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문엔 봄 춘(春)자가 없다
천둥벌거숭이일 때는 몰랐다.
‘천자문(千字文)’을 무턱대고 외울 뿐이었다.
어른들이 입춘첩(立春帖) 쓰는 걸 보면서 얼핏 생각하기는 했다.
왜 봄으로 들어서는 시기라면서 입춘(立春)에 들 입(入)자가 아닌 설 립(立)자를 쓰는 걸까.
더 궁금한 것도 있었다.
온갖 어려운 한자까지 들어 있는 ‘천자문’에 정작 봄 춘(春)자는 왜 없을까.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입춘은 24절기 중 첫 번째로 봄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이 날 기복적인 문구를 담은 입춘첩을 써 붙이는데, 가장 흔한 게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이다.
‘立春’이란 말은 중국 황제가 동쪽으로 나가 봄을 맞이하고
봄기운을 일으켜 제사를 지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立’에 ‘곧’ ‘즉시’라는 뜻이 있어 이제 곧 봄이라는 걸 의미한다고도 한다.
입하(立夏), 입추(立秋), 입동(立冬)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봄 기운이 막 일어선다’는 게 이해가 간다.
그렇다 해도 봄 춘자가 천자문에 없는 것은 의아했다.
천자문은 한문 초보자의 필수교재 아닌가.
15000여년 전 중국 남조 양(梁)의 주흥사(周興嗣·470~521)가 짓고 왕희지 필체를 모아 만들었다고 한다.
하룻밤 사이에 완성하고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 해서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부른다.
그 속에는 자빠질 패(沛), 멀 막(邈) 같이 평생 한 번도 안 쓸 글자까지 있는데 정작 봄 춘자는 없다.
‘천자문 다 떼고 입춘대길(立春大吉)도 못 쓴다’는 우스개가 그래서 나왔다.
이와 관련해서 이어령 선생은 주흥사가 남쪽나라 사람이었기에 늘 따뜻한 곳에서는 봄을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봄 춘(春)은 본래 초목(艸)이 햇볕(日)을 받아 싹을 틔우려 애쓰는(屯) 모습이니 늘 그런 남국에서야 봄이 따로 없는 셈이긴 하다.
첫구절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서 하늘을 검다고 말한 이유도 어릴 때는 잘 몰랐다. 이는 심오하면서도 난해한 ‘주역’에서 따온 것이다.
천자문은 주역뿐만 아니라 서경, 시경,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예기, 사기, 효경, 춘추 등의 유학 경전을 총동원한 대서사시여서 그 내용이 깊을 수밖에 없다.
하늘이 곧 우주이니 푸른 게 아니라 검은 게 맞다.
어쨌거나 천자문에는 없는 봄이 왔다.
봄볕 아래 풀꽃들이 곧 솟아날 것이다.
얼어붙은 강바닥으로 봄물도 새로 흐르고 그 속을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우리나라 대한민국도 부드럽게 좀 풀렸으면 좋겠다.
진짜 봄은 얼음짱 밑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