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한국인 맞나?
내가 조선 왕릉을 알게 된 계기는 정말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지금까지 찾았던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은 이름만 들으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만한 유명한 곳이었다. 서울의 궁궐과 종묘, 수원 화성, 제주도가 품은 천혜의 환경, 청동기 시대 우리 조상들이 남긴 수많은 고인돌, 팔만대장경을 여태까지 보존한 해인사, 천년 고도 경주의 화려한 불교 유산들까지 어느 하나 빼놓을 만한 것이 없다.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제주도 이후로 지정된 세계유산은 대한민국의 국력이 커졌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후에 지정된 세계유산을 보면 아름답기는 하지만 앞서 지정된 것들에 비해 소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이후로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건 조선 왕릉 (2009년에 등재)이다. 조선 왕릉을 처음 찾았던 건 추운 겨울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조선 왕릉을 알게 된 연유가 어이가 없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대해 크게 관심도 없다가 'Lonely Planet - Korea'라는 해외에서 유명한 여행책을 보게 되었다. 경기도에 대해 소개한 글 중 '조선 왕릉'에 대해 짤막하게 소개된 글이 있었는데, 2009년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서울을 포함한 경기도 전역에 흩어져 있는 곳 중 가장 밀집도가 높은 곳이 구리의 동구릉이니 찾아가면 좋다고 되어 있었다. 그 전에는 조선 왕릉에 대해 들어보지도 못했기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걸 몰랐다는 게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웠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멸망했기 때문에 조선 왕릉이 아직까지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유학 사상을 바탕으로 건국된 조선은 검소함을 강조하였기에 왕릉이 화려할 리가 없었다. 다만 중국이 문화 대혁명으로 자신들의 손으로 조상들의 귀중한 문화재를 신나게 파괴한 덕분에 대한민국이 유학을 제일 잘 계승한 나라가 되었고, 조선 왕릉은 이를 드러내는 소중한 문화재가 되었기에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가 충분하게 된 것이다.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이야기 22 - 조선 왕릉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왕릉’은 우리나라에 소재한 40기의 조선시대 왕릉으로 구성되어 있다.
조선왕조(1392~1910)는 태조에서 마지막 순종에 이르기까지 519년간 이어져 왔다. 왕위에 올랐던 27명의 왕과 그 왕비뿐 아니라 사후 추존된 왕과 왕비가 묻힌 총 42기의 왕릉이 있으며, 이 중 40기는 대한민국에, 2기는 북한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조선시대의 국가 통치 이념인 유교와 그 예법에 근거하여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공간의 크기, 문인과 무인 공간의 구분, 석물의 배치, 기타 시설물의 배치 등이 특색을 띠고 있다. 특히 왕릉의 석물 중 문석인, 무석인의 규모와 조각 양식 등은 예술성을 각각 달리하며 시대별로 변하는 사상과 정치사를 반영하고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뛰어난 문화유산에 속한다.
조선시대의 왕릉은 하나의 우주 세계를 반영하도록 조영 되었다. 능역의 공간은 속세의 공간인 진입공간(재실, 연못, 금천교), 제향 공간(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그리고 성역 공간(비각, 능침 공간)의 3단계로 구분되어 조성되었는데, 이는 사후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이다.
조영 당시부터 계획적으로 조성되고 엄격하게 관리된 왕릉 내부와 주변의 녹지와 산림은 당시에도 주요한 생태계로 작용하여 왔으며, 특히 도시화가 고도로 진행되고 있는 현대 한국의 대도시 서울 주변 지역의 생태적 안정성과 종 다양성을 보장하는 주요한 생태계로서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조선시대의 능원은 600여 년이나 되는 오랜 기간 동안 통치한 왕조의 능원 제도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시대적 흐름에 따른 통치철학과 정치상황을 바탕으로 능원 공간 조영 형식의 변화, 관리 공간 영역의 변화, 조형물 특성의 변화 등을 잘 반영하고 있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현재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 시행하고 있는 산릉제례는 조선왕조 60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되어 왔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대표적 사상인 유교의 충과 효를 상징하는 예제의 집결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서, 조선왕조가 멸망한 후 오늘날까지 왕실 후손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는 한국만의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조선왕릉의 다양한 형태를 볼 수 있는 동구릉
소박한 모습일 것이 분명했지만 조선 왕릉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기에 글을 읽자마자 주말에 시간을 내어 동구릉으로 향했다. 추운 겨울이라 아침부터 눈이 내리고 있었고 동구릉을 관리하시는 분들은 쌓인 눈을 치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동구릉의 지도를 살펴보니 9개의 무덤이 언덕을 따라 차례로 흩어진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언덕 사이로 물이 흐르고 있어 당시 조상들이 입지를 정할 때 활용한 풍수지리설이 무덤의 배열에도 영향을 끼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관리사무소와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을 지나 가장 가까운 수릉부터 찾았다. 수릉은 추존 문조익황제와 신정익황후 조씨의 능이다. 수릉은 한 봉분 안에 왕과 왕비를 같이 모신 합장릉(合葬陵)의 형식이다. 문조는 조선의 제24대 왕인 헌종의 아버지로 1834년에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추존되어 무덤이 왕릉으로 격상되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1855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으며, 1890년에 문조의 아내였던 신정익왕후가 죽자 합장되어 지금에 이른다. 추존된 왕의 무덤인 데다 합장릉이기 때문에 봉분이 하나밖에 없어 동구릉의 무덤 중 가장 소박하다고 할 수 있다.
수릉을 지나 조금만 걸으면 현릉이 나온다. 현릉은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문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현릉의 능제는 『국조오례의』의 제도를 따랐다. 문종의 능 병풍석의 무늬는 이전의 영저와 영탁 대신 구름무늬로 바뀌었고, 혼유석 받침대인 고석의 수량도 4개로 줄었다. 능침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를 배치하였고, 중계에는 문석인과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현덕왕후의 능침은 문종의 능침과 같은 상설로 조성하였으나 병풍석을 생략하였다. 현릉 이후부터는 신도비를 세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임금의 치적이 국사(실록)에 실리기 때문에 굳이 세울 필요가 없다는 논의 때문이었다. 현덕왕후는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되는 바람에 폐위되었다가, 1512년에 복위되어 다음 해인 1513년, 사후 72년 만에 왕의 곁으로 능이 옮겨졌다.
동구릉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무덤은 건원릉이다. 건원릉은 조선 1대 태조의 능으로, 조선 왕릉 제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고려 공민왕의 현릉(玄陵)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고려 왕릉에는 없던 곡장을 봉분 주위에 두르는 등 세부적으로 석물의 조형과 배치 면에서 일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봉분에는 다른 왕릉처럼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덮었는데, 『인조실록』에 태조의 유교(遺敎)에 따라 청완(靑薍, 억새)을 덮었다는 기록이 있다.
능침에는 12면의 화강암 병풍석이 둘러싸고 있는데, 병풍석에는 십이지신과 영저(금강저) 및 영탁(방울) 등을 새겼다. 병풍석 밖으로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고, 난간석 밖으로는 석호와 석양이 네 마리씩 교대로 배치되어 있다. 석호와 석양은 밖을 향하고 있는 형상으로 수호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이 있는데, 혼유석 밑에는 도깨비가 새겨진 북 모양의 고석 5개가 놓여 있고 양 옆으로는 망주석이 한 개씩 서있다. 중계에는 장명등과 석마 한 필씩이 딸려 있는 문석인이 놓여 있고,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가 양쪽에 놓여 있으며 가운데에는 정중석이 있다.
태조는 생전에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하여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貞陵)에 본인의 자리(신후지지)를 미리 마련해두었으나 태종은 태조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동구릉 중 가장 넓은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건 목릉이다.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첫 번째 왕비 의인왕후 박씨와 두 번째 왕비 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은 현릉처럼 같은 능역 안에 각각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식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이 선조, 가운데 언덕이 의인왕후, 오른쪽 언덕이 인목왕후의 능이다.
선조의 능은 기본적인 왕릉 상설에 맞게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 망주석, 석양 및 석호가 배치되어 있다. 의인왕후의 능과 인목왕후의 능은 병풍석만 생략했을 뿐 상설은 선조의 능과 같다. 특히 의인왕후 능침의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다만, 의인왕후의 능은 임진왜란을 겪은 후 처음 조성한 능이었기 때문에 석물들의 조각미가 다소 떨어지지만, 망주석과 장명등에 새겨진 꽃무늬는 처음 선보인 양식으로 이후 조선 왕릉 조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목릉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향하면 휘릉이 나온다.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두 번째 왕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단릉 형식으로 봉분에는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난간석에는 십이지를 새겨 방위를 표시하였다.
능침 주변의 석양과 석호는 아담한 크기에 다리가 짧아 배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이다. 혼유석을 받치고 있는 고석은 5개로 배치하였다. 조선 전기 왕릉(건원릉~헌릉)의 고석은 모두 5개였다가 세종의 영릉 이후에는 4개로 줄었는데, 휘릉에 와서 다시 초기의 형식을 따르게 되었다. 이는 건원릉의 예를 잠깐 따른 것으로, 휘릉 이후의 왕릉에는 다시 고석을 4개씩 배치하였다.
휘릉 왼쪽에 위치한 무덤은 원릉이다. 원릉은 조선 21대 영조와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 김씨의 능이다. 쌍릉의 형태이며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서쪽)이 영조, 오른쪽(동쪽)이 정순왕후의 능이다. 능침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으며, 왕과 왕비의 능 앞에 각각 혼유석 1좌씩 배치되었다. 망주석 기단부에 조각된 꽃무늬가 세련되고 화려하며 오른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위를 향하고 있고, 왼쪽 망주석에 새겨진 세호는 아래로 내려가는 모양을 하고 있다. 장명등은 사각옥개형의 장명등으로 화사석(火舍石)과 옥개석 부분을 제외하고 상, 중, 하대석 부분은 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영조의 원릉을 시작으로 중계와 하계 사이의 단을 없애고 문석인과 무석인을 한 단에 같이 배치하였다.
경릉은 조선 24대 헌종성황제와 첫 번째 왕비 효현성황후 김씨와 두 번째 왕비 효정성황후 홍씨의 능이다. 경릉은 세 개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삼연릉(三連陵)의 형태로 조선왕릉 중 유일하다. 정자각 앞쪽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헌종, 가운데가 효현성황후, 오른쪽이 효정성황후의 능이다. 세 봉분은 모두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난간석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각 봉분 앞에는 혼유석을 따로 설치하였다.
혜릉은 조선 20대 경종의 첫 번째 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단의왕후는 처음 왕세자빈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전의 순회세자묘(순창원)와 소현세자묘(소경원)의 예를 참조하여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경종이 왕위에 오른 후 단의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혜릉이라 하였고, 1722년(경종 2)에 능의 형식에 맞게 무석인, 난간석, 망주석 등 석물을 추가로 제작하였다. 능침의 석물은 명릉(明陵) 이후의 양식을 그대로 따라 작게 조각하였다.
동구릉 중 마지막 무덤은 숭릉으로 조선 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능이다. 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봉분을 나란히 배치한 쌍릉(雙陵) 형식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하였으며 능침 앞에는 혼유석이 각각 1좌씩 놓여 있다. 숭릉은 동구릉에서 유일하게 제한구역으로 공개되고 있지 않다가 2013년 말에야 일반인들에게도 개방되었다.
조선 왕릉 탐방의 단점
조선 왕릉은 신비하고 아름답다. 조선 왕릉을 둘러싼 소나무 숲을 따라 걷는 길은 언제 걸어도 상쾌하고 즐겁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 산책을 하기에 이만한 곳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왕릉은 가까이서 볼 수 없다. 봉분의 형식과 석물의 장식은 가까이서 봐야 제 맛을 알 수 있는 법이지만 번거로운 절차를 거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왕릉을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역사에 관심 있는 일부 관람객을 위해 해설사와 동행하여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 좋을 것 같다. 영월에 있는 장릉은 정면에서 무덤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대한민국 국민들 또한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