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630 /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면 (수14:6-15)
어느 책에선가 보니까 지옥문 앞에 가면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소망과 희망을 다 버리라.’고 하는 안내문이 붙어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소망과 희망을 잃어버리게 되면 그 순간 그 자리가 지옥이 되고 만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전에 보면 희망의 뜻은 ‘앞일에 대하여 좋은 결과를 기대함’이고, 소망은 ‘바라고 원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얼핏 보면 둘이 ‘같은 뜻의 다른 말’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완전히 ‘다른 말, 다른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세상엔 없는 소망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에게서의 소망은 분명하게 이루어질 것, 즉 이미 확정된 것을 바라는 것이지만, 희망은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만에 하나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좀 더 세밀하게 분류하자면 그리스도인에게서의 희망은 세상을 향한 것이고 소망은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는 차이가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여러분이라면 하나님의 구원, 은혜, 복. 천국 등에 대한 소망을 더욱 굳건히 하시기를 권면 드립니다.
그렇다고 희망이 필요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세상을 사는 동안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실패했을지라도, 고난 당할지라도, 질병에 걸렸거나 원수의 괴롭힘을 당할지라도, 실패 중에도 성공에의 희망을, 고난 중에도 행복에 대한 희망을, 질병 중에도 치유와 건강의 희망을, 원수 앞에서라도 승리에 대한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희망을 품으신 후엔 그 희망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희망이 하나님께 연결되면 그때부터 희망은 믿음과 연결되는 소망이 되게 되며, 그 소망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시편 146:5절 말씀에서는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했는데, 그렇게 복 받은 사람 중 하나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갈렙입니다.
본문 6절을 보면 갈렙은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그니스 사람’이라 함은 이스아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거주하는 중에 함께 섞여 살던 에돔 족속과의 혼인으로 인해 에돔 혈통을 가진 사람을 칭하는 것으로, 정통 히브리인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갈렙은 유다 지파의 대표가 됩니다.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소망하는 사람이었고, 믿음으로 희망을 품고 살았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기에 출애굽 후에 12 정탐꾼의 일원으로 가나안을 탐지하고 와서도 모두가 ‘안 되는 이유’만을 찾고 있는 상황에서도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되는 이유’를 역설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는 헤브론 산지 정복을 앞에 두고 역시나 ‘내가 얻으리라!’는 희망적인 선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그에게 희망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견고케 했을까요?
당연히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믿음과 하나님이 내 희망을 이루어지게 해주실 것이라는 소망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랬기에 갈렙은 당시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그러니 가나안은 우리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하셨다! 그러니 가자. 가나안으로!’
전자가 하나님에 대한 갈렙의 희망이었다면, 후자는 하나님을 향한 갈렙의 믿음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가자. 가나안으로!”라는 이 선포가 중요합니다. 이 선포에는 전제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믿음과 희망을 늘 기억하셔서, 언제 어떤 형편에서라도 ‘가자. 가나안으로.’에서 ‘가나안’ 대신 여러분의 ‘희망 사항’을 넣어 선포하신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믿음대로 역사해 주실 우리의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이미 ‘가자. 가나안으로.’를 외쳤던 갈렙이었기에 오늘 본문에서는 가나안을 자신의 희망 사항으로 바꿔서 다시 이렇게 외칩니다. ‘가자. 헤브론 산지로!’
그래서 12절을 보면, 가나안 땅을 분배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갈렙이 찾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그런데 여기서 살펴봐야 할 것이, 당시 갈렙은 직책만 달랐지 이스라엘 최고 지도자인 여호수아와는 동급의 인물이었습니다.
민수기 14:3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단언하시기를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로 거하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출애굽 세대 중에 현재 생존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여호수아 갈렙 둘 뿐이었습니다. 말 그대로 갑렙은 이스라엘의 원로 중에 쌍두마차였던 겁니다. 그런데 그런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땅 분배와 관련하여 청탁을 합니다. 그러니 여호수아로서는 들어줘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또한 다른 지파들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반발이나 불만이 생겨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분열이 일어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도대체 갈렙같은 사람이 여지껏 믿음으로 존경받고 잘 처신해 오다가 왜 갑자기 땅 분배에 관해서는 청탁을 하고 있는 걸까요?
본심이 나온 걸까요? 욕심이 발동한 걸까요?
그 이유 역시 12절에 나옵니다.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기서 아낙 자손이라는 말은 창세기 6장에 나오는 타락한 인물의 대표인 네피림의 후손을 말하는 것으로, 크고 강한 거인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는 이런 거인족을 상대해야 했기에 이전에 10명의 정탐꾼이 보고할 때도 ‘그들에 비하면 우린 메뚜기 같더이다.’라고 했던 것이고,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도 말로는 정복했다고는 했지만 미처 점령하지 못한 지역들이 더러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낙 거인족이 살고 있던 헤브론 산지였던 겁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땅을 분배받는 과정에서 헤브론 지역을 원하는 지파가 아무도 없었던 겁니다. 그렇다고 그대로 두기에는 언제든 위협이 될 터였고, 가나안 땅을 주리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도 아직은 미완성인 상태로 남게 될 것이기에 여호수아로서도 고민이 아닐 수 없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와서 뭐라고 말합니까?
9절에서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라고 하면서 12절에서는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라고 합니다.
이때 갈렙의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갈렙에게는 예전에 가나안 백성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던 그 믿음이 여전하여 이번에도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고, 두 번째로 여호수아를 향해서는 내 말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니 당신도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본문에서는 그다음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습니까?
13절을 보세요. 여호수아 역시 순종하여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매번 인생 최대의 난제 앞에서도 갈렙은 언제나 ‘희망적’이었습니다. 그렇게 갈렙이 늘 희망적일 수 있던 이유는 ‘나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갈렙의 믿음은 ‘Why not?, 안 될 게 뭐 있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데.’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누구라도 나에게 있는 희망이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연결만 되면 꿈은 이루어진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 대로’ 된다고 했을 때의 믿음은 ‘믿습니다’라고 하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희망을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바꾸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나 ‘희망적’이기 위해서는 매사에 늘 ‘믿음적’이어야만 합니다.
갈렙은 그렇게 살았기에 세상을 향해서는 늘 희망적인 소망을 가졌고 하나님으로부터는 늘 믿음적인 결과를 응답받은 것입니다.
이렇게 갈렙에게서 되어진 일을 알았다면 이제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할 일도 자명해졌습니다. 범사에 믿음적인 마음을 가져 매사에 희망적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6:9절에서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갈렙을 보시는 하나님은 어떠셨을까요?
민수기 14:24절에서 하나님은 “내 종 갈렙은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온전히’라고 번역된 히브리어의 원어적인 의미는 ‘만족시키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갈렙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매사에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 드리는 믿음을 가질 때면 하나님도 우리의 모든 희망을 만족하게 하시는 응답으로 역사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역시나 문제가 되는 것은 방법입니다.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있을까요?
첫째는 하나님을 소망하여 세상에서 희망을 가지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눈치채신 분도 계시겠지만, 성경에서 보면 ‘갈렙의 말투’에는 큰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뭘까요?
모든 말에 꼭 ‘하나님이 언급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하나님이 함께하시면.’이란 말은 ‘갈렙의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이란 말은 ‘갈렙의 믿음’을 보여주며, ‘하나님이 해주시면.’이란 말은 ‘갈렙의 승리’의 확신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갈렙이 했던 것을 그대로 우리 인생에 적용시킨다고 하면.
여러분에게도 실패나 아픔, 고민이나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의지를 꺾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내 희망과 내 의지를 하나님과 연결시키시만 하면 결과는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온전케, 즉 만족케 해주실 것입니다.
언제나 잊지 마세요. 인생이 괴로우니까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안 되는 일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보여야 합니다. 사는 게 힘들고 어려우니까 하나님이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매번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건 아직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지 못하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든 하나님이 소망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내 안에서 희망을 만들어 내고 그래야 그것이 우리 마음을 믿음으로 이어지게 해주며, 우리를 기도하게 만듭니다. 그러면 결과는 하나님이 승리와 복으로 응답하시는 겁니다.
본문 12절에서도 보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너무 유명하다 보니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씀을 좋아하고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기도 합니다만, 그 전에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갈렙은 왜 그 땅을 자기에게 달라고 한 걸까요?
그 땅이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 땅이 탐나서도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그곳엔 감히 싸워볼 엄두가 나지 않는 막강한 대적이 있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누군가는 그 땅을 정복해야만 합니다. 왜요?
정복했다고 하면서도 아직 정복하지 못한 땅이 있다고 하면 그건 완전한 정복이 아닙니다. 그리되면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미완성인 채로 끝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라도 누군가는 그 땅을 정복해야만 했는데, 그 일을 자원한 사람이 갈렙이었던 겁니다.
이렇듯 갈렙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였다면 오히려 ‘그 땅’이 아닌 곳이 더 좋았겠지만, 갈렙은 그 땅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하나님도 그런 갈렙과 함께하시며 그에게 능력을 더하신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하면, 하나님도 나를 위해 역사하신다.’
이게 진리입니다. 본문 10절 후반부와 11절을 보세요. 갑렙은 말하기를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때나 지금이나 같아서”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갈렙이 85세가 되도록 기력이 여전했다는 것이 초점이 아닙니다. 본문 12절 말씀을 보면 갈렙은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합니다.
갈렙이 말하는 ‘그 날에’는 45년 전입니다. 세월에 장사 없다고 45년 전과 비교해서 지금의 갈렙은 몸은 늙었고 기력도 많이 약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하다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더 강해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11절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그 믿음이 여전합니다,’라는 고백인 것입니다.
이런 갈렙을 보며 여러분의 믿음도 그러하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우리 역시나 세월에 따라 몸은 늙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믿음은 늙지 말아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형편은 어려워질 수 있어도 믿음이 여전하고 꿈을 잃지만 않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환경을 극복하며 살 수 있습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편한 게 좋고 쉬운 걸 좋아합니다만, 문제는 하나님은 무엇을 기뻐하시고, 어떤 걸 좋아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세월은 의미가 없습니다. 상황이나 환경도 무의미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지금’ 나에게 있는 믿음만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젊었나 늙었나, 있느냐 없느냐, 되느냐 안 되느냐가 아니라 오직 믿음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모습이 부족해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희망을 가지고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
산이 있으면 산을 오르면 됩니다. 오르기 힘들면 산을 깎든지 터널을 뚫으면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는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해주실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런 믿음으로 갈렙은 헤브론 산지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뒤에 갈렙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5절 하반부를 보세요.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고 했습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의 꿈을 가로막는 일을 만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뭡니까?
포기할 만한 곳에서도 희망을 가지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 주신 것이 아니겠는지요?
이제부터 여러분은 세상을 사는 동안에 원하는 모든 희망을 다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하나님과 연결시키기만 하면 세상은 나의 희망이 이루어지는 무대가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앞서 우리가 ‘희망적’이기 위해서는 ‘믿음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믿음적으로 살면 하나님도 우리를 위해 믿음대로 역사하실 것이기에 결과는 ‘나에게’는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매 순간 세상에서의 희망을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연결시키며 살았던 갈렙의 믿음이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의 믿음이 되게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