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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濟州氏(제주고씨)
본관(本貫): 제주(濟州)
시조(始祖): 고을나(高乙那)
유래(由來):
제주(濟州)에는 태초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았는데, 한라산(漢拏山) 북쪽 기슭 모흥혈(毛興穴)에서 세 사람의 신인(神人)인 고을나(高乙那), 양을나(良乙那), 부을나(夫乙那)가 나왔다고 한다. 이 세 사람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사냥을 하여 짐승 고기를 먹고 살았는데 하루는
동(東)쪽으로부터 목함(木函)이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기이하게 생각하여 함께 열어 보니
용모(容貌)가 아름다운 세 여자와 망아지, 송아지, 오곡(五穀)의 종자(種子)가 들어있었다.
삼신인(三神人)은 각각 세 미녀(美女)를 배필로 맞이하고 활을 쏘아 고을나(高乙那)가 제일도(第一都)인 제주목(濟州牧)을, 양을나(良乙那)는 제이도(第二都)인 대정현(大靜縣)을 부을나(夫乙那)는 제삼도(第三都)인 정의현(旌義縣)을 차지하여 목축(牧畜)과 농사(農事)를 지으며 살아 비로소 인간세계(人間世界)가 열리게 되었다고 한다.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通譜)에는 고을나(高乙那)의 15세손(世孫)인 고후(高厚), 고청(高淸)고계(高季) 등 세 사람이 신라(新羅)에 입조(入朝)하여 신라왕(新羅王)으로 부터 국호(國號)와 벼슬을 받아와서 탐라국(耽羅國)이 개국(開國)된 것으로 전한다.
고씨(高氏)는 고을나(高乙那)를 시조(始祖)로 하여 45세손(世孫) 자견왕(自堅王)까지 탐라군주(耽羅郡主)로 세습(世襲)해 오다가 서기 938년(고려 태조 21) 자견왕(自堅王)의 태자(太子) 말로(末老)가 고려(高麗)에 내조(來朝)하였는데, 그가 곧 우리나라 고씨(高氏)의 중시조(中始祖)가 되었으며, 그의 아들 유(維), 강(綱), 소(紹) 형제가 모두 고려(高麗)에서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지냄으로써 본토(本土)에 진출이 시작되었다.
그로 인하여 후손들은 말로(末老)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시조(始祖)의 발원지(發源地)인 제주(濟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가문(家門)을 크게 번창시켰다.
고씨(高氏)의 본관(本貫)은 문헌에 제주(濟州)를 비롯하여 장흥(長興), 개성(開城), 횡성(橫城), 연안(延安), 용담(龍潭), 담양(潭陽), 의령(宜寧), 고봉(高峰), 옥구(沃溝), 상당(上黨), 김화(金花), 면산(免山), 회령(會寧), 안동(安東) 등 122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傳)하고 있으나 모두가 동원(同源)이므로 오늘날에는 제주(濟州)를 단본(單本)으로 하고 있다.
제주(濟州) 고씨(高氏)의 파(派)
① 성주공파(星州公派)
중시조(中始祖) 말로(末老)의 15세손(世孫) 인단(仁旦)을 파조(派祖)로 하는 성주공파(星州公派).
② 전서공파(典書公派)
13세손(世孫) 신걸(臣傑)을 파조(派祖)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③ 영곡공파(靈谷公派)
15세손(世孫) 득종(得宗)을 파조(派祖)로 하는 영곡공파(靈谷公派).
④ 문충공파(文忠公派)
11세손(世孫) 경(慶)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
⑤ 장흥백파(長興伯派)
10세손(世孫) 중연을 파조(派祖)로 하는 장흥백파(長興伯派).
⑥ 화전군파(花田君派)
11세손(世孫) 인비(仁庇)를 파조(派祖)로 하는 화전군파(花田君派).
⑦ 문정공파(文禎公派)
13세손(世孫) 택(澤)을 파조(派祖)로 하는 문정공파(文禎公派).
⑧ 상당군파(上黨君派)
4세손(世孫) 공익(恭益)을 파조(派祖)로 하는 상당군파(上黨君派).
⑨ 양경공파(良敬公派)
4세손(世孫) 영신(令臣)을 파조(派祖)로 하는 양경공파(良敬公派).
등 아홉파(派)로 갈리었다.
그러나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내륙(內陸)에 진출(進出)하여 명성(名聲)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성주공(星主公) 말로(末老)의 맏아들 유(維)가 처음이다.
유(維)는 고려조(高麗朝)에서 남성시(南省試)에 장원(壯元)하여 벼슬이 문하시중(門下侍中), 우복야(右僕射 : 상서도성에 속한 정2품 벼슬)에 이르렀고, 그의 아들 조기(兆基)는 예종조(睿宗朝)에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인종(仁宗)때 시어사(侍御史)에 올라, 이자겸(李資謙)의 일파(一派)로서 환관(宦官)과 결탁하여 권세(權勢)를 누리던 봉우(奉佑)를 탄핵하고 의종(毅宗)이 등극한 후 정당문학(政堂文學)과 판호부사(判戶府事)를 거쳐 1149년(의종 3)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랐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여 오언시(五言詩)의 신인(神人)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로부터 제주 고씨(濟州高氏)는 고려조(高麗朝)에서 9상서(尙書) 12한림(翰林)의 명현(名賢)을 배출하였고, 조선조(朝鮮朝)에서도 수많은 인재(人才)를 낳아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또는 학행(學行)과 충효(忠孝), 의열(義烈) 등으로 역사를 수(繡) 놓아 탐라왕족(耽羅王族)으로서의 긍지(矜持)를 세습(世襲)하며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져왔다.
가문의 중요 인물
고득종(高得宗)
자 자부(子傅). 호 영곡(靈谷). 시호 문충(文忠). 전서공(典書公) 신걸(臣傑)의 손자(孫子)이며 상장군(上將軍) 봉지(鳳智)의 아들로, 1413년(태종 13) 효행(孝行)으로 천거받아 직장(直長)이 되고, 이듬해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하여 대호군(大護軍)·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 등을 지낸 다음, 1427년(세종 9)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 1437년 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가 되었다.
이듬해 호조참의(戶曹參議)로 관압사(管壓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39년에는 통신사(通信使)로 가서, 일본 왕의 서계(書契)를 가지고 돌아왔다. 1441년 예조참의로 있을 때,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함부로 약재(藥材)를 청하고 또한 이만주(李滿住)·동범찰(童凡察)의 처치를 요구한 일 때문에 귀국하자 강음현(江陰縣)에 유배되었으나, 2년 뒤에 풀려나와 중추원동지사(中樞院同知事)·한성부판윤 등을 지냈다. 1448년 도전운사(都轉運使)가 되어 미곡의 조운(漕運)에 힘썼다. 문장과 서예에 뛰어났다.
고태필(高台弼), 고태정(高台鼎), 고태보(高台輔), 고태익(高台翼) 4형제
득종(得宗)의 아들 태필(台弼), 태정(台鼎), 태보(台輔), 태익(台翼) 4형제가 모두 조선조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고여(高呂)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 여(呂)는 나라에 공(功)을 세워 고성부원군(高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고형산(高荊山)
자 정숙(靜叔). 시호 위열(威烈). 해남(海南) 출생. 화전군(花田君) 인비(仁庇)의 8세손(世孫)이며 사신(思信)의 아들로서, 1483년(성종 14) 별시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연산군 때 해주목사, 함경북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중종 때 형조 ·호조 ·병조의 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이르렀다. 1519년(중종 14) 남곤(南袞) 일파와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조광조(趙光祖) 세력을 숙청하였다. 곧고 근검한 성품으로, 수리(數理)에 밝아 행정능력이 뛰어났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고경명(高敬命)
국난(國亂)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 가문(家門)의 의맥(義脈)을 살려 충렬(忠烈)로 전쟁에 공을 세운 충렬공(忠烈公) 경명(敬命)은 제주 고씨(濟州高氏)가 자랑하는 인물(人物)이다.
중종(中宗) 때 남화풍(南畵風)으로 호랑이 그림을 잘 그린 하천(霞川) 운(雲)의 손자(孫子)인 경명(敬命)은 부친(父親) 맹영(孟英)이 명종조(明宗朝)에 호조 참의(戶曹參議)를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가 이양(李樑)의 일파로 몰려 유배당하는 불운을 맞자 아보지를 따라 담양(潭陽)에 옮겨 살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늙고 병든 몸으로 의병(義兵)을 일으키고 ⌜나라 운수가 중도에 비색(丕塞)하여 섬 오랑캐가 밖에서 개떼 덤비듯 한다.⌟로 시작되는 거의(擧義)의 격문(檄文)을 팔도(八道)에 돌려 구국(救國)의 염원으로 일어난 의병(義兵)을 이끌고 왜병(倭兵)과 싸우다 금산(錦山)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도망가자는 참모의 말을 뿌리치고 차남 인후(因厚)와 함께 의열(義烈)로 죽음을 맞이했다.
고종후(高從厚)
조선중기의 의병장. 경명(敬命)의 아들. 1577년(선조 1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현령(縣令)에 이르렀다. 1592년, 임진왜란 애 아버지 경명(敬命)을 따라 의병을 일키고 금산(錦山) 싸움에서 아버지와 동생 인후(因厚)를 잃었다. 이듬해 다시 의병을 일으켜 스스로
복수군(復讐軍)이라 칭하고 여러곳에서 사웠고 위급해진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다가 성이 왜병에 의해 함락되자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는데, 세상에서는 그 삼부자를 삼장사(三壯士)라 불렀다.
선조(宣祖)는 경명(敬命) 일가(一家)의 죽음을 슬퍼하며 광주(光州)에 사당(祠堂)을 짓게하여 포충사(褒忠祠)로 사액(賜額)하고 경명(敬命)에게는 충렬공(忠烈公) 종후(從厚)에게는 효열공(孝烈公), 인후(因厚)에게는 의열공(義烈公)이라 시호(諡號)를 내렸다.
고언백(高彦伯)
박진(朴晋), 황진(黃晋), 원호(元豪)와 더불어 임진왜란의 4대명장(四大名將)으로 손꼽히는 언백(彦伯)은 교동향리(喬桐鄕吏)로 있다가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변장(邊將) ·군관(軍官)을 지냈다. 임지왜란 때 영원군수(寧遠郡守)로서 양주에서 왜병 42명을 참살, 그 공으로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었다. 이천(利川)에서 적군을 격파하고 경기도방어사(京畿道防禦使)가 되어, 내원한 명나라 군사를 도와 서울 탈환에 공을 세웠고, 이어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양주 ·울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 다시 경기도방어사가 되어 참전하였고, 1604년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제흥군(濟興君)에 봉해졌다. 1609년 광해군이 임해군을 제거할 때, 그의 심복이라 하여 함께 살해되었다.
高道寧(고도영)의 전설.
직지사(直指寺)의 창건 유래.
魏(위)나라의 사신이 고구려에 왔다가 아름다운 여인 고영도를 보고 관계하여 아들 阿道(아도)를 낳았다.
아들 阿道(아도)는 자라서 위나라에 아버지를 찾아가 열심히 佛道(불도)를 닦고 新羅(신라)에 포교를 하로 들어와 一善(일선)에 있는 毛禮(모례)의 집에서 숨어 살면서 포교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때마침 신라의 공주가 병이 걸려 아무약도 듣지 않고 어떤 의원도 고치지 못하였데, 공주의 병은 날로 깊어만 갔다.그때 아도가 가서 공주의 병을 말끔히 고쳐주니 왕이 너무나 기뻐 아도에게 佛敎(불교)를 포교할 것을 허락해 주었다.그러나 왕이 죽자 불교 배척이 심해지고 阿道(아도)도 박해를 받게 되었는데, 아도는 다시 一善(일선)에 돌아와 毛禮(모례) 집 지하실에서 일생을 거기서 제자를 기르며 보냈다.아도가 죽기 전, 제자들에게 황악산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거기 좋은 절터가 있으니 그곳에 절을 지으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힘을 모야 스승의 유언대로 황악산에 절을 짓고 절 이름을, 阿道(아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이라는 뜻에서 直指寺(직지사)라고 하였다 한다.
高裕(고유) 선생의 전설.
옹기장수의 옹기 값 변상 소송.
전 재산을 모두 팔아 옹기장수로 나선 사람이 길을 가다가 나무 밑에서 옹기 짐을 막대기로 받쳐 놓고 쉬다가 잠이 들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지게가 넘어져 옹기가 모두 깨어져버렸다.
한순간에 전재산을 잃어 살길이 막연해진 옹기장수가 원님인 高裕(고유)에게 가서 옹기 값을 받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소지(訴紙)를 올렸다.
고유는 한참 생각하다가, 그 동내 부자인 어장 주인들을 불러 모아, 그들이 뱃길에 유익한 바람이 불기를 기도하였기 때문에 바람이 불어 옹기장수의 옹기들이 깨어졌으므로, 옹기 값을 물어 주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1722(경종 2) ∼ 1779(정조 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순지(順之), 호는 秋潭(추담) 상주출신. 한익(漢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석(師錫)이고, 아버지는 규서(奎瑞)이며, 어머니는 김익남(金益南)의 딸이다. <출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高裕(고유) 선생의 전설
어린 사또高裕(고유)가 13세 어린 나이로 고을 원으로 부임해 오자, 고을 이방들이 그를 어리다고 얕보았다.
이를 알고 그가 이방들에게 수숫대를 뽑아 오게 해서“ 통째로 소매 속에 넣어 보라. ” 고 하였다.
이방들이 모두 넣지 못하자,“ 한 살 먹은 수숫대도 소매 속에 넣지 못하면서, 열세 살이나 먹은 한 고을의 목민관을 마음대로 하려 드느냐? ” 고 호통을 쳐서 이방들을 제압하였다고 한다.
그 후 아무도 어린 원을 능멸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1722(경종 2) ∼ 1779(정조 3).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순지(順之), 호는 秋潭(추담) 상주출신. 한익(漢翊)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석(師錫)이고, 아버지는 규서(奎瑞)이며, 어머니는 김익남(金益南)의 딸이다.
高敬命(고경명) 장군의 일화.
금산전투에서 일생 마침
고경명은 당초 계획을 바꿔 금산에 방어진을 치고 유팽로에게 지시하여 호서의병장 조헌에게 전서를 보내 합세할 것을 건의하였다. 첫 전투에서 고경명은 선봉대를 앞세워 공격했는데 군장 김정립의 말이 부상당해 후퇴하였다.
그러나 이날 저녁 적병이 잠든 후 용맹스런 30여명을 성 밑에 잠복시킨 뒤 성 밖에 사가를 모두 불태워 서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튿날 다시 공격을 시작 관군은 북문을, 의병은 서문을 향해 쳐들어갔으나 관군이 먼저 집중공격을 받아 무너지자 의병도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이 와중에 유팽로가 고경명에게 피할 것을 외치나 1592년 고경명은 둘째 아들 인후와 함께 몸을 감싼 채 최후를 맞았다.
고경명이 세상을 떠난 후 큰아들 종후가 의병을 일으켰고 능주에서는 최경회가 전라 우 의병을, 보성에서는 임계영을 중심으로 해 전라 좌 의병을, 남원에서는 변사정을 주축으로 적기의병군을 일으켰다. 모두 고경명 휘하의 의병들이었다.
고경명의 피가 의병운동에 불을 지펴 호남과 조선 땅은 고스란히 지켜졌던 것이다. 후학들은 조선조의 도통정맥을 따지면서 기묘사림의 조광조 이후 호남사상의 맥을 이은 이로 고경명을 꼽고 있다.
高敬命(고경명) 장군의 일화.
임진왜란 발발로 의병장 활약
"이제 내 인생에 화룡점정을 할 때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리기로 한 제봉은 마음을 수습하고 정세변화를 보았다. 왜적의 진출은 속도가 빨라 4월 14일 부산진을 상륙해 5월에는 서울에 입성하니 위기였다. 게다가 이 어인 오판인가. 아니면 비겁한 체념인가 정부는 경성 함락 소식을 듣고 관군을 해체하는 우를 범하니 정치는 사분오열이었다.
나라가 위험에 휩싸이자 고경명은 아들 종후. 인후를 시켜 본주까지 도망쳐와 있는 군사를 이끌고 수원에 이르러 본주 목사 정윤우에게 붙여주고 돌아오도록 하였다. 당시는 관군이 후퇴해 흩어지고 수도 서울이 함락되어 선조가 의주로 파천한다는 소문이 나돌아 인심이 흉흉한데다 의병군과 관군간의 갈등이 심화된 상황이어서 의병 모집이 정말 어려웠다. 고경명은 두 아들을 앞세우고 30일 만에 6,000명을 운집시켰다.
곧장 의병군 편대를 정비해 담양을 출발해 전주에 도착 각 도의 수령과 민중에게 격문을 보냈다.
"국운이 비색하여 섬나라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국가가 무너질 지경에 이르렀는데 수령이나 관군들은 죽기를 두려워하여 도망치기 일쑤니 어찌된 일인가. 신하로서 왕을 잔학한 왜적 앞에 내버려둔단 말인가. 각 읍의 관군, 수령, 민중들이여, 무기를 들고 군량을 모으며 모두 분연히 일어설 때다. 구국을 위해 다 함께 목숨을 걸고 앞을 다투어 나설 줄로 믿는다."
페부를 찌르고 간담을 울리며 용기를 불어넣은 이 간절한 호소에 호응한 의병들은 담양을 출발해 태인을 거쳐 전주에 도착, 금산으로 향한다. 고경명 주력부대가 은진까지 진군했을 때 항간에는 적이 금산을 넘어 전주까지 침략할 것이라는 소문이 밀려왔다.
"전부는 호남의 근본인데 먼저 흔들리면 적을 제압하기 어려우니 먼저 본도부터 구해야 옳다."고 판단하였다.
高敬命(고경명) 장군의 일화.
1591년 동래부사로 재직 중 鄭澈(정철)이 탄핵 유배되자 鄭澈(정철)을 등용시켰다는 이유로 서인이 배척받기 시작하자 동래부사를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가 이듬해인 1592년 임진왜란으로 나라가 풍전등화의 어려움을 겪자 60세의 고령임에도 온 가족이 죽기를 각오하고 전 재산을 처분해 두 아들 같이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에 맞서 싸웠다.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평양으로 천도를 하는 등 온 나라가 위험에 처하자 다른 고관대작들은 서로 자기 한 목숨 살기위해 도망치기 바빴지만 고경명 장군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바로 의병을 모아 임금을 보필하고 왜적과 싸우고자 한 일이었던 것이다.
高敬命(고경명) 장군의 일화.
고경명 장군은 장군이라고 부르지만 칼 한 번 들어본 적이 없는 문인출신이다. 사간원 정언으로 있다 사가독서 중 이조판서 이량의 탄핵에 연루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되었다가 곧 파면되었으며 그 후 고향 광주로 내려와 압촌 마을에서 18년간 지내며 많은 문인들과 교류하였다.
당시 그와 교류를 나눈 인물들은 金麟厚(김인후), 奇大升(기대승), 鄭澈(정철) 등 이었으며 고경명은 식영정 20영을 짓고 林億齡(임억령), 김성원, 정철 등과 함께 식영정 사선(四仙)이라는 명성을 얻었고 현존하는 최고의 무등산 기행문 유서석록(遊瑞石錄)을 남겼다.
동래부사 高敬命(고경명) 선생의 일화.
高敬命(고경명)의 자는 이순(耳順)이고 호는 제봉(霽峯) 또는 태헌(苔軒)이라 하며 본관은 제주이다. 중종 28년(1533) 11월 30일 광주에서 태어났다. 시문에 능하여 명종 7년(1552)에 20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에 1등으로 급제, 진사가 되었고 명종 13년(1558)에는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준재였다. 이후 바로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예문관의 전적(典籍),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를 하였다. 그 다음 해에 외직 영암, 서산, 한산 등의 군수직을 역임하였다. 한편,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辯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고 승무원판교를 거쳐 동래부사가 되었던 것이다.
선조 23년(1590) 12월에 동래부사로 부임한 고경명은 이듬해 정월에 당시 일본에 통신사로 간 황윤길과 김성일 등이 부산포로 돌아왔을 때 이들의 이야기를 종합, 난이 터지면 순국 할 각오를 이때부터 준비하였던 것이다. 동래부사 시절 조정에서 서인들이 제거될 때 사직 하고 광주 향제에 은거하다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29일 담양 향리에서 사서들과 희맹하여 많은 의병을 모았다.
종사관 사제 안영, 유팽로와 더불어 50의 노구를 이끌고 선조의 행궁이 있던 평안도로 가고자 북상하는 중 금산에서 왜군을 맞아 싸우다 7월 9일 장렬히 순사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예조판서를 추증하였고 뒤에 좌찬성에 가증되고 시호를 충렬이라 하여 광주의 표충사, 금산의 성곡서원과 칠백의총의 종용사 및 순창의 화산서 원에서 제향이 받들어지고 있다. 시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나 이름을 떨쳤는데 저서로는 『제봉집』 『유서석록』등이 있다.
제주고씨 상계도
항렬표(行列表)
71
炯(형)
72
增(증)
73
鈺(옥)
74
源(원)
75
炳(병)
76
董(동)
77
報(보)
78
鏞(용)
79
淑(숙)
80
林(임)
81
奐(환)
82
淳(순)
83
銳(예)
84
澤(택)
85
桁(항)
86
燁(엽)
87
堯(요)
88
鎰(일)
89
海(해)
90
木敬(경)
91
炫(현)
92
載(재)
93
銘(명)
94
淡(담)
95
相(상)
96
熒(형)
97
土乇(탁)
98
健(건)
99
河(하)
100
業(업)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고씨(高氏)는 남한(南韓)에 총 91,384가구, 384,01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보는 곳으로 한다.
[출처] 高濟州氏(제주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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