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제주의 숨결을 보고, 느끼고, 걷다 설화와 자연의 길
작성일2022-09-29
작성자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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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정 긴 여운, 마라도
많은 사람이 마라도를 찾는 이유가 있다. 우리나라 최남단 이라는 상징성이다. 마라도는 동서 500m, 남북 1.2km로 길쭉한 고구마를 닮은 섬이다. 해안을 따라 섬 전체를 한바퀴 돌아도 고작 4.2km, 걸어서 1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이다. 그런데도 정해진 배 시간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마음이 조급하다. 그래서인지 여객선에서 우르르 쏟아지듯 섬에 내려선 사람들은 경보라도 하듯 종종걸음으로 섬을 한 바퀴 쓱 돌아본 뒤 짜장면 한 그릇을 삼키듯 들이켠다. 그러곤 허겁지겁 선착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이래서는 마라도의 참맛을 알기 어렵다. 마라도는 태곳적 자연의 속도로 만들어진 섬이 아닌가. 그러니 빠름에 길든 사람의 속도가 아니라 천천히 그리고 주의 깊게 살펴야 제대로 볼 수 있다. “자세히 보아야 / 예쁘다 / 오래 보아야 / 사랑스럽다 / 너도 그렇다”라고 노래한 나태주 시인의 시처럼 말이다. 현지 주민의 말에 따르면 마라도를 다녀간 사람 중에 섬을 다시 찾는 사람이 많다니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마라도 가는 배편은 모슬포 운진항에서 출발하는 ‘마라도 정기여객선’과 송악산항에서 출발하는 ‘마라도 가는 여객선’이 있다. 두 곳 모두 30분 정도 걸린다. 마라도에 가는 날, 때마침 바람이 거세다. 갑판에 서서 멀어져 가는 제주도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봉긋한 산방산 뒤로 한라산이 구름 이불을 덮고 누웠다. 제주도에서 한라산은 왕좌에 앉은 절대권력자 같은 존재이다. 제주도 어디에서나 고개만 들면 한라산이 선명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제주도 설화에 따르면 저 크고 높은 산을 설문대할망이 치마에 흙을 담아다가 만들었다고 한다. 그때 치마 사이로 흙이 한 줌씩 떨어졌는데 그것이 제주 전역에 흩어져 있는 오름이다. 제주도에는 360여 개의 오름이 있다.
배가 큰 바다로 나아가자 수평선에 펑퍼짐한 섬 하나가 펼쳐져 있다. 가파도이다. 최고 해발고도가 25m에 불과한 가파도는 우리나라에서 지대가 가장 낮은 섬이다. 가파도와 마라도는 바닷속에서 독립적으로 화산이 분화해 이루어진 섬으로 추정되지만 분화구는 찾아볼 수 없다. 출렁이는 파도를 헤치고 배가 마라도에 근접한다. 거대한 현무암 덩어리인 마라도의 해안은 병풍을 펼쳐놓은 것 같은 기암절벽이 장관이다. 그 절벽에는 파도가 침식해서 만든 해식동굴(海蝕洞窟)이 여럿 있다. 여객선이 살래덕 선착장에 배를 대려 하자 고빼기쌍굴과 대문바위가 검은 입을 크게 벌리고 여행객을 맞이한다.
기암절벽과 해식동굴의 환대를 뒤로하고 선창을 벗어난다. 가파른 언덕을 오르자 드넓은 초원과 그 너머 탁 트인 바다가 펼쳐진다. 시원한 풍경에 눈도 가슴도 상쾌하다. 산책로 한편에 할망당 표지판이 있다. 애기업개당이라고도 부르는 이것은 해녀들이 바다에서 물질할 때마다 안전하게 보살펴 주는 수호신 같은 존재이다. 요즘도 제사를 정기적으로 지낸다고 하는데 제단에는 누가 올려놓았는지 소주와 사탕이 놓여 있다. 할망당 가까운 곳에는 돌을 동그랗게 쌓아 불을 피우도록 만든 불턱도 있다. 해녀들이 물질할 때 몸을 녹이고 쉬는 곳이다.
마라도에는 의외의 풍경이 있다. 길게 늘어선 짜장면 가게이다. 이 거리는 일명 ‘블랙로드’로 불린다. 우스갯소리로 마라도에 짜장면을 먹으러 간다더니 실제로 마라도에는 짜장면 가게가 10곳에 이른다. 1997년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카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동통신 광고에 마라도가 등장한 이후 가게가 하나둘 문을 열어 성업 중이다. 하지만 마라도의 진미는 짜장면이 아니라 자연이 빚은 수려한 풍경과 천혜의 환경이다. 2000년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블랙로드 한편에 마라분교가 있다. 한때 30여 명이 모여 공부했다지만 지금은 텅 빈 교정에 태극기만 휘날린다.
마라분교에서 언덕을 오르면 마라도교회에 닿는다. 이곳 역시 ‘우리나라 최남단’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1984년에 지어져 지금까지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주민 수가 90명이 채 안 되는 작은 섬이지만 마라도에는 교회뿐만 아니라 절과 성당도 있다. 절은 바다가 바라보이는 곳에, 성당은 마라도 등대 아래에 있다. 성당은 마라도 주변에서 많이 잡히는 문어와 전복을 형상화해 독특한 외관을 자랑한다. 성당 앞에 있는 바다를 향한 큰 바위는 장군바위이다. 사람이 이 바위에 올라가면 파도가 세진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마라도에서 신성시하는 바위이다. 장군바위 뒤로 ‘대한민국 최남단비’와 마라도 등대가 있다. 1915년부터 불을 밝히고 있는데 세계 해도(海圖)에 제주도는 나오지 않아도 마라도 등대는 표시될 만큼 매우 중요한 등대이다. 등대 앞 절벽에는 선인장이 군락을 이룬다. 강한 바람 탓에 키가 자라지 못한 것이 안쓰럽다. 그 뒤로 승객을 가득 태운 여객선이 거친 파도를 헤치며 다가온다. 제주도의 지붕, 한라산이 아스라하다.
제주도 남녘 해안을 수놓은 자연의 걸작
마라도행 여객선에서 봤던 명승 제주 서귀포 산방산으로 향한다. 종처럼 봉긋한 종상화산체인 산방산은 해상에서 볼 때보다 훨씬 우람하다. 제주도의 절대권력자는 분명 한라산이지만 맏형은 산방산이다. 물론 전설에 따르면 산방산은 한라산보다 늦게 만들어졌다. 포수에게 화살을 맞은 옥황상제가 홧김에 한라산 꼭대기를 뽑아 던진 것이 산방산이 되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실상은 제주도의 기초를 이루는 서귀포층의 대표 격이 산방산이다. 산에 굴이 있어 산방산으로 불리는 이 산은 제주도의 경치 좋은 10곳을 일컫는 영주(제주도의 옛 이름) 10경 중 제8경이다. 산 중턱에 있는 산방굴사까지 등산로가 놓여 있어 쉽게 오갈 수 있다. 산방굴사 앞에 서면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용의 머리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을 닮은 용머리해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용머리해안은 첫인상부터 매우 강렬하다. 전설에 따르면 이 기이한 형세를 허투루 여기지 않은 이가 있었다. 중국 진시황제가 제주도에서 장차 왕이 태어날 것을 알고 풍수사 호종단을 보내 혈을 끊으라 한 것이다. 이에 호종단이 혈맥을 찾아 칼로 내리치자 검붉은 피가 솟았다고 한다. 오늘날 용머리해안의 탁한 주황 빛깔은 그때 치솟은 피가 주변을 물들인 핏자국인 셈이다. 용머리해안은 지질학적 가치 또한 매우 높다.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화산체로 한라산과 용암대지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에 일어난 수성화산(水性火山) 활동으로 형성된 것이다.
자연이 만든 이 걸작은 흡사 미국의 그랜드캐니언을 축소해 놓은 것 같다. 미로처럼 이어진 비밀스러운 해식동굴과 억겁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 암벽을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천연기념물 제주 중문·대포해안 주상절리대도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졌다. 주상절리는 화산에서 분출한 용암이 빨리 식으면서 만들어진 육각형 단면의 규칙적인 돌기둥이다. 주상절리대는 바다가 격노할 때 더 아름답다. 주상절리에 파도가 부딪치면 하얀 물거품이 이는데 생크림을 뒤집어쓴 것처럼 탐스럽다. 특히 에메랄드빛 바다와 검은 주상절리, 하얀 물거품의 색감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환상의 조합이다.
태곳적 흔적을 마주하다
앞서 제주도에 360여 개의 오름이 있다고 했다. 이들 오름가운데 거문오름은 ‘오름의 황제’로 꼽히는 곳이다. 오름의 황제는 규모도 으뜸이다. 해발고도는 456m, 둘레는 4,551m에 이른다. 그에 걸맞은 훈장도 여럿 지니고 있다. 천연기념물이자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며 2009년 환경부 선정 생태관광 20선, 2010년 한국형 생태관광모델 10선에 뽑힌 바 있는 거문오름은 설화와 자연의 길 핵심 구간이다.
거문오름의 이름은 ‘신(神)’을 뜻하는 ‘검’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우거진 숲이 검게 보여 ‘검은오름’으로 불리다가 거문 오름이 됐다는 설이 있다.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숲이 매우 울창해 신령스럽다는 점이다. 거문오름에서 분출한 용암은 15km 정도 떨어진 월정리까지 흘러갔다. 이때 크고 작은 용암동굴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이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이다.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에 속하는 용암동굴 가운데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동굴은 벵뒤굴, 웃산전굴, 북오름굴, 대림굴, 만장굴, 김녕굴, 용천동굴, 당처물동굴이다. 거문오름 탐방 코스는 분화구 내의 알오름과 역사 유적지를 볼 수 있는 분화구 코스(약 5.5km, 2시간 30분 소요), 주변을 조망하는 정상 코스(약 1.8km, 1시간 소요), 두 코스를 완주하는 전체 코스(약 10km, 3시간 30분 소요)로 나뉜다.
전체 코스는 그 모양이 태극을 닮아 태극길이라고도 부른다. 탐방은 예약자만 할 수 있고 코스 선택은 현장에서 한다. 이번 탐방은 분화구 코스를 선택했다. 오름 입구를 지나 삼나무 숲으로 향한다. 숲속은 햇빛이 들지 않아 어둑어둑하다. 가파른 삼나무 숲길을 10여분 정도 오르자 비로소 하늘이 열린다. 안타깝게도 해무가 짙어 정상 전망대에서조차 한라산을 볼 수 없다. 울창한 삼나무군락지를 지나 2km에 이르는 용암 협곡을 지난다. 이 협곡은 용암동굴의 천장이 무너지면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협곡 주변은 바위와 나무, 넝쿨과 이끼가 얽히고설켜 영화 ‘아바타’ 속 풍경 같다. 화산섬 제주도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이런 독특한 원시 지형을 곶자왈이라 부른다. 곶자왈에는 바위틈에서 선선한 바람이 뿜어져 나오는 풍혈(風穴)도 있다. 겨울에는 따뜻한 바람이 나온다. 큰 바위에 타조알만 한 크기의 화산탄이 박힌 모습은 지구과학 교과서에서 본 사진 그대로이다. 현무암을 쌓아 만든 숯가마 터, 제주4·3 당시 피란처였던 곳은 태평양전쟁을 위해 일본군이 구축한 갱도 진지와 일본군 주둔지였다.
만장굴은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거문오름 용암동굴계에 속한 7개의 동굴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만장굴은 ‘아주 깊다’라는 뜻처럼 총연장 약 7.4km를 자랑하는 용암동굴이다. 그 가운데 일반에게 공개되는 구간은 아쉽지만 약 1km이다. 비공개 구간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 ‘2022 세계유산축전-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이 10월 1일부터 16일까지 거문오름 용암동굴계 등지에서 진행된다. 축전 기간에 맞춰 비공개 구간인 거문 오름 용암동굴계 동굴이 일반에 공개된다.
글, 사진. 임운석(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