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스타트업 비스포큰 스피릿, 超속성 위스키 제조법 개발
증류주 원액을 참나무 조각과 함께 스테인리스에 담고 숙성
와인업계도 비슷한 ‘오크칩’ 활용법 있지만 中下 취급
술 맛은 복합 감각의 향연…단지 기술로 재현할 수 있을지 의문
21년산 위스키 맛을 닷새 만에 재현할 수 있다는 미국 스타트업 비스포큰 스피릿(Bespoken Spirit)이 주류 업계에서 화제다. 과학자 마틴 야뉴섹과 마케팅 전문가 스투 에런이 개발했다는 초(超)속성 위스키 제조 비법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증류주 원액을 아주 작게 자른 참나무 조각과 함께 액티베이터(activator)라 부르는 스테인리스 용기에 담고 온도, 섞는 속도, 기압 등을 입력해 3~5일 숙성시키면 위스키와 맛·향·색이 똑같은 술이 완성된다는 것.
대단한 혁신 같지만 사실 와인 업계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활용해온 기술이다. 와인이나 위스키를 숙성시킬 때 사용하는 참나무통(오크통)은 비싸다. 오크통으로 숙성시키지 않고도 숙성한 듯한 풍미를 낼 수 없을까 고민하던 와인 생산자들은 ‘오크칩(oak chip)’을 1960년대 고안했다.
포도즙을 참나무를 작게 쪼갠 오크칩과 함께 스테인리스 탱크에 담아 숙성시키면 참나무통을 사용할 때와 비슷한 와인을 생산할 수 있다. 훨씬 더 정교하게 다듬고 발전시켰겠지만, 비스포큰 스피릿에서 개발했다는 기술과 큰 차이가 없다.
/일러스트=양진경
배럴(barrel)이라고도 부르는 참나무통은 원래 숙성이 아니라 운반·보관을 위한 도구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와인을 암포라(amphora)라고 하는 항아리에 담았다. 낮은 온도에서 구운 암포라는 술이 새기도 했고 쉽게 깨지기도 했다.
오늘날 프랑스와 벨기에인 갈리아 지역을 점령한 로마인들은 켈트족이 사용하는 배럴을 주목했다. 길고 납작하게 자른 나무판을 묶어 배가 불룩하게 나온 원통형 용기인 배럴은 암포라보다 훨씬 견고하고 술도 새지 않았다. 배럴은 차츰 암포라를 대체하다가 마침내 완전히 밀어냈다.
와인 생산자들은 배럴에 보관하면 와인의 맛과 향이 더 복합적으로 변한다는 걸 알아챘다. 나무가 함유한 다양한 성분이 와인에 배어들기 때문이다. 바닐린(vanillin)이 대표적이다. 참나무에 다량 함유된 바닐린은 아이스크림 등 각종 디저트에 들어가는 향신료 바닐라의 핵심 성분. 덕분에 오크통 숙성 와인은 바닐라처럼 달큼한 향을 풍긴다.
“스모키(smoky)하다”고 표현하는 구수한 훈연향도 난다. 배럴은 안쪽이 검게 그을려 있다. 널빤지를 둥그렇게 구부리려면 열을 가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안쪽이 검게 타는데, 이때 생기는 그을음이 와인에는 양념 역할을 한다.
위스키 생산자는 와인 숙성에 사용한 배럴을 와인 생산자에게서 사다 쓴다. 새 참나무통보다 재활용 참나무통이 쌌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새 오크통보다 사용했던 오크통에 숙성시킨 위스키가 더 맛있다는 걸 발견했다. 배럴에 배어든 와인의 풍미까지 위스키에 더해지기 때문이다.
오크칩 이야기로 돌아간다. 와인 업계에서는 오크칩을 널리 활용하고 있을까. 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저가 와인 업체에서는 일부 사용하지만, 중급 이상에서는 별로 쓰지 않는다. 와인 전문가 김상미씨는 “오크칩을 사용하는 고급 와인은 전 세계 단 하나도 없다”고 단언했다.
오크칩을 사용한 와인은 인위적이랄까, 인공 조미료를 과하게 친 음식 같다. 복합미도 떨어진다. 김상미씨는 “와인은 오크통 숙성 과정에서 일정량이 증발한다. 천사의 몫(angel’s share)이라 한다. 와인 생산자는 줄어든 만큼을 새 와인으로 채운다. 이 과정에서 와인의 맛이 농축된다. 비싼 와인은 복합미를 얻기 위한 손실이 가격에 반영된 것”이라고 했다.
오크칩을 와인에 사용했을 때의 단점은 비스포큰에서 만든 술에도 적용될 수 있다(스코틀랜드는 3년 이상, 미국은 2년 이상 숙성돼야 위스키라고 부를 수 있으니 비스포큰 제품은 아직 그저 ‘술’이라 지칭하려 한다). 직접 마셔보지 않아 단언할 수 없지만, 비스포큰의 술을 시음한 미국의 한 위스키 전문가는 “숙성되지 않았고 맛의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며 “칵테일 등 섞어 마시기에는 괜찮지만 단독으로 마시기는 힘들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비스포큰 측은 “전문가들조차 블라인드 테이스팅(blind tasting·상표를 가린 시음)에서 기존 위스키와 구별하지 못했다”고 했다. 물론 그랬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술을 블라인드 테이스팅 하지 않는다. 뇌 과학자들은 “라벨과 가격을 보는 순간 두뇌 회로가 완전히 바뀐다”며 “‘비싼 술이 맛있을 거야’라고 합리화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더 맛있게 느낀다”고 했다.
비스포큰의 혁신이 성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맛있는 술을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하지만 그들의 방식이 주류 업계의 대세가 될지 아직은 미지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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