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郭玄風氏(현풍곽씨)
본관(本貫): 현풍(玄風)
시조(始祖): 곽경(郭鏡)
유래(由來):
현풍곽씨(玄風郭氏)는 송(宋)나라에서 귀화(歸化)한 성씨(姓氏)로 알려저 있으며, 중국(中國) 관서(關西) 홍농(弘農) 출신인 곽경(郭鏡)이 고려(高麗) 인종(仁宗)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를 지내고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포산군(苞山郡)에 봉해졌으므로 처음엔 관향(貫鄕)을 포산(苞山)으로 하였으나 조선조(朝鮮朝)에 이르러 포산현(苞山縣)이 현풍(玄風)으로 개칭(改稱)됨에 따라 현풍(玄風)을 본관(本貫)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현풍곽씨(玄風郭氏)는 고려중기(高麗中期)에서 조선조(朝鮮朝)에 이르기까지 충(忠)·(孝)·(烈)의 가통(家統)을 이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代表的)인 도덕가문(道德家門)으로 알려졌다.
시조(始祖)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적성면 무건리에 있으며 매년 11월 둘째 일요일에 향사하고 있다.
가문의 중요 인물
곽기정(郭其正)
시조(始祖) 의 현손(玄孫) 기정(其正)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해서 사문을 빛냈다.
곽응(郭膺)
기정(其正)의 아들 응(膺)은 충렬왕조(忠烈王朝)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와 감찰어사(監察御史)를 지냄으로써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또한 임진왜란 때 김 면(金 沔)이 의병을 일으키자 그 막하에 들어가 공을 세웠고,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안음 현감(安陰縣監)으로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과 함께 호남(湖南)의 목구멍이라던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자 호상(胡床)에 걸터앉아서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는 무저항으로 죽음을 당했다.
그의 아들 이상(履常)·이후(履厚)도 그 아버지를 안고 적을 꾸짖다가 죽음을 당했고, 딸 이문호(李文虎)의 아내도 남편이 포로가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일문삼강(一門三綱)>의 가문으로 일컬어져 나라에서 정려(旌閭)를 세워 표창하였다.
곽재우(郭再祐)
목사(牧使) 월(越)의 셋째 아들 재우(再祐)는 현풍 곽씨(玄風郭氏)가 자랑하는 인물로 1552년(명종 7) 의령현(宜寧縣) 세천리 외가 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질박(質朴)하고 효성이 지극했으며, 일찍이 남명(南溟) 조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는데 조식이 자기 외손녀를 재우의 아내로 삼게 하였다. 1585년(선조 1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한 재우는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 때문에 파방되고 나이 40이 넘자 벼슬을 단념, 낚시질로 세월을 보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아버지 월의 무덤을 찾아가 “아버지께서 만약 계셨다면 왜놈들의 창궐이 어찌 걱정 되겠습니까”하고 울며 하직한 후 임진년 4월 27일에 의병을 일으켜 항상 붉은 비단으로 만든 첩리를 입고 스스로 <천강홍의대장군(天降洪衣大將軍)>이라 칭하면서 의령· 삼가· 합천· 현풍· 창녕· 영산 등지에서 크게 무공을 세웠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는 경상좌도 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로 창녕의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켰고 관찰사 김수와의 불화로 대관(臺官) 홍여순(洪汝諄)의 탄핵을 받아 영암으로 유배되기도 했으며,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이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죽이려 하자 신구(伸求)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혼탁한 조야(朝野)의 기강이 문란함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 비슬산(琵瑟山)으로 들어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솔잎을 씹으며 일생을 마쳤다.
곽재겸(郭在謙)
재우(再祐)의 종형(從兄)인 재겸(在謙)은 임진왜란 때 금강 방어에 전공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에는 재우와 함께 화왕산성에서 의병을 거느리고 싸워 부호군(副護軍)에 임명되었다.
곽자방(郭自防)
자방(自防)은 의병장 조 헌(趙 憲)의 휘하에 들어가 금산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순절하여 현풍 곽씨의 의맥(義脈)을 이었다.
곽종석(郭鐘錫)
고종 때의 거유(巨儒) 종석(鐘錫)은 이황(李滉)의 학문을 계승한 스승 이진상(李震相)에게 성리학을 이어받아 이기설(理氣設)을 주장한 학자로 한일합방이 되자 고향에 은거하다가 3·1운동 때는 전국 유림들의 궐기를 호소했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호소하는 장서(長書)를 지어 만국평화회의에 보내는 등 민족자결원칙에 의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하여 충의의 가문인 현풍 곽씨(玄風郭氏)를 더욱 빛냈다.
郭安邦(곽안방)선생의 정설.
되돌려 보낸 방울
공이 벼슬길에 있을 때, 말과 행동이 얼음같이 맑고 깨끗하여 흠잡을 대 없이 청백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 올 때는 타고 오는 말 한 필뿐이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때문에, 사람들은 선생이 태수인지 조차도 몰랐다고 한다.
오는 도중 고갯마루에서 쉴 때 어린 종 하나가 방울을 갖고 노는 것을 보고 공은 크게 놀며
「이것도 공적인 물건이다. 크고 작은 것을 따질 수 없이 공적인 물건은 갖아서는 아니 된다. 어서 갖다 놓고 오너라.」하며, 즉시 차고 있는 것을 풀어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郭期致(곽기치)선생의 일화.
곽기치(郭期致 ) 효자 정문의 신기한 영험 :
남원군(南原郡)곽기치(郭期致)는 남원군 동면(東面) 자연동(紫烟洞)에서 출생하였다.
벼슬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효성이 지극하여 새벽 일찍 부모에 문안드리고 밤이면 잠자리를 보아 드리는 혼정신성(昏定晨省)의 정성을 다 하니 사람들은 그를 하늘이 낳은 효자라 칭찬해 마지않았다.
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백약이 무효하거늘 하루는 엄동설한에 쑥국이 먹고 싶다 하므로 유곡리(酉谷里) 상산(霜山) 깊은 산골짝에 들어가 몇 질로 쌓인 눈을 헤치고 기어이 쑥을 얻어 어머니께 끓여 드렸더니 그 길로 어머니의 병환은 차도가 있어 마침내 완치되었다.
상산은 자연동에서 25리(약 10키로)나 되는 깊은 산중인데 추운 겨울에 쑥을 캐낸 것은 그의 지극한 효성이 하늘에 통하심이라 하였다.
또 하루는 추운 겨울에 생대추를 먹고 싶어 원하시므로 뜰에 심어있는 대추나무 밑에 맑은 물을 한 그릇 떠놓고 3일간 기도하였더니 난데없이 지나가는 행상꾼이 생대추를 팔러 온지라 그 대추를 어머니께 드렸더니 이것도 하늘의 도우심이라 하였다.
그뿐 아니라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목숨이 위독하던 중 갑자기 잉어가 먹고 싶어 하시므로 두꺼운 얼음을 깨고 물 속으로 들어가 기어이 잉어를 잡아오니 사람들은 그의 효성에 탄복, 곽기치는 하늘이 낳은 효자라 칭찬한 나머지 이후로는 그를 곽호자(郭孝子)라 부르게 되었다.
어느덧 그의 효행이 위에까지 아는 바 되어 향당(鄕黨) 유림들의 추천으로 순조(純祖16: 1816) 효자 정문이 하사되어 자연동 마을 앞에 그의 정려(旌閭)가 전해 온다.
그러나 후손들이 마을에 없어 그의 무덤과 정려를 지금은 동민들이 보호하고 제사를 드리고 있다.
郭再祐(곽재우) 장군의 설화.
관재우장군은 遠接使(원접사)가 부정을 저질러 나라에 큰 해를 끼쳤으므로 그를 처벌하라는 상소문을 올렸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그 상소를 묵살하고 장군에게는 더 크고 막중한 벼슬을 내렸다.
그러자 관장군은「임금이 신하의 의견과 계책을 들어주지 않으면, 그 신하는 물리치는 것이 옳고, 신하가 임금께 말씀드려 그 의견이 행해지지 않으면 물러나는 것이 옳습니다.
신의 계책을 들어 주지 않으면서 큰 벼슬을 주는 것은 사람 쓰는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데도 중한 책임을 맡는 것은 임금 성기는 도리가 아니니 신은 물러갑니다.」
그리고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푸른 솔 바위 가에서 배고프면 솔잎을 먹고, 흰 구름 피어오르는 곳에서 목마르면 샘물을 마시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한다.
郭再佑(곽재우) 선생의 전설.
곽재우의 전투에 대한 설화
곽재우는 기백이 강하고 재주가 신출기몰 해서 강을 뛰어 넘을 정도로 비범했는데, 낙동강과 남강이 합쳐지는 기강나루에서 왜병과 대적할 때 밤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옷을 입혀 놓고 줄에 매달아 불을 붙여 흔들어서 수백 명의 군사가 강을 막고 서 있는 것처럼 위장전술을 써서 왜병이 겁에 질려 도망가니 별로 힘들이지 않고 승전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郭再佑(곽재우) 선생의 전설.
적마를 다룬 곽재우
용마소(龍馬沼)에서 나온 적마(赤馬)는 너무나 사나와 어른도 잡지 못했는데 열세 살의 어린 곽재우가 잡아서 탔을 정도로 비범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 곽재우가 붉은 옷을 입고 산봉우리를 날아다녀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렸고, 왜병들은 곽재우의 모습만 보고도 기가 질려 도망쳤다고 한다.
郭再祐(곽재우) 장군의 일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유명했던 곽재우 장군은 고령에서도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장군은 수가 굉장히 많은 왜군들과 고령지역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장군은 이 지역을 사수하지 못하면 전세가 불리해질 것이라 판단하여 수적으로 열세한 휘하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다짐했다.
장군은 왜놈 군대를 살펴보며 말하기를, “비록 저들은 수적으로 우리보다 많다고 하나 장수를 처치하면 저들의 기세는 일시에 무너지리라.”고 하였다.
이에 곧 진격하여 왜군들과 대적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장군은 곧장 왜놈 장수를 향해 힘껏 말을 달려 나가 싸웠다. 장군은 귀신같은 칼솜씨와 용맹한 기상으로 곧 왜놈 장수의 칼을 빼앗아 목을 베었다.
왜놈들은 장수의 목이 베어지는 것을 보고 진열이 흐트러지며 우왕좌왕하다가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왜놈들은 앞 다투어 도망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낙동강이 넘쳐흘러 못을 이룬 곳이 있었는데, 곽재우 장군이 말을 달려 도망가는 왜놈들을 향해 진격하자 왜놈들은 못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왜놈이 많이 빠져 죽었다고 하여 그곳을 왜양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곽재우 장군은 성산면 일대에서 왜군과 대치하여 전멸하는 큰 전승을 이루었다.
먼 훗날 이 못 아래를 파 보니 수십 짐 분량의 많은 유골이 나왔다고 한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郭再祐(곽재우) 장군의 일화.
그의 처사 적 삶은 세속과 어느 정도 절연한 것이었지만, 일정한 경제적 기반 없이는 영위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광해군일기]에 실린 그의 졸기(卒記)에서는 이때 그가 그냥 은둔한 것이 아니라 농업경영에 힘써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고 기록했다(1617년(광해군 9) 4월 27일).
곽재우의 재력은 실제로 작지 않은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이후 곽재우의 전공을 보고한 장계에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은 그의 집안이 매우 부유했는데 의병을 모집하는 데 재산을 모두 희사(喜捨- 목적을 위해 기꺼이 돈이나 물건을 내놓음)했다고 기록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당시 의병활동에 참가한 양반들은 대부분 수백~수천 마지기(斗落)1)의 토지와 200~300명의 노비를 소유했다. 이런 측면들을 고려하면, 곽재우도 그것과 비슷한 경제력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마지기(斗落)
부정한 방법이 아닌 이상 축재는 나쁜 일이 아니다. 김성일이 지적했듯이, 중요한 사실은 그런 재산을 창의(倡義)하는 데 쾌척했다는 것이다. 조선 최대의 국난은 곽재우가 은거한 지 4년 만인 1592년 4월에 발발했다.
그때 곽재우는 40세의 장년이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그는 지체 없이 행동에 나섰다.
郭再祐(곽재우) 장군의 일화.
10대 후반부터 문무를 함께 연마하던 곽재우는 32세 때인 1585년(선조 18) 별시에서 제2등이라는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선조는 그의 답안에 불손한 내용이 있다고 판단해 그 별시의 합격을 모두 취소시켰다. 기록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그는 크게 낙망했을 것이다.
불행은 거듭 찾아왔다. 이듬해 8월 6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이다.
곽재우는 선산인 현풍 신당(新塘)에서 삼년상을 치르고 1588년에 탈상했다. 36세였다.
그 뒤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의령 동쪽 남강(南江)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인 기강(岐江) 근처 둔지(遯池)에 정자를 짓고 낚시질을 하면서 지냈다.
郭再祐(곽재우) 장군의 일화.
곽재우는 1567년 15세의 나이로 만호(萬戶) 김행(金行. 본관 상산)의 둘째 딸과 혼인했다. 이 혼사는 그의 자질과 그것에 대한 인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장인 김행은 당시의 대표적인 학자인 남명 조식(曺植, 1501~1571)의 사위였고, 따라서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사위가 된 것이었다.
손위 동서도 저명한 성리학자로 대사헌ㆍ대사성 등을 역임한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1540~1603)이었다. 조식은 두 외손사위를 직접 선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망우집] <연보>). 인물을 보는 그의 안목은 정확했다.
곽재우는 18세 때인 1570년(선조 3)부터 활쏘기와 말 타기ㆍ글쓰기 등을 고루 익히고 병법서도 공부했다. 1575~76년에는 의주목사에 임명된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서 살았으며, 1578년(선조 11)에는 명에 사신으로 파견된 아버지를 수행해 중국 북경에 다녀왔다.
이때 중국에서 가져온 비단은 그 뒤 임진왜란에서 그의 상징이 된 홍의(紅衣)의 옷감이 되었다.
郭再祐(곽재우) 장군의 일화.
임진왜란 당시 전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국운을 되살린 의병장‘’홍의 장군 곽재우’는 국난의 어려움 속에서도 나 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여 목숨을 걸고 의병운동에 앞장섰던 장군이다.
곽재우장군과 의병의 활약은 바다에서 이순신장군의 수군의 활약과 더불어 일본이 임진년 조선침략전쟁에서 패배한 대표적인 2대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郭再勳(곽재훈) 가문의 4효자.
사효자굴
달성군 현풍면 솔례에는 현풍 곽씨 집안에서 태어난 효자 열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십이 정려각(十二旌閭閣)이 있고, 그 중에 특히 4 효자의 정려가 참배하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달성군 유가면 양동 산중턱에 있는 자연 석굴에는 ‘사효자굴’이라고 새겨져 있는 동굴이 있다. 이 두 곳에서 기리는 4 효자는 바로 서기 1592년(선조 25년) 솔례에 살고 있던 가난한 선비 곽 재훈(郭再勳) 노인의 네 아들로 결(潔), 청(淸), 형(洞), 호(浩)를 가리킨다.
곽 노인은 지병인 해소병 으로 육 년 동안이나 병석에 누워 네 아들의 극진한 간호를 받고 있었다. 평화롭던 이 마을에도 임진왜란의 거센 바람이 몰아쳐 와서 왜군들의 노략질을 피해 뿔뿔이 흩어져 피난을 가야 했다. 왜군이 점점 가까이 온다는 급보와 함께 마을 사람들도 대부분 피난을 떠나자, 곽씨 4 헝제는 어찌할 줄을 몰랐다. 병든 아버님을 험한 피난길로 모시고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이를 눈치 챈 아버지 곽 선비는 네 아들을 불러 앉혔다.
“너희들은 어찌 피난을 가지 않느냐? 나는 이미 늙고 병들어 자리를 뜰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상 대대로 살아 온 고향과 선영을 두고 갈 수 없으니 너희들은 어서 피난을 떠나거라.”
4 형제는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아버님, 그럴 수는 없읍니다. 어찌 저희들이 아버님 곁을 떠날 수 있겠읍까? 아버님께서 피난을 떠나시지 않으시면 저희들도 아버님과 함께 여기에 남겠읍니다.”
맏아들 ‘결’이 마루에 엎드려 통곡했다. 그러자, 둘째 아들 ‘청’이
“아버님, 소자가 아버님을 모시겠읍니다. 어서 소자의 등에 오르소서.” 하며, 간청을 했다. 지그서 눈을 감고 4 형제의 간청을 듣고 있던 곽 선비는 자기가 떠나지 않으면 아들들도 떠나지 않을 것 같아 아들의 등에 업혔다.
아버지를 모신 4 형제는 동쪽에 있는 지금의 비슬산으로 들어갔다. 병환 중인 아버님을 모사고 가는 피난길이라 깊숙이 들어갈 수가 없어 산중턱에 잠서 머무르면서 편안히 모실 장소를 찾아 헤맸다. 얼마 동안을 헤매다가 산중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제법 널찍한 자연 석굴을 발견하게 되었다.
아버님을 이 굴 속에 옮겨 모시게 된 4 형제는 풀을 뜯어 깔아 잠자리를 만들고, 서로 번갈아 가며 음식을 구해 오는 등 극진히 모시는 바람에 곽 선비는 그렇게 불편하지가 않았다. 약초를 캐어 잡수시게 하려고 온산을 헤매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굴속에서 내려다보이는 마을에 왜적들이 오락가락하는 것이 보였다. 4 형제는 걱정이 되있다. 그렇다고 굴을 빠져나와 다른 곳으로 옮기기에는 너무 늦었다. 병환 중인 아버님 때문에 걸음이 늦어지고 얼마 안 가서는 잡힐 것이 뻔했다. 모든 것을 하늘의 뜻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왜적들은 산 아래까지 다가오더니 숲속으로 난 길을 발견하고 왜적 서너 명이 올라왔다. 한참 후에 굴을 발견한 그들은 굴 밖에서 소란스럽게 지껄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만 같았다. 맏아들 ‘결’이 “내 잠깐 밖에 나가 보고 올 테니 아버님을 잘 모셔라.”
하며 밖으로 나가려 하자, 둘째 ‘청 ’ 이 형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자기가 나가려 했다.
세째와 네째도 서로 먼저 나가 살펴보겠다고 옥신각신하였다.
이 모습을 지켜본 곽 선비는 4 형제의 우애와 용기에 감동하며 속으로 한 없이 울었다.
“얘들아, 내가 나가 보고 오겠다.”
“아버님, 아니 되옵니다. 그럴 수는 없읍니다.”
맏아들 ‘결’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왜놈들과 마주친 ‘결’은
“이 동굴 안에는 병든 아버님이 계시니 소란스럽게 굴지 말고 돌아가렷다.” 하며 호통을 쳤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왜적은 결을 한 칼에 베어버렸다. 결의 비명 소리를 들은 아버지와 동생은 분함을 참지 못하여 치를 떨었다. 아버지는 너무 화가 솟구쳐 그만 해수병으로 인한 기침이 발작되었다. 기침 소리를 듣고, 돌아가려던 왜적 들은 돌아서서 다시 굴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그 순간 둘째 아들‘청’이 칼을 들고 나와 왜적에게 달려들었으나 끝내 목숨을 잃었고 셋째도 역시 그랬다.
그 다음 마지막 네째도 아버지를 보호하기 위해 왜적들이 굴속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나가 힘껏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고 말았다. 4 형제를 처참하게 죽인 왜적들은 계속되는 기침소리를 듣고 굴속으로 들어와 보니 백발이 성성한 한 노인 이 오랫동안 앓은 모습을 보이며 누워 있었다.
이 때 왜적 한 놈이 칼을 빼들고 해치려하자, 대장인 듯한 왜적이 앞을 가로막고 중지시켰다. |
“이 왜놈들아! 너희 놈들은 부모도 가족도 없느냐, 이 짐승 같은 놈들아! ”
처참히 죽어간 아들들의 시체를 향해 기어가는 곽 선비의 모습을 본 왜병 대장은 4 형제가 병든 아버지를 살리려고 차례로 나와 죽은 것을 깨닫고 무릎을 꿇어 경례를 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는 노인의 등에다
“하늘이 내린 4 효자의 아버지이니 그 누구도 절대로 헤치지 말라.” 는 글을 남기고 떠났다.
왜란이 평정 되고 4 형제의 죽음이 알려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은 4 형제를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큰 효자라 하고 칭송을 아끼지 않았고, 선조 임금께 서도 이 이야기를 듣고 정려를 세우도록 한 것이었다. 4 효자가 차례로 숨 진 석굴은 지금도 한을 간직한 채 산중턱에 자리 잡고 있으니, 그 후로 이 석굴을 사효자굴(四孝子窟)이라 부르게 되었다.
병든 아버지를 살라기 위해 4 형제가 차례로 굴 밖으로 나와 왜적에 대항 하다가 죽어간 이들 4 효자야말로 효자 중의 효자이며, 현대를 살아가는 우 리들에게 크나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비록 부모를 대신해 목숨을 바치지 는 못할망정, 우리를 위해 평생을 사신 부모님들이 좀 더 편안하고 좀 더 자유로우며, 웃고 살아가실 수 있도록 해 드리자면, 한 번쯤 4 효자의 교훈을
되새겨 봄 직하지 않을까.
〈이모모: 달성군 용계초등학교 교감 〉
〈 참고 문헌 〉玄風郭氏十二旌閭事蹟誌
현풍곽씨 상계도
항렬표(行列表)
전리공파
25 士(사)
26 鎭(진)
27 河(하)
28 東(동)
29 魯(노)
30 華(화)
31 錫(석)
32 昌(창)
33 鳳(봉)
34 植(식)
35 大(대)
36 -
우장공파
25 弼(필)
26 泰(태)
27 處(처)
28 鎭(진)
29 源(원)
30 柱(주)
31 熙(희)
32 基(기)
33 金(금)
34 -
35 -
36 -
교리공파
25 重(중)
26 時(시)
27 鐘(종)
28 漢(한)
29 相(상)
30 燮(섭)
31 基(기)
32 鎭(진)
33 泰(태)
34 -
35 -
36 -
주보공파
23 萬(만)
24 鎭(진)
25 瑞(서)
26 潤(윤)
27 根(근)
28 炯(형)
29 圭(규)
30 鐘(종)
31 準(준)
32 求(구)
33 -
34 -
현령공파
25 宗(종)
26 尙(상)
27 基(기)
28 守(수)
29 浩(호)
30 根(근)
31 燮(섭)
32 喆(철)
33 鐘(종)
34 海(해)
35 鎬(호)
36 -
목사공파
19 翰(한)
20 萬(만)
21 思(사)
22 泰(태)
23 寧(녕)
24 性(성)
25 東(동)
26 燮(섭)
27 基(기)
28 鏞(용)
29 永(영)
30根(근),杓(표)
구거당공파
22 壽(수)
23 玄(현)
24 國(국)
25 漢(한)
26 基(기),以(이)
27 鎭(진)
28 汴(변)
29 相(상),鐘(종)
30 燮(섭)
31 東(동)
32 煥(환)
33 海(해)
충익공파
24 鎭(진)
25 柱(주)
26 燦(찬)
27 址(지)
28 坤(곤)
29 鐘(종)
30 濚(영)
31 東(동)
32 燮(섭)
33 在(재)
34 -
35 -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현풍 곽씨는 남한에 총 30,969가구, 127,32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의 뿌리와 조상을 잘 알려면 남의 조상과 뿌리도 잘 아라야 하기에 여기에는 다른 가문의 뿌리와 조상을 알아보는 곳으로 한다.
[출처] 郭玄風氏(현풍곽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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