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볼 때 갑자기 나타나는 효과라는 것은 대체로 피상적인 수준에 그친다.
다가올 사건의 뿌리 속으로 깊숙하게 파고드는 원인들은 언제나 매우 중요한 효과들을 천천히 만들어낸다.
그 원인들이 만들어내는 변화를 사람 들이 알아챌 때쯤이면 그런 변화는 이미 기존 질서의 한 부 분이 될 만큼 익숙해진다.
따라서 변화가 아주 두드러질 때도 예민하지 못한 관찰자는 그 변화가 원인과 특별히 긴밀하게 관련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전부터 충분히 알려진 것이 아닌 한, 새로운 정치적 사건이 먼 미래에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초기에는 알기가 매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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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문제에 대해 이해 관계 당사자의 말을 듣고 따를 수는 없다.
노동자 계급으로서는 모든 사회제도를 전면 재검토해야 하고, 마치 이런문제가 사상 처음 제기된 것처럼 어떤 질문이라도 던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 권리가 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해 기존 체제로부터 안락과 지위를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추상적인 정의와 사회 전체의 일반 이익 외에 다른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사람이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편견도 없는, 다시 말해 유산자와 무산자 사이에서 절대 공평한 입법자라면 어떤 재산제도를 고안할 것인지 따져보아야 한다.
입법자가 기성 질서를 정당화하는 논리가 아니라 진정 이성의 지시에 따라 그런 제도를 구상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재산에 관한 권리 중에서 이런 시험을 견뎌내지 못하는 것은 전부 조만간 폐기되어야 한다.
나아가 재산 그 자체를 반대하는 모든 주장도 공평하게 논의되어야 한다.
재산에 관한 최선의 제도라고 한다면 이에 따라붙는 모든 해악과 불편함도 허심탄회하게 드러내 보여야만 한다.
그래야 인간의 지력이 닿는 한 그런 단점들을 개선하거나 완화할 가장 뛰어난 방책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이 무엇이든, 재산제도가 빚어내는 해악을 멀리하고 그 긍정적인 기능만 살리기 위해 사회개혁가들이 제안한 모든 대책에 대해 터무니 없다거나 실현 가능성이 없다고 미리 편견을 갖지 말고 최대한 공평하게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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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팔자소관이 각자의 덕성, 지력과 전적으로 무관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것은 분명 유리한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아무런 가치도 없으면서 훨씬 강한 힘을 발휘하는 것도 많다.
사람을 둘러싼 환경 중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출생이다.
대부분 사람은 태어난 대로 살아간다.
평생 일 안해도 부자로 살아갈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을 해야 부자가 될 집안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평생 고생하며 일하지만 항상 가난을 못 벗어나고 때로 극심한 빈곤에 시달려야 할 팔자를 타고난다.
출생 다음으로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우연한 사고와 기회다.
어떤 사람은 부자로 태어나지 않았지만 자신의 노력과 재능으로 큰돈을 모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노력과 재능이라는 것도 적절한 때와 운을 만나지 못하면 큰 힘이 되지 못한다.
그런 행운은 오직 소수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 일을 하면서 자신의 덕 때문에 도움을 받기는 하지만 악덕 (이를테면 노예근성, 아첨, 무정하고 인색한 이기심, 적당한 거짓말과 꼼수, 도박꾼 기질, 때로 노골적인 부정 같은 것)의 도움을 받는 경우도 자주 있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데 정력과 재능은 덕성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정력과 재능을 이용해서 사회에 유용한 일을 잘해내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경쟁자를 골탕 먹이고 해롭게 하는 데 그런 것을 써먹는다.
사실 도덕주의자들은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정직이 최선의 정책이 되며, 공정한 여건 속에 서는 정직한 사람이 악한보다 더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용감하게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 삶의 실제 모습을 들여다 보면 이런 주장은 그대로 믿기 힘들다.
정반대 일이 자주 벌어진다.
정직이 성공의 발판이라고 하지만 엄격히 말해 서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는 사다리 한 칸보다 더 유리하다 고 할 수 없다.
행운과 행동의 상호 관계를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나쁜 행동, 아니 일부 나쁜 종류의 행동들은 조금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아무리 엄청난 행운도 충분히 망칠 수 있다.
그러나 그 반대는 성립되지 않는다.
대부분 사람은 아무리 좋은 행동을 하더라도 행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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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이라는 것은 인민의 삶을 말살시키는 체제다.
가난한 사람은 사회의 한 구성원인가 아니면 그 적인가? 무엇이 정답인가?
그 가난한 사람 주변의 모든 땅은 이미 누군가 점유하고 있다.
그 사람이 자기 손으로 땅을 경작해도 될까? 그건 안 되는 일이다.
그 땅을 제일 먼저 점유한 사람이 소유권을 가지기 때문이다.
조물주가 심은 과일들이 길에 떨어져 있는데 가난한 사람이 그것을 주워 담아도 될까?
그것도 안 된다. 땅과 마찬가지로 과일도 이미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이 사냥이나 낚시는 해도 될까?
그것 역시 안 된다. 정부가 허락 해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울타리 쳐진 남의 밭에 있는 우물에서 물을 끌어당겨 쓸 수 있을까?
안 된다. 밭의 주인이 우물의 소유권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배고픔과 목마름으로 죽어가는 사람이 그의 이웃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뻗을 수 있을까?
안 된다. 법으로 구걸을 금지하기 때문이다.
피곤에 절어 녹초가 되었지만 잠잘 데가 없 는 사람이 포장도로 위에서 누워 쉴 수 있을까?
역시 안 된다. 부랑자를 처벌하는 법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나라 에서 도무지 살아갈 방도를 찾지 못한 사람이 자기가 태어난 곳을 떠나 먼 외국 땅에서 생을 다시 도모해볼 길이 있을까?
그것 역시 불가능하다. 국적을 바꾸려면 몇 가 지 조건을 충족해야 하는데 가난한 사람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불행한 사람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사람은 '나는 일할 수 있는 두 손이 있다.
나는 머리를 쓸 수 있다. 나는 젊다. 나는 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가져가고 대신 나에게 빵 한 덩어리만 다오'라고 외친다.
이것이 오늘날 노동자들이 하는 말의 전부다.
그런데 그 가난한 사람에게 돌아오는 말이 '나는 너에게 줄 일거리가 없다'는 것뿐이다.
도대체 그 사람은 이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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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상식처럼 너무나 당연한 듯이 들리는 진리를 되풀이 말하기 싫어서 조직된 산업(오늘날 상황에 비추어 본다면 조직되지 않은 산업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겠지만)이 중산층의 도덕을 얼마나 기가 막히게 타락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이제 세상 모든 것이 썩어버렸다.
경쟁은 심지어 사고 영역까지 오염시키고 있다.
공장이 작업장을 박살낸다. 화려하게 꾸민 가게가 초라 한 모습의 가게들을 집어삼킨다.
일용직 노동자가 자신을 부리던 장인을 대체한다.
쟁기 농사가 삽 농사 일자리를 빼앗아간다.
가난한 밭주인이 현금 대부업자에게 비굴하게 빌고 있다.
파산이 급증한다.
무분별하게 부채를 끌어들이는 바람에 제조업이 그 누구도, 심지어 악한까지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투기장으로 바뀌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엄청난 혼란 때문에 질투심, 불신 그리고 증오심이 불타오르고 있다.
일체의 관대한 희망, 믿음,자기희생, 그리고 시가 서서히 질식 상태에 빠지고 있다.
너무나 끔찍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진실, 이 모든 것이 경쟁 원리가 만들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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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은 수없이 많은 파산을 통해 사회에 타격을 입힌다.
이 상업 사회에서는 매일 사고, 정치적 사건, 수많은 종류의 혼란 때문에 능력 이상의 빚을 진 상인이 한 계상황에 몰려 파산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긴다.
그것이 사기든 아니든, 한 상인이 일단 파산을 선언하면 채권자는 막대한 타격을 받게 된다.
파산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후폭풍을 몰고오면서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힌다.
이 경우에도 늘 생산자와 소비자가 고통을 겪는다.
왜냐하면 크게 볼 때 상업은 부를 생산하지 않고 그 손을 거 쳐가는 부의 매우 낮은 비율만 투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타격을 받고 얼마나 많은 제조업자들이 무너졌던가!
이런 체제가 만들어내는 처참한 결과 때문에 얼마나 많은 부의 비옥한 원천이 고갈되고 말았던가! 생산자는 물건을 만들고 소비자는 돈을 쓴다.
실제 자본이 별로 없는, 또는 아예 하나도 없는 대부업자가 돈을 빌려준다.
이 과정에 관여하는 상업 사회의 구성원들은 서로에 대해 아무 책임이 없다.
줄여 말하자면, 이것이 문제의 본질이다.
상업은 사회로부터 상당한 규모의 자본을 회수해간다.
이것은 상업이 원래대로 종속적 역할을 수행하고 단지 다소 떨어져 있는 생산자와 거대한 소비 중심지들, 공산주의적 사회들 사이에서 중개 역할만 담당한다면 생산업으로 돌아가야 할 몫이다. 따라서 상업이 재화들 사이에서 중간재 역할을 하지 못하면 상업적 투기에 동원된 자본(상인들이 유통하는 막대한 부에 비하면 작기는 하지만, 그 자체도 상당한 규모다)은 생산을 자극할 것이다. 그리고 재화를 분배하는 일은 행정 조직이 담당할 것이다.
주식 매매는 이런 상업적 해악 중에서도 가장 끔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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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뿐만 아니다. 이 문명은 온 사방에 분열과 싸움의 씨앗을 뿌리고 비생산적, 심지어 파괴적인 일에 힘을 쏟 아부으며 산업에다 불필요한 갈등과 불화를 불어넣어 사회적 부를 더욱 감소시킨다. 더 고약한 것은 바로 이 체제가 일을 싫어하고 노동을 혐오하는 풍조를 확산한다는 점이다.
여기저기에서 노동자, 기능공, 점원들이 자기 지위와 직업에 대해 불평하며, 먹고살기 위해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금 직장에서 물러나 쉴 수 있는 때가 오기를 갈망하는 소리가 들린다.
끔찍이 싫지만 오직 굶지 않아야 한다는 유일한 동기와 목표 때문에 일을 한다는 것이 현대 사회의 노동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하고 치명적인 성격이다.
문명사회의 노동자들은 징역을 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생산직 노동이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과 피곤, 권태로 점철되는 한, 모든 사람이 할 수만 있으면 일을 그만두려 할 것이다.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일을 안 하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대다수 노동자, 사회적 부의 생산자들, 모든 안락과 사치품을 직접 열심히 만들어내는 일꾼들이 항상 빈곤과 굶주림을 시달려야 할 팔자로 살고 있다.
늘 무지와 수모에 찌들어 살아야 한다.
이들은 언제나 그저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진 가축처럼 거대한 무리를 이룬 채 병에 걸려 잘 자라지도 못하고 곧잘 죽고, 대규모 작업장의 쟁기나 계산대 뒤에 목을 늘어뜨리고 살 것이다.
그러면서 상층 부유한 계급을 위해 우아한 음식을 만들고 호사스러운 쾌락을 준비할 것이다.
노동을 보람 있게 만들 그 어떤 것이 고안되지 않는 한 '소수의 부자를 위해 다수의 가난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변함없는 진리가 될 것이다.
이 비열하고 저주스러운 말을 기독교 신자니 철학자로 자칭하는 인간들이 영원한 진리라고 떠드는 것을 우리는 매일 듣고 있다.
억압, 사기, 특히 빈곤이 노동을 싫어하는 모든 사회 상태가 보여주는 영원하고 치명적인 속성인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빈곤만이 사람들에게 일을 시킬 수 있다.
만일 사람들이 전부 하루아침에 부자가 된다면 지금 노동의 19/20가 버려지고 말 것이라는 사실
이 그것을 잘 증명한다.”
푸리에주의자들은 엄청난 재산을 가진 소수의 손에 부가 집중되면서 사회의 나머지 사람은 그들에게 완전히 종속되는 위치로 전락하는 것이 현재 사회 질서의 두드러진 추세라고 주장한다.
푸리에는 이것을 '산업 봉건제도 la féodalité industrielle’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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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들의 과장된 주장에 이처럼 제동을 거는 말로 그들의 문제의식에 대한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인다.
그래야 사회주의와 기존 사회 상태 사이에 가로 놓인 가장 중요한 쟁점들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체제가 사람들을 총체적 궁핍과 노예상태로 급격하게 몰아넣고 있으며 사회주의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아니다.
지금 체제가 초래하는 악과 불의 때문에 가혹한 고통을 겪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나쁜 것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느리지만 전반적인 추세는 감소하고 있다. 나아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에 생산 분배가 불평등 한 정도가 너무 심해서 자연적 정의 감정에 비추어볼 때 대단히 충격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자와 다른 수 많은 사람이 흔히 가정하듯이, 그것을 단순히 평준화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리 용을 쓰더라도 낮은 수준의 임금을 올리기 위한 막대한 기금을 충당할 수 없다.
지금 사회에 만연한 학대나 불의 중 어느 하나만 없앤다고 인류가 당장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에 이를 수는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삶이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어느 쪽이 더 유리한지 두 종류의 사회를 냉정하게 비교하는 것이다.
만일 이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이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더 어렵고 지적•도덕적 조건에 많이 달려있다면,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실험 가능한 규모로 실제 시도해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으로 만족해도 좋을 것이다.
나는 사회주의적 개혁이 얼마나 실천 가능하고 또 유익한지 그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는 시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현재 경제체제를 최선의 상태로 개선하는 데 필요한 여러 기본 원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사회주의의 지적•도덕적 토대에 대해 매우 심각하게 연구해볼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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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재산제도와 공산주의제도 아래서 경제를 움직이는 동력에 차이가 생기는데, 특히 경영 지도자의 경우 그 차이가 가장 크다.
현재 체제에서는 자본을 소유한(또는 자본에 개인적으로 책임이 있는) 사람 또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경영을 담당하는데, 최고 실적을 낸 경우와 사업이 계속 유지될 만한 수준에서 최악의 성적을 거둔 경우 생기는 차이의 전부가 경영을 책임진 사람 또는 사람들에게 귀속된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한 계산 끝에 또는 관대한 마음이 작동한 까닭에 그들의 아랫사람과 나누어 가지게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 한 경영을 잘해서 얻는 수익의 전부를 혼자 차지한다. 반대로 경영 실패로 생긴 모든 손실에 대해서도 향후 경영권에 심각한 타격을 입지 않는 한 전적으로 혼자 감수해야 한다.
효율적인 경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게 하는 이런 강력한 개인적 동기가 공산주의체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영자도 조직의 다른 구성원과 똑같은 분배를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각자에게 돌아가는 몫을 크게 하기 위해 공동체 일을 다 같이 열심히 하는 것뿐이다.
공공 정신, 양심, 경영자로서 얻는 명예와 신용 정도가 일을 열심히 하게 만드는 유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이런 동기들도 합쳐지기만 하면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마다 그리고 목적에 따라 작용하는 힘이 크게 다르다.
경험이 증명하듯이, 인간 사회가 아직 불완전한 도덕 수준에 머물고 있는 상황에서 양심과 신용과 명성의 동기라는 것은, 제법 힘을 쓴다고 하는 경우에도 대부분 촉진하기보다는 억제하는데, 다시 말해 일상적인 업무를 더 잘 수행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나쁜 일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데 훨씬 더 큰 힘을 발휘한다.
대부분 사람이 게으름에 빠지고 편한 것을 좋아하는 습성에 빠지기 쉬운데, 이것을 충분히 지속적이고 변함없이 이겨낼 수 있다고 알려진, 그리고 대개 그 자체로 지루하고 재미없는 작업을 쉬지 않고 일하게 만들 수 있는 유인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자신과 자기 가족의 경제적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심어주는 것이다.
노력을 늘리는 것에 비례해서 과실이 커지는 만큼 그 유인도 강력해진다.
이 사실을 부정한다는 것은 현재 상태의 인간에게 의무와 명예라는 감정이 때로 특별한 행동과 자제를 고취할 뿐 아니라 그들의 삶 전부도 늘 통제한다면서, 그런 감정이 개인적 이해관계보다 더 강력한 행동 원리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내가 볼 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혹 어떤 사람은 이런 공적•사회적 감정이 낮은 효율성을 보이는 것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고 단지 교육이 불완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주장을 흔쾌히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
시원찮은 보통 사람과 달리 개인적으로 예외적인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예외가 다수, 아니 굉장히 큰 소수가 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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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전체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동기에 관한 한 공산주의는 사유재산제보다 더 나을 것이 없고 우두머리 경영자 문제에서는 상당히 불리하다.
또한 그 체제 특유의 단점으로 보이는 것도 있다.
즉 현재 체제에서는 때로 형편없지만 어쨌든 자율적으로 결정하는 문제들을 필요라는 거짓을 내세워 다소 자의적으로 결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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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의 생산 요소들을 고용하는 방식, 사회적 삶의 조건, 다른 조직과의 관계 등에 영향을 주고, 때로 타결점을 찾을 수 없는 생각의 차이를 생기게 하는 수많은 다른 중요한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밝힐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불화가 생긴다 해도 다수의 명령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개인의 생각과 소망을 짓밟
으면서 의견 일치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것에 비한다면 인간의 삶에 끼치는 해악이 훨씬 덜하
다.
인간의 진보를 가로 막는 장애물은 언제나 대단히 크다.
그것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우호적 조건들이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그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본성이 생각과 행동 모두 여러 방향으로 자유롭게 뻗어나 갈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자유롭게 실험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소수의 이름으로 하든 아니면 다수의 이름으로 하든, 지배자에게 사람들을 위해 생각하고 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되는지 처방하는 권한을 준 다음 그의 품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조직에서는 사적인 삶이 유례가 없을 정도로 공권력의 철저한 통제 아래 놓이 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존재했던 어느 문명사회의 시민들 보다도 개인의 성품과 선호를 발전시킬 수 있는 여지가 적다. 이미 현대 사회에서 다수가 개별성을 짓밟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이런 해악이 점점 더 커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공산주의에서는 개인이 자기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모여 살 권한을 가지지 않는 한 그 상태가 훨씬 더 나빠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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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런 여러 논의를 통해 미래 언젠가는 공산주의적 생산이 인류의 필요와 환경에 가장 잘 들어맞는 사회 형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희석시키는 추론을 끌어내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는 우호적 환경 속에서 공산주의 원리에 대한 실험이 계속되고 현재의 사유재산체제가 점진적으로 개선되면서 새로운 사실이 계속 밝혀질 것이기 때문에 지금 현재, 그리고 앞으로 상당 기간 이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공산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도덕적으로나 지적으로나 높은 수준에 올라서야 한다는 점이다.
도덕적으로는 사람들이 다른 유인이 없어도 그저 조직 전체의 수입에서 자기 몫으로 돌아오는 것만을 바라보며 조직에 대한 의무감과 일체감으로 정직하고 열성적으로 자기 생업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지적으로는 이런 문제를 놓고 좋은 구상과 나쁜 제안을 충분히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장기적 이익을 평가하고 다각도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을 지금 이 정도로 교육하고 정신을 깨우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에 현재 상태에서 그 단계까지 가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것은 분명하다.
나는 도덕 교육이 공산주의의 성공을 좌우한다고 하는 관점에서 접근할 때, 현재 사회 상태는 매우 비관적이라 오직 공산주의식 조직만이 사람들을 공산주의에 맞게 효과적으로 교육 할 수 있다는 주장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공산주의는 실제 실험을 통해 이런 교육을 잘 진행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공산주의를 성공으로 이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높은 수준의 도덕적 자질을 갖추고 다음 세대에
게 그런 높은 수준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교육을 시킬 만한 사람이 어느 정도나 있는
지 실험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자기 조직이 지속적으로 번창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그 조직은 확산될 것이다.
나아가 보다 발전된 나라의 사람들이 그런 생활 방식에 도덕적으로 공감하면 아마 그들도 그것을 점점 더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준비 안 된 사람들을 강제로 공산주의 체제로 몰아넣는 것은, 설령 정치적 혁명을 통해 그렇게 시도할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한다 해도, 실망스러운 결과를 맞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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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회주의가 해결해야 할 여러 어려움을 검토해본 결과, 개인이 아니라 공적 기관이 나라의 생산 요소를 직접 경영하기 위한 이런저런 계획들은 실험을 통해 그 타당성을 검증받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 계획 중일부는 결국 기존 질서보다 더 낫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그런 것들이 현재로서는 단지 소수 엘리트를 중심으로 가동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들이 기대하는 수준까지 보통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게 교육할 능력이 있는지 증명해 보여야 한다.
물론 나라 전체의 토지와 자본을 모두 몰수해서 즉각 공동 소유체제로 시작하는 더 야심찬 계획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많다.
현재 소유체제의 정의롭지 못함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렇다 쳐도, 한 나라의 산업 전체를 단 하나의 중앙 권력의 지시에 따라 경영한다는 그런 발상 자체는 너무나 파멸적이어서 감히 그 누구도 그것을 감행할 구체적 처방을 내지 못한다.
만일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자신의 최우선 목적을 달성해서 실제로 나라 전체의 재산을 자기들 손안에 넣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잘게 나누어서 작은 규모 사회주의 조직들의 관리 아래 두게 하는 것 외에 다른 그 어떤 현실적인 관리 방안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우리가 보았듯이, 경영을 잘한다는 것은 사전에 충분히 준비된 소수에게도 매우 어려운 문제다. 따라서 사회주의자들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오직 지역 단위로 무차별적으로 집단을 구성함으로써 그 문제를 최대한 해결하려 할 것이다
(그들은 악당들, 게으르기 짝이 없고 악질적인 인간들, 꾸준히 열심히 일하는 것이나 미리 생각하는 것, 또는 자기를 통제하는 일에 도대체 무능한 인간들 그 누구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는 그처럼 타락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자들의 생각에, 기 존 사회 상태에서 심각하게 사기가 꺾이는 바람에 사회주의의 성공에 필수적인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도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사회주의를 도입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실패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사회주의의 사도들은 그저 지금 존재하는 사회 질서가 먼저 소멸 될 것이고, 그 체제로부터 혜택을 받는 모든 사람이 함께 파멸의 길을 걸을 것이라는 사실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 사도들 중 일부는 정말 위안을 얻을지도 모른다.
겉으로 보이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바로 증오가 대다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움직이는 1차적 원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혼돈으로부터 더 나은 우주가 떠오를 것이라는 희망에, 그리고 이제 점진적 개선이라는
것에 더 이상 기대를 걸 수 없다는 인내의 한계 때문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심지어 현재 체제로부터 고통을 받는 사람들의 희생마저도 불사하면서) 기존 체제를 끝장 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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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그렇게 해야 한을 풀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현존하는 악에 대한 증오심은 그들 나름 정당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혼란이 새로운 우주를 잉태하기에는 대단히 부적합한 환경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혼란이 수습되더라도 오랜 세월에 걸쳐 갈등과 폭력, 그리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폭압하는 사태가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모르고 있다.
그들은 홉스가 (리바이어던 Leviathan) 1부 13장에서 그토록 강력하게 묘사했던 자연 상태의 나락으로 인류를 빠뜨리고 말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
홉스는 그 책에서 자연 상태의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 조건에서는 어떤 열매를 맺을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산업이 설 자리가 없다.
따라서 땅을 경작하지 않게 되고, 바다를 항해하는 일도 없기 때문에 바다를 통해 상품을 수입하는 일도 없다.
널찍한 건물도 없고, 힘을 써서 물건들을 움직이기 위한 도구도 없고, 지구의 표면에 관한 지식도 없고, 시간을 잘 필요도 없고, 예술, 문학, 사회도 없다.
가장 나쁜 것은 공포 그리고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위험이 계속된다는 점이다.
그러니 인간의 삶이 고독하고 가난하고, 끔찍하고, 야수 같고, 또 단명 할 수밖에 없다."
만일 소위 문명사회의 가장 가난하고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 문명이 사라진 최악의 야만 사회 사람들만큼이나 나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면, 다른 모든 사람을 그처럼 비참한 상태로 똑같이 몰아 넣는 것이 그들을 구원하는 길은 아닐 것이다.
반대로 그런 상태를 벗어난 첫 번째 사람의 도움으로 수많은 사람이 비참한 삶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듯이, 이제 조직을 잘 만들어서 그런 과정을 밟아야만 언젠가 나머지 사람들도 구원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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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밝혀졌듯이, 사회주의가 주장하는 것처럼 사회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것, 다시 말해 사회의 경제체제를 사유재산제도와 경쟁체제를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기초 위에 세우는 것은, 하나의 이상으로서 아무리 가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또는 궁극적으로 실현 가능하다고 하는 하나의 예언으로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현재와 같은 여건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서는 우선 새로운 사회 질서를 구축해나갈 사람들이 도덕적 지적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데, 거기에다 반드시 검증도 받아야 한다.
이것은 의회가 법을 하나 만드는 것으로 해결 될 일이 아니다.
아무리 우호적으로 계산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충분히 보여준 것 같다.
앞으로 상당 기간 개인재산제도는 유지될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건 민중 봉기 덕분에 혁명 정부의 권력을 장악한 사회주의자들이 아무리 사유재산권을 침범하더라도 그 제도 자체는 살아남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폐지하더라도 그들 자신이 다시 살리게 될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이 어떤 대안이 나와서 정착되기 전에는 현재 자기들의 생존을 보장해줄 유일한 수단이요 무기인 것을 잃으려 하지 않을 것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소유를 빼앗아 같이 나누어 가졌던 사람(그런 사람이 있다고 치자)들도 일단 자기 손에 들어온 것을 놓치지 않으려 할 것이다.
그들은 과거 유산자들의 소유에 대해 취하던 태도와는 달리 이제 자기 것에 대해서는 그 신성한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런 이유 때문에 사유재산제도가 상당 기간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기간 동안 재산제도에 어떤 변화도 있을 수 없다든가 지금 재산에 따라붙는다고 인정되는 모든 권리는 내재적인 것이고 그 제도가 존속하는 한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반대로 어떤 식으로든 현재 재산법이 대다수 사람들을 덜 고통스럽게 만들 모든 제안에 대해 공정한 판단을 내리는 것이 그 법을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이득을 보는 사람들의 의무이고 또 그들에게도 이익이 된다.
이것은 어느 모로 보나 정의의 명령이다.
나아가 여건도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빈번하게 사회주의 형태의 사회를 수립하려 드는 섣부른 시도를 가로막는 현명한 선택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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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맞든 틀리든, 법적으로 소유자라고 인정된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물에 행사하는 권력에 약간 변화를 주거나 조정하는 것은 사회에 유익하고 일반적인 개선에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다면, 그런 변화를 위한 제안이 재산 관념과 충돌한다고 막무가내로 저항할 것만은 아니다.
재산 관념은 역사를 통틀어서 전혀 변할 수 없는 어떤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정신이 창조해낸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가변적이다.
그것은 그저 어느 특정 시간, 어느 특정 사회에서 법 또는 관습이 준 물건에 대한 권리를 뜻하 는 일시적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특정 시간과 장소의 법과 관습이 그 무엇에 대해서도 영원히 변하지 않을 권리를 줄 수는 없다. 따라서 법이나 관습을 개혁하려고 하는 제안에 대해 반드시 반대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그런 적응은 모든 인간사가 기존 재산 관념에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후자가 전자의 발전과 개선에 적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주장을 하면서 재산 소유주가 일방적으로 손해를 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누구든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법적 소유권을 포기할 경우 국가로부터 그에 맞는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당한 요구, 그 근거와 한계는 그 자체가 중요한 문제로서 앞으로 좀 더 길게 논의해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사회는 충분한 검토 끝에 공익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특정 재산권에 대해서는 그 어느 것이든 폐지하거나 변경할 완전한 권리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자칫 사회주의자들이 현재 사회의 경제 질서를 뒤엎을 수 있다.
이런 끔찍한 경우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는 모든 수단을 충분히 검토해보아야 한다.
그 핵심은 현재 상황에서 사회가 주는 직접적 혜택을 거의 누리지 못하고 있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