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노인의 아름다운 죽음👵
그는 재산도 많아 남부럽지
않게 살았었다.
건강도 죽기 전까지 좋았고, 봉사활동도 많이 해서 사회적으로 명망도 어느 정도 받으며 살았다.
자녀도 서넛이나 두었는데,
모두들 여유 있게 살고
사회적 신분도 좋았다.
그런데, 그는 대부분의 유산을
자신의 후처에게 주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도 상당한
액수의 재산을 남겼다.
자녀들에게는 별로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녀들이 이에 반발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그렇게 유언한 노인을 비난하였다.
"늙은이가 망령이 들었지."
"후처한테 쏙 빠졌던 거야."
"젊은 마누라 마술에 걸려든 거지."
"후처로 들어갈 때부터 꾸민 계략에 걸렸어."
특히, 기르던 개한테도
막대한 돈을 준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였다.
자식들이 개만도 못하게 되었다'고
비아냥 거리기까지 하기도 하였다.
그 노인이 70세가 넘어서
아내가 죽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30대의 젊은 여자를
후처로 맞아들일 때에도 사람들은
말이 많았었다.
그때 그는 몸이 불편하지도 않았고,
옆에서 간호해 줄 만큼 병고로
시달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었었다.
"늙은이가 주책이지,
그 나이에 무슨 재취야."
"아마 기운이 넘쳐나는가 보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젊은 여자를 맞아들여."
"막내딸보다도 더 젊어요, 글쎄."
"재취를 하더라도 분수가 있어야지."
그러면서, 모두들 젊은 여자가
틀림없이 재산을 노리고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부녀처럼
서로 재미있게 살았다.
그렇게 그들은 10년을 넘게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80세가 넘어 죽은
그의 유서에는 자식들에게 주는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너희들은 나와 가장
가까운 나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지금까지 오래 동안
내게서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았고,
현재도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물론, 가장 많은 유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나의 혈육들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아라.
내가 괴로울 때 누가 진실로
위로해 주고,내가 아플 때 누가
지켜보며 함께 아파했었는가?
울적할 때 마음을 풀어주고,
심심할 때면 함께 놀아준 게
누구였더냐? 너희들은 아느냐?
예쁜 꽃 한 송이가 얼마나 즐겁게
하는가를.정겨운 노래 한 가락이
어떻게 가슴을 뛰게 하는지를.
정(情)은 외로울 때 그립고,
고마움은 어려울 때 느껴진다.
그러므로,
행복할 때의 친구보다
불행할 때의 이웃이 더욱 감사한 것이다.
병석의 노인에게는 가끔 찾는
친구보다 늘상 함께 지내는 이웃이
훨씬 더 고마운 것이다.
한창일 때의 친구들이 재롱을
피우는 귀여운 자식들이라면,
늙어서의 이웃은 내 어린 시절의
부모와 같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너희들은 친구라 할수있고,
너희들의 젊은 계모와 검둥이는
내게는 부모와 같은 존재들이라 할수있다.
내가 왜 친자식인 너희들에게
보다 나의 젊은 아내와
우리 개에게 대부분의 유산을 물려주었는지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노인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젊은 아내가 못된 계모로 살아도
내게는 가장 소중하고 고마운 분이다.
설령 유산을 노리고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가 내게 잘 하는 이상
내게는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내 인생의 가장 괴롭고
힘없고 외로운 마지막 시기를 그래도 살맛이 나게 하고 위안을 받으며
살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힘없이 외로이 사는 노인에게는
어떻게 해주는 것이 가장 필요하며,
어떤 사람이 진실로 소중한 사람인가를
깊게 생각하길 바란다...
부모님에 대한 생각을 한번더 해보게하네요
우리가 한 평생을 살면서
기쁠 때보다 슬플때
생각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여러분은 누구를 떠 올리겠습니까?
기쁠 때에는 생각조차도않는 얼굴
일생동안 제 자식에게 하는 십분의 일만라도 정을 주지도 못하는 얼굴
가끔씩 이라도 삶이 힘든날이
아닌 기쁜 날에 부모님을 진정
생각하고 사시는지요.
우리는 부모에게 조금 해준것은
잘 기억하면서 받은 것은 기억
못하며 사는게 못난 자식의 삶인것 같습니다
이루어진 일생의 흔적인 것 입니다
다시 내가 부모가 되어
삶의 굴레로 물려줘야할 귀중한
인륜의 도덕인 것입니다
내 삶에 웃음이 흐를때 생각나는 사람
삶이 슬플때 생각나는 얼굴이 아닌
진정 기쁘고 행복할때 늘 가슴에 새기는 늙으신 부모님의 얼굴이어야
할 것입니다.
일년에 한번 어버이날이 아닌
일년에 한번 생신이 아닌
늘 생각하고 걱정하는 자식이 되어야겠습니다^^*
💗 인생은 뜬구름 3디 입채영상 💗
3디 입채영상 상사화 /대금연주
https://youtu.be/zRnFed8yu3o
● 명언 - 누가 나(我)의 친구(友)인가?
01
외국(外國)의 어느 한 출판사에서 '친구(友)'라는 단어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말을 공모(公募)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밤(夕)이 깊을 때 전화하고 싶은 사람,
나의 아픔을 진지하게 들어주는 사람,
나(我)의 모든 것을 이해해 주는 사람
등 여러 가지 정의(定義)를 내렸지만
그 중 1등을 한 것은 바로 이 내용(內容)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나(我)를 등지고 떠날 때
나(我)를 찾아 올 수 있는 사람(人間)"
02
풍요(豊饒)속에서는 친구(友)들이 나(我)를 알게 되고,
역경(逆境)속에서는 내(我)가 친구(友)를 알게 된다.
*.즐거움과 괴로움이란!
樂者苦之種也苦者樂之根也
지금 즐거운 것은 장차 괴로움의 씨앗이고, 지금 괴로운 것은 장차 즐거움의 뿌리가 된다.
善不妄來災不空發
좋은 일은 까닭없이 찾아오지 아니하고, 재앙은 터무니없이 찾아들지 아니한다.
人生에 고통은 피할 수는 없지만, 선택할 수는 있다.
“인생은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삶은 진자(방울 추)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이 두 가지가 삶의 궁극적인 요소다.”
결핍과 권태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다. 욕망이 충족되면, 무료함이 찾아온다. 인정해야만 한다. 고통은 필연이다.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고통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친구가 되어야 한다. 능동적으로 고통을 다루는 수행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인간이 고통을 이겨내고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인생에 좋은 때가 있듯이 어려운 때도 피할 수는 없다. 인생 자체가 苦樂이 아닌가? 고락은 밀물과 썰물처럼 우리 인생에 교번하며 오간다. 즐거움은 좋은 추억이 되지만, 어려움은 좋은 가르침이 되어 우리를 더욱 성장시킨다. 이러한 인생의 고락은 누구와 함께 나누는가에 따라 증폭되기도 하고 경감되기도 한다. 그래서 가장 좋은 인간관계는 고락의 오르내림을 언제나 변함없이 함께 나누는 同苦同樂의 관계이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사람에게 동고동락을 요구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내가 부귀하여 좋은 상황일 때는 사람들이 몰려오고 내가 빈천하여 어려워지면 떠나간다. 그것이 세상인심이다. 富貴多士, 貧賎寡友가 人之常情이다.
乞人得時娶妾
살다보면 거지도 때를 얻으면 첩을 둔다.
상기하자 6.25
🔫6,25 전쟁에서 한국이 살아남은 ‘5가지 기적’🔫
1950년 6월25일 새벽,
전격적으로 처 내려온 북한 인민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 전쟁에서, 한국은, 그때 누가 보아도 패하고, 결국 그 후의 베트남처럼 망하게 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1) 그때 한반도는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 밖에 위치해 있었다.
해방 후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완전히 철수한 후,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은 1950년 1월 ‘한반도 미국 태평양 방위선에서의 제외’발언이 나왔었다. 그래서 스탈린이나 김일성은 북이 남침을 해도 미군이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2) 북의 김일성은 한반도의 무력을 사용한 공산화 통일을 위해 먼저 철저하게 준비를 했었다.
먼저 ‘소련’ 스탈린의 허락을 받고, 중국 모택동의 협력을 약속 받았다. 그리고 지상군 약 18만 명, 항공기 2백여 대, 대포 400여문, 그리고 탱크 240여대 등의 막강한 화력으로, 6월25일 새벽 4시에, 38선 전 지역에서 일제히 남침 공격의 불길을 내 뿜었던 것이다.
(3) 반면, 대한민국의 형편은 어떠했는가? 우선 남한 내에 공산당, 친북 세력의 준동, 반정부 세력의 활동으로 국론은 4분 오열 분열되어 있었고, 신생 이승만 정부는 취약하기 그지없었다.
국방은 한마디로 ‘오합지졸’ 상태였다. 병력, 화력, 장비, 전투능력도 형편없었다. 북한의 남침에 대한 대비가 전혀 없었고, 그래서 6,25 직전, 전방 지휘관들을 대거 교체하기도 했고, 그 주말에는 장병들의 휴가 외출을 대대적으로 내 보기도 했었다.
(4) 그리하여 탱크 한대도 없었던, 전방부대는 탱크를 앞세워 처 들어 오는 인민군의 강력한 화력 앞에, 여지없이 무너졌고, 결국 사흘 후에 수도 서울이 함락되고 말았다.
얼마 후에는 부산 일원만 겨우 남고, 전국이 북한군의 군화에 짓밟히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이제 지구상에서 사라질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김일성의 승리는 확실하게 보였다. 한반도는, 베트남처럼, 완전히 김일성의 의도대로 적화 통일되게 되었었다.
그때 3천만 동포는, 그래서, 현재의 북한상태처럼, 낙후되고, 굶주려 죽는, 자유와 평등, 인권이 전혀 없는, ‘생지옥’의 나락으로 모두 떨어질 뻔했었다. 인민군의 승리는 거의 확실시 되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대한민국은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대한민국이란 ‘남한’이 망하지 않고 ‘살아 남은 것’(survived)이야말로 정말 ‘기적’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었는가? 거기에는 5가지, ‘기적’ 같은 일이 있었다.
첫째는 트루먼 대통령의 신속한 미군 참전 결심이다.
미국이 침공 받은 것도 아닌데 미국 대통령이 그렇게 빨리 미군의 한반도 투입을 결심했다는 것은 기적이다. 트루먼은 ‘미군의 참전 결정’에 10초도 안 결렸다고 그의 회고록에서 말하고 있다.
둘째는 유엔 상임 이사국 회의에서 유엔이 ‘참전’ 결의 할 때 소련대표가 불참한 것이었다.
소련대표가 그때 참석하여 거부권을 행사했다면 유엔군의 참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셋째는 그때 미군이 가까운 일본에 주둔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만일, 미국 본토에서 미군을 함정으로 이동하려 했다면, 이미 상황은 종료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2차 대전 후 맥아더 사령부 휘하의 미군이 일본에 주둔해 있었기 때문에 신속하게 한반도로 이동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넷째는, 북한 침공군이 서울을 정령 한 후, 약 1 주일간을 이유 없이 지체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때 김일성은 박헌영의 "인민군이 남으로 침공하여 서울을 점령하기만하면 남한 내 각처에서 북에 동조하는 인민들의 대대적 봉기가 일어난다.
그러면 우리가 싸우지 않아도 남반부는 스스로 무너진다." 라는 말을 믿고, 서울에서 1주간을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 1주간의 시간이 결국 미군 및 유엔 연합군이 한반도에 진입하는 시간을 만들어 준 것이다.
다섯째는, 여름에 한반도는 비가 많은 우기, 장마의 계절인데, 그 해의 여름은 대체로 날씨가 계속 좋아서 미군의 항공기가 거의 매일 작전을 수행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항공력이 약한 북한군은 강력한 미군의 항공력에 무력화 되었다.
끝으로, 나 자신은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었지만, 자신이나 우리 가족이, 1,4 후퇴 때, 그 혹독한 1월의 겨울의 눈보라 속에서 피란 가며, 얼어 죽지 않고, 또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을 생각해 보면, 그것도 하나의 ‘기적’ 이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다.
이런 여러 ‘기적’같은 일들은 다 우연이었을까?
거기에는 분명히 '역사를 주관하시는 섭리’가 있었다고 믿는다. 다시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한반도 ‘통일’도 이성적으로 보면 거의 불가능해 보이지만, 어느 때, ‘기적적'으로 이루어질 날이 올 것이라고 믿어 본다.
오늘은 6.25사변 74주년 되는 해 입니다. 다시는 이런 전쟁은 없겠지만, 잊어서는 안되는 상흔이 있기에 순국선열을 기리며 힘차게 화요일을 맞이하시기를 기원합니다.