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의 언어
1. 시조의 質料
부리가 길수록
목이 긴 항아리 속에 숨겨둔 슬픔까지도
흔들어 흘러 넘치게 할 소리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산만큼 꽃술은 길고 아름다운 부리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한 점 새의 혈육이 되고 싶었다
새에서도 가장 가볍고 단단한 부리,
부리의 한 점 혈육이 되고 싶었다
그 해 겨울
서른 아홉 해의 꽃술을 말려
새의 부리를 만들었다.
- 박라연의 '새의 부리'
목이 긴 항아리 속의 슬픔까지도 흘러 넘치게 할 소리를 낼 수 있는 긴 부리. 그것은 시인이 만들어낸 상상력의 세계다. 그리고 목이 긴 항아리 속의 슬픔과 (새의) 아름다운 부리의 대비나 꽃술과 부리의 대비! 인간의 넋을 깨우고 정신이 바짝 들게 하는 이 작품의 전달 매체는 바로 언어(言語)다. 이것이 곧 시어(詩語)가 가진 힘인 것이다.
시조를 탄생시키는 유일한 질료(質料)는 언어(言語)다. 시조의 뼈와 살, 빛과 소리, 혼(魂)과 향기는 모두 언어 속에 깃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언어 속에는 우주의 생명이 깃들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언어는 인간의 의식 속에 있고, 인생은 자연의 태(胎) 속에 존재한다. 시조시인(사람)이 창조하는 언어가 자연의 피를 받아 한 생명체로서 독립 환원하는 곳에 시조(시) 탄생의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찌하여 우리들이 일상생활에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독특한 시의 생명을 부여받아 시조로 탄생하고 다른 언어와 구별되는 것일까. 생명 있는 언어는 시인의 내면의식 속에 잉태(孕胎)되고 독자의 인격 속에 유입(流入)되는, 살아 움직이는 언어가 아니면 안 된다. 그러므로 시의 언어는 곧 작자(시조시인)의 정신이요, 사고(思考)요, 창조의 언어이다.
속눈썹 다 젖도록 그리움의 등촉 밝혀
깊은 적막 헤치고 올 그대 바라는 선한 여인
겨운 밤 이슬길목을 지새우며 지키는가.
- 우경화의 '달맞이꽃'
천년 세월 흘렀어도 목마름이 남았는가
쳐든 그 가지 위로 바람소리 잦아들고
몸 밑둥 傷痕을 딛고 스물스물 돋은 새순.
- 오경임의 '고목'
우경화의 '달맞이꽃'은 깔끔하면서도 가슴 절절한 한 편의 연시(戀詩)다. 그리움이 어느 정도에 이르면 '겨운 밤 이슬길목을 지새우며' 지키겠는가. 달맞이꽃을 '깊은 적막 헤치고 올 그대' 기다리는 '선한 여인'이라고 표현한 대목이 더욱 그러하다. 오경임의 '고목' 또한 시조 솜씨가 만만치 않다. 앞에서 말했듯이 시조의 언어는 곧 작자의 정신이요, 사고요, 창조의 언어라는 것을 귀띔해 준다.
무금선원에 앉아
내가 나를 바라보니
기는 벌레 한 마리가
몸을 폈다 오그렸다가
온갖것 다 갉아 먹으며
배설하고
알을 슬기도 한다.
- 조오현의 '내가 나를 바라보니'
이 작품을 두고 시인 정끝별 선생은 이렇게 평하고 있다. '시인은 백담사에 안거하시는 큰스님입니다. 몇 해 전 친구로부터 "내 육칠십 평생이 벌레처럼 오그렸다 폈다 한 생이었다"라는 오도송(悟道頌)을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서늘한 슬픔을 느꼈더랬는데, 그 말씀이 이 시에 담겨 있군요. 일기입공(一技入功)이라는 말이 있지요. 자기 나름의 올바른 방편을 찾아 평생을 두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면 경지에 이른다는 속뜻을 담고 있습니다. 스님은 스님의 방편을 가지고 평생을 <오그렸다 폈다>만 반복하셨다니 그 공력이 대단할 것입니다. 우주를 손바닥 안에 축소해 놓은 듯한 큰 시선이 장쾌하지 않습니까?'라고. 그렇다 시조의 언어는 바로 이런 장쾌한 비전을 지니는 일이다.
2. 시조의 언어
다시 말하지만 언어는 시조의 질료이며 매체(媒體)다. 시조의 언어라고 해서 따로 하나의 종(種)을 형성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시어는 특수언어가 아니라 생동하는 모든 언어의 결정체다. 크로체(이탈리아 역사 철학자)의 말처럼 모든 인간은 언제나 자기가 겪은 인상과 감정을 표현하기 때문에 시인처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만약 시가 '선(禪)의 언어' 혹은 특수한 언어라면 우리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조는 표현매체로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일종의 우수한 벙어리 담화'다. 김준오 교수(전 부산대 교수)의 지적처럼, 시는 산문과는 달리 세부의 '축적(蓄積)'으로서가 아니라, 선택된 세부의 '첨예성(尖銳性)'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의 언어는 모든 언어 가운데서 매우 신중히 선택된 언어다. 뿐만 아니라 시조는 이미지, 리듬, 톤 등으로써 음향적·조소적(彫塑的)·미적 의장(意匠)에 의하여 최대한 효과를 내도록 그 선택된 세부들이 긴밀히 조직되어야 하므로 시조의 언어는 신중하게 배열해야 하는 것이다.
시조시인은 일반언어를 사용하면서도 독자(혹은 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산문의 언어현상과는 달리 시의 언어현상이 특수한 심리적 구조나 반응에 기여하도록 사용해야 한다.
시어의 신중한 선택과 배열은 시의 언어용법이 특수하다는 것, 즉 언어의 일반적 용법이나 문법과 다름을 의미한다.
시어는 추상적 기호로서의 언어개념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서 레비 스트로스(프랑스 신철학파)의 말처럼 시어는 "언어를 초월한다",
또는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정의처럼 시어는 "일상어에 가해진 조직적 폭력"이다. 시의 언어는 일반적인 문법규칙과는 다른 독자적 규칙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규범으로부터 이탈되는 비문법성의 '비틀린 언어'가 시어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비틀린 언어의 시성(詩性)에서 시는 미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다.
날이 저문다
먼 곳에서 빈 뜰이 넘어진다
無限天空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조금씩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끝까지 남아 있는 햇빛 하나가
어딜까 어딜까 都市를 끌고 간다
날이 저문다
날마다 우리 나라에
아름다운 女子들은 떨어져 쌓인다
잠 속에서도 빨리빨리 걸으며
寢床 밖으로 흩어지는
모래는 끝없고
한 겹씩 벗겨지는 生死의
저 캄캄한 數世紀를 향하여 아무도
자기의 살을 감출 수는 없다.
집이 흐느낀다
날이 저문다
바람에 갇혀
一平生이 落果처럼 흔들린다
높은 지붕마다 남몰래 하늘의 넓은 시계소리를 걸어 놓으며
曠野에 쌓이는
아, 아름다운 모래의 女子들
부서지면서 우리는 가장 긴 그림자를 뒤에 남겼다.
- 강은교의 '自轉·1'
<빈 뜰이 넘어진다>, <無限天空 바람 겹겹이>, <사람은 혼자 펄럭이고>, <파도치는 거리의 집들>, <어딜까 어딜까 都市를 끌고 간다> 같은 표현은 엄밀하게 말하면 언어의 일반적 용법이나 문법규칙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환기하는 절망, 우울, 허무 등 어두운 정서들은 작자의 주관적인 시간의식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형상화, 정적 이미저리(공간)를 동적 이미저리화(시간화)하는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시의 언어는 상식을 넘어선 비범(非凡)함을 보여야 하는 것이다.
3. 線과 色彩, 리듬이 있는 언어
그러면 어떤 언어가 시조의 언어가 되는가.
시조시인의 가슴에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언어를 빌려 3장 6구의 시조 형태 속에 담기기 전에는 그것은 다만 순수한 사념(思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시, 혹은 시조의 사념은 안개처럼 떴다 금방 사라지는 불투명성 사념이 아니라 작자의 의식 속에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刻印)된 사념, 새로운 생명의 옷을 걸치고 외부 세계로 뛰어나오려는 사념, 살아 움직이는 율동미를 지닌 사념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조시인의 내면의식 - 정신 속에서 춤추는 언어가 곧 시조의 언어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에 쓰이는 언어는 다른 일상 언어와 같이 무엇을 서술(敍述)하고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짧고도 함축성 있는 생명 그대로의 최초 발성(最初 發聲)이어야 하는 것이다.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현상 그대로를 보여 주고 들려주는 것이므로 '시는 노래하는 정신의 그림이요, 그림 그리는 마음의 음악'인 것이다.
그러므로 시조의 언어는 언어 중에서도 선이 있고 색채가 있는 언어여야 하고 리듬이 있고 멜로디가 있는 언어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시조에서 언어의 선과 색채는 언어를 묘리(妙理) 있게 조화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시의 리듬과 멜로디는 언어를 묘리 있게 배열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말을 우리 문인화(文人畵)의 원리대로 풀이하면 시중유화(詩中有畵) 화중유시(畵中有詩)의 묘법(妙法)과 같은 것이다.
여기 있어, 나
푸른 바람과 햇빛 녹여
너에게 줄 둥글고 커단 숲의
모자를 깁고 있지
고개 숙인 목덜미에 서늘한 입김
불어 줘
겨드랑이 안쪽에 고인 불씨도
활활 당겨 봐
주머니마다 가득 차 넘치는
왼갖 살아 있는 것들의 파동
물결 무늬
아직 때가 아니지만
수런거리는 공기로 부풀어오른 말 속의 말,
빈자의 등불 하나 너에게로
박혀 들겠지
더럽혀진 건
내가 아니야
하루해 저무는 마음 발치에 오늘도
빛의 아이들 놀고 있어
- 최춘희의 '금강초롱'
푸진 햇살
고운 보리누름
맨손인 나무 그늘 풍요로와라
부끄런 남루 차림 사치하여라
바람 줄기
스스럼 오르내리는 산마을
초집 처마끝 한 꾸러미 우거지
아직도 서너 춤이나 남았다
- 구재기의 '보리누름'
길은
어느 틈엔가
원시로 접어들었다
거미줄 같은
햇살이
나를 빨아들이고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풀들이 밟혀 온다
여름 내내
피다 질
저 하얀 옥잠꽃
오늘은
발이 빠져
역사 속으로 갇히고
시간을
감고 있던 물뱀
그 위로 지나간다.
- 강현덕의 '우포 늪에서'
이와 같은 언어의 미술적 음악적 구성을 통한 상상의 계시(啓示)가 없으면 시와 산문을 구별할 수 있는 아무 근거가 없을 것이다. 아무리 자유시라고 하더라도 시는 화려한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산문은 아니다. 아름다운 낱말을 줄만 끊어 써 놓으면 시, 혹은 시조가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왜 그러냐 하면 산문으로 표현되는 것은 그 관념 자체가 이미 산문정신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마는 것이다.
4. 시의 언어와 산문 언어
시의 언어와 산문 언어의 변별성에 대해 조지훈 선생은 이렇게 설명했다. 어떤 동일한 내용의 생각일지라도 그것이 시정신(詩精神)으로써 시의 시각에서 파악하느냐, 산문정신(散文精神)으로써 산문의 각도에서 파악하느냐에 따라 그 세계가 아주 달라진다.
전자(시)는 '느낌'으로써 표현되고
후자(산문)는 '묘사(描寫)'로써 서술된다.
조지훈 선생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가령 어떤 사람이 바닷가 언덕 위에 서 있는 국기 게양대(揭揚臺)의 깃발을 보고, 그것을 하늘 높이 올라가 목메어 외치는 것 같기도 하고, 먼바다를 향하여 손수건을 흔드는 것 같다고 느꼈다고 하자. 그 느낌은 이미 매우 시에 가까운 느낌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시도 될 수도 있고 또 산문도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 느낌을 시로 표현한다면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永遠한 노스탈자의 손수건.>
- 유치환의 '깃발' 부분
이라고 세 행만 쓰면 족하다. 이 이상 더 쓸 말이 없다. 그 시간과 장소와 보는 사람을 구구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좋다. 설명하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니라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감격적인 절박한 호흡을 이렇게 외마디로 터트려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진실로 시의 기본적인 태도다.
그러나, 산문으로써 그 생각을 쓴다면 위의 시에서처럼 그런 짧은 단언(斷言)으로는 우선 산문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을 산문으로 쓰자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서술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 높이 솟은 게양대에서는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공중에 올라가 목메어 외치는 것 같기도 하고 푸른 바다를 향하여, 영원한 향수를 향하여 흰 손수건을 흔드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것이 바닷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이라는 것과 그것을 보고 원통한 부르짖음과 외로운 손수건같이 느꼈다는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서술적 설명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만일 이것을 좀더 시적인 산문으로 서술한다면 다음과 같을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소리 없는 아우성이었다.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자의 손수건이었다. 나는(혹은 그는) 바닷바람에 깃발이 펄럭이는 언덕을 지나가며 이렇게 느끼는 것이었다.>
이 글에서 보이는 것처럼 산문의 언어는 객관적 서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산문은 시나 시조와 같이 주관적 토막 난 언어의 나열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시나 시조에서는 주관적인 토막 난 언어만으로도 충분히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그것들은 토막난 무관계의 언어들 같지만 실상은 확실한 한 줄기 시심(詩心)으로 일관된 언어들이요, 그것이 좀더 효과적으로 표현되기 위하여 겉으로는 극도의 생략법(省略法)을 취하면서도 뒤로는 '비약적 연락(連絡)'을 가지는 묘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언외언(言外言)! 곧 말로서 나타나지 않는 수많은 말과 생각을 함축하기 위하여 시조는 의식적으로 설명과 서술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의 본보기로 앞에 인용한 유치환(柳致環) 선생의 시 '깃발' 전문을 읽어보자.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른 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永遠한 노스탈자의 손수건.
純情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理念의 푯(標)대 끝에
哀愁는 白露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다음에는 근래에 발표된 시와 시조 작품의 예를 보자.
클린트 이스트우드, 그는 어제나 혼자였다
낯선 마을로 혼자 걸어간다
마을에는
낯선 사람들이
그들의 몸으로 만든 사랑, 사랑으로 만든 폭력,
폭력으로 만든 평화,
그들만의 질서 속에 숨어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노린다
저리 당당한 폭력을
등뒤에서 일제히 쏜다
그러나 쓰러진 것은
이 마을의 낯선 사람들이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권총을 번쩍이며
발기한 성기처럼 꿋꿋이 서 있다.
- 구석본의 '서부영화 1'
흐린 불빛 아래 편지를 쓰고 있다
네게로 건너가는 변함없는 이 온기,
냇물에 잠겼다 뜨는 내 상념의 피라미떼…
인적 좌다 끊긴 성당 어느 뒷 뜨락의
담쟁이 젖은 잎들이 수녀처럼 묵상에 잠긴
그 시간 어둠 속에서
하나 둘
별이 돋듯이.
- 이우걸의 '편지'
구석본의 시 '서부영화 1'과 이우걸의 시조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시나 시조에서는 주관적인 토막난 언어만으로도 충분히 이미지와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수많은 말과 말, 생각과 생각을 함축·비약시키기 위하여 시나 시조는 의도적으로 설명과 서술을 거부하는 것이다.
5. 생략법과 서술언어
생략법의 언어와 서술 언어는 어떻게 다른가.
시나 시조의 언어는 원칙적으로 생략법의 언어이지만 산문의 언어는 지나친 생략으로써는 작자의 의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도 항상 느낄 수 있지만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는 자리,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눈을 껌벅하거나 고개를 끄떡하거나 감탄사 한마디(불교에서 갈·碣 같은 예)로 뜻이 통한다. 시조는 바로 이러한 언어의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완결된 문장이 아닌, 단어의 나열이라든가 '준문장(準文章)'이 충분히 시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언어와 언어 사이에 최대한의 생략법을 구사하면서 언어와 언어 사이의 이미지에 최대한의 비약과 확대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절을 보러 갔다가 절은 보지 못하고
허공을 보듬고 앉은 산만 보다 왔다.
동해 연잎 파도 이파리 밟으며 잠시 고요에 든
禪僧
하늘 깊이 고인 그 산능선 몇 보다 왔다.
- 최영길의 '돌아오는 길'
종종걸음 치며 살다 때로는 휘청거리다
환한 햇살 속에 한 뼘 그늘로 앉고
벼랑 끝 어지럼증마냥 부서지는 언약이다.
작은 물줄기로 얼마쯤은 흐르다가
더러는 저 강기슭 모래알로 반짝이고
고인 채 썩는 因業의 물웅덩이 되기도 한다.
- 이승은의 '시간'
붓이 왜 마르지 않는지, 마를 수 없는지를
그대는 시방 넋 잃은 채로 보고 있다
노래가 끝이 없음을 눈 시리도록 보고 있다.
쉬임 없이 흔들리는 것 흔들리게 둘지언정
저렇듯 뒤척이며 끝없이 밀려오는 것
노래가 되지 않으랴
사무치지 않으랴.
- 이정환의 '바다 앞에서'
최영길, 이승은, 이정환의 작품을 통해 생략법의 언어와 서술 언어가 어떻게 다른지 확인할 수 있다. <동해 연잎 파도 이파리 밟으며 잠시 고요에 든/ 禪僧>(최영길의 '돌아온 길')이나 <벼랑 끝 어지럼증마냥 부서지는 언약><고인 채 썩는 因業의 물웅덩이> (이승은의 '시간') 등은 언어와 언어 사이에 최대한의 생략법을 구사한 예이다. 이정환의 '바다 앞에서'도 언어의 생략과 이미지의 비약 효과를 거두고 있다.
"시는 실로 주관의 구극에서 찾은 객관이요, 산문은 객관의 구극에서 찾은 주관"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뜻에서 보면 시조야말로 진실한 심정의 리얼리즘이요, 소설이야말로 허구적인 진실의 로맨티시즘이라고 할 수 있다.
시조 형식(形式)이 다른 문학과 구별되는 특질을 한마디로 설명한다면 '복잡한 사상(思想)의 단순화'라고 말할 수 있다. 시조는 거대한 것을 압축할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형식이 구속하는 부자유 속에서 비약하는 즐거움, 많은 언어를 생략하면서도 상상의 공간을 한껏 확보해 두는 여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작고 단순한 시적 대상을 가지고도 우주만물(宇宙萬物)의 정신을 포용하는 것이 바로 시조의 형식적 자유로움이라는 말이다.
1
한 시대 협기 서린 수평선을 가늠하며
오랜 해를 담금질로 벼린 끝에 혼이 섰다
서정을 엮은 달빛도 이 날 아랜 갈라진다.
2
머리맡에 걸어두면 가을물 소리 높다
굽은 목을 치려는 살의에 찬 저 눈빛
깊은 밤 칼을 뽑으면 한 秘史가 잠을 깬다.
3
어둠을 겨냥하여 서릿발 恨이 울고
당대의 정수리를 내리치는 혼불이여
그날에 쓰러진 함성이 섬광으로 일어선다.
- 정해송의 '劍'
1
마침내 이 지상의
여론조사는 끝이 났다.
아성의 박수 소리
담장 너머 뜸해지고
하나 둘 임시정부의 깃발들을 내리나니.
2
하냥 그 산기슭에
가건물은 허물어져
방방곡곡 내로라는
사기 도박꾼도 다 뜬 지금
빛 바랜 장풍 껍데기만 식은 바닥에 어지럽고…
3
쓸쓸히 낮달이 혼자
젖은 냅킨 입에 물고
부러진 목재 사다리를
간신, 간신히 내려와선
이제 막 내 지문에 묻은 도장밥을 닦으라 한다.
-고정국의 '늦가을의 詩'
정해송의 '검'에서 우리는 '시조는 거대한 것을 압축할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머리맡에 걸어두면 가을물 소리 높다/ 굽은 목을 치려는 살의에 찬 저 눈빛/ 깊은 밤 칼을 뽑으면 한 秘史가 잠을 깬다.> 이 얼마나 서늘하고 섬뜩한 시적 발견인가.
고정국의 '늦가을의 시'도 예외는 아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을 두고 <하나 둘 임시정부의 깃발들을 내리나니>라고 진술하고, 늦가을 단풍잎을 <빛 바랜 장풍 껍데기만 식은 바닥에 어지럽고…>라고 토로하는가 하면 <이제 막 내 지문에 묻은 도장밥을 닦으라 한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많은 언어를 생략하면서도 상상의 공간을 무한대로 열어 두는 형식 미학의 자유로움을 한껏 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