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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준 시 모음 61편
《1》
4월 그러나
임영준
활개를 펼치고
저 푸른 하늘을
날아 보겠다고
겹진 가슴에
흰 띠를 두른다고
바람 든 산하에
향기 그득하지만
노을이 검붉다
획이 너무 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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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5월 그대
임영준
흥건한 그대 사랑 때문에
번듯해진 것 같습니다.
눈부신 은총으로
함께 자리한 내가
무척 대견해 보입니다.
갈피마다
농후한 봄빛이 새겨지고
못다 핀 꽃들이
따라 술렁이지만
심지를 세우고
활활 타오르는 그대 앞에선
왠지 투명해지고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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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월의 그대여
임영준
그대여
눈부신 햇살이 저 들판에
우르르 쏟아지고
계곡마다 초록선율 넘쳐흐르는데
아직도 그리움에 목말라
웅크리고만 있는가
때는 바야흐로
소박한 아카시아도 불붙는 날들인데
가시를 두른 장미도 별이 되는 날들인데
어이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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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월의 기도
임영준
이 햇살이
절실한 이들에게
희망으로 비치게 하소서
민생을
도구로만 여기는
야망으로 뭉친 자들에겐
준엄한 형벌을 내리소서
부디
압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가련한 북녘의 동포들이
속히 해방되게 해 주소서
이 포근하고
아름다운 봄날이
세상에 고루 스며들어
진정한 낙원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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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5월의 초대
임영준
입석밖에 없지만
자리를 드릴게요
지나가던 분홍바람에
치마가 벌어지고
방싯거리는 햇살에
볼 붉힌답니다
성찬까지 차려졌으니
사양 말고 오셔서
실컷 즐기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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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월
임영준
산이 춤춘다
덩실덩실
앞섶 풀어헤치고
열락에 젖는다
강물 도도하다
미지의 세상으로
거침없이 굽이친다
나는 취했다
봇물 터진 유월에
덩달아 꿈꾸고
곁붙어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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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6월의 꿈
임영준
앙
깨물어 볼까
퐁당
빠져버릴까
초록 주단
넘실대고
싱그러운 추억
깔깔거리는데
훨훨
날아보아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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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6월의 향기
임영준
찬란한 아침이면
족하지 않은가
가만히 있어도
응어리진 채 떠난 수많은 이들에겐
짙은 녹음조차 부끄러운 나날인데
남은 자들은 여전히 들끓고 있다
게다가 어찌 모두
빨간 장미만 쫓고 있는가
그래도 묵묵히
황허한 골짜기를 지키고 있는 건
이름 모를 나무와 한결같은 바람인데
가슴을 저미는 것은 풀잎의 노래인데
유월에 들면 잠시라도
영혼의 향기가 느껴지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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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6월이 그대에게
임영준
그대의 갈피사이로
파랗게 끼어들겠습니다
세월을 탓했다면
마음껏 나를 탐하세요
눈물이 말라버렸던가
가슴이 식었다면
더 많이 들이키시고
행장을 풀었다가
다시 추스립시다
갈 길이 멀고 험한데
잠시라도 흉금을 터놓고
기대어 앉았다 가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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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7월
임영준
땡볕이 외려 즐겁고
너울이 대수롭지 않아
벌어진 틈새로
감로수가 넘쳐흘러
억수 비에 낙담하지만
기다림도 절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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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7월의 길목에서
임영준
햇볕은 열망을 품고
소나기는 물꼬를 튼다
막힌 여울이 무겁고
기울어진 추상이 늘어져도
일그러진 일상을 두드리고
허술한 노정을 다듬어
알찬 열매가 되리니
넘쳐흐르는 물결이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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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7월의 詩
임영준
아직은 약간 설익었으니
과하게 누리려 하지 마라
바람의 유혹만으로도
세상을 다 품겠다
무성한 초록의 영지는
노래가 끊이지 않고
호젓한 몸짓만으로도
영감을 투영하지 않는가
잠시라도 손 놓고 있으면
다그치고 지지고 볶아
초라한 냇둑이라도
못다 한 청춘을 우려내겠다
이제 도도한 계곡이 되자
숨 가쁜 바다가 되자
이 여름에 녹아들어
응감의 신전에 들자
음울한 세포 하나라도
용납하지 않는 너울을 타고
지저귀는 날들이리라
맥을 잇는 진한 열정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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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7월이야
임영준
성큼 다가선 태양이
교감을 원한단다
아이야
모두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달려가려무나
산이면 산
강이면 강
바다면 바다
모두가 활짝 열려 있지 않니
마음껏 소리치고
들이마시고
청춘을 구가하려무나
아이야
가뿐한 7월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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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8월
임영준
이제 또 한 번의 축제가 열리고
신명나는 뒤풀이가 있겠지
술잔 속에서 출렁이던
수많은 청춘들이
한꺼번에 폭발할거야
활짝 트인 바다에서
은밀한 계곡에서
비우고 다시 채워지겠지
여태 화려한 방황을 더듬는
뻐근한 가슴들은
식어버린 추억만 쪽쪽 빨면서
내내 감내해야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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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8월만 같아라
임영준
땡볕에 좀 널었느냐
후덥지근하긴 했지만
구들만 지고 누워
누굴 탓하고만 있진 않았겠지
허접한 나부랭이들에 매여
산천을 외면한 건 아니겠지
상궤를 약간 벗더라도
8월만 같아라
진솔하게 다 토해버려
맺힌 것은 덜하더라
쌓이고 쌓아
복장이 넘치더라도
다시 올 때까지 꾹 눌렀다가
후련하게 환치해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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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8월의 기도
임영준
이글거리는 태양이
꼭 필요한 곳에만 닿게 하소서
가끔씩 소나기로 찾아와
목마른 이들에게 감로수가 되게 하소서
옹골차게 여물어
온 세상을 풍요롭게 하소서
보다 더 후끈하고 푸르러
추위와 어둠을 조금이라도 덜게 하소서
갈등과 영욕에 일그러진 초상들을
싱그러운 산과 바다로 다 잡아
다시 시작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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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8월의 초상
임영준
야금야금 베어먹어도
살금살금 기어 다녀도
청춘은 간다
넘실거리는 바다
흐르는 살별을 따라
영그는 섬
다시 한 번
익을 만큼 익었으니
기다림의 선을 그어 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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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9월 여정
임영준
비울 만큼 비웠으니
욕심 좀 내어도 좋으리
별도 밤도 가까우니
담담히 조우할 수도 있겠지
아무리 매정한 날들도
잠시 묵상에 들지 않을까
향기 고픈 나그네는
그리움을 따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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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9월이 오면
임영준
되돌릴 수 있을까
동구 밖 웅크린 그리움을
뜨거운 열정의 밤은
종적도 없이 사라지는데
내내 시름하던 추억들이
잘 영글어갈 수 있을까
9월이 오면 우리
보다 깊이 스며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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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0월
임영준
혹시
다 마셔버렸나요
빈 잔을 앞에 두고
후회하고 있나요
옆구리가 시리고
뼈마디가 아린가요
차분히 지켜보세요
저 깊은 하늘소(沼)에서
붉은 술이 방울져 내릴 겁니다
다시 잔을 가득 채웁시다
그리고 남은 날들을 위해
건배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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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가족의 힘
임영준
'참을 인' 자 한번 제대로 써 본 적 없다
고단한 하루를 무사히 갈무리하고
곤히 잠든 아내와 아이들을 보면서
감히 어찌 사치스러운 불만을 품으랴
비록 채이고 밟혀서 찌그러진 아빠지만
초롱초롱 여물어가는 눈망울들을 보면서
어찌 감사히 바닥을 기지 않으랴
넝마를 걸치고 찌꺼기를 삼키더라도
억척을 떨면서 더 순순히 녹아들 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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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걸어 다니는 詩가 그립다
임영준
몇몇 얼치기들이 詩를 깔아뭉갠다
장바닥 트로트 가락처럼
몇 번을 꼬아야만 높아 보이는 줄 안다
여린 청중들을 모두 쫓아버리고
의기양양 고함을 지른다
번뜩이는 재치는 타고났는지 몰라도
머리털을 쥐어뜯어 가슴에 붙인 듯하다
읊지 못할 외계의 암구호에
가녀린 새싹들도 메말라간다
잠시 피었다가 바스러진다
걸어 다니는 詩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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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그리움이 놓아집니까
임영준
헤어졌다고
그리움이 놓아집니까
그대가 떠난 후 내내
어둠만 찾아다녔습니다
회상의 언덕을 넘나들며
일상은 놓아버렸습니다
어둑새벽을 알리는 기적소리
공연히 들창을 두드리는 바람 소리
아픈 만큼 무거운 빗소리가
돌아섰다고 들리지 않겠습니까
사랑의 속삭임이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데
안녕을 고하던 울음이
아직도 가슴을 헤집고 있는데
잊겠다고 해서 그리움이 놓아집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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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꿈속의 사랑
임영준
몇 광년 건너 어느 별에 있습니까
눈멀고 귀먹어야만 만날 수 있나요
뚫린 가슴으로 그냥 살아갑니다
이룰 수 없는 것이 그리 많아도
보고 싶은 사람들이 그저 가버려도
어섯 삭이고 접고 말았는데
꿈결에 스쳐 간 그대는 평생을 점했습니다
무한한 우주를 떠도는 외로운 별똥별이 될지라도
꼭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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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임영준
무너진다
쓰러지고 있다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만 있다
살아야 몇 년을 산다고
가져서 얼마나 더 할 거라고
아귀다툼으로 날을 지샌다
오늘 우리가 선 자리는
승강장일 뿐
임차 일상일 뿐
손놓은 방관자일 뿐
저들이 또
장삼이사의 목줄을 잡고
흥정을 할 때
나는 비겁하게
등 돌리고 앉았다
언제나
통탄하는 그 순간,
그들은
유치하고 당당하고
가당치도 않지만
점령하고 있었다
자리다툼에서 이긴 자
바늘구멍을 통과한 자
나태와 무관심으로 버림받은 자
무지몽매하고 착취당하는 자
모두가 한통속
부진한 연극은 끝이 없고
되풀이되는 저열한 윤회,
시지포스의 세상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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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낙엽이야기
임영준
대대손손 가난을 벗지 못하는 이들에게
넉넉하게 눈 보시布施라도 하고 가려 합니다
한평생 따뜻한 입김 한번 스치지 않고
그럴듯한 사랑 한번 받지 못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베풀고 가겠습니다
비록 약간은 버거운 짐이 되겠지만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억척같이 버티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하염없이 주절거리고 싶습니다
한정된 궤도軌道를 마구 달리다가 마침내
과적過積에 겨워 찌부러지는 미물들에겐
홀홀히 날아가는 혼령이고 싶습니다
☆★☆★☆★☆★☆★☆★☆★☆★☆★☆★☆★☆★
《27》
너에게로 가는 길
임영준
하필이면 가을이
움츠러들었어
안팎이 어수선하여
사람들도 메말랐어
차곡차곡 쌓는다면
스치기라도 할거라는
어린 꿈까지 꾸었어
허나 대강 어림하던
그런 간극이 아니었어
짜릿하지만
먼 여정이 시작된 걸까
☆★☆★☆★☆★☆★☆★☆★☆★☆★☆★☆★☆★
《28》
되었는가
임영준
별이 내린다
달이 부서진다
바람이 기어오른다
가지마다 욕망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치닫고 휘날리다 보니
빛이 되었는가
버티고 아우성치다 보니
꽃이 되었는가
☆★☆★☆★☆★☆★☆★☆★☆★☆★☆★☆★☆★
《29》
무임승차 시대
임영준
글쎄, 수두룩한 세상사에
시름 짙은 날들이 얼마쯤일까
맞바람 앞에 의연한 가지가 몇이나 될까
왜 때만 되면 모두가 한목소리를 내는 걸까
여전히 서울역 지하도에 가면
파르라니 사위어가는 호롱불들이
날카롭게 눈을 찌르는데,
먼 타국에선 둥지를 틀지 못해
밤을 잘라먹고 있는 방랑자들이
숨죽이고들 있는데,
안온한 철 밥 통을 끼고 자판을 두드리면서
때늦은 개탄만 일삼는 자들은 무슨 배짱일까
지나간 역사를 통분하는 척이라도 하면서
무임승차를 꿈꾸는 것은 아닐까
때만 되면 죽순들은 쑥쑥 잘도 자란다
☆★☆★☆★☆★☆★☆★☆★☆★☆★☆★☆★☆★
《30》
무한의 꿈으로
임영준
눈을 크게 떠라
귀를 최대한 기울여라
무한의 꿈을 꾸어라
끝없는 우주가
치열한 태양이 모두에게
활짝 열려 있지 않은가
짙푸른 바다 험난한 계곡
올망졸망한 산동네에도
흠뻑 뿌려지고 있지 않은가
누구든 가장 많이
품는 자의 몫이 아닌가
끝없이 파헤치고 끈질기게
쫓는 자의 몫이 아닌가
☆★☆★☆★☆★☆★☆★☆★☆★☆★☆★☆★☆★
《31》
미련조차 아름답습니다
임영준
별이 저리도 슬픈 것은
그대의 눈물 때문인가요
바람이 이리도 스산한 것은
애절한 한숨 때문인가요
불콰한 우리 이야기가
희미한 전설이 되어버릴 때쯤
갸륵한 한 줌 흙이라도
순순히 될 수 있을 건지
다시는 돌아갈 수 없어
티끌마저 소중하고 애석하기에
아주 조금씩 저며 가게 됩니다
그 아름다운 미련을
☆★☆★☆★☆★☆★☆★☆★☆★☆★☆★☆★☆★
《32》
복사꽃
임영준
복사꽃 그늘에서
잃어버린 청춘을 되새기지 못한다면
그대, 한 가닥 지나가는 바람이리라
해맑은 미소도 없이 그 유혹에
맥없이 그냥 스쳐 가는 나그네라면
분홍빛 그리움도 모르는 이슬이리라
봄너울에 어룽거리는 꽃몸살을 보면서
눈부신 열락을 맛보지 않았다면
하늘거리며 사라져간 아지랑이일 뿐이리라
☆★☆★☆★☆★☆★☆★☆★☆★☆★☆★☆★☆★
《33》
봄 주의보
임영준
보드라운 손길이 쓰다듬고
응축된 눈물이 대지를 적셔야만
새순이 솟아 나온다
화사한 능선에 얼핏 현혹되어
섣부르게 치마 올리고
옷고름 풀지는 말았으면
가슴을 열고
오롯한 씨앗을 품어주는 것은
투명한 햇살과 초록숨결뿐이다
☆★☆★☆★☆★☆★☆★☆★☆★☆★☆★☆★☆★
《34》
봄날 그대는
임영준
귀 기울이고 있나요
양지 바른 곳에 앉아
구름을 헤아리고 있나요
가까운 이들과 함께
꽃노래를 부르고 있나요
웅크렸던 생령들이
박차고 터트리고들 있는데
절정의 능선을 더듬다가
내내 앓고 있지는 않나요
☆★☆★☆★☆★☆★☆★☆★☆★☆★☆★☆★☆★
《35》
봄비는 눈물입니다
임영준
오랫 만에
펑펑 울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허드슨 강안江岸에 차를 대고
빗방울에 모두 담아
남김없이 흘려보내고 싶었습니다
허나 껍데기만 남아있는
이방인의 곡조曲調로는
도저히 닿을 수없는 피안彼岸이
강 건너에 어렴풋이 보이고
일렁이는 주마등 속에
그리운 얼굴들이 번갈아
질책하고 함께 흐느끼면서
추억을 적시고
미처 다하지 못한 하소연이
방울마다 절절히 아롱져
한층 고조되고 말았습니다
새삼 깨닫게 됩니다
봄비는 파릇한
청춘의 초상과 어우러져
오랫만에 찾아오는
감루感淚였습니다
☆★☆★☆★☆★☆★☆★☆★☆★☆★☆★☆★☆★
《36》
분노의 계절
임영준
애당초
순순히 손잡아 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고
극심한 일교차만큼이나
변덕스러운 풍토에 대해서도
이미 각오한 바 있었지만
신천지에서 벌어지는
텃새들의 기득권 보전에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를 깔아뭉개는 것은 기본이고
접신을 빙자해 거들먹거리는 행태가
군락에 만연되어 있었다
어수룩한 핫바지 등골을 후려
아흔 아홉 칸을 이어 붙이고
제 식솔만 잘 간수하면
대성한 줄 알고들 있었다
둥지를 깨부수고 뛰쳐나온 처지라서
다시 돌아갈 수 없고
절대 되돌리지도 않겠지만
농간에 탁월한 그들을 보면서
따사로운 봄볕을 거부하게 된다
차라리 혹독한 됫 바람을 맞더라도
삼베를 걸치고 짚신을 꿴
후줄근한 불뚝 삿갓이 되고 싶다
☆★☆★☆★☆★☆★☆★☆★☆★☆★☆★☆★☆★
《37》
사랑은 비가 되어
임영준
창문을 두드리고
앙가슴을 적시는 건
그대 눈물인가요
깊이깊이 스며들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진한 속삭임인가요
눈여겨보지 않는
시름까지 어루만지는
그대의 손길 아닌가요
짙은 사랑이 내립니다
단 하나도 놓지 않고
고루 여며주고 있습니다
☆★☆★☆★☆★☆★☆★☆★☆★☆★☆★☆★☆★
《38》
사막의 별
임영준
아리조나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그래도 맨하탄의 불빛이 간절하지 않았다
황야를 부유하는 붉은 산을 지나는데
도심의 일상이 시퉁스럽게 제동을 걸다니
벌레들의 비웃음이 뇌리를 꿰고 흐른다
사막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들 사이
심장의 판막사이
이별과 그리움사이
갈등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영역을 넓힌다
그러나 공제선에 번지는 노을이 은혜롭고
끝없는 갈망의 구렁에서도 쉬 보이지 않던
이른 별 하나가 그렇게 생생할 줄이야
사막은 단지 담담할 뿐 살벌하지 않았다
세속의 극렬한 요구에 응하지 못한
우둔을 묵묵히 받아주었다
그리고 우주의 어디에선가 별안간 나타난
그 이른 별 하나가
고스란히 폐부를 열고 스며들었다
살아있어 벅찬 밤을
비로소 사막에서 맞게 된 것이다
☆★☆★☆★☆★☆★☆★☆★☆★☆★☆★☆★☆★
《39》
새해의 기도
임영준
새해에는
모두 빛나게 하소서
저마다의 소망을 이루어
별처럼 반짝이게 하소서
새해에는
고아한 향기에 취하게 하소서
비우고 여미고 아래로 임해
절로 스며들게 하소서
새해에는
도도한 강물이 되게 하소서
거침없이 그러안고 흘러
한 가닥이 되게 하소서
☆★☆★☆★☆★☆★☆★☆★☆★☆★☆★☆★☆★
《40》
쉼표
임영준
느낌표 하나 찍고 돌아서니
온통 말없음표 천지다
뭔 일인가 하고 파고들어 보니
탐욕만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이런 난장에선 후련하게
마침표를 찍어버리고 싶지만
초롱초롱한 물음표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쉼표를 찍게 된다
☆★☆★☆★☆★☆★☆★☆★☆★☆★☆★☆★☆★
《41》
詩가 꺾이는 사회
임영준
한가한 정원
포만한 식탁
돌아보지 않는 사람들
천지개벽을 꿈꾸던 자들이
더 이상 도모하지 않는다
부스러기에 꼬이는 벌레들도
내성이 더욱 강해졌다
예전에 그러했다는 어른들이
이젠 영영 잊혀지고 싶어한다
발품을 팔아도 별로 건질 게 없다
☆★☆★☆★☆★☆★☆★☆★☆★☆★☆★☆★☆★
《42》
아픈 사랑
임영준
나의 밤은
언제나 허기지고
안개가 자욱하다
홀로 찾는 들녘엔
갈대가 무성하고
꽃이 피지 않는다
주위를 밝히는 네 미소가
꿈꾸는 노을이 되었고
몸짓 하나하나가
펄럭이는 깃발이 되었지만
하늘은 시리도록 맑고
길이 어긋난 것을
다가갈 수 없어도
떠올릴 수만 있다면
먼바다를 바라보는
등대이고 싶다
☆★☆★☆★☆★☆★☆★☆★☆★☆★☆★☆★☆★
《43》
여름
임영준
작열하는 태양이
축복으로 느껴진다면
만끽할 수 있다
세찬 장대비 속
환희를 안다면
누릴 자격이 있다
노출이 자랑스럽고
자연에 당당하다면
깊게 빠진 것이다
풀밭에 누워
별들과
어우러질 수 있다면
즐길줄 아는 청춘이다
☆★☆★☆★☆★☆★☆★☆★☆★☆★☆★☆★☆★
《44》
여름 사랑
임영준
가뿐히 돌아서면
지워지리라 생각했습니다
밤새 술렁이던 파도와
비릿한 바람처럼
또 만날 수 있겠지 하고
가벼이 넘겨버렸습니다
하지만 파고드는 모래알처럼
밤바다를 적시는 수많은 별처럼
두고두고 헤집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하룻밤의 열정이 일생을 다그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
《45》
여름바다에서
임영준
솔직한 알몸이 아니라면
함부로 모래를 더듬지 마라
도발을 꿈꾸지 않는다면
섣불리 파도에 엉키지 마라
수평선에 걸린 노을이
별들을 깨울 때까지
누구든 가뿐히 떠날 수 없다
모자란 열정이 아쉽구나
유한한 삶이 우습구나
생생한 추억을 부르는
섬의 노래도
한평생 맴돌고 있을 것을
☆★☆★☆★☆★☆★☆★☆★☆★☆★☆★☆★☆★
《46》
여름바다의 사랑
임영준
술렁이는 파도소리가
가슴을 헤집는가요
해변을 잠재운 별들은
눈물 속에 스며드나요
가까운 듯 먼 섬에
숨어있는 사랑노래가
우리의 속삭임이 아닌가요
언제 어디서나 눈만 감으면
떠오르는 백사장인데
함께 찍었던 발자국인데
그 바다에 잔뜩 남겨놓은
우리의 약속은
어디로 가버렸나요
☆★☆★☆★☆★☆★☆★☆★☆★☆★☆★☆★☆★
《47》
여름사냥
임영준
그대 이 뜨거운 태양아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일상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함께 사냥을 떠나보는 것이 어떤가
먼저 파릇한 얼굴과 단정한 매무새 따위는
가까운 이들에게 대충 미루어두고
심산이나 욕망 따위는 낯 두꺼운 자들에게 떠넘기고
청량한 기미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좋으니
팍팍한 가슴에 여유 일발 장전하고
흐밋한 머리에 본능의 띠를 두르고
불만 가득한 뱃속엔 수긍의 배짱을 채우고
이것저것 가리지 말고 사냥을 떠나보자
눈에 띄는 원두막이 보인다면
함께 누워 별을 헤던 친구들을 잡아보자
가차없는 땡볕을 원망하지 말고
으늑한 계곡 얼음물에 발을 담그고
열망에 몸부림치던 시절을 끝까지 뒤쫓아 잡아채보자
한껏 졸아붙었던 가슴을 망망대해 해변으로 실어가
감질나던 설레임과 아슬한 추억만 남기고
겨냥할 것도 없이 연발로 후련하게 쏘아버리자
더 이상 늘어져 일그러지지 않게
여름창공에 산산이 날려 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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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욕망에게
임영준
이제 그만 돌을 던지지
계가計家를 할 것도 없이
깨끗이 물러서게나
아무리 애원하고
몸부림친다 해도
어쩔 수가 없다네
다시는
만나지 않기를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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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우주로 견디다
임영준
울분이 미로에 들 때마다
하늘을 보는 것
우주의 결사이로 틈입하여
강팍한 살별의 길을 따라
폭발해 버릴 수도 있다는 것
곤고한 자의 눈으로만
볼 수 있나니
분노에 쉬 멍들거나
침몰하지 말 것
뇌리가 우주의 한 축이니
각을 예리하게 세우고
오연하게 공전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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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임영준
그 곳은 이미
첫눈이 내렸다고요
여기는 가을이 깊다 못해
온통 흐드러지고 있습니다
그대가 언제나 꿈꾸던
호젓한 호숫가 벤취 위엔
낙엽만 가득합니다
한걸음씩 엇갈린 것이
멀리 떨어지게 된 것인지
보다 간절하지 않았던 것이
긴 단절이 되어버린 것인지
타오르다만 시간들이
회한을 늘이고 있습니다
황혼을 함께 하자던
그대의 속삭임이
아직도 뇌리를 맴도는데
해거름 흐느끼는 지평선 따라
음울한 겨울이 번뜩입니다
닻을 내릴 수 없는 부두엔
불빛 더욱 찬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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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일탈
임영준
바람이 거세다고
애드벌룬이
줄을 끊었다
승객이 줄었다고
열차가
궤도를 이탈했다
걸핏하면
뛰어내리고
자폭하고
유행으로 번지는
번지점프 노름에
삶은
골병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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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장마
임영준
이것저것 모두 다
뒤죽박죽인데
어김없이 찾아왔구나
어느새 우리가
허튼소리에 익숙해
둔감한 껍질만 남았던가
지리한 공방 사이를
어설픈 광대들은 헤매고
헐벗은 여름을 난타하는
울분의 빗줄기들은
흩어진 민심을
잠시라도 엮으려
연일 패거리 지어 다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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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젊음아
임영준
젊음아
불을 밝혀라
어둠에 잠긴 길목에
열정아
길을 내어라
미로에 갇힌 세상에
차라리 눈을 감아라
시절아
곁을 내주지 않을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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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진실의 눈
임영준
촉수를 거두고 나니
진실이 보인다
아집과 섣부른
예단을 끊고 나서야
안온에 닿으려나
생의 소용돌이에서
장착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인가
심지를 흔들 때마다
궁극이 넘실거리지만
변할 건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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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창문 너머 어렴풋이
임영준
그대의 별은 어디쯤 떠있나요
대체 어느 곳을 헤매고 있기에
다 온통 어둠뿐인가요
우리의 주마등 속에서는 아직도
일그러진 시간들이 꽃을 피우고
상상의 결이 끝도 없이 퍼져 가는데
어렴풋이 창문 너머에서만 보이나요
얼어붙은 절망의 서리만 비치나요
따사로운 속삭임마저도 기어이
얼어붙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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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청춘은 영원하다
임영준
한때 그러했으나
흘러가 버렸다는 것들
지나가 버린 꽃 노래라
지워버리고 마는 것들
일상에 밀리고 세월에 쫓겨
잃어버린 것들이 그리 많고
제쳐놓은 것들이 널려 있는데
청춘의 파편이 뿌리를 내려
곳곳에 만발하고 있지 않은가
열망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눈부신 빛살이 되지 않는가
문득문득 무구한 들숨으로
후련한 날숨으로
지켜주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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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폭포 앞에서
임영준
찬란히 부서졌다가
다시 이룬다
용솟음치는
열망
장엄한
헌신
모든 것이 다
자상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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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하늘
임영준
아들은 파랑
딸은 딸기색
집사람은 아직도 핑크
나만
군데군데 먹장구름
사랑으로 투영되는
무한의 캔버스에
우리 가족 색상은
제각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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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한여름 밤의 꿈
임영준
동무야 그래 어찌 되었느냐
아름다운 열두 선녀를 거느리고 살다가
너울너울 바람을 타고 구름을 디디고
하늘에 올라 신선이 되었느냐
도리가 뭔지도 모르는 정신 나간 패거리들을
호되게 응징하여
민초들의 울분을 후련하게 풀어주었느냐
떠나보낸 가까운 이들을 다시 만나
못다 한 정을 나누고
미련 없이 회포를 풀었느냐
설령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고
몽롱이 일그러져 허무만 남았다고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지 않니
두고두고 틈이 날 때마다
죽부인이나 때가 꼬질꼬질한 베개를 끼고
대청마루나 남루한 장판에 누워
이 더위를 지워버릴 잠을 청해 보렴
혹시나 오늘밤에
아무런 대가없이 이 어지러운 강토를 다독일
한여름 밤의 황제가 될 수도 있지 않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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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함박꽃 만발하다
임영준
허울 좋은 세상
다 삼켜 버리려무나
첫사랑의 눈빛이 드러날 때까지
재너머 아스라이 꿈길이 열리고
함박꽃 흐드러지게 피어
잠시나마 모두 잊어버리라 한다
손닿는 곳마다 씨를 뿌리면서
함께 뒹굴어보라
목청 높여 한껏 소리치라 한다
잃어버린 청춘이 가지마다 열려
살다 보면 이런 날도 있다고
연신 방긋거리고 있다
귀 기울이리라, 새겨 두리라
꼬옥 품고 감싸고 가라는
이 천상의 화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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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희망사항
임영준
다시 그대를 만나서
밤새 준비한 우스갯소리를 들려주고
자지러지는 그 웃음소리에
그냥 파묻히고 싶다
기별도 없이 홀연히 떠나버려
황당했을 친구들에게
일일이 찾아가서
사죄하고 넋두리하고 용서받고 싶다
그리고 젊음의 대부분을 치장한
아기자기한 내 나라의 구석구석을
함께 몰려다니던 정다운 청춘들과
다시 한번 되짚고 싶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먼저
어린 손자들의 성공을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는
홀로 계신 어머니를 끌어안고
몇날 며칠 통곡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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