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사익(尹思翼):성종9년(1478)∼명종18년(1563)
윤사익의 할아버지는 정언 윤미견(尹彌堅)이고 아버지는 부사(府使) 윤징(尹徵)이며 어머니는 박수신(朴粹信)의 딸이다. 본관은 무송(茂松)이고 자(字)는 언례(彦禮)이다.
중종2년(1507)진사시에 합격하고 중종9년(1514)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성균관 전적․사헌부 감찰․호조좌랑․춘추관 기주관을 역임하고 잠시 평양교수로 나갔다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은거하였다.
1520년 다시 벼슬길에 나서 병조좌랑이 되었으나 적임자가 아니라고 하여 벼슬이 바뀌었고 1522년 사헌부 지평이 되고 이듬해 사간원 헌납 그 이듬해 지평을 거쳐 중종20년(1525) 사헌부 장령에 승진하였으나 사헌부에서 논의되지 않은 일을 보고하였다고 하여 또 벼슬이 바뀌었다.
다시 장령으로 복직되어 전라도에 갔다 와서 보고하기를 “신이 오갈 적에 보니 이전에 없던 흉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각 고을에서 음식 대접하는 것이 전처럼 매우 성대하니 이는 매우 좋지 않은 일입니다. 각도 감사에게 지시를 내려 금하도록 함이 어떠리까?” 하였다.
1526년 장령으로 있으면서 소송 당사자의 아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눈 것이 문제가 되어 파직되었으나 다시 필선으로 복직하였다. 그 후 1528년 문신으로 무재(武才)가 있다고 하여 경성(鏡城)도호부 판관에 제수되었다. 이 때 대간(臺諫)이 “성격과 능력상 피폐한 경성에는 적합하지 못하다” 고 반대하였으나 그대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2년 후 함경도관찰사가 “경성판관 윤사익은 당초 그에게 판관을 제수할 때는 그 자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이제 들으니 윤사익이 매우 조심스럽게 공무를 수행하므로 경성이 잘 다스려진다고 합니다.” 라고 보고하였다.
중종30년(1535) 의정부와 이조․예조가 함께 의논하여 사표(師表)가 될 만한 유신(儒臣)이라 하여 성균관의 사유(師儒)에 적합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중종33년(1538) 통례원 좌통례로서 청백리에 선발되고 전례대로 정3품 통정대부에 오르고 병조참의에 임명되었다.
1539년 참판직을 가지고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서 이듬해 한성부 우윤에 제수되고 곧 경연특진관을 겸하였으며 1541년 황해도관찰사로 갔다가 돌아와 특진관이 되고 이듬해 공조참판으로 옮겼다. 중종39년(1544) 한성판윤에 제수되고 명종1년(1546) 공조판서에 발탁되었으며 명종5년(1550)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서 『중종실록』 수찬(修撰)을 지휘하였다.
명종8년(1553) 나이를 이유로 공조판서를 사직하고 지중추부사로 옮겼다. 명종12년(1557) 윤원형이 “윤사익은 여러 조정을 섬긴 노신(老臣)으로 나이 80이니 가자(加資)해야 한다.”는 계청(啓請)에 따라 종1품 숭정대부에 올랐다.
명종 때 정사를 마음대로 한 이기와 윤원형과 친하게 지내며 10년간이나 공조판서에 재직하였다. 그러나 식견이 짧아 별 치적을 남기지 못했으며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이기와 뜻을 같이 하여 “조광조는 부관참시(剖棺斬屍)해도 괜찮다.”고 하는 등 많은 선비들에게 화를 주는데 참여하였다. 명종16년(1561) 아들 윤옥(尹玉)의 딸이 명종의 아들 순회세자와 결혼하여(공회빈) 왕실과 인척관계가 되었다. 시호는 공호(恭胡)이다.
** 증보문헌비고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음. 청선고와 전고대방에는 윤사익(尹思翼)이고 대동장고에는 윤익(尹翼)으로 되어있으나 명종실록을 보면 윤사익이 맞음.
[출처] ● 윤사익(尹思翼):성종9년(1478)∼명종18년(15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