를 설립해 의류 산업의 원단 컴버터로서 기업가적인 모험이 시작되었고, 짐모 에트로는 이국적인 문화에 대한 사랑을 꽃피우기 시작하였다.

원래의 문양과 독특한 색상을 갖춘 캐시미어라든지, 실크, 린네, 면 등 고급스러운 천염섬유로부터 만들어진 독창적인 원단생산이 시작되었다. 1981년에는 원단 생산라인을 창조했고, 첫 Collection은 페이즐리 문양의 성격을 띄었고, 그 문양은 그 회사의 Trade Mark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에트로트는 잡화류에서 시작하였다. - 숄, 스카프, 타이 등 이 라인은 독특한 재질뿐만 아니라 정교한 디자인과 색감으로 다시한번 강조가 되었다. 원단 생산라인은 가죽제품 쪽으로 확장 됐으며, 가방과 여행용 가방의 독특한 재질 즉, 특수코팅 제작으로 처리된 페이즐리 패턴의 쟈카드 문양은 점점 시간이 갈수록 지갑, 화장품 케이스, 소품용품과 같은 작은 사이즈제품에도 적용이 되었다.

이 라인은 80년대의 에트로 주류를 이끌었다. 그와 동시에 에트로는 이불, 담요, 소파 등 집안을 우아하게 장식할 수 있는 홈 컬렉션을 시작하였다. 90년에 들어서면서 의류 사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였으며, 디자이너들은 브랜드의 특수한 고품질의 수공예 작업을 살리면서, 창조적이고 현대적인 남성복, 여성복 컬렉션을 창조시켰다.

지난 10년간 아시아 전지역에서 강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으며, 브랜드 특성은 세계화에 맞추어 전세계적으로 매장 어디서나 회사 로고를 발견할 수 있다.

본사는 MILAN의 역사적인 도시인 VIASPARTIQUE에 쇼룸과 함께 자리잡고 있다. 에트로(ETRO)는 동양적인 미를 바탕으로 유행을 창조하고 있다. 중국, 인도 등 동양권의 문화를 응용하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기업이다. 에트로의 유행창조에 대해 전문가들은 '모방적인 변형' (데포메이션 또는 메타모포저)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에트로를 이끌고 있는 지모 에트로는 틈만 나면 동양권의 옛 쓰레기를 뒤지는 여행을 즐긴다. 그리고 헝겊 쪼가리, 중국의 옛 인쇄기, 야구방망이, 선박모형, 치과 의사용 의자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긁어 모은다. 그는 혼란 속에도 일정한 법칙이 있다는 카오스 이론을 신봉한다.

현재 에트로는 전세계의 주요 도시에 부티끄를 증진시키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프린트와 모티브를 살리면서도 현대적인 스타일을 추구하고 있다.

상업적인 면으로 에트로는 지난 10년 동안 아시아 전지역에서 강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으며, 오늘날 에트로는 70% 이상을 수출에 의존하고 있고, 브랜드 특성은 세계화에 맞추어 전 세계적인 BOUTIQUE들 사이에 어디서나 ETRO 로고를 발견할 수 있다.

 

전 세계 여성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티파니

 

노을빛처럼 침울한 날, 블루스처럼 비가 줄줄 오는 날엔 비참해지고 두려움이 몰려온다. 그럴 때마다 티파니에 가면 금방 기분이 좋아진다. 그 고요함과 고고함. 나쁜 일은 없을 것 같아진다.

오드리 헵번이 주연한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주인공 할리의 독백이다. 이 영화로 인해 티파니는 일약 '꿈의 매장'이 되었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 티파니의 블루박스는 그녀처럼 꿈많은 여성들이 연인 혹은 남편에게서 한번쯤 받고 싶어하는 선물상자가 되었다. 그 안에 단지 은반지 하나가 들었더라도, 오직 티파니이기 때문에 그것은 소중한 추억이 된다.
티파니를 유명하게 만들었던 이는 비단 오드리 햅번만이 아니다. 재클린 케네디가 착용해서 이름까지 그녀의 이름을 본 딴 티파니의 '잭키 팔찌', 리처드 버튼이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선물한 '돌핀 브로치',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부인 메리 여사에게 선물한 '티파니의 진주'. 이 외에도 많은 영화와 광고에서 생애 최고의 선물, 영원한 사랑의 고백, 프로포즈의 승낙 등 인생의 가장 설레이고 축복 되는 순간엔 언제나 티파니가 그 순간이 더욱 빛나게 해 주었다.


티파니가 탄생해서 성공하기 까지
보석의 대표적인 명품 브랜드인 "티파니"는 1837년 '찰스 루이스 티파니'에 의해 미국 브로드 웨이에서 설립되었다. 하지만, 티파니도 처음부터 보석상으로 시작한건 아니었다고 한다. 1837년 25살의 젊은 티파니가 친구와 함께 뉴욕에 문방구와 도자기를 취급하는 작은 가게로 시작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티파니의 모태였고, 그것을 시작으로 점차 보석상으로 변신시킨 것이다.

티파니는 1845년 처음으로 거래에서 주문방식을 채택했다. 이것은 보석점뿐 아니라 일반 소매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1848년에 뉴욕 최고의 은 제조업자인 존 무어를 영입해 수입에 의존하던 사업방식에서 탈피하여 직접 장신구 제작을 시작하였고, 1867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장신구 전시회에서 은 공예부분 금메달을 수상함으로써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가게 된다. 1858년에는 대서양의 해저 전선사업이 성공하자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쓰다남은 케이블로 기념 문전을 제작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1878년 킴벌리 광산에서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다는 카나리아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티파니는 즉시 이것을 사들였다. 128.51캐럿이나 되는 이 희귀 다이아몬드는 현재 뉴욕 5번가의 티파니 본점 특별실에 진열되어 있다. 일명 "티파니 다이아몬드"라고 불리는 카나리아 빛깔의 유명한 황색 다이아몬드가 뉴욕 본점 1층 홀에서 신비로운 광채를 발하고 있다. 1902년 창업자 티파니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뒤를 이어 1955년에 회장으로 취임한 월터 호빙은 파리의 슈란바자, 이탈리아의 페레티 등 유명 디자이너를 초빙해 "티어 드롭(Tear Drop)", "다이아몬드 바이쟈아드"와 같은 명품들을 제작, 티파니의 명성을 한층 드높였다. 그후 파로마 피카소가 "오픈하트"를 제작해서 티파니의 대표 디자인으로 가세해 부유층뿐만 아니라 만인의 사랑을 두루 받을 수 있는 제품을 탄생시켰다.

미국 최고의 보석점 티파니는 시대적 추세를 타고 눈부시게 발전하여 1850년에는 파리에, 1968년에는 런던에 지점을 설치 세계의 티파니로 성장하게 되었다.한국에는 지난 95년 첫 매장을 연 뒤 매년 1개씩 점포를 늘려가고 있다. 최근 20여 년 동안은 연속 흑자행진을 해왔으며, 매출은 2002년 기준 17억600만 달러, 순이익률 9%로 탄탄한 토대를 일궜다. 현재 전체 판매의 80% 정도가 보석이며, 시계, 스털링 실버 식기류, 문구류, 팬시용품 등이 나머지 매출을 차지하고 있다. 최근 티파니 Mark라는 시계를 런칭해 시계 사업에 대해 적극적인 마케팅 처제에 돌입하기도 하였다. 현재 티파니의 시계 비즈니스는 전체 판매의 3%를 차지할 정도지만 이것을 10%대로 성장시키고자 하는 것이 목표.큰 굴곡 없이 160년 사를 질주해온 티파니는 유행을 따르지 않는 클래시컬(classical) 스타일로 티파니만의 디자인과 품질을 유지할 수 있었다. 티파니의 사명은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 최상의 고객 서비스를 제공하며, 직원들을 아끼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기준이 된 세팅법
뭐니뭐니 해도 티파니가 전세계 여성들의 맘을 흔드는 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티파니의 다이아몬드 제품이다. 1880년대 창업주인 '찰스 루이스 티파니'의 지도 아래 개발되어 소개된 '티파니 세팅' 또는 '육지 세팅'은 밴드에서 분리한 다이아몬드를 6개의 발이 떠받들게 하여 다이아몬드를 통과하는 빛이 반사를 보다 완벽하게 구현하도록 하는 독특한 세팅법이다.

이는 다이아몬드를 통과하는 빛의 반사를 보다 완벽하게 구연해 광채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살아나도록 하는 기법으로 이는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전통적인 반지 스타일로 자리 잡혀 다이아몬드 제품 하면 가장 먼저 티파니가 떠오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또 이 브랜드가 채용한 은순도는 925/1000은 미국의 법정 은순도가 됐고, 1878년 파리국제박람회에서 금메달을 얻은 최초의 미국디자인회사가 되면서 티파니의 명성은 정상에 이르렀다.

 

또 다른 상징, 포장
티파니 만의 전통적인 티파니 세팅 외에도 티파니를 소비자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게 만든 것이 바로 '티파니 블루'로 불리 우는 포장 색상이다. 1880년대 말, 이 유명한 티파니의 블루는 쇼핑백과 포장 상자의 색상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연한하늘색 빛깔에 네모난 종이상자, 그리고 하얀색 리본은 티파니 세팅과 더불어 티파니의 또 다른 상징이며 자산으로 자리잡았다. 맑은 하늘색 박스 위에 십자로 묶여진 흰색 리본을 살며시 건네주며 애인이 프로포즈 해온다면 과연, 안 받아줄 여자가 있을까?

명물, 티파니 본점 시계
아틀라스 시계는 뉴욕 5번가 727번지 티파니 본점을 대표하는 상징물 중 하나다. 나무를 깎아 조각하여 그 위에 동(銅)을 씌워 만든 9피트 길이의 아틀라스 신이 약 지름 4피트의 둥근시계를 어깨에 짊어진 디자인의 시계다. 이 역사적인 명물은 1853년 찰스 루이스 티파니가 브로도웨이 550번지에 위치한 매장에 설치함으로써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그 후 반세기에 걸쳐 언제나 변함없이 뉴욕의 시간을 정확하게 알리는 상징물이 되어 왔다. 이 시계가 한 차례 멈춘 적이 있는데, 바로 1865년 4월 15일 아침 7시 22분, 링컨 대통령이 서거한 순간이다. 어디서든지 아틀라스 시계는 정확한 시각의 상징으로 티파니의 세계적인 품질과 혁신,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뛰어난 디자인의 명성을 대변해 왔습니다.


티파니 제품

시계
스위스에서 만들어지는 티파니 클래식(Classics) 시계의 본체는 18K 금이나 스테인레스 스틸로 이루어져 있으며, 심플한 디자인, 세련된 취향, 내재된 우아함이 한데 잘 어우러져 있다. 각각 남녀 별로 다른 사이즈가 있으며, 여러 색상과 다른 소재의 가죽끈도 준비되어 있다. 1987년 티파니는 창립 150주년을 맞아 테소로(Tesoro) 컬렉션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모양과 기능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만들어진 우아한 디자인의 제품이다. 남성과 여성을 위한 고급 시계인 테소로는 뛰어난 디자인과 장인정신이 잘 조화되어 18K금, 18K금과 스테인레스 스틸의 콤비, 진주모패(Mother Of Pearl) 시계 다이알 위에 다이아몬드가 엑센트로 장식된 디자인이 있으며, 광택 혹은 무광택 등의 다양한 종류가 있다. 모두 스위스에서 제작된 테소로 시계는 활동적인 남성을 위해서 캐쥬얼이나 양복 어떠한 복장에도 무난하게 어울릴 수 있게 제작된다. 이 밖에 Tiffany&Co는 우아한 디자인에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한 새로운 코디스(Cordis) 시계 컬렉션도 선보였다. 시계 가장자리 여백을 수평으로 정교하게 계곡 모양으로 조각한 듯한 디자인은 매우 깔끔하고, 그래픽적이며, 작은 디테일까지도 완벽을 기울여 세공한 것이 특징. 또한 이 시계는 도마뱀 가죽 줄에 18K 금이나 백금에 세공된 사각형과 라운드의 2가지 형태가 있어 취향에 맞게 고를 수 있다.

루시다
티파니가 육지 세팅을 소개한 이후, 114년만에 독창적인 컷과 세팅의 새로운 반지 루시다를 최근 선보였다. 독창적인 세팅법으로 새로운 다이아몬드 반지 '루시다'는 "별 중에서 가장 빛나는 별"을 뜻한다. 루시다는 그동안 티파니가 소개해온 유명한 디자인 가운데 하나로서 완벽한 우아함, 정교함, 그리고 현대적인 매력을 이어갈 디자인이다. 루시다의 새로운 커팅은 다이아몬드 원석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에 참신하고 현대적인 우아함과 세련된 감각을 불어 넣도록 설계되었다. 현대적인 느낌을 주는 정사각형에 가까운 이 반지는, 높은 계단 형태로 커팅된 크라운 면과 넓은 단면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새로운 컷은 다이아몬드만이 갖고 있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루시다 만의 독특한 개성으로 한층 빛나 보이도록 독창적으로 제작하였다.
진주
1837년 회사가 세워진 이래 Tiffany&Co는 고급 진주의 조달원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려왔다. 티파니 창업자인 Charles Lewis Tiffany는 높은 수준의 티파니 고객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진주를 제공하기 위해 수석 보석 학자였던 쿤즈 박사와 함께 세계를 두루 여행 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티파니는 보석 디자인에 여러 종류의 진주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일본 조개로부터 나온 고전적인 함수 양식진주들이 있는데, 진주들은 크기가 2mm에서 10mm까지 다양하며, 백장미색, 금색, 은 푸른색 등 모양과 크기에 있어 다양하다.

 

티파니CEO
제임스 퀸(51)은 1986년 판매담당 부사장으로 티파니에 합류했다. 90년에는 기업고객 담당 부사장으로 승진했고, 92년에는 수석부사장에 올랐다. 티파니에 근무하기 전에는 미국내 여러 회사에서 비즈니스 경험을 쌓았다. 퀸 사장은 뉴욕에 있는 호프스트라대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했고, 뉴욕 페이스대에서 경영학 석사(MBA)학위를 받았다. 티파니는 최근 20년 동안 한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는 회사다. 매년 한국에서 매장을 늘리며,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티파니의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제임스 퀸은 해마다 티파니가 흑자를 내는 요인을 오랜 기간 굳건히 지켜온 티파니의 정책에 있다고 말한다.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 최상의 고객 서비스를 제공하며, 직원들을 아끼는 것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로 그것.

그가 말하는 티파니가 갖는 가장 큰 강점은 바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클래식한 디자인과 다양한 선택의 폭을 제공하는 제품군이다. 티파니의 제품은 시대를 초월한 클래식함을 지니고 있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물려줄 수 있고, 각기 다른 취향을 가진 고객들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제품들을 가지고 있다는것이 장점.

따라서 자연스레 많은 사람이 티파니에서 일하기를 원한다고 한다. 세계 최고의 보석회사라는 명성과 티파니가 개인의 창의성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좋은 업무 환경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자신들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고, 회사와 제품들을 통해 성취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에 회사를 쉽게 떠나지 않고 이것은 곧 티파니의 자산으로 연결된다.

 

패션이 아닌 스타일, 티파니
이렇듯 티파니는 보석 및 장신구의 대표 브랜드이자 전 세계 여성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확고한 명품 브랜드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작년 방한한 티파니의 마이클 코왈스키(50) 회장은 "티파니는 패션이 아니라 스타일입니다"란 첫마디로 티파니를 정의했다. 166년의 시간 동안 세상 가장 빛나고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세계 모든 이의 기쁨과 희열을 같이 해 온 티파니가 더욱 갚진 브랜드로 자리잡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 하다.

 

고대 그리스에서 세계 80여개국까지… 불가리

 

패션 쇼 쁘레따 뽀르테를 그대로 카메라에 담은 영화 '쁘레따 포르테'를 보셨나요? 할리우드의 여배우들과 수퍼모델들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영화였죠? 영화에서 이들 배우가 모두 참석했던 런칭 쇼 기억나세요? 그 장면이 바로 "불가리"의 신제품 쇼였답니다.
불가리? 유제품 이름도 아니고…. "불가리"는 도대체 어떤 브랜드일까요?

"BVLGARI" 약간 어색한 철자의 브랜드. 이탈리아 어로 "불가리"라고 읽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은세공업자에서부터 시작된 불가리는 1884년 소티리오 불가리( otirio Bvlgari)가 로마의 시스티나 거리에 최초의 상점을 오픈하면서 브랜드로서 그 역사가 시작됩니다
1905년, 값진 원석과 보석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두 아들 콘스탄티노와 조르지오는 두 번째 상점을 로마의 콘도티 거리에 위치에 오픈합니다. 바로 이 상점이 오늘날의 불가리 본점으로 남아있답니다. 로마로 여행가시면 한번 들려보세요.
제 2차 세계대전이 이후, 전환점을 맞이한 불가리는 1970년대부터 국제적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뉴욕에서 최초의 부띠끄를 오픈한 이후, 파리, 제네바, 몬테카를로에 숍을 오픈하면서 지금은 세계 80여개국에 불가리의 샵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부터는 아시아 시장에도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

 

불륨이 있는 디자인, 불가리!
불가리 스타일! 액세서리 점에 가면 '불가리 스타일'이라는 제품을 볼 수 있습니다. 도대체 '불가리 스타일'이란 뭘까요?
굵고 큼직큼직한 선으로 디자인 된 주얼리에선 여성미보다는 중성적인 미가 느껴집니다. 보기만해도 느껴지는 묵직한 양감. White Gold 로만 이루어진 제품들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기도 했지요. 대담한 디자인, 다양한 컬러의 보석의 컴비네컴비네이션! 이것이 바로 불가리 스타일 입니다.
단색으로만 이루어진 White Gold 분명히 찍힌 BVLGARI라는 로고. 이제는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심플한 디자인을 증명하는 단 하나의 심벌이 되었습니다.

 

원칙에서 벗어난 화려함과 심플함
불가리만의 개성이 살아나기 시작한 1940년대, 보석계의 주류는 프렌치 스쿨의 엄격한 원칙주의적 기법이었습니다. 보석은 화려하고, 현란하게… 그러나, 불가리는 이에 벗어나 볼륨감과 양감이 느껴지는 고유의 스타일을 주얼리에 적용했습니다.
이와 같은 디자인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주의,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그리고 19세기 금 세공의 대표격인 로만 스쿨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죠.
아마도 오늘날의 불가리의 크리에이티브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제, 아이웨어, 러더웨어, 그리고 테이블웨어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주얼리 메카로서의 명성을 펼쳐나가고 있는 불가리.
이러한 주얼리 리더로써 불가리의 끊이지 않는 행보는, 불가리를 좋아하는 매니아뿐 아니라 아름다운에 가슴 설레이는 심미안을 가진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편한구두 만들자" -스위스 '발리'

 

스위스의 대표제품으로 시계와 함께 발리구두가 꼽힌다.
발리구두는 300달러~500달러(약35만~60만원선)에 이르는 고가제품이지만 편안한 착용감으로 즐겨 찾는 사람이 많다. 1851년 칼 프란츠 발리가 설립했으며 구두 가방 시계 등 각종 액세서리 소품을 생산하다 최근에는 의류까지 생산하는 토탈패션 브랜드로 성장했다. 발리구두가 태어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된 사람은 발리의 아내였다.
남자용 멜빵과 고무줄을 만들던 오스트리아 이민자 출신 칼 프란츠 발리가 멜빵고리를 구하려고 프랑스 파리로 출장을 갔다. 아내는 출장길에 구두를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아내의 발 사이즈를 몰랐던 그는 여러 구두 가게에서 무려 열두 켤레의 구두를 사왔다. 그는 여기에다 자신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고무밴드를 달아 신기 편하게 만들어 줬다.
신기 편한 구두생산의 가능성을 발견한 발리는 편한 구두를 대량 생산하는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20명 남짓한 제화공들과 함께 가내수공업 형태로 구두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발리구두의 출발이다. 이는 맞춤구두시대에서 기성구두시대로의 전환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발리로 자리잡기까지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창업후 30년이나 지난 1880년대가 돼서야 발리구두는 고급품으로 인정받았다. 발리는 당시 막대한 식민지를 보유한 영국에 성공적으로 진출함으로써 '세계화'를 가속했다. 그후 1, 2차 세계대전과 경제공황, 1970년대와 90년대의 기업인수와 합병 등 커다란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발리는 제품생산에 대한 열정과 스위스인 특유의 근면성으로 성장을 계속했다. 일화에서도 나타나듯이 창업자 발리는 발 사이즈를 모르는 아내의 구두를 열두 켤레나 사올 만큼 세심한 배려가 있었던 사람이다. 발리구두에서 느껴지는 스위스의 주도면밀함과 꼼꼼함은 이태리의 패션지향성이나 프랑스의 감성적 조화와 사뭇 다르다. 발리는 150년이 지난 지금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며 전세계 70여개국에 470여개의 전문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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